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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Oct 02. 2018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신은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신다!’ 

      -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Nader And Simin, A separation,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 2011년. 이란)     


150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우주가 생겨나고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45억 년  전 지구가 만들어졌고 300만 년 전 인류가 탄생했으며, 그 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사라졌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과 사람들을 통틀어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지금은 아주 사소한 시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아주 사소한 시기의 아주아주 작은 먼지 같은 존재... 그게 우리다.     

현대는 영웅이 없는 시대이다. 다시 말하면 영웅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철학은 플라톤, 음악은 베토벤, 문학은 셰익스피어, 과학은 뉴턴... 다 오래전 사람들이다. 그나마 20세기에 아인슈타인 정도가 최근의 대표인물이 될까?


영화의 경우도 그런 것 같다. 1895년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 이후 많은 영화와 감독들이 명멸했지만 1940-50년대를 전성기로 해서 ‘대가’라고 부를만한 감독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재능 있는 감독들이 생겨나기는 하지만, 그들의 영화가 더 이상 예전 대가들이 보여주는 폭넓은 안목과 무게와 향기를 갖고 있지는 않다.


폴 토머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1970년생) 감독을 떠올려 본다. <매그놀리아> (1999년), <펀치 드렁크 러브>(2002년), <데어 윌 비 블러드>(2007년), <마스터>(2012년) 등을 만든 그는, 내 생각으로는, 현존 최고의 영화적 재능을 가진 천재 감독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이 천재적 솜씨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옛날 대가들의 영화에서 느껴지던 품격과 깊은 성찰의 느낌은 주지 못한다. 부분적인 세공에서 주는 아름다움은 있으나 전체를 조망하는 대가적 풍모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한계라기보다 시대적 한계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현대는 움직이는 시대이다. 불확정성의 시대이다. 우주도 물질도, 시간도 공간도, 감정도 생각도 확실히 정해져있지 않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 시대에 전체를 조망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이하 <별거>로 칭함)는,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홀연히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신공을 구사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처럼 탁월한 영화적 기교를 사용하지도 않고 지극히 평범한 테크닉만으로 존 포드, 장 르누아르, 알프렛 히치콕 등의 작품이 갖고 있는 기품을 보여준다. 

<별거>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불확실한 것을 불확실한 채로 보여줌으로써 어떤 삶의 진면목을 포착해내는데 성공한다. 

나는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대가가 사라진 현재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성숙한 영화세계를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확신한다.


     

씨민(레이라 하타미가 연기)과 나데르(페이만 모아디가 연기)는 이혼소송 중이다. 

씨민은 딸 테르메의 교육을 위해 이민을 가야겠다고 하고, 나데르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여 두 사람의 의견은 평행선을 달린다. 그 견해 차이가 이혼소송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씨민이 짐을 꾸려 친정으로 떠나는 날 나데르는 아버지를 돌봐줄 가정부를 구하고, 그렇게 온 사람이 라지에(사레 바이아트가 연기)다.

라지에가 일한지 며칠 후, 나데르가 딸과 함께 집에 돌아와 보니 라지에는 보이지 않고 아버지가 침대에 손목이 묶인 채 방바닥으로 떨어져 의식불명이 되어있다. 겨우겨우 아버지의 정신이 돌아왔을 때 허겁지겁 라지에가 돌아왔지만 화가 난 나데르는 문 밖으로 그녀를 밀어내 쫓아버리고 만다.


그로부터 며칠 뒤 라지에는 임신했던 아이를 유산하고, 그녀의 남편 호얏(샤하브 호세이니가 연기)은 나데르를 살인혐의로 고소한다. 사건의 쟁점은 두 가지. 하나는 나데르가 그녀의 임신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하는 것. 

또 하나는 나데르가 라지에를 집에서 쫓아낼 때 문 밖으로 심하게 밀쳐냈는데, 그 때 그녀가 계단에서 굴러 그로 인해 유산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영화는 이 쟁점을 둘러싸고 각 등장인물들이 각각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퉈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 <별거>의 가장 독특한 점은 극중 주요 인물들의 입장에 뚜렷한 선악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서로 갈등하는 대부분의 드라마가 어느 한 쪽을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시각을 가지게 되는데, <별거>는 그러한 가치판단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각자의 인물이 나름 최선을 다해서 행동하는데, 그 행동들이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방향을 달리함으로써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건의 발단은 씨민이 이민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에서 시작한다. 

씨민은 딸 테르메의 장래를 위해서 이민을 가려고 한다. 판사가 이유를 묻자 ‘엄마 입장에선 이런 환경에서 키우고 싶진 않죠’ 라고 답하는 것으로 보아 현재 이란의 현실에 대해 불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남편 나데르는 ‘이민을 가지 못할 이유가 천 가지도 넘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생활에서 이런 식의 갈등은 너무너무 흔하다. <사랑과 전쟁> 류의 통속 TV 드라마에서도 ‘깜도 안 되는’ 이야기 소재이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 갈등 속에 사실은 도저히 접합될 수 없는 깊은 골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별거>가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별거>는 오히려, 이러한 깊은 골과 한계마저도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넓은 시각을 보여준다. 

    

이민을 가는 것이 옳은가, 가지 않는 것이 옳은가? <별거>에서 이민 문제는 하나의 도화선에 불과하다. 미스터리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맥거핀’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영화는 ‘이민’으로 시작한다. 이민 때문에 이혼소송이 시작되고, 그로 인해 별거를 하게 되고, 별거 과정에서 파출부 나데르 문제가 발생하고, 나데르 측과 법적 분쟁을 하게 되고, 합의 과정에서 갈등을 겪고, 다시 법정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마지막 법정 장면에서는 딸 테르메가 엄마와 아빠 중 누구와 살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아마 이혼을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된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이민 문제’는 전혀 언급이 없어서 씨민이 과연 이민을 가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이민 문제로 이혼소송이 제기됐는데, 막상 결론 부분에서는 이민이 관심사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이좋은 커플이 연휴를 맞아 놀러갈 계획을 세운다고 해보자. 두 사람은 잔뜩 기분이 들떠서 어디로 갈 것인지 의논을 시작한다. 여자는 제주도를 일주하는 여행을 주장하고, 남자는 심플하게 일본 오사카 먹자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제주도를 가는 게 옳은가, 오사카를 가는 게 옳은가?


당연히 여기에 정답은 없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다. 거래의 문제다. 어떤 거래든지 상호간에 어느 정도 오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한다. 산술적으로 50:50은 아니어도 심리적으로 상호 만족할만한 거래가 되면 좋다. 

그러나 이렇게 처음부터 확연히 다른 입장을 보이게 되면 거래는 어렵게 마련이다. 어느 한 쪽이 통 큰 양보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게 안 되면, 다시 말해 소통이 끊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싸우는 일만 남는다. 시시콜콜, 처음 만난 날 먹었던 저녁 메뉴부터 시작해서 혈액형 점이 맞느니 틀리느니 얘기까지 줄줄이 나온다. 

흔한 일이고, 흔한 싸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싸우며 산다.  

   

씨민과 나데르 역시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은 결혼 후 10여년을 별 문제 없이 생활해 왔고, 각자 직장생활을 하며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 씨민이 나데르에 대해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이민을 가겠다고 하면 이혼소송을 취하할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도 좋았던 것 같다. 

그동안 별 문제없이 잘 살아왔는데, 갑자기 씨민이 이민문제를 제기하면서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파탄난 책임이 씨민에게 있는 것일까? 

얼핏 생각하면 ‘씨민이 이민문제를 꺼내지 않았으면 갈등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씨민에게 파국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집에 있었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텐데, 나간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씨민도 집에서 나갈 권리가 있고, 외국에 가서 살 권리도 있다. ‘신체의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다.


갑자기 이민얘기를 꺼낸 것이 잘못이라는 지적도 옳지 않다. 어쩌면 이민은 씨민의 오랜 숙원이었으며,  결혼기간 내내 그 문제를 제기해 왔으나 나데르가 들어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설령 얼마 전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라고 해도 이민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보다 나은 선택을 하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이민에 대한 견해 차이가 아니라, 그 견해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의 진행상황을 보면 씨민은 나데르가 대처하는 방식에 불만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씨민이 별거를 제안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단순한 위협용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가 떠나려는 씨민을 붙잡자 씨민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데르가 분명 적당한 협상카드를 제시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나데르는 전혀 타협하지 않고,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씨민이 시아버지를 자동차에 태워 데리고 가면서 하는 말은 씨민의 속마음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씨민; 남편은 절 붙잡지도 않아요. 이혼소송을 거부하지도 않고요. 14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이 말을 다시 풀어보면 이렇게 된다.

 ‘별거하자고 했지만, 전 남편이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이혼소송도 안할 줄 알았죠. 14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그것도 별 문제없이 잘 살았거든요. 그게 너무너무 서운해요.’ 


다시 말해서 모든 잘못은 나데르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데르의 고집과 불통이 상황을 이렇게 악화시켰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나데르는 고집불통이고 융통성도 없고 원칙과 명분을 중요시하면서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그런 태도 때문에 영화 속의 상황은 항상 악화된다. 마지막에 합의금을 주고 끝낼 수 있는 순간도 나데르의 결벽증 때문에 무산되고 만다. 나데르가 ‘나 때문에 유산됐다고 코란에 맹세하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원만히 합의에 이르렀을 것이고, 어쩌면 이혼소송도 유야무야 끝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질문. 

앞에서 예를 든 씨민의 대사, “남편은 절 붙잡지도 않아요. 이혼소송을 거부하지도 않고요. 14년을 함께 살아왔는데...”라는 말은 진실일까?


영화의 맥락으로 보아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진심이다. 

씨민과 시아버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비록 별거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씨민이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은 게 분명하다. 

시아버지는 씨민이 집을 떠나려는 것을 알고 씨민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분명한 어조로 “씨민”하고 이름을 부르는데, 아들 나데르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시아버지가 씨민을 알아보고 애착한다는 것은 그동안 씨민이 정성껏 시아버지를 돌보아왔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씨민은 시아버지가 유일하게 심리적으로 의지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시아버지에게, 그것도 울면서 하는 고백이 진심이 아닐 수는 없다. 



문제는 모든 진심이 다 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진심을 ‘현재 상태의 진정성’, 진실을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무엇’이라고 정리해 두자. 

씨민이 ‘남편이 붙잡지도 않는다’ ‘이혼소송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14년을 함께 살아왔다’는 등의 사실을 열거하면서 ‘이 모든 사태의 잘못은 남편 나데르에게 있고, 서운하다’고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분명히 감정적으로는 진심이지만 옳은 이야기는 아니다. 


반대로 이야기해 보자. 그러면 씨민은 ‘남편이 붙잡았으면’, 또 ‘이혼소승을 거부했으면’ ‘14년간 함께 살아온 결혼생활을 깨지 않았을까?’ ‘이민’이라는 자신의 요구사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도 씨민은 별거를 포기했을까?


나는 씨민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씨민은 이민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딸과 같이 가고 싶지만, 만약 딸이 거부한다면 혼자라도 이민을 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씨민의 말대로 딸의 장래를 위해서 이민을 가는 거라면 딸 테르메가 자신을 비난하고 아빠를 선택하는데도 계속 이혼을 고집하면 안된다. 

그런데 영화의 끝을 보면 테르메의 선택에 상관없이 이혼이 이루어진다. 테르메 때문에 이민을 가야한다는 씨민의 말은, 결과적으로. 거짓말이다.


마찬가지로 차 안에서 시아버지에게 한 씨민의 말 역시, 결과적으로, 거짓말이다. 진심이지만 거짓말이다. 진심은 진실이 아니다. 진심은 현재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게 마음이고 그게 사람이다. 우리는 항상 변한다. 불완전한 존재다. 그것이 당연하고,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이 영화 <별거>의 가장 독특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옳고 그름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인물을 묘사한다. 객관적인 영화들도 나쁜 것을, 비난하지는 않더라도, 나쁜 그대로 보여준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옳고 그름이 섞어있는 그것이 현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거>는 그러한 가치판단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지만 옳고 그름을 나누지는 않는다. 주요 등장인물 각각의 입장에서 보면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고 진심으로 현재에 충실하다. “선악의 대립이 아니라 각자의 선이 갖고 있는 ‘비전의 대립’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비극”이라는 감독의 말 그대로이다.


그러나 감독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변치 않는 100%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이 말을 했을 당시의 상황에서는 진실이고 진심이지만, 다른 상황 다른 문맥에서는 전혀 다른 말을 할 수도 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별거>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씨민이 시아버지에게 한 말이 ‘진심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거짓말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의 거짓말은 영화에서 여러 번 보여진다. 예를 들어 보자.


상황이 진행되면서 테르메는 점점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사실을 몰랐다고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씨민의 말을 거론하며 나데르를 추궁하자 결국 나데르는 자백을 한다.

      

나데르; 그래, 알았어. 엄마 말이 맞아. 거실에서 하는 얘기 다 들었어, 주방에서.

테르메; 근데 왜 모른댔어?

나데르; 내가 알았다고 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1년에서 3년 정도 감옥에서 살아야 해. 그럼 너는 어떻게 되고 누구랑 지내게 될지... 그 생각만 들었어. 그래서 몰랐다고 한 거야.  

   

그동안 부인하던 사실을 시인하는 상황이고 그 대상도 가장 사랑하는 어린 딸이므로 나데르의 말이 거짓말일 리가 없다. 전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나데르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나데르의 말대로 하면 1년에서 3년정도 감옥에서 살지 않기 위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거짓말이다. 

‘1년에서 3년 정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원래 나데르의 생각이 아니라 나데르가 판사에게 들은 말이다. 이미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사실을 알았는가’가 쟁점이 된 상태에서 판사는 ‘이건 살인죄예요. 19주 정도면 인간이죠.’라면서 ‘알았다는 게 인정된다면 1년에서 3년까지 구형이 가능해요.’라고 말한다. 이때 비로소 나데르가 알게된 사실이다.

그런데 나데르는 나중에 알게된 사실을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것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단편적 사례라면 ‘기억의 오류’라거나 ‘착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의 대화는 <별거>의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이런 접근이 하나의 자세이고 가치관이라는 말이다.


라지에도 여러 번 말을 바꾸고, 라지에의 어린 딸은 ‘엄마 아빠 싸운 적 없어요.’ 라고 했다가 과외선생이 엄마 아빠가 싸우는 그림 얘기를 하자 ‘이젠 안 싸워요.’라고 고쳐 말한다. 심지어 테르메는 판사 앞에서 아빠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노골적인 거짓말까지 한다. 


이처럼 주요 인물들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별거>는 그것을 그냥 자연스러운 하나의 현상처럼 보여준다.

숨을 쉬는 것처럼 거짓말도 당연한 우리의 일상이라는 듯이. 거기에 대해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을 하거나 비난하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간단히 ‘묘사하되 설명하지 않는다.’거나 ‘술이불작(述而不作)’이라고 하는 리얼리즘 용어로 말할 수도 있다. 작자의 가치판단이나 의미부여를 유보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여주기만 한다는 것이다. 판단은 수용자(독자나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별거>는 표현방법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리얼리즘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는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하나의 가치관, 세계관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앞에서 “선악의 대립이 아니라 각자의 선이 갖고 있는 ‘비전의 대립’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비극”이라는 감독의 말을 100% 믿지 말라고 한 것은 그런 뜻이다, 그 말 이면에 미처 하지 못한, 혹은 감독의 잠재의식 속에 있어서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또 다른 의도가 있다는 말이다.     

좀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보자. 이건 실화다. 내가 친구로부터 실제로 들은 이야기다. 

그는 어느 날 어떤 여자와 밤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여자는 내 친구를 좋아해서 쫓아다니는 입장이었고, 친구는 그냥 심심풀이 정도로 만나곤 하는 사이였다. 

누구의 계획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은 같이 밤을 지내게 되었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성관계를 하는 상태가 되었다. 점점 과정이 진행되어 결정적 상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여자가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며 관계를 거부했다. 그 때 내 친구는 간절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내가 다 책임진다’고...    

 

내 친구는 나름 진지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좋은 사람이다. 

그 얘기를 친구에게 듣고 처음 내게 든 생각은 ‘야! 세상에 믿을 놈 없구나. 남자는 다 도둑놈이다!’라는 것이다. 책임진다는 친구의 말은, 99.99%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여자도 알고 남자도 아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공공연한 거짓말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그 당시 친구의 입장에 국한시켜 보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 때 그 말을 할 당시, 정말 내 친구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당장 욕망을 채우고 싶은 마음에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까?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성품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아니, 성품 여부를 떠나 누구든지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말을 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그게 그 때의 진심이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상황에서는, 잠시 후에 지구가 멸망하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내가 다 책임진다’고 말하게 되는 게 우리 인간의 보편적 마음이다. 인지상정이라는 말이다.


내 친구는 나쁜 사람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앞에서 <별거>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거짓말을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그때 열심히 현재를 살아가지만, 지나고 보면 그들의 선택이 잘못된 상황을 만들어내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나쁜 의도로 그런 선택을 했던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현재를 산다. 문제는 선한 의도로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 같다. 


<별거>의 씨민과 나데르는 결국 이혼을 한다. 라지에는 ‘당신 돈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이제 이집에서 어떻게 살아요?’라고 흐느낀다. 어린 테르메는 엄마와 아빠 중 누구와 살아야할지 결정을 해야 한다. 

왜 선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원치 않는 비극을 겪고 피하고 싶은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걸까? 누구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야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우리는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부족한 존재여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면 거짓말인 것이 드러날 뻔한 말이지만 지금 간절하게 ‘내가 책임진다’고 말하고, 치매 걸린 시아버지에게 ‘금장 돌아온다’고 말해놓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 

‘라지에가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지만, 또 나중에 ‘알고 있었다’고 고쳐 말했지만, 어느 말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처음부터 들었을 수도 있고, 사실 못 들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들었던 것 같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세상을, 미래를, 운명을, 상대방을, 심지어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 그 중에 작은 행성 지구에 대해, 심지어 그 행성의 한 생물체에 불과한 인간에 대해, 인간의 마음과 뇌에 대해 여전히 조금밖에 모른다.

      

그러한 인간의 무지에 대해, 그로 인해 빚어지는 삶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 작품들은 많다. 아니, 대부분의 예술작품이나 철학이 그것을 이야기해 왔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부조리, 아이러니, 소외, 불확실성 등등 수많은 용어들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별거> 역시 그러한 삶의 비극성을, 감독의 말을 빌자면 “현대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명백히 대부분의 작품들과 차별되는 것은 그러한 비극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똑같이 잘못된 상황을 바라보면서도 ‘그렇게 살면 안되지’ 라든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지 않고 ‘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야. 잘못되었다고 자책하지 마. 그렇게 열심히 살면 돼. 응원할 게.’ 라고 말한다. 


그 응원하는 존재가 누구냐고? 그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진실함, 영원한 존재... 바로 ‘신(神)’이다.     

얼핏 <별거>를 비롯한 아쉬가르 파르하디 영화가 갖는 미스터리 구성이 ‘불가지론’ 비슷한 것을 말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지금 맞는다고 보이던 것이 잠시 후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지금 알았던 사실이 나중에 아닌 것이 드러난다. 이런 구성이 인간의 한계나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방편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판단 자체를 벗어나는 어떤 시선, 즉 신적인 세계가 존재함을 암시하는 수단이라고 봐야 한다. 

<별거>는 신의 시선으로 인간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신은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신다. 힘내라!’라고 말하고 있는 영화이다. 

    

앞에서 계속 살펴봤듯이 ‘옳다 그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하는 가치판단은 인간의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변치 않는 진실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진실의 세계이다. 상대적 진실들이 서로 충돌할 때, 그걸 조정하고 결정하기 위해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고 법적 판단을 구한다. 

<별거>에서는 두 개의 결정권자가 있는데, 하나는 법원의 판사이고 또 하나는 ‘코란’ 즉 신이다.


영화는 법원에서 시작한다. 씨민과 나데르가 카메라 정면을 보고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들은 지금 법원의 판사에게 말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서 <별거>의 ‘판사-법원-국가’는 인간의 시비를 판단해주는 절대자이다. 그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그렇다고 강제적이지는 않다. 씨민이 이민을 가려고 한다는 것은 그 절대적 세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인데, 판사는 그것에 대해 비난하거나 제지하지 않는다. ‘이란’이라는 종교중심 국가가 지금 변화의 과정에 있고, 그 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판사-볍원-국가’가 종교, 즉 신을 대신하기는 하지만 신처럼 절대선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도 인간사의 한 부분이다. ]


엄숙하고 형식적인 서구식 법정과 달리 캐주얼한 이란 법정의 광경은 우리에게 색다른 느낌을 준다. 법이 권위적이고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이 있는 친근한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영화의 중후반 법정에서 서로 공방을 펼치고 있을 때 갑자기 판사가 일어나며 ‘창문 좀 열자’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그동안 흥분해서 나데르를 비난하던 라지에의 남편 호얏이 창문을 열러가고 판사는 재킷을 벗는다.


이런 장면을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사실 이런 디테일을 만들어 넣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어떻게 보면 필요 없는 연기이고, 별 의미 없는 디테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판사는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게 판사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영화 내내 그 역할에 충실하던 판사가 왜 갑자기 재판을 중지하고 엉뚱한 행동을 할까? 지금 실내가 덥다는 얘긴데, 그게 문제였다면 왜 직원에게 시키거나 그냥 슬그머니 재킷을 벗지 않았을까? 왜 판사는 잡담하다가 ‘아 덥네. 창문 좀 열자’고 하듯이 말하고, 호얏은 왜 동네 친구끼리 수다떨다가 덥다는 친구의 말을 들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까?    

 

이 행동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판사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시시비비를 다투는 씨민과 나데르, 라지에와 호얏이나, 그것을 판가름해주는 판사나 똑같이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굉장히 과격한 시각이다. 판사와 법원과 국가를 같은 의미망으로 봤을 때, 이 말은 국가도 우리 인간들처럼, 영화에서 법원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잘못 할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이 세상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시 법정이다. 

이제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이 정해진 듯, 판사는 테르메에게 아빠와 엄마 중 누구와 살 건지 결정했느냐고 물어본다. 테르메가 망설이자 판사는 아직 결정 못했느냐고 다시 묻고, 테르메는 결정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도 테르메가 대답을 망설이고 울기만 하자 판사는 씨민과 나데르를 나가게 한다. 이때 카메라도 두 사람을 따라 나가고, 이어 2분 30여초의 긴 시간동안 복도를 보여준다.


법정의 복도는 복잡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복도에 와 있고 또 오고 간다. 복도의 중간에는 유리문이 있는데, 오른쪽 문은 열려있고 왼쪽 문은 닫혀 있다. 열린 오른쪽 문 쪽으로 사람들이 오고 가고, 닫힌 왼쪽 문 너머에 씨민이 서 있다. 

문 안쪽 카메라 가까이 오른쪽 복도면에 긴 의자가 있고, 잠시 서있던 나데르가 자리에 앉는다. 이런저런 사람들 소리가 들려오지만 씨민과 나데르는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씨민과 나데르가 각자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종료된 것이다.  

   

<별거> 속 대부분의 쇼트 지속시간이 몇 초에 불과한 상황에서 2분 30여초라는 시간은 엄청나게 길게 느껴진다. 

영화의 처음 ‘이민’을 논쟁하며 시작된 씨민과 나데르의 갈등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딸 테르메가 누구와 살 것인지만 결정되면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지도 모른다. 씨민은 이민을 갈 수도 있을 것이고, 나데르는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별거>의 진행과정을 통해 지금 이렇다고 알았던 것이 나중에 저랬던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그게 우리의 인생살이이고, 지금 씨민과 나데르의 경우도 또 마찬가지이다. 

테르메는 지금 판사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와 살지 결정했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나오지 않는 것일까? 혹시 ‘결정은 했지만 엄마 아빠가 헤어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판사에게 그걸 설득해달라고 부탁하고, 그 결과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이 없던 일로 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씨민과 나데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앉아있는 것일까? 오랜 세월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 하던 두 사람이 지금은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아있다. <별거>의 영어 제목이 ‘Nader And Simin, A separation’인데, 제목 그대로의 상황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2분 30여초의 긴 시간동안 화면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것을 찍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영화의 시작은 판사의 시선이었는데, 지금 복도를 보고 있는 이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이렇게 오랜 시간을, 아무런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복도를, 무엇을 보여주거나 알려주려 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이 시선은 누구일까?  

   

나는 그것이 ‘신의 시선’이라고 느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굳이 이유를 설명하자면 여러 증거를 댈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신’이란 ‘있다’고 말하는 순간 사라진다. 말로 내뱉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객관이 되고, 정해진 사실이 된다. 그러나 모든 정해진 것은 이미 가짜다. 모든 것은 변하고,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다.


씨민과 나데르, 그리고 화면 밖에서 판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테르메, 또 법원 복도를 오가는 수많은 이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의 미래가 현재보다 나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씨민이 테르메와 함께 프랑스로 이민 가서 재혼을 했는데, 지금보다 훨씬 나쁜 상황을 맞을지도 모른다.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별거> 다음 작품이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The Past. 2013년)인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다. 

어떻게 되건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누군가가, 따뜻한 시선으로, 과거에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때론 즐겁지만 때론 괴롭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여러분 곁에는 누군가가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항상 사랑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자애로운 엄마 아빠가 나를 지켜봐 주듯이, 그렇게 신께서 우리를 지켜봐 주신다. 

영화 <별거>가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엔딩 크레디트 자막이 올라오고, 영화가 끝나는 것이다. 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영화는 끝나지만 여러분을 바라보는 신의 자애로운 시선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별거’는 가슴 아픈 일이다. 그밖에도 ‘실패’ ‘불합격’ ‘친구와 싸움’ ‘미래에 대한 불안’ ‘가난’ 등등 무수한 고통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부디 잊지 마시길. 신은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고 항상 지켜보고 계신다!  


        

*** 결정적 장면 ***     


나데르와 라지에가 법정분쟁을 하면서 영화 후반 맞고소 사건으로 발전한다. 

나데르가 라지에를 떠밀어서 임신된 아이를 죽게 했다는 사건과, 라지에가 나데르의 아버지를 침대에 묶어놓고 나갔고 그 결과 침대에서 떨어진 아버지가 다치게 되었다는 사건이 병합된 것이다.



나데르는 아버지가 다쳤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가 의사로부터 타박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몇 군데 있다고 대답한 나데르는 바로 아버지의 셔츠를 벗기려고 단추를 푼다. 

몇 개 단추를 풀던 나데르는 돌연 마음을 바꿔 다시 옷을 입힌다. 의사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나데르는 대답한다.

     

나데르; 침대에서 떨어져서 난 상처인지 확실치 않아서요.  

   

옷을 다 입힌 나데르는 아버지를 껴안아 일으킨다. 

물론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리고 장면은 씨민 쪽으로 넘어간다.


나는 이 장면이 <별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별거>는 요즘 보기 드물게 기품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주는데, 이 장면은 그러한 품격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과잉의 시대이다. 모든 것이 넘쳐난다. 물질도 넘쳐나고 감정도 넘쳐나고, 사랑과 증오도 넘쳐나고, 행동과 표현도 흘러넘친다. 영화에서 폭력과 섹스 묘사가 그 한계를 모르고 확장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상상을 초월하는 뒤틀어진 형태가 많이 나타난다. 우주가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것처럼 끝없는 팽창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팽창과 과잉의 시대에 <별거>는, 그리고 방금 예를 든 이 장면은 묘한 느낌을 준다. 

<별거>도 현대에 유행하는 소재인 싸움을 다루고 있다. 싸움은 시작하면 끝을 봐야하고, 끝을 보려면 과격해진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어지는 살벌함은 아니라 하더라도,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야 한다. 

나쁜 짓만 아니라면, 물론 수많은 경우 상상하기 어려운 나쁜 짓도 서슴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Winner takes it all! 승자독식이 현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데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타박상을 입었다는 것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중요한 증거가 되지만 나데르는 그걸 포기한다. 

왜 나데르는 아버지의 옷을 벗기다가 마음을 바꾼 것일까?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 나데르가 왜 스스로 ‘침대에서 떨어져 난 상처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일까?  

   

물론 나데르의 그 말은 거짓말이다. 아니 거짓말이라기보다 표면적인 이유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상처가 침대에서 떨어져 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나데르의 몫이 아니다. 그건 판사가 할 일이다. 나데르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밖에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말을 해야 할 것이 있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 있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요즘 세상은 그런 구분이 무색하게 모든 것을 말하는 휘황찬란한 시대가 되어있지만 나데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 내 몫이 아닌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을 ‘예의’라고 말하는데, 나데르는 지금 예의를 지키고 있는 중이다. 

    

분명히 나데르를 위해서는 아버지의 상처가 도움이 된다. 그래서 아버지의 옷을 벗기던 나데르는 갑자기 아버지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내 이익을 위해서 내 마음대로 병에 걸린 아버지의 옷을 벗기고 있다. 아버지를 오욕스럽게 하면서까지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는 게 과연 옳은가? 아버지의 존엄보다 나의 이익이 더 중요한가?



나데르는 그런 생각에 행동을 멈춘다. 사실 이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내 욕망에 충실해서 열심히 달려본 사람은 정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러나 나데르는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 판단을 했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을 바꾼다. 

    

물론 그 선택으로 인해 나데르가 법정 싸움에서 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나중 일이고 결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냐 하는 점이다. 나중 나의 승리를 위해 현재의 아버지를 괴롭히고 모욕하는 것은 나데르의 선택이 아니다. 

현재 선택의 결과 나중에 어떤 일이 닥칠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할 뿐이며 나머지는 신의 영역이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미래를 신에게 맡기는 겸손한 태도, 그것이 나데르의 자세이고 <별거>의 기본 입장이다. 

    

유사한 상황이 또 있다. 

라지에의 남편 호얏이 떼르메의 학교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등 갈등이 고조되자, 나데르가 판사에게 조처를 해달라고 항의성 부탁을 한다. 판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그동안 나데르의 입장에 서있던 가정교사가 증언을 번복했다면서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다시 묻는다. 

알지 못했고, 산부인과 전화번호는 딸 테르메가 말해준 것이라고 말하는 나데르. 그러자 판사는 나데르에게 딸을 들여보내고 나가있으라고 말한다. 복도로 나가는 나데르. 

    

테르메; (나데르를 보며)무슨 질문? 뭐 물어보신대?

나데르; (잠깐 망설이다가)모르겠어. 그거 이리 줘.

(테르메의 가방을 받아든다. 들어가는 테르메.)

판사; (잠시 눈치를 보고)할 말이 뭐니?

테르메; 질문 안 하셨잖아요?

판사; 내가 뭘 물어볼지 아빠가 얘기 안하던?

테르메; 안하셨어요.

판사; 몇 학년이니?

테르메; 6학년요.    

 

그제야 판사는 사건 당일의 상황과 전화번호 문제를 묻고, 테르메는 아빠에게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얘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짓말임이 분명한, 아빠에게 전화번호를 준 것이 자신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 나데르는 운전하면서 계속 테르메의 눈치를 보고, 테르메는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자, 이 장면은 <별거>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상황의 반복이다. 

인물들 각자는 모두 현재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말이나 행위가 맞느냐 틀리냐가 아니다. 자신들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현재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냐가 중요하다. 주인공들의 말이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은 지금의 진실만이 중요한 것이다. 

나데르는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거짓말을 했고, 테르메 역시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거짓말을 했다. 테르메는 자신이 거짓말 한 것을 알고 있고, 그게 나쁜 짓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빠를 위해 테르메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재 상황이 가슴 아픈 테르메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아빠 나데르 역시 가슴 아프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결정적 장면은 이 얘기가 아니다. 그 앞부분, 나데르가 테르메를 부르러 나간 때가 결정적 장면이다. 

그 때, 분명히 나데르는 판사가 테르메에게 무슨 질문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테르메가 ‘무슨 질문? 뭐 물어보신대?’ 라고 묻자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바로 이 순간, 테르메가 질문하고 나데르가 대답하는 그 사이의 짧은 망설임의 순간, 질주하는 욕망이 잠시 정지되는 그 순간... 나는 이 순간이 ‘신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테르메에게 ‘판사가 산부인과 전화번호에 대해 물어볼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네가 아빠한테 말했다고 얘기하라’고 까지는 강요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테르메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나데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잠시 망설이더니 ‘모르겠다’고 말한다. 

    

앞에서 나는 이 시간이 ‘신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시간이 감동스럽다. 나는 이 시간이 아름답다. 그러나 이 시간이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것은, 이 시간이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의 품격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짧은 시간은, 나데르의 갈등과 선택의 찰나는, 우리 인간세상이 아무리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난장판처럼 보여도 나름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을 준다. 우리가 백점짜리 행동은 못하지만 그렇다고 50점 이하로도 내려가지 않는다는 믿음, 최소한의 예의와 염치는 살아있다는 확신이 느껴지는 것이다. 



예의와 염치가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나는 <별거>를 보면서 그것이 살아있음을 본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의 존엄함을 보여주는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에게 감사한다. 

나는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영화적 태도와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공감하고 그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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