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영화 <나를 찾아줘>

by 천하태평

<나를 찾아줘(Gone Girl)> (감독 데이비드 핀처. 2014년. 미국)


에이미 던(로자먼드 파이크가 연기)은 베스트셀러 동화 시리즈 <어메이징 에이미>의 실제 주인공이다. 에이미의 엄마가 만들어낸 ‘어메이징 한 에이미’ 때문에 실제의 에이미는 항상 현실과 허구의 격차 사이에서 고통받으며 살아왔다.

엄마 아빠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에이미는 남자를 선택했고, 드디어 닉 던(벤 애플렉이 연기)을 만나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닉과의 결혼생활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살아보려던 에이미는 차츰 실망하게 된다. 처음 에이미의 뜻대로 잘 따라주던 닉이 점점 나태하고 무능력한 남자로 변해갔고, 엄마와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이사한 후로는 더욱 에이미를 실망시키는 생활을 계속한다.

게다가 닉이 자신을 멀리하고 바람까지 피우는 것을 알게 된 에이미는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결혼 5주년 기념일을 기해 에이미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영화 <나를 찾아줘>는 그렇게 시작된다.



매년 결혼기념일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에이미는 이번에도 보물찾기 단서들을 남겨놓고 사라진다.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폭행 납치된 흔적을 남기고.

실종신고를 받은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들어가고, 연락을 받은 에이미의 부모도 에이미를 찾는 이벤트를 벌인다.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닉에게 불리한 증거들이 발견되고, 매스컴도 닉의 사생활을 보도하면서 나쁜 여론이 형성된다. 쌍둥이 여동생 엘렌만이 닉의 편일 뿐 점점 닉을 에이미의 살해범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반전. 미스터리 스릴러의 흐름으로 에이미의 실종사건을 풀어가던 영화가 갑자기 사라진 에이미에게로 시점을 옮긴다.

모든 미스터리를 일거에 날리며, 이제까지 모든 단서와 사건이 에이미에 의해 치밀하게 준비된 것임이 밝혀진다.

‘사라진 여자(Gone Girl)’로서, 아직 남아있는 복수극의 스케줄을 계속하는 에이미. 닉이 자신을 납치 피살한 것처럼 보이게 자살함으로써 닉을 사형당하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있는 스토리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에이미가 매스컴을 비롯한 여론 시스템을 의도대로 조작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시한 부랑자 커플에게 의도치 않은 강도를 당할 것은 예상치 못했다.

무일푼이 되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야 하게 된 에이미.


돈을 강탈당하고 궁지에 빠진 에이미가 새로 만든 스토리의 조연은 옛날부터 자신을 좋아하는 데시 콜린스(닐 패트릭 해리스가 연기)이다.

데시는 에이미가 찾아오자 감지덕지하며 자신의 별장에 묵게 한다. 고상한 취향의 부자인 데시가 에이미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려 하자 에이미는 또다시 새로운 스토리를 준비한다.


인기 TV 프로그램에 나가서 인터뷰를 하는 닉.

하지만 에이미의 치밀한 증거조작으로 인해 닉은 궁지에 몰리고, 에이미가 임신했었다는 증거(이것도 에이미의 조작이다)가 알려지면서 여론도 급격히 나빠진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닉은 에이미의 룰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에이미가 원하는 스토리를 연기한다. 그 과정에서 닉은 에이미가 남긴 결정적 단서 때문에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지만 유능한 변호사 태너 볼트(타일러 페리가 연기) 덕분에 보석으로 풀려난다.


닉의 인터뷰 방송이 전국 네트워크를 탄다. 진솔한 태도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닉의 태도에 대중들은 호의적 반응을 보인다. 모든 사람이 닉의 간절한 부탁에 감동하지만, 그게 연기이고 거짓이라는 것을 닉 자신과 에이미는 안다.

에이미의 세계에 동참하겠다는 닉의 말은, 거짓이긴 하지만, 에이미의 마음을 움직였고, 에이미는 닉에게 돌아갈 결심을 하고 데시를 계획 살해한다. 데시가 자신을 납치해 가학행위를 했고, 그를 살해하고 겨우 탈출한 것으로 스토리를 만든 것이다.

망설임 없는 살해 장면. 그리고 에이미는 닉에게 돌아간다.


극적으로 탈출한 에이미가 닉과 재회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닉은 에이미가 데시 살해범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대세는 에이미 편이다. 게다가 에이미가 임신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은 진정한 사랑, 완전한 결혼, 완벽한 가정의 표상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닉에게 안겨 누운 에이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닉이 말한다.


닉; (혼잣소리로) 무슨 생각하고 있어? (쳐다보는 에이미) 기분은 어때? 우리는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해온 걸까? 앞으로 무슨 짓을 하게 될까?


우리는 이 대사를 영화가 시작할 때도 들은 바 있는데, 조금 더 자세하다.


닉; 아내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그녀 머리를 떠올린다. 아내의 예쁜 두개골을 열고 뇌 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그녀 생각을 잡으려 애쓰는 날 상상한다. 결혼생활 중에 제일 자주 했던 질문이다. (쳐다보는 에이미) 무슨 생각하고 있어? 기분은 좀 어때? 우리가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영화의 시작과 끝을 동일한 장면으로 놓고 가운데 본론을 배치한, 흔히 액자 형식이라고 부르는 구성이다. 닉과 에이미라는 부부가 ‘서로에게 한 무슨 짓’ 중 하나가 영화 <나를 찾아줘>의 내용인 것이다.


간단한 스토리의, 흔히 보는 미스터리 스릴러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줄거리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전반부는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로, 후반부는 에이미에 초점을 맞춘 스릴러 형태로 진행된다. 장르영화로서도 즐길 거리가 많고, 관객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매스미디어와 여론이 주도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일 수도 있고, 결혼제도와 가족중심주의에 대한 살벌한 경고일 수도 있다. 또 사이코패스 아내를 맞은 평범한 남편의 악몽 같은 현실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대중영화로서 영리한 선택을 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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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바대로 다양한 양념이 첨가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모든 양념을 걷어낸 본질의 맛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우리의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우리가 영화를 비롯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방법도 정해진 바가 없다. 내가 영화를 보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는 나의 것이 되고, 나는 나의 세계 속에서 그 영화를 완전하게 경험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듯이, 영화감상의 주인공 역시 나인 것이다.


현재 지구 상에는 70억 명이 넘는 지구인이 살고 있고, 그중 어느 하나도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70억, 인류의 탄생 이후부터 따지면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각자 자신의 드라마를 만들어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간단히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사회 중심적인 사람과, 자신과 사회의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가는 사람.

대체로 앞의 두 종류는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자신의 욕구와 사회적 기대 사이 어느 곳에 위치하게 마련이다.

오해를 무릅쓰고 편하게 말하자면, ‘햄릿형’의 사람은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고, ‘돈키호테 형’ 사람은 개인적 가치를 중시한다. 햄릿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라는 말로 유명한데, 그 말은 햄릿이 사회적 현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것을 내가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고민한다.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다. 그는 사회적, 객관적 현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고, 세상은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흔들림이 없다.

그에게 현실은 자신의 주관적 신념을 행사하고 구현하는 실현의 장이다. 그는 오로지 행동할 뿐 고민하지 않는다. 99명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도 내가 옳다면 그게 옳은 것이다.

햄릿과 다르게, 돈키호테는 죽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잘못된 현실이라고 믿는다. 돈키호테는 주관주의 인간형의 완벽한 모델이다.


<나를 찾아줘>가 인상적인 영화인 이유는 주인공 에이미를 통해 돈키호테적 주관주의 인간형의 탄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영화의 과정을 통해, 에이미는 현실에 갈등하는 보편적 햄릿형 인간에서 극적으로 돈키호테 형 인간으로 환골탈태해서 돌아온다.

기존 도덕이나 상식적 인물형으로 판단하면 당황스러울 수 있겠으나, 그 모든 것을 떠나 에이미 개인의 뜻만을 생각하며 보면 영화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제목 그대로 ‘사라진(Gone) 나를 찾은’ 에이미는, 우리의 도덕관념으로는 불편하긴 해도, 비난하기보다는 곱씹어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중요한 캐릭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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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에이미에게 ‘나’는 없었다.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허구의 세계 속 인물을 허수아비처럼 연기했을 뿐이다. 부모가 만든 완벽한 판타지 월드에 살면서, 에이미는 차츰 자아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가벼운 연애를 통해 자아를 학습하던 에이미는 닉을 만나면서 때가 왔음을 느낀다. 이제 독립적으로 ‘나의 세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에이미는 닉과 결혼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 한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아서, 잘 해내는가 싶던 닉이 점점 세상의 속물로 주저앉는다.


닉; 더 나은 남자가 되겠다고, 결혼할 때 에이미에게 약속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남자, 아내처럼 열정을 갖고 살고 사랑하는 남자가 되겠다고요. 그러나 아내를 실망시켰어요. 그걸 바로잡는 대신 쉬운 탈출구를 택했습니다.


닉이 TV 인터뷰 쇼를 통해 에이미에게 항복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하는 대사다. 여기서 ‘아내처럼 열정을 갖고 살고’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에이미가 열정을 갖고 산다는 뜻이고, 에이미의 중요한 가치관이라는 뜻이다. 열정을 갖고 산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자신의 세계를 추구함에 게으름이 없다는 뜻임을 환기하자.


닉이 자기계발을 등한히 하고 저급한 불륜에 빠지자 에이미는 실망한다.

에이미 역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고민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는데 매진하는 선택을 못하고 닉과 자신을 파멸시키는 스토리를 진행시킨다. 이것은 ‘나’를 포기하는 햄릿형 고민과는 다른 것으로, ‘나와 세상’을 모두 파괴시킴으로써 모든 것을 끝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내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는 주관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미스터리 스타일로 풀어진 영화의 전반부 구성이다.


실종된 에이미에게로 시점이 넘어간 중반부는 이제 태동을 시작한 에이미의 주관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나름 치밀하게 계획된 에이미의 스토리는 실제 현실에 따라 조정되고 변경된다. 돈키호테처럼 주관성이 확고해서 객관적 현실을 압도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런 불안정함 속에서도 자신의 스토리를 완성시켜나가던 에이미에게 전혀 예상 못한 상황이 닥친다.

가진 돈을 모두 강탈당하고 냉엄한 현실에 내팽개쳐진 에이미는 결정적인 기로에 선다. ‘To be, or not to be.’ 계속 자신의 스토리를 진행시킬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그리고 에이미는 옛날부터 자신을 좋아한 데시 콜린스에게 전화를 건다.


데시에게 전화했을 당시에 에이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갑자기 닥친 현실의 공포 때문에 데시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동안 꿈꿔왔던 자신의 스토리를 포기하고 현실적 안락함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최소한 데시와 잠시 생활을 해 본 이후, 데시가 자신의 스토리에 끼어들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 상태에서 닉의 인터뷰를 보고 새로운 스토리를 떠올리고 에이미는 그걸 실행에 옮긴다. 그 실행의 단호함이나 거침없음을 보면 이즈음 어느 때 에이미의 주관성이 갑자기 완성상태에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위 말하는 ‘깨달음의 상태’를 얻은 것이다.

데시를 살해하는 에이미의 그 과감함을 보라. 거기에는 햄릿의 고뇌가 끼어들 틈이 없는 돈키호테의 행동력이 있다.


이것은 완벽하게 다른 세계다. 닉이 ‘너의 뇌를 헤집어서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닉의 객관적, 현실 중심적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에이미의 세계를 발견할 수 없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리 분석하고 연구해도 나오지 않으니까. 새로운 세계관, 기존의 선악 논리와 가치체계를 뛰어넘어 완벽한 나의 세계를 구축해야만 알 수 있는 세계니까.

에이미를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하는 한, 돈키호테를 ‘미친 사람’이라고 우습게 아는 한 우리는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에이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돈키호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태어남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은 모든 질문들의 원형이다.

인생이란 나와 세상의 관계 맺기를 간단히 표현한 말이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나를 찾아줘>는 주인공 에이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자신의 확실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어릴 적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아이, 어메이징한 모습으로 살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고, 자라면서 나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배워나간다. 세상에 나를 맞추는 삶이 아니라, 나의 뜻대로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삶으로 변화해가는 것이다.

에이미에게 인생이란 세상에 나를 적응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나의 스토리를 완성시키는 공연장이다.


닉; 널 이해할 수 없어. 우리는 서로에게 분개하고 조종하려고 하면서, 서로 고통만 줬잖아.

에이미; ...그게 결혼이야.


에이미에게 항복하고 에이미의 세계에 들어갔지만, 닉은 여전히 에이미의 세계가 납득되지 않는다. 닉은 ‘결혼이란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정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에이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의 개념이 다르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정확할 것 같다.

보통의 사랑이 감정적으로 화목한 상태를 의미한다면, 같은 뜻을 가지고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에이미의 사랑이다. 지금 에이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의 관심과 응원을 얻었고, 닉의 객관적 모습 역시 잘 만들어져가고 있다. 심리적으로 갈등과 고통이 있긴 하지만, 그건 스토리의 진행상 항상 있는 일이고 그게 결혼이고 인생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감정적으로 만족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내 상태가 내 뜻에 부합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에이미의 세계가 여전히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에이미는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쓰고, 다정한 척 연기를 하고,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범죄까지 저질렀다.

그런데도 에이미는 전혀 죄책감이 없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라고 할 만하다. 과연 이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의 반어법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부정이다. 정-반-합의 과정에서 ‘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에이미의 모습이 사회적 가치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직 그 세계가 미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키호테처럼 완벽히 사회와 괴리된 모습보다는 (어쩌면) 진전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돈키호테가 사회와 완전히 유리된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했다면, 에이미는 계속 사회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완성시키려고 노력한다. 비록 그 과정 속에서 반사회적인 결과가 빚어지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 바람직한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의 모습이 딱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뜻마저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질문이고,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시간인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왜 사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내놓았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내가 아는 한,

인생의 목적을 ‘먹고살기 위해서’라고 답한 사람은 없다.

먹고사는 것이 인생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인생의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먹고 살기 충분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도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 밤낮없이 노력한다. 나는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세상의 한 부속품이 된다.

<나를 찾아줘>는 한시라도 빨리 세상의 주인공이 되라는 충고다. 내가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라는 역설이다.


변호사;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아요.

닉; 위험해요.

변호사; (일어나며) 책을 내고, 영화를 찍고, 술집 체인점을 내세요. 아내에게 감사하게 될 겁니다. ...화나게 만들지만 말고요. 안녕히!(사라진다.)


아내 살해범 전문 변호사 태너 볼트가 여전히 에이미 곁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닉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다.

변호사는 에이미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음을 인정한다. 에이미의 세계에서 먹고사는 문제는 더 이상 아무런 고민거리가 아니다. 변호사의 사고방식대로 말하면, 그저 즐겁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 저절로 돈이 들어오는 것이다.

17세기의 돈키호테가 사회와의 싸움에서 패한 것을 생각하면, 주관주의의 세계가 객관적 세계를 이기기까지 400여 년이 걸린 셈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해피엔딩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닉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때 이것은 악몽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악몽 드라마가 영화가 끝나면 마무리되지만 이건 여전히 계속되는 최악의 악몽 드라마이다.

변호사의 말처럼 완전히 나를 포기하고 에이미의 세계에 항복하면 축복받은 삶을 살 수 있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아직 ‘나를 버리면 세계를 얻는다’는 말을 믿지 못한다.


에이미의 입장에서도 해피엔딩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에이미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세상과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미숙한 상태에서 세상에 나갔다가 뜨거운 맛도 보았다. 겨우 1라운드 싸움을 끝내고 돌아왔을 뿐이고, 앞으로 더 험한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세상이 에이미의 편인 듯하지만, 여론이란 언제 돌아설지 모른다.

무엇보다 불안정한 요인은 닉이 아직도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닉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우리는 앞으로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하게 될까?’라는 것은 에이미의 미래도 그다지 평탄치 않을 거라는 예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에이미에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해피엔딩이냐 아니냐, 부자냐 가난하냐, 즐거우냐 괴로우냐, 좋으냐 싫으냐 하는 문제는 에이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건 삶의 무게중심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세상 중심’으로 살아갈 때 중요한 문제들이다. 에이미처럼, 또 돈키호테처럼 ‘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런 객관적 가치들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현실적 가치, 세속적 규율을 무시한다. 그들은 자신의 ‘뜻과 이상’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그 뜻을 실현하는 과정이고, 스스로 그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하고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지금, 내가, 나의 뜻대로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날 007 시리즈 중에 <007 두 번 산다>라는 제목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영생을 얻었다고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 산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 왔다. 지금이 마지막이고 다시는 선택의 순간이 없다고 할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의 룰에 따를 것인가, 나의 뜻에 따를 것인가?


당연히 나의 뜻대로 살면 갈등이 생긴다. 세상과의 불화를 견딜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가 자라온 과거를 떠올려 보라. 치열한 갈등과 좌절의 역사 아닌가?

그걸 이겨내고 나의 세계를 만들어나갈 용기가 필요하다. The sooner, the better! 싸움의 시작은 빠를수록 좋다. 늦어질수록 사회적 파장과 위험부담이 커지고 성공할 확률도 낮아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를 찾아줘>는 ‘세상은 내가 조종할 수 있다, 나의 뜻대로 살아라’라고 권유하는 영화다. 닉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재앙이겠지만, 에이미처럼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전사들에게는 축복이고 성공 교사인 것이다.



*** 결정적 장면 ***


에이미는 왜, 그리고 언제 닉에게 돌아갈 결심을 한 것일까?

처음 집을 나올 당시 에이미의 계획은 자살로 끝맺는 것이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닉을 확실히 감옥에 보내어 사형당하도록 하는 것이 에이미 가출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수정되고 틀어져서 에이미는 오랜 남자 친구 데시에게 의탁한다.고등학교 시절 이래로, 에이미에게 데시는 오래된 가구 같은 것이었다. 항상 에이미의 근처에 머물면서 에이미가 사용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부유하고 헌신적이고 일편단심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데시는 좋은 파트너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에이미는 안락한 생활을 거부하고 다시 닉을 선택한다. 닉을 떠나는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된 반면 데시를 살해하는 과정은 짧게 묘사된 것으로 보아 에이미에게 데시의 존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처음부터 데시가 안중에도 없었을지 모른다.

닉에게 하는 다음 대사처럼 에이미에게는 오직 닉만이 중요하다.


에이미; 우리에겐 서로가 있잖아. 다른 건 모두 소음일 뿐이야.


그러므로 에이미는, 창문을 닫아 소음을 없애듯이 가볍게, 데시를 죽이고 닉에게 돌아간다. 편집을 통해 간략하게 처리되어서 ‘가볍게’라고 표현했지만, 살인 자체에 대해서는 에이미도 부담을 가졌던 것 같다.

‘당신은 살인자야. 사람을 죽였어.’라고 닉이 몰아붙이자 에이미는 “난 전사야. 당신에게 돌아오려고 싸웠어.”라고 항변한다.

그 이후에도 떠나겠다고 계속 투덜대는 닉에게 “당신을 위해 살인을 했어. 누가 또 이 말을 할 수 있지?”라고 말하며 생색을 낸다.

그런데 에이미는, 닉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왜 닉을 포기하지 않는가?


영화의 맥락을 따져봤을 때, 데시의 별장에서 닉의 TV 인터뷰를 본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게 확실하다. 그 때 에이미는 닉의 태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닉은 TV를 통해 에이미에게 사과와 반성을 하고 앞으로 잘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어서 돌아와서 자신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간절한 부탁이다. 그리고 인터뷰 마지막, 내가 결정적 장면으로 제시하는 그 장면이 나온다.


닉; 에이미! 당신을 사랑해. 당신은 내가 아는 최고의 여자야. 헛간에 가서, 내가 당신에게 한 잘못을 깨달았어. 돌아온다면, 내가 약속할게. 평생 당신에게 보상하며 살 거야. 내가 되겠다고 약속한 남자가 될게. 당신을 사랑해. 집에 돌아와 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닉은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는데, 이건 에이미와 닉 만의 은밀한 신호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나 데이트를 할 때 에이미는 닉의 턱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갈라진 턱 때문에, 악당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자 닉은 두 손가락으로 턱의 갈라진 곳을 가리면서 “100% 진실이야.”라고 말한다.

이후 이 동작은 자신의 진심을 표현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여기가 미묘한 지점이다. 닉이 손가락으로 턱을 가리며, 다시 말해서 ‘100% 진실로’ 사랑한다고 공언을 했지만 그건 명백히 거짓말이었고 연기였다.

TV를 보는 대중들은 믿었겠지만, 닉과 에이미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에이미는 그 말을 듣자 돌아갈 결심을 하고 데시를 죽이고 닉에게 돌아갔을까?


닉; 좋아. 이제 연기 그만해.

에이미; 연기가 아냐. TV 속의 당신은 완벽했어. 그 ‘닉’이 내가 사랑에 빠졌던 닉이야.

닉; 당신이 듣고 싶어 할 말만 한 것뿐이야.

에이미; 당신은 그토록 날 잘 알고, 배우자로서 날 이해하는 거야.


닉 스스로가 연기였다고 실토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이미는 닉이 ‘완벽했다’고 말한다.

여기에 두 사람의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닉에게 연기란 자신의 진심을 속이는 거짓이고 나쁜 것이다. 곤경에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없이 연기를 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이미에게 연기는 거짓이고 나쁜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것을 흉내내고 따라 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그것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만해야 할 것이 아니라 더욱 열심히, 치열하게 싸워나가야 할 핵심 방편이다.


‘위선(僞善)’이라는 말이 있다. 선한 척 위장한다는 뜻으로 상대를 비난할 때 흔히 쓰이는데, 닉이 에이미를 보는 태도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자. ‘착한 척’이 과연 나쁜 짓인가? 말 그대로 착한 척이란 ‘내 마음속에 나쁜 것이 있는데, 그걸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착한 것처럼 위장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런 위선이 나쁜 거라면, 내 마음 속의 악을 그대로 보여주고 행하는 것이 선한 것인가? 나의 속마음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그것을 내버려두고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 더 나은 행동 아닌가? 연기로라도 위선을 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선함에 도달하려는 자세가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 아닌가?


돈키호테가 기사도의 이상을 실천하면서 세상과 갈등을 겪듯이, 에이미는 자신의 뜻을 연기하면서 자기 식의 세상을 확보해 나간다. 그리고 그 단단한 출발점이 바로 배우자이고 동지인 닉이다. 닉만 있다면 다른 것은 모두 소음에 불과하다.


에이미; 난 당신을 해치지 않아. 하지만 당신은 참여해야 돼. 자기 역할을 해야 돼.

(턱을 가리는 닉. 에이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방을 나간다.)


‘내가 세상이다.’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이들(돈키호테와 에이미)의 태도는 ‘내가 부처다’라고 믿는 불교 승려와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불교 승려가 완전히 ‘나’에 집중하고 객관의 세계를 ‘무(無)’라고 인식하는 반면, 에이미와 돈키호테는 나의 세계를 객관적 세계 속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출발이 돈키호테에게는 산초이고, 에이미에게는 닉이다. 닉만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소음에 불과하다는 말은 닉이 있어야 에이미의 세계가 완전해진다는 말이고, 그래서 에이미는 닉에게 ‘자기 역할을 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독특한 서구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개인’보다는 ‘짝’을 중요시한다. 에이미-닉, 닉-여동생 마고, 여형사-젊은 남형사, 에이미 엄마-아빠, 에이미 폭행 커플 등 중요한 인물들이 모두 커플로 등장한다.

다양한 관계 중에서 에이미와 닉의 부부관계가 모든 사회적 관계의 으뜸이 된다는 점에서 <나를 찾아줘>의 보수적 스탠스를 엿볼 수 있다. 타고난 관계(닉과 마고의 쌍둥이 관계)를 이겨내고 에이미와 닉의 계약적 관계가 승리했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지만, 대부분 이성 간의 커플만 인정될 뿐 동성 간이나 다양한 연령간의 연대가 제거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돈키호테>가 <나를 찾아줘>보다 좀 더 열린 지향점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내가 세계다. 옛날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가 했던 “내가 곧 국가다.”라는 말도 그런 확신의 표시이다.

우리는 그 말의 부정적인 해석을 무수히 들어왔다. 내가 세계라는, 내가 국가라는 사고방식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세계라는 말의, 내가 국가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 <나를 찾아줘>는 ‘내가 세계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말을 실천하는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세계다’라는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제발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다’라는 말만이라도 믿어주시기를. 이 세상이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세상임을 억지로라도 기억하시기를.

그리하여 작은 것부터라도 나를 위해 행동하고, 나에 의해 결정되고,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연습을 하시기를.


그러다 보면 작게 문제가 생기고 작게 싸우게 되고 때로는 커다란 갈등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일찌감치 싸우는 법을 배우고, 내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그 과정에서 나의 길이 옳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늦으면 늦을수록 싸움은 커지고 문제는 복잡해진다.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는 너무 늦게 싸움을 시작했다. <나를 찾아줘>가 우리에게 중요한 영화인 이유는 하루라도 빨리 나를 찾는 여정을 출발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The sooner, the better! 바로 지금이 주인공의 연기를 시작해야 할 때다! 내가 주인공임을 자주 잊어버리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기억하고 나의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 불퇴전의 각오로 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나를 찾아줘>는 그렇게 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낸 어느 전사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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