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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Nov 02. 2018

청년이여 부디 살아있으라-영화 <똥파리>


청년이여 부디 살아있으라. 죽어도 죽지는 말아라 “씨발 놈아!” - <똥파리> (감독 양익준. 2008년. 한국)


살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막상 기억하려고 하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저 이런저런 사람이었지 하는 정도로 막연히 생각해버리고 만다.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은 별 볼일 없었다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 별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이 얼마나 되시는지...?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제껏 내가 본 영화가 대략 수 천편은 될 것이다.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가 직업이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별처럼 박혀있는 영화가 많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물론 좋아하는 영화도 많고, 좋게 본 영화도 많다. 그러나 그런 영화들도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느 한 장면이 반짝! 떠오르지는 않는다. 
물론 생각하다 보면 따라 올라오기는 한다. 그러나 그건 별이 아니다. 별 같은 사람, 별 같은 영화는 이름보다 먼저 구체적 사실이 떠올라야 한다.
  
내게도 그런 별 같은 영화, 잊을 수 없는 영화가 몇 편 있다. 좋은 영화도 아니고 대단한 감동을 주었다고도 할 수 없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영화들이다.

내 영화 하늘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영화별은 ‘이름 없는 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름을 모르는 별이다. 선명하게 그 날의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데 정작 그 영화의 제목을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더운 여름이었고 동네의 허름한 극장이었다. 사춘기의 방황이 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는 여기저기 극장을 전전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집에는 독서실에 간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무슨 영화인가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컴컴한 극장에 앉아 그냥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 이상한 일이 생겼다. 

주인공 남녀가 바닷가에 있었다.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여주인공이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 비스듬히 쓰러졌고, 남자 주인공이 달려와 여자를 껴안았다. 
서로 마주 안은 두 사람 위로 파도가 밀려왔다. 흔한 통속극의 흔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내 마음에 깜박, 불이 들어왔다. 
‘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계시처럼 내 가슴에 새겨졌다. 
그때까지 특별히 영화를 좋아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특이한 생각이었는데도,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안 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영화는 내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영화감독을 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사춘기의 끝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극장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었다. 


당시 청소년 불가 영화를 보기 위해서 서울을 벗어나 의정부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학생 단속을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그게 비교적 안전했다.), 그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감독 밀로스 포먼. 1975. 미국)를 보았다. 
당시 나는 고3이었고, 공부하기 싫어서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그냥 보게 되었다. 
당시로는 매우 과격하다고 할, 반사회적인 영화였다. 요즘으로 보면 별거 아닌 내용이지만, 당시는 통제가 심하던 시절이라 약간이라도 반사회적인 내용미면 수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신병동의 불합리한 체제에 저항하는 잭 니콜슨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인디언 추장이 잭 니콜슨의 목을 졸라 죽이고 정신병원을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에서 보면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없으나, ‘아! 이런 영화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고1 어느 극장에서의 계시대로 영화를 직업으로 삼았고, 나이를 먹으며 준 은퇴 상태를 맞게 되었다.
그 사이 결혼하고 딸도 하나 생겼다. 이제는 영화가 취미생활 정도여서 간간히 화제작이 나오면 여편과 함께(때로는 딸과 셋이서) 보러 가곤 했다.

그러는 중에 보게 된 영화가 <똥파리>였다. 삐딱한 반항아 정서가 체질화된 나에게 <똥파리>는 맞춤옷처럼 편안한 영화다. 
그런데, 가랑비에 옷이 젖은 꼴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마음 놓고 젖어서 영화를 보는 중에,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석유가 터지듯이, 화산이 폭발하듯이, 그렇게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영화의 후반 상훈(양익준이 연기)이 한강변에서 연희(김꽃비가 연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우는 장면이었는데, 그만 주인공의 심정에 홀딱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눈물도 재채기와 비슷한 것이어서, 한번 발동이 걸리면 통제가 불가능하다. 
한번 터져버린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영화보기를 포기하고 그냥 울기로 했다. 옆에서 같이 영화를 보는 여편에게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엉엉 소리가 났지만 조절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많은 영화를 봤어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영화는 <똥파리>가 유일했다.
  
울었던 얘기를 하고 나니 <똥파리> 말고 뭔가를 보면서 그렇게 운 경우가 또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찔끔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경우는 많지만 <똥파리>처럼 보는 걸 포기하면서 울었던 기억이 영화에는 없다.
소설을 읽으면서는 두 번 그랬던 기억이 난다. 하나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다. 말썽꾸러기 천덕꾸러기 제제가 실직한 아빠를 위해 춤추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 


아빠를 위로한다면서 열심히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감출 수 없는 여자의 알몸..’이라며 노래하고 매 맞는 그 장면은 정말 볼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랑의 진심이 온전히 전달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제제의 그 진실한,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이, 그럴 수밖에 없는 제제의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다른 하나는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의 한 장면이다. 
<토지>는 워낙 내용이 방대하고 등장인물도 많은 대하소설인데, 내가 읽기를 멈추면서까지 울 수밖에 없었던 장면은 이용이 임종을 앞둔 월선을 찾아오는 장면이다. 


이용과 월선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맺어지지 않는, 불륜의 관계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사랑하다가 결국 월선은 죽음을 맞게 되고, 월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이용은 월선을 찾아온다. 
그런데 이용은 바로 월선에게 가지 않고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 심정이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간절한 것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이용은 그러지 않는다. 아니 가지 못한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보낼 준비가 안된 것이다. 
월선도 이용을 기다리지만 왜 안 올까 애달아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올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이용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월선을 보고 ‘잘 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월선이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이용에게는 있다. 그 믿음, 그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사랑 이야기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는 항상 슬프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랑 불구의 사람이다. 
마음속에는 온통 세상을 향한 증오가 불타고 있어서 사랑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입을 열면 나오는 것이 욕뿐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면 결과가 폭력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이 남자는(그의 이름은 상훈이다.) 무조건, 닥치고 폭행을 시작한다. 길거리에서 여자를 때리는 남자에게 하는 폭행이지만, 그는 이어서 맞던 여자도 때리기 시작한다. 
이유는 ‘맞지 말라’는 것. 맞지 말라고 여자를 때리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이로 인해 상훈이라는 인물은 강한 환기 효과를 얻게 된다. 
그에게 옳고 그름이란 없다. 기회만 되면 분노의 주먹을 휘둘러댈 준비가 되어있을 뿐이다. 상훈에게 세상은 불구덩이 지옥에 불과하다.
  
그 분노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원래부터 그런 놈이었다고, 똥파리는 태어날 때부터 똥파리라고 얘기하지는 말자. 사람은 다 똑같다. 맵고 짜고 쓰고 달고 다 구별할 줄 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비난보다는 칭찬을, 가난보다는 부유함을, 아픔보다는 기쁨을, 증오보다는 사랑을 원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분노가 쌓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모든 악행의 발화점이다.
  
아버지...
모든 아들은 아버지를 증오한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도 생겼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아들이 있다면 그는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이다. 아주 희귀한 행운아이거나, 답답하고 둔한 비겁자 거나.
오랜 세월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사회에서의 역할에 상관없이 아버지는 가정에서 제왕적 지위를 누렸고, 결함이 있는 아버지일수록 자식들에게 험한 꼴을 경험시켰다.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가족에게 행패 부리고, 엄마를 때리고, 심지어 칼질까지 하다가, 말리는 딸을 칼로 찔러 죽게 만드는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주인공 상훈은 그런 아버지가 미워 폭력에 중독됐고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불행은 항상 유전된다.
  
상훈; 핏줄? 할 수 있다면, 손목이라도 그어서 이 피, 다 먹여버리고 싶어.
  
그렇게 해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면 “이 나라 애비들 좆같애.”라고 욕하지 않아도 되고, “왜 그랬어? 씨발 놈아.” 하면서 아버지를 때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상훈은 이 진저리 나고 끔찍한 세상을,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는 중이다.
  
사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신적으로 모든 사람은 불구다. 다만 그 상처에 대해, 자신의 불구에 대해 처신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대개는 아닌 척 자신을 위장하고 살게 마련이지만, 일부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 참혹해서 발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너무나 민감하고 섬세해서 작은 상처에도 온몸으로 반응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을 비난하고 처벌하는데만 열중해서는 안 된다. 그 발악을, 온몸으로 하는 그 반응을 잘 받아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똑같은 환경을 겪어도 여성은 다르게 성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그려진다. 반항하고 비뚤어지고 뛰쳐나가기보다는 참고 견딘다. 어찌 보면 남성 감독들의 판타지로 생각되기도 하는데, 많은 경우 여성은 거칠고 험한 상처 입은 남성의 피난처 역할을 한다. 
<똥파리>의 연희도 그런 경우다. 그런 아버지 그런 남동생과 살면서 견디고, 그런 남자를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된다. 
사랑이라고는 말하지 말자. 그렇게 말하면 두 사람, 닭살 돋는 걸 못 견뎌서 달아나버릴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상훈과 연희는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고 위로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 하나는 두 사람이, 비슷한 환경을 견뎌내는 두 사람이 ‘왜 저기서 벗어나버리지 않을까? 왜 멀리 도망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점이었다. 
아마도 ‘만약 나라면, 내가 저런 환경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나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지옥 같은 생활을 그들은 견뎌낸다. 몸부림치고 욕하면서도 거기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산다. 난 그 마음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가족주의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아가서 감독이 가족중심주의라는 보수적 가치관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생각했다. 가족이, 핏줄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아니라면 그런 비인간적 생활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용기가 없나?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그건 아니다. 
아니면 미래에 대한 어떤 가능성, 가족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나?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이 피, 다 먹여버리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상훈은 자신의 핏줄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상훈은 출소한 아버지를 찾아가고, 쌓인 분노를 참지 못해 폭행을 한다. 이복누나에게 생활비를 거들고, 누나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돌보기까지 한다. 
이건 이상한 광경이다. 그토록 망나니 깡패 짓을 하는 상훈이 조카와 누나를 대하는 태도는 얼핏 ‘유사 가족’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빠-엄마-자식의 이상적 관계를 상훈-누나-조카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속성으로 볼 때, 같은 어머니-다른 아버지의 형제가 다른 어머니-같은 아버지의 형제보다 심리적으로 가깝다. 심리적으로 먼 관계에서, 더군다나 상훈처럼 막장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살뜰하게 누나와 조카를 보살피는 것은 분명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런 생각의 과정에서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들(상훈과 연희)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이 끝나기를,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마구 뒤엉켜버린 이 운명의 실타래가 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러한 기다림의 태도, 견디고 몸부림치면서도 달아나지 않는 마음에는 ‘책임감’이 있다. 과거에 있었고, 현재 일어나고,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지겠다는 자세가 있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인생’ 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행복했으면 좋았겠으나, 불행하다고 해서 나의 인생이 아닌 것은 아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역시 나의 삶이다. 포기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다 받아내겠다는 태도, 그런 삶에 대한 결기가 그들의 마음에는 깔려있다.
  
“죽지 마. 힘들어 죽고 싶어도 넌 살아야지.”
  
상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자살을 시도하고, 상훈은 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간다. “네가 죽으면 난... 난...” 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데, 미처 못다 한 그 말에 상훈의 진심이 들어있다고 본다. 
그 상황에서 상훈이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일단 떠오르는 것은 ‘네가 죽으면 난 누구한테 화풀이를 하느냐? 내가 아버지에게 쌓인 분노를 다 풀 때까지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 맘대로 죽느냐?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는, 죽어도 좋다고 할 때까지는 죽지 말아라’는 것이다. 

이건 평소에 상훈이 아버지에게 하던 그대로의 마음이다. 
그러나 현재는 아버지의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이고, 상훈은 ‘힘들어도 살아야 한다’며 이미 속마음을 드러낸 상태다. ‘넌 살아야지.’라는 말은 ‘나는 죽어도 아버지는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죽어도 좋은 똥파리 인생이지만, 아버지는 살만한 자격이 있다. 충분한 죗값을 치렀으니 이젠 떳떳하게 살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네가 죽으면 난...’ 하고 말을 못 잇는 것은 ‘정말로 죽어야 할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다. 죽어야 할 나도 살아있는데, 아버지가 죽으면 난 어떡하란 말이냐?’ 하는 마음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를 괴롭히는 게 내 삶의 이유였는데, 그 이유가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야?’ 하는 말이다. ‘내가 아버지를 미워하는 게 끝나면 우리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그걸 못 참고 포기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고, ‘이제 아버지를 미워하는 게 끝나 간다. 조금 있으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사랑 고백이기도 하다.
  
영화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이건 상훈이 연희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연희의 아버지가 칼을 들고 행패 부리는 장면과 상훈 아버지의 자살시도 장면은 병치되어 보이는데, ‘죽지 말라’고 하는 말은 ‘죽어버리고 싶은’ 연희에게 보내는 상훈의 마음인 것이다. 
세상에 마음 기댈 곳 없던 두 젊은 영혼이 이제 막 서로에게 의지하고 마음을 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어서 처음에 언급한 장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그 장면이 나온다. 
크게 상심한 상훈과 연희는 밤늦게 한강변에서 만나고, 상훈은 연희의 무릎을 베고 누워 운다. ‘부모한테 잘해라. 속 썩이지 말고’라며 우는데, 이 말이 참 웃기다. 정작 속 썩인 것은 자식들이 아니라 부모,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들이었기 때문이다. 
속 썩이는 아버지여도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처럼 들린다. 그게 사람의 도리, 인간의 조건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된다는 것,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의 에너지가 바뀌면 모든 상태들이 리셋되어 버려서, 그동안 해왔던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왜 우물쭈물 대는데?  놀러 왔어?”

상훈은 폭행에 가담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연희의 동생 영재를 비난하고 “바로 행동으로 옮겨. 감정에 빠지지 말고.” 라며 가르치지만, 지금은 상훈이 우물쭈물 댄다. 얼었던 마음이 녹아서 감정이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흐른다는 것은 통한다는 것이고, 통하려는 서툰 움직임은 우물쭈물 멈칫거리기 마련이다. 거침없던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고, 마구 내뱉던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우물쭈물거린다는 것은 이제 비로소 성인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인이 되는 문턱에서 상훈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왜 인생은 우리의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이 오지 않거나, 너무 늦게 오거나, 아니면 너무 빨리 왔다 가버려서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냥 보내버리곤 한다. 오는 것 막지 말고 가는 것 잡지 말라고 하지만,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는 이상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한다. 내 욕망에 충실해서 열심히 원하는 것을 잡으려고 하거나, 차라리 욕망의 문을 닫아버리고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면서 산다. 


그 두 가지 길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원래는 하나였다. 다만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진짜 똥파리는 똥을 좋아하게 태어났는지 몰라도, 인간 똥파리는 처음부터 똥을 좋아했던 게 아니다. 똥 같은 환경에서 매일매일 똥 같은 일을 겪으며 살아서 똥파리가 되었다. 
똥 같은 세상, 똥 같은 가족을 버릴 수 없었기에 똥파리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몰라. 지겹다 이제...”
하던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사장이자 친구인 만식(정만식이 연기)은 왜 그러느냐고 묻고, 상훈은 ‘지겨워서 그런다’고 말한다. 

지겹다... 
흔히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이 단어가 상훈의 입을 통해 나왔을 때, 왜 그렇게 부드럽고 따뜻하고 기분 좋게 들렸을까? 이제 비로소 악몽이 끝난 것처럼, 몸서리치는 지옥행 완행열차에서 겨우 내리게 된 것처럼 느낀 것은 나뿐이었을까? 
증오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사랑과 행복의 문을 열게 되었다는 안도감은 나만의 감정은 아닌 듯하다.
잠깐 놀라던 사장 만식도 “나도 안 해. 나도 그만둘래.”라며 상훈의 결정에 동조한다. 나쁜 삶, 똥파리의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오늘까지만 일하고 그만둘래’라고 했던 그 마지막 악행의 자리에서 상훈은 죽임을 당한다. 
자신이 데리고 다니며 일을 가르치던, 상훈은 알지 못했지만 연희의 동생이기도 한 영재(이환이 연기)의 손에 맞아 죽는다. 


죽지 않아야 할, 죽을 수 없는 이유가 백가지가 넘는데도 상훈은 죽는다. 
늘 같이 다니던 영재의 친구 환규(윤승훈이 연기)가 그날따라 빠지지만 않았다면, 추심을 간 집의 어린 아들 이름이 상훈이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상훈이 ‘그냥 가자’며 돌아서지만 않았다면, 폭행하는 영재를 말리고 앞세워 나가지만 않았다면 (원래 하던 대로라면 상훈이 먼저 집을 나갔어야 한다), 그래서 유난히 독한 그 집 남자의 장도리에 머리를 맞지만 않았다면, 조카의 어린이집 재롱잔치를 떠올리고 ‘오늘 그만하자’고 말하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상훈을 롤 모델로 삼던 영재에게 실망감을 주게 안 했다면, 그랬다면 영재가 “이 새끼야. 왜 우물쭈물 대는데? 우물쭈물 대지 말라며?” 라고 비난하며 장도리를 휘두르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게 인생의 아이러니야’라고 말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얼른 일어나 도망가시라. 내가 이성을 잃고 장도리를 휘두를지도 모르니까. 
‘아이러니’라고 말하면 뭔가 부득이한 인생의 진리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진리가 있는가? 
이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정말 너무나 가슴 아픈 비극일 뿐이다. 영재는 죽어서는 안 된다.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자꾸 죽어간다. 
현대사회, 특히 지금 한국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중 하나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다. 자살률이 OECD 1위라는 현실의 죽음 말고라도, 영화를 비롯한 가상세계 속에서도 죽음은 가장 쉬운 해결책으로 사용된다.
뭔가 문제를 풀기 어렵거나 극적인 해결책이 마땅치 않으면 어떻게든 죽여서 매듭을 지으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죽일까’를 고민한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똥파리>에서 영재를 죽이는 드라마적 선택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똥파리>라는 영화에 공감하고 120% 흠뻑 빠져서 울기까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이기는 하나 그래서 더욱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쉬운 해결책 말고, 좀 더 고민하고 연구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냈어야 했다. 아흔아홉 가지의 죽는 방법만 생각난다고 해도, 마지막 한 가지 사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더군다나 상훈은 이제 한창 인생의 전성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청년 아닌가? 겨우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새로운 삶을 열려고 하는, 가늘고 어설프고 연약하지만 새로운 숨을 쉬고 태어나는 감동적인 출발점에 있지 않았던가? 왜 그렇게 놀라운 축복이 시작되는 순간에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만들어야 하는가?
나는 그 선택에 동의할 수 없다.
  
그게 드라마라고,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고, 그렇게 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지 말라. 솔직히 말해서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잔혹하고 냉정하고 더 극적인 경우가 많다. 
나는 영화의 현실적 타당성이나 옳고 그름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영화가 보는 사람의 입장에 서 있는가, 보는 사람의 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도 일종의 장사 같은 것이어서 파는 사람의 이문을 남기는 것이 제일 목표이다. 그러나 상도덕이란 파는 사람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사는 사람에게 어떤 이익을 주느냐도 같이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드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작은 즐거움이라도, 작은 위로라도 주려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하다는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영화의 결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똥파리>에서 상훈을 죽게 만드는 것이 관객에게 어떤 즐거움이나 위로, 혹은 감동을 줄까? 놀라움이나 가슴 아픔을 주기는 하겠지만 그게 긍정적인 것일까? 
어떤 사람은 ‘왜 꼭 긍적적이어햐 하느냐? 부정적인 결말도 좋은 선택일 수 있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영화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상관없이, 그게 최종적으로 관객의 마음에 어떤 작용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부정적인 마음을 주는 것은 물건을 사는 고객에게 엄청 바가지를 씌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의 중간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상훈이 아버지를 학대하고 폭행하는 것은 불편하고 부정적이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극복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뀐다. 가장 보편적이고 흔한 전략이다. 
그런데 영화가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이르자, <똥파리>는 갑자기 아버지에게 가하던 학대를 관객에게 하기 시작한다. 관객의 마음을 거스르면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겠어.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라고 윽박지른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똥파리>의 문제는 그 입장이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내 편인 것처럼 얘기를 해 오다가, 갑자기 끝나려는 순간에 ‘난 네 편이 아니야.’라고 한 발 물러서는 것이다. 
어렵고 괴로워도 힘내라고 위로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하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는 절대 안 될 거야. 포기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배반은 관객의 잠재의식에 큰 상처를 준다. 인생은 악순환의 연속이고 굴레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아무도 믿을 수 없고 희망도 없다는 절망감을 마음 깊이 새겨두게 된다. 
‘돌 던지는 아이는 장난이지만 맞는 개구리는 죽을 지경’이라고, 만드는 사람은 재미로 그랬을 테지만 보는 관객은 의문의 좌절을 맛보아야 한다.
  
그러나 영화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한마디 말도 할 게 없는 영화들이 대부분인 요즘 세태에, 이런 문제점이라도 말하게 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나는 <똥파리>를 지지한다. 
그리고 <똥파리>가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살아가는 많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더 괴로운 똥파리들을 응원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똥파리>는 순진한 영화다. 순진하게 문제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영화는 ‘덜’ 위험하다.
  
  
*** 결정적 장면 ***
  

사실 처음에는 마지막 부분 상훈이 영재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 대해 쓰려고 했다. 상훈이 겨우 방황을 끝내고 새 출발하려는 시점이라 가슴이 아프기도 했고, 상훈을 죽이는 사람이 포스트 상훈이라고 할 영재라는 점도 인상 깊었다.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덮어버리는,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굴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불행한 인생일수록 그 삶 그대로 유전될 확률이 훨씬 크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 지옥 같은 삶이 고통스러워서 발버둥 치다가 이제 겨우 끝이 보이는 시점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훈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죽어가면서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조카의 재롱잔치에 가야 한다며 데려가라고 웅얼거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죽어가는 상훈의 모습에 이어 보이는 것은 즐겁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엄마와 딸의 모습이다. 
상훈의 엄마와 여동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상훈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것이 이 두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 두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상훈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죄책감 때문에 그렇게 악행을 하고 아버지를 폭행하고 살았던 것이다.
잊어버리고 싶으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지금 보고 있는 두 사람의 즐거운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즐거운 시간이 없었다면 아마 상훈은 벌써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라도 남아있는 그 즐거움의 시간이 지금껏 상훈을 지켜줬고, 이제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그 소중한 동력이 소진되고 있다. 
그리움의 시간도 죄책감의 시간도 이젠 끝이다.지금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문제다. 마치 예수가 사람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것처럼, 상훈은 자신의 죄를 갚음 하면서 죽음을 맞았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제 잘 살기만 하면 된다. 그게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식의 마무리는 많은 작품이 사용하고 있는 극적 장치이다. 당장 떠오르는 것으로는 <초록 물고기>(이창동 감독. 1997년. 한국)가 있다. 
주인공 막동(한석규가 연기)이 죽은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인다. 막동이 꿈꾸던 생활을 남아있는 가족들이 살아가고 있고, 막동과 드라마를 만들었던 배태곤(문성근이 연기)과 미애(심혜진이 연기)가 그곳에 와서 관객에게 죽은 막동을 환기시킨다. 
막동은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던 막동의 에너지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유산으로 남았고, 이제 격동의 시기를 지나 하나 둘 정리된 모습이다. 
막동의 죽음을 바탕으로 남은 사람들이 한 단계 성숙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이창동의 영화 중에서 <초록 물고기>를 제일 좋아한다. 기술적으로는 허술한 점이 있으나, 이 영화에는 한국영화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서사의 힘’이 있다. ‘대단한 이야기꾼이 나타났구나!’ 하는 것이 나의 첫인상이었는데, 막상 이창동은 다음 작품 <박하사탕>에서부터 방향을 급선회하여 개인 예술의 길을 갔다. 
나는 그 변화가 매우 아쉽다. 훌륭한 재능을 가진 만큼, 그가 현재의 주관적 세계를 넘어서서 보다 폭넓은 객관의 세계를 다룰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똥파리>는 <초록 물고기>가 끝난 시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상훈의 친구 만식은 상훈에게 말했던 대로 하던 일을 접고 고깃집을 낸다. 그리고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연희가 먼저 고깃집을 나와 포장마차를 부수는 광경을 보면서 영화는 급격히 리와인드된다. 깡패 용역을 하고 있는 영재가 보이고, 연희와 영재가 마주 본다. 


이건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간 상황이다. 영재는 포스트 상훈이므로 굳이 이렇게 보여주지 않아도 어떻게 살아갈지 알고 있는데 왜 꼭 확인사살을 해야 했을까? 
이렇게 영재가 등장함으로 인해 그동안 상훈이 겪어왔던,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그 고통의 시간들은 모두 무효화되었다. 상훈의 분신인 영재가 똑같이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영화의 효율성 측면에서도 좋지 않거니와, 관객과의 묵시적 약속이라는 측면에서도 반칙이다. 이 장면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고,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때 보이는 상훈의 쇼트이다. 
연희가 영재를 발견하고 영재도 연희를 본다. 그리고 다음, 연희가 보는 것은 옛날 연희의 엄마 포장마차를 때려 부수던 상훈의 모습이다. 상훈도 연희를 보고 있다. 
이 장면을 편히 생각하면 연희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영재의 모습에서 상훈을 떠올렸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단순한 인생유전 정도의 느낌으로 마무리된다. 불필요하지만 그나마 해악이 덜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연희가 상훈을 떠올린 것이 환상이 아니라 잊고 있던 기억이라고 보면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연희는 그날 엄마가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 상훈을 보았으나 잊어버렸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 속에 동생 영재가 있는 것을 보면서, 가장 가까운 두 남자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잊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상훈이 직접 엄마를 죽이지는 않아다 하더라도 엄마를 죽인 책임이 있고, 그렇다면 그동안 상훈과 지내왔던 많은 시간들은 무효화되어야 한다. 상훈과 교감한 모든 것을 전체 삭제해야 한다.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엄마를 죽인 원수이기 때문이다. 
연희의 아버지가 밥상을 엎듯,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갑자기 드라마 전체를 엎어버린다. ‘인생은 원래 좆같은 거야, 씨발놈아!’라고 말하고 싶은가? 
  
맞다. 동의한다. 많은 경우,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좆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힘 있는 사람은 혼자 가도 되지만, 가진 것 없고 약한 사람일수록 같이 가고 연대해야 한다. 손잡고 서로 격려하며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우리가 원하는 좋은 시간을 만나야 한다. 그런 시간이 올 때까지 우리는 살아있어야 한다. 상훈 말처럼 ‘우물쭈물하지 말고’ ‘행동하면서’ 내일로 가야 한다.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 현재가 괴롭더라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견디며 우리들의 시간이 올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똥파리>를 다른 식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연희가 고깃집을 나와서, 포장마차를 부수는 영재를 보는 장면을 없애고 다른 장면을 넣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장면은 역시 포장마차 장면이다. 
연희는 고깃집을 나와 길을 걷다가 포장마차를 발견한다. 옛날 상훈과 술을 마시던 그 포장마차. 
연희는 혼자 술을 마시고, 이어 웃음소리가 들린다. 상훈의 웃음소리다. 연희가 고개를 들면 상훈이 웃고 있다.

우리는 <똥파리> 전체를 통틀어 단 한번 상훈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상훈더러 한 턱 내라고 연희가 상훈을 데리고 포장마차에 왔을 때, 상훈은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연희는 상훈에게 마음이 열려서 ‘옛날 생각나서 한번 와봤어’라고 하며 처음으로 자기 엄마 아빠와 남동생 얘기를 한다. 
‘미친년’이라고 부르는 상훈에게 ‘나도 이름 있거든. 한, 연, 희.’라고 더욱 다가서는 연희. 
남과 제대로 소통해본 적이 없는 상훈은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연희는 그런 상훈을 놀리며 ‘내 이름은 너무 평범해서 별명 한번 없었다’고 즐거워한다.

바로 그때, 연희가 마음을 열어 자신을 보여줄 그때, 마법처럼 상훈이 웃기 시작한다. 

‘한 연희, 두 년이. 세 년이.’ 

욕으로 꽉 차 있던 상훈의 입에서 농담이 나온다. 
네 년이. 이 썅년아.’ 
웃기 시작하는 상훈. 한번 터진 웃음은 참을 수 없다. ‘이 미친년아’라고 웃으며 말하지만, 지금 욕에는 이미 구멍이 뚫려서 독기가 빠져있다. 괴물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의 마지막 부분, 상훈이 ‘한 연희, 두 년이...’ 하면서 웃는 부분이 영재 쇼트 대신 연희의 회상으로 들어간다. 
상훈은 죽었지만 연희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상훈이 엄마와 여동생 이미지를 에너지 삼아 버텨낸 것처럼, 연희는 상훈의 웃음을 에너지로 살아갈 것이다. 
동생 영재는 계속 나쁜 짓을 하면서 괴롭힐 것이고 아빠는 여전히 피해망상으로 연희를 짜증 나게 하겠지만 연희는 잘 살아갈 것이다.
  
같이 웃어본 적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다. 같이 울어본 적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다. 정말 힘들 때 곁에 누군가 있어주기만 해도 힘이 된다. 부디 여러분도 그런 사람을, 그런 기억을 간직할 수 있기를. 
상훈과 연희처럼 사람이면 좋지만, 취미나 어떤 물건 같은 것도 힘이 될 수 있다. 


내 경우를 보면 고등학교 시절 정신적으로 방황이 심했을 때, 도저히 심리조절이 안 된다 싶으면 노래를 들었다. 
그런 때 나를 진정시켜주는 유일한 노래는 영국 락그룹 Led Zepplin의 <락앤롤>(Rock and Roll)이었다. 단순한 멜로디의 시끄러운 노래였는데, 크게 틀어놓고 한 시간 정도 반복해서 듣고 있으면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떤 수를 쓰던지 그 순간을 넘겨야 한다. 그리하여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이 삶의 주인공임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포기하면 내 인생의 영화는 그냥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죽어도 포기하지 말기를. 미완성의 영화를 찍지 말기를...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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