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 -영화 <로건>

by 천하태평


영화 <로건> (감독 제임스 맨골드. 2017년. 미국)


나는 사실 히어로물이나 애니메이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도 대중적인 오락영화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터미네이터 2>(제임스 카메론 감독. 1991년. 미국)을 보기 전까지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iMDb에서 역대 영화 평점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쇼생크 탈출>도 최근에 고등학교 시나리오 교과서를 쓰기 위해서 처음 봤을 정도니, 그 편식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말하기도 창피할 정도다. 어렸을 때 다들 열심히 보았다는 <로봇 태권브이>나 <달려라 하니> 같은 TV 애니메이션도 나는 본 기억이 없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TV 애니메이션이 있다. 유명한 작품이 아니라 요즘 세대는 거의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요괴인간>이라고 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과학실험 중에 실수로 잘못 만들어진 요괴인간들이 떠돌아다니며 겪게 되는 수난을 다룬 시리즈인데, 나쁜 사람들을 물리치며 다니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세부적인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초능력을 가진 그 요괴인간들의 끊임없는 갈망, 작품이 끝날 때마다 절규하듯 내뱉던 한마디 “나도 사람이 되고 싶다!”는 한마디 외침이다. 사람이 되고 싶지만 사림이 될 수 없는 그 비극적 운명의 요괴인간들, 그들의 한 맺힌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요즘은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대세다. 이름을 대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또 사라진다.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가 각자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 화려한 그들만의 리그를 벌인다. 이제는 지구의 평화를 넘어서 전 우주의 안전을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철학적 방대함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다. 나 같은 평범한 소시민은 그런 전 우주적 시각을 가질 수 없으니 그 세계가 실감 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냥 가볍게 즐기자면 가능한 일이겠으나, 그런 가벼운 즐김에 익숙지 못한 나로서는 그것도 어색하고 낯설다. 구식 사람이라, 어느 정도 나 자신과 연결되는 끈이 있어야 심리적 안정과 공감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엑스맨’은 나의 마음을 건드리는 거의 유일한 히어로 캐릭터이다. 엑스맨 중에서도 특히 울버린...

울버린이 화를 내고, 그의 손등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솟아 나올 때마다 나는 그 손톱이 내 가슴에 박히는 것처럼 아픔을 느낀다.

그것은 슬픔을 동반하는 아픔이다. 울버린의 손톱을 보면 <요괴인간>에서 요괴인간이 ‘나도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탄하던 그 슬픔이 느껴진다. 그건 한편으로 축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주의 표상이다.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어도 결코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저주받은 인간의 확실한 증거...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태어난 경우도 있고 후천적으로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결코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사람들.

모두들 센터에 서고 싶어 할 때도 절대로 그럴 생각이 없는 사람들. 아무리 봄날 햇빛이 좋아도 반드시 그늘진 곳으로만 다니고, 그것도 후드티 모자를 깊이 눌러써야 겨우 안심이 되는 사람들.

남들이 멋있다는 곳에는 절대로 안 가고 재미있다는 영화나 드라마도 볼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 정해진 길이 아니라 힘들어도 나의 길을 가고 싶은 사람들. 재미있는 얘기를 들어도 웃어지지가 않고, 아프다고 말하고 싶어도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사람들. 모두 넓고 밝은 곳을 볼 때 좁고 어두운 구석에 더 눈이 가는 사람들.

소수자 약자 고난 받는 자들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삐딱하다’는 비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묵묵히 그 주홍글씨를 문신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

‘엑스맨’은 그런 평범할 수 없는 사람들의 대변자이고 대속자이다. 울버린, 영화 <로건>의 주인공 제임스 로건 하울렛(휴 잭맨이 연기)은 그렇게 저주받은 영혼들의 대속자 ‘예수’가 된다.


혹시 울버린을 ‘저주받은 영혼’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불만인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 상세하게 설명을 해보자.

다음은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오는 ‘울버린’ 관련 설명이다.


대개 마블 유니버스의 히어로들은 어떤 특별한 계기를 통해 초능력을 얻는다. 스파이더맨은 방사능 거미에 물렸고, 헐크는 감마 폭탄의 폭발로 초능력을 얻었다.

그러나, 뮤턴트라는 존재들은 태어날 때부터 초능력을 갖고 태어나며 개인별로 가진 능력이 다 다르다. 어떤 이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어떤 이는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데, 이런 능력은 인간들의 눈에는 두려움이자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울버린은 뮤턴트로 태어났으며, 동시에 과학기술에 의해 지상에서 가장 강한 금속인 아다만티움을 이식받은 슈퍼 솔저다.


그가 가진 여러 능력 가운데 첫째는 회복 능력이다. 칼이나 총에 입은 상처는 물론 기차에 깔려 죽거나 온몸의 살이 불에 타 없어져도 재생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부상과 죽음의 고통은 보통 인간과 똑같이 느낀다.

강력한 회복 능력 덕분에 그의 신체는 노화하지 않은 채로 100년 이상을 살고 있다. 또한 강한 회복 능력 덕분에 웬만한 약물이나 독극물에도 잘 중독되지 않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주량도 회복 능력 덕분이다.


둘째 웨폰 엑스. 웨폰 엑스는 슈퍼 솔저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캐나다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다.

웨폰 엑스는 대상자의 몸에 아다만티움 금속을 이식하는 실험을 했고, 울버린은 타고난 뮤턴트의 회복 능력 덕분에 이 위험한 실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다만티움 이식으로 인해 울버린의 뼈는 그 무엇으로도 부러뜨릴 수 없는 단단함을 갖게 되었다.


셋째 아다만티움 클로.

손등에서 나오는 클로는 본래는 뼈였다. 클로는 처음에는 그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위험한 상황일 경우에 손등에서 튀어나왔는데, 수련을 거친 끝에 나중에는 클로를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클로는 아다만티움으로 되어 있어서 그 무엇으로도 부러뜨릴 수 없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심지어 헬기 건 탱크 건 다 잘라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다. 클로가 손등에서 나올 때, 혹은 클로로 무언가를 찌르거나 벨 때 나오는 ‘스닉트(Snikt)’라는 의성어는 울버린을 대표하는 의성으로 쓰인다.


넷째는 동물적 감각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인체의 모든 감각이 동물적인 수준으로 예민하기 때문에, 위험 간파 속도나 적을 추적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일단 울버린이 꼬리에 붙으면 그 누구도 그를 피할 수 없다.


다섯째, 그는 군사 전문가이자 전략가이며, 스파이, 무술 고수다. 울버린은 양차 대전과 베트남전까지 참전한 군인이며, CIA와 쉴드 등에 소속되어 하이드라와 핸드 등의 테러 조직에 잠입 요원으로 활약했다.

따라서 일본어, 러시아어, 중국어, 사이엔어, 라코타어, 스페인어, 불어, 타이어, 베트남어 등 세계 각국 각 부족들의 언어에 능통함은 물론 세계 각지의 무술에 통달한 무술 고수로, 특별히 검술에 조예가 깊은 뛰어난 사무라이다.

무식하게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할 듯이 보이지만 각종 기계와 첨단 기술에도 능통하여 컴퓨터와 폭발물 등의 전문가이자 자동차, 오토바이, 헬기 등 각종 탈것을 능숙하게 조종하는 파일럿이기도 하다.

엑스맨의 팀원으로 활약할 때는 엑스맨의 전투기인 엑스 플레인의 조종사 역할도 했으며, 평상시에는 오토바이를 가장 애용한다. 그 능력은 뮤턴트부터 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기도 하고, 사연도 많지만, 그가 최강의 슈퍼히어로로 손꼽히는 이유는 무척 단순하다.


울버린은 그 어떤 끔찍한 짓을 당한다 할지도 내일 아침이 되면 다시 멀쩡하게 일어나서 하던 일을 계속하는 인물이다. 한번 삶을 망쳐버려도 그것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금방 잊어버리고 그 위에 새 삶을 쌓아 올리는 뚝심. 무엇으로 묶어둘 수 없는 자유로움과 거칠 것이 없는 야성. 거기다 언제나 최고를 자신하는 배짱과 자신감까지.

이런 강인한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서의 모습이 울버린의 진짜 능력이자 매력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울버린 - 초능력에 과학기술이 더해진 불사의 히어로 (슈퍼히 어로 대백과 이규원. 시공사)

제법 긴 원문을 편집 없이 그대로 인용한 이유는 이런 시각이 엑스맨-울버린을 보는 일반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최강의 슈퍼히어로’이고 ‘강인한 사나이 중의 사나이’인 그는, 게다가, 불사의 치유능력까지 가졌다.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고도 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울버린을 ‘저주받은 영혼’의 대표적인 인물인 것처럼 말했고, 위에 인용한 많은 장점들을 똑같이 그러한 저주의 증거로 제시하려고 한다.

대체로 모든 장점은, 그것이 어느 정도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되려 자신을 해치는 강력한 무기로 되돌아온다. 옛말 그대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장점과 단점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붙어있고, 선-악 이익-손해 천국-지옥 등의 대척되는 개념들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돈 버는 재주가 엄청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무엇이든지 하기만 하면 돈이 된다.

때문에 일찍부터 많은 돈을 벌었고, 유명해졌고, 번 돈으로 좋은 일도 많이 했다. 주위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기꺼이 도와주었고,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도움을 청해도 망설임 없이 손을 잡아주었다. 타고난 재주이니 모두 돈을 벌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항상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하는 법이다. 돈을 버는 사람이 있으면 손해 보는 사람이 있고, 그들은 그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원망하고 항의한다. 그는 점점 회의를 느낀다. 자신의 돈 버는 재주가 이제는 필요 없고, 오히려 장애가 된다. 욕망에 가득 찬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고, 그의 삶은 난장판이 된다...

이럴 때 그의 돈 버는 재주는 축복인가 재앙인가...?


물론 이것은 과장된 비유다. 굳이 과장된 비유를 한 까닭은 소위 슈퍼맨 히어로들 역시 그러한 과장된 표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렇게 많이 가진 것의 긍정적 양상을 그려내지만 드물게 <로건>처럼 그것의 고통과 슬픔을 그리는 영화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것이 <로건>의 매력이고 장점이다.


내가 슈퍼 히어로 무비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영화들이 관객을 현혹시켜 현실로부터 유리시킨다고 생각한다. 그 히어로들의 초능력이 비현실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그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가능한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벌어지는 과정은 우리의 생각 이상이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수천수만 배 수억 배 더 크고 엄청나고 대단한 일들이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대다수 관객들이 슈퍼 히어로들의 그런 대단한 능력을 ‘나의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의 현실 너머의 어떤 것’ ‘내가 가질 수 없는 대단한 것’ ‘나보다 뛰어난 어떤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냥 재미 삼아 보는 것 같지만 우리의 내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열등화가 진행되고, 좋은 것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건 거짓말이야’ 하는 생각의 이면에 ‘나는 저런 능력이 없는 열등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같이 묻어서 지나간다. 그런 열등감은 나로 하여금 세상의 질서에 복종하게 만들고, 힘과 권력과 능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만든다.

<로건> 같은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하는 점 중의 하나는, 그러한 모든 종류의 뛰어남은 사실은 당사자에게 재앙이고 저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모자라는 자에게는 채우려는 희망이 있지만, 넘치는 자에게는 덜어낼 수 없는 절망이 따라다닌다. 보통보다 부족한 사람은 노력해서 보통이 되는 기쁨을 맛보지만, 보통보다 넘치는 사람은 내 살을 덜어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보통사람의 편안함을 경험할 수 있다.


너무 예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너무 똑똑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너무 돈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너무 빠르게 성공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너무 쉽게 일을 해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너무 **한 모든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그냥 적당하거나 약간 부족한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 보통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적 분위기도 책임이 있다. 각종 매스컴과 예술작품들이 보통사람들을 부추겨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인생의 고뇌를 말하는 대다수 예술영화는 물론이고, 재미로 즐기는 히어로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지구를(더 나아가 우주를) 지키는 것은 그들의 일이고, 보통 사람들은 한마디 비명도 없이 그냥 죽어간다. 그렇게 죽어도 뭐라 할 말 없는 저급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은 유명인사들, 셀러브리티들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점점 불행에 빠진다. 그러면서 유명해져야 할 것 같고, 부자가 되어야 할 것 같고, 슈퍼파워를 가져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현대사회는 이렇게 가짜가 진짜를 현혹하는 사회다.


하지만 평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아는가? 보통사람으로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정작 우리 보통사람들만 모르고 있다.

우리는 그걸 모르도록 끊임없이 최면을 거는 각종 매체와 기존 관습과 도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세뇌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구박당하고 차별받고 소외당하고 소모품 취급받는 부당한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를 우리 삶의 엑스트라로 전락시키려는 극소수 어떤 세력들의 시도가 워낙 집요하고 위력적이기 때문에, 두 눈 부릅뜨고 깨어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시류에 휩쓸려버리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평범한 삶을 부러워하던, 그러나 평범할 수 없는 초능력자 로건이 죽어가는 순간 평범한 감정을 처음 실감하고 “이런 느낌이구나.”하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1832년에 태어나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온 최고의 초능력자가 지극히 평범한 친밀감 -연대감. 가족애-을 처음 느끼고 감격해한다는 게 이해가 가는가?


영화 <로건>은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초능력자가 세상을 자신들의 계획대로 조작하려는 어떤 세력과 싸우다가 죽어가는, 그 과정에서 가족애라는 가장 평범한 인간적 연대감을 깨달아가는 인간회복의 이야기이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살펴보자.


2029년 미국 텍사스. 한동안 돌연변이 소동으로 시끄러웠던 사회가 다시 조용해졌다. ‘모두 잠들었어요. 몽유병, 빙하 감소, 음란물, 오염수, 돌연변이... 전부 연관된 거예요.’라고 라디오 방송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돌연변이가 사라지면서 각종 사회적 문제들도 가라앉은 모양이다.

25년째 단 한 명의 돌연변이도 태어나지 않고 있는 현재, 가장 유명한 뮤턴트의 한 명인 ‘울버린’ 로건은 콜 리무진의 운전사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고급 리무진은 강도들의 표적이 되고, 기능이 퇴화 중인 로건은 그들을 물리치고 몸에 박힌 총알을 빼내는 것도 힘겹다.

그를 알아보고 도와달라고 달라붙는 사람을 떼어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각양각색의 손님들을 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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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로건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한때 그는 불사의 몸이었으나 이제는 재생능력도 많이 약해졌고, 몸속에 이식한 아다만티움의 부작용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리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돌보고 있는, 한때 엑스맨 학교의 교장이었던 ‘프로페서 X’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가 연기) 때문이다. 90이 넘은 나이에 치매에 걸린 찰스는 ‘썬 시크’라고 미리 이름까지 지어놓은 보트에서 여생을 보내는 게 소원이다.

로건은 찰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돈을 번다.


멕시코 여인 가브리엘라가 5만 불을 주겠다고 하면서 로건에게 11살 소녀 로라(다프네 킨이 연기)를 캐나다 근처 노스다코다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다. 이제부터 얘기는 복잡해진다.

로라는 ‘알칼라이 트랜시젠’이라는 회사에서 상업용으로 탄생시킨 뮤턴트였는데, 사업적으로 폐기된 상품을 간호사였던 가브리엘라가 탈출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로라는 제임스 하울렛, 즉 로건의 유전자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로건의 초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로건의 딸이었던 것이다.


이제 조용히 찰스를 돌보며 살려는 로건의 꿈은 깨졌다. 로라와 연관됨으로써 로건은 또다시 처절한 싸움 속으로 빠져든다.

로라를 추적하는 자들은 생명과학 회사 ‘알칼라이 트랜시젠’의 용병 집단 리버스. 리버스의 보안팀장 도널드 피어스(보이드 홀브룩이 연기)는 로라를 비롯한 X-23 프로젝트 뮤턴트들을 소탕하는 게 임무다.

영화의 후반부는 이들의 쫓고 쫓기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주된 내용이다. 영화 자체가 히어로 액션 장르인 만큼 여러 액션 장면이 등장하고, 그 묘사의 내용은 아주 잔인하다. 말로 하면 아주 끔찍한 장면들이 많은데, 세부묘사를 해서 보여주지는 않으므로 생각보다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아도 된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사냥하는 장면이나 곰이 물고기를 낚아채는 장면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히어로 영화로는 드물게 ‘18금’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므로, 잔인한 폭력장면을 싫어하는 관객이라면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봐야 한다.


여기서 깊게 다룰 사항은 아니지만, 사실 영화나 TV 등에서의 폭력장면은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폭력의 묘사는 일상화되어 있고 나날이 그 강도가 높아져 간다. 폭력의 강도에 따라 관람등급이 정해지므로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본질은 폭력의 강도가 아니다. 아주 사소한 강도의 폭력이라고 해도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내 감정이나 생각에 의해 상대를 폭행할 수 있다’는 인식이 심어지는 순간 이미 폭력은 발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인식이 새겨진 이후에는, 설령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정신력으로 자제한 결과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억압이 발생하고 스트레스와 불균형이 따라오게 된다. 폭력이 잠재 의식화한다는 점에서, 특히 문화 생산자들이 좀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처절한 액션의 외피로 둘러싼 영화의 내면은 로건의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시작 당시 로건은 세상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다. 그는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꿈은 오직 하나, 돈을 모아 보트를 사서 ‘썬 씨크’라는 이름을 짓고 바다에서 찰스와 사는 것이다.

그것도 로건 자신의 꿈이 아니라 찰스의 꿈이다. 다시 말해 로건은 꿈이 없었다. 찰스를 돌봐야 하므로, 죽지 못해 살고 있던 중이다.


그러나 로라와 연결되고, 로라를 ‘에덴’이라고 불리는 노스다코다의 어느 곳으로 데려가는 과정에서 변화가 생긴다. 찰스(아버지)- 로건(나)- 로라(자식)로 이어지는 연대가 생기고, 그로 인해 끊어졌던 사회와의 관계가 다시 생겨난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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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로라와의 관계를 부정하던 로건이 결정적인 변화를 겪는 사건이 발생한다. 노스다코다로 가는 도중 우연히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고, 그로 인해 먼슨이라는 흑인 가족의 집에서 묵게 된다.

정상적인 일반 사람의 생활을 처음 경험하는 로건. 찰스는 그런 로건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찰스; 로건, 이런 게 바로 삶이라네. 집, 사랑하는 사람들, 안전한 곳... 잠시 여유를 갖고 그걸 느껴보게.


그러나 로건은 아직 그걸 느낄 겨를이 없다. 그의 삶은 그런 여유를 느낄 수 없이 거칠고 외롭고 급박한 시간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전체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건이 웃는 모습을 본다.

평범한 가족의 저녁 식탁에서 로건은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찰스; 로건. 자네에겐 아직 시간이 있어.

로건; 찰스. 세상이 예전 같지 않아요. 여기 있다간 모두 위험해요. 그리고 에덴이란 곳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 간호사가 만화책에서 본 거예요. 아시겠어요? 진짜가 아니라고요.

찰스; 로라에겐 진짜야... 로라에겐 진짜야.


찰스는 로건이 보통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물론 로건도 그걸 원하긴 하겠지만 그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그래 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로라는 그럴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믿는다. 일반인들과 함께 정상적인 삶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그들 돌연변이들끼리 그들만의 낙원(에덴)을 만들어 살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래세대인 로라는 에덴이 실제 한다고 믿고, 현세대인 로건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울버린> 만화에 나온 상상의 장소라는 것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사실상은 로건이 더 오래 살고 있지만) 구세대 찰스는 에덴의 존재가 ‘로라에겐 진짜’라고 말한다.


찰스는 한때 엑스맨 학교의 교장이기도 했던, 말하자면 뮤턴트들의 대부 같은 인물이다. 염력을 이용하는 그의 초능력도 대단하지만, 세상에 대한 안목과 철학도 뛰어나다.

그런 찰스가 에덴의 존재에 대해 ‘있다’고 말하지 않고 ‘로라에겐 진짜야’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찰스는 에덴이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없다고 생각할까?


나는 찰스가 에덴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문제는 본질이 아니다. 찰스가 에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찰스가 에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로라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찰스; 로라에겐 진짜야... 로라에겐 진짜야.


찰스는 이 말을 반복해서 말한다. 로건이 못 들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강조하기 위해서, 확신을 주기 위해서 다시 한번 반복한다. 이 말을 풀어서 해석해 보자.


찰스; 로건. 너는 에덴이 단지 만화 속에 나오는 가상의 공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렇지 않아.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은 실제 할 가능성이 있어. 우리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니까.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은 현실이 되고,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만큼 그것이 실제 할 가능성은 커지지. 많은 사람이 신을 믿지만, 그 들이 모두 신을 본 건 아니잖아? 실제로 봐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만큼 보이는 거야. 로라는 에덴이 실제로 있다고 믿고, 그런 만큼 로라에게 에덴은 실제로 존재하는 거지.


나는 <로건>에서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가장 영화의 주제가 잘 녹아있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사실 <로건>의 감독 제임스 맨골드가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주제는 따로 있다. 실제로 그 영화의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는 서부극 <셰인>의 대사. 영화의 마지막, 로건의 묘지 앞에서 로라는 <셰인>의 대사를 추도사로 대신한다.


로라; 사람은 본성대로 사는 거야, 조이. 그 틀을 깨트릴 순 없어. 사람을 죽이면 고통 속에 살게 돼. 되돌릴 방법은 없어. 그게 옳든 그르든, 낙인이 되어 지워지지 않지. 이제 어머니한테 가서 괜찮을 거라고 전하렴. 이제 이 계곡에 총성은 없을 거라고.


영화 <셰인>의 이 장면은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미국 영화의 대표적인 장르인 서부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서부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장엄한 순간을 보여준다. 혼돈과 무질서, 탐욕과 열정, 열광과 좌절, 인간의 모든 드라마가 한껏 펼쳐지던 광란과 희열의 순간들...

그 모든 과정이 정리되고 수습되고 안정화되어가는 서부극의 황혼.


솔직히 이건 <로건>의 감독 제임스 맨골드의 ‘오바’다. 과몰입의 결과다. 물론 감독으로서 로건의 죽음을 서부시대의 종언 같은 느낌으로 끝내고 싶어 한 것이 이해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세인이 조이에게 ‘더 이상 총성은 없다’고 선언하듯이, 로건의 죽음도 로라에게 ‘더 이상의 시련은 없다’는 선언이 되는가? 사람을 죽이면 고통 속에서 살게 되는데, 과연 로라의 앞길은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정된 평화가 보장되어 있는가? ‘에덴’을 떠나서 국경을 넘는다고 안락한 삶이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셰인>은 혼돈의 시간이 끝나고 체제가 형성되어 가는 서부시대의 끝을 다루고 있지만, <로건>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끝난 것이 없다. 찰스가 죽고, 로건이 죽고, 다음 세대 로라의 시간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셰인>은 진정한 끝이지만, <로건>은 새로운 시작이다.


‘로라에겐 진짜야.’라는 찰스의 대사로 돌아가 보자. 이 말에서 찰스의 초점은 ‘로라’에게 있다. 에덴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은 다음 문제다.

그러나 로건에게는 에덴의 실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로건에게 에덴은 평화와 안식의 땅이다. 돌연변이 소수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희망의 공간이다. 에덴이 아닌 공간은 지옥 같은 고난의 시간만 제공할 뿐이고, 구태여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그런 곳이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고, 찰스도 그렇게 살았고, 당연히 로라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에덴이 없다’는 사실은 로건에게 이제껏 자신이 견뎌왔던 것보다 훨씬 더한 고통을 준다. 그건 ‘로라에게 미래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찰스는 ‘로라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라에겐 진짜야.’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에덴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에덴이 있다고 생각하는 로라’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시대의 방점이 바뀐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로건은 현재를 생각하지만 찰스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제 ‘로건의 시대’에서 ‘로라의 시대’로 바뀌었다는 선언.


<셰인>에서 ‘이제 어머니한테 가서 괜찮을 거라고 전하렴. 이제 이 계곡에 총성은 없을 거라고.’ 하는 말은 어른들의 것이다. ‘총성이 없을 것’이라고 멋있게 말하는 셰인은 어른이고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도 어머니, 즉 어른이다. 어린 조이는 그 중요한 사실의 전달자일 뿐이다. 조이는 아직 주인공이 아니며, 아직은 그의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로라에겐 진짜야’라는 말은 ‘로라가 이 시대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어른들의 시대가 가고, 이제 아이들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다.

그 시대가 어떤지는 찰스도 모른다. 에덴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에덴은 있지만 쫓겨날 수도 있다. 지금보다 더 좋을 수도 있고 어쩌면 더 나쁠 수도 있다.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젠 로라의 시대라는 것이다.

<로건>이 <셰인>보다 좋은 영화는 아니겠지만 내가 <로건>을, 특히 찰스의 이 대사를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진취성 때문이다. 생각의 무게중심이 기성세대가 아니라 새로운 세대로 옮겨진 진취성, 그 진리...

세상은 어차피 젊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하여 로건은 죽는다.

그렇게 죽고 싶어도 불사의 회복능력으로 되살아나던 그가 197살의 나이로 죽어 무덤에 묻혔다. 로라의 추도사처럼, 이제 그의 인생에 더 이상의 총소리는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쉭!’ 소리를 내며 클로를 뽑아낼 필요도 없다.

이제 로라는 떠나야 한다. 배낭을 메고, 국경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려던 로라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무덤 앞에 앉아 두 손으로 나무 십자가를 잡는 로라. 십자가를 뽑더니 삐딱하게 X자로 다시 꽂는다.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고 죽어간 예수처럼, 로건도 엑스맨들의 원죄를 대속했다는 뜻일까? 셰인이 조이에게 말한 것처럼, 돌연변이들에게도 이제 더 이상의 총성은 없을 거라는 뜻일까? 아니면 십자가를 X자로 삐딱하게 박아놓음으로써 엑스맨들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로건을 대신해서 로라가 세상에 보내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삐딱한 사람들에 대한 격려, 억압받는 소수자들에 대한 연대, 저주받은 영혼들에 대한 위로의 신호...


그리고 무엇보다 하고 싶은 말,

“굿바이 로건! 이제 더 이상 남을 해치는 꿈을 꾸지 않아도 됩니다. 부디 편히 잠드세요.”



*** 결정적 장면 ***


‘에덴’을 향해 가는 도중 먼슨 씨 집에서 우연히 지내게 되는 하룻밤. 로건 일행은 먼슨 가족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며 처음으로 보통사람들의 삶을 맛본다.

찰스는 로건에게 ‘이런 게 바로 삶’이라고 말하고, 로라는 먼슨 아들에게 아이팟을 건네받아 처음으로 ‘노래’라는 것을 들어본다.

로건이 유일하게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도 이 날 저녁식사에서 찰스의 농담을 들었을 때이다.


그러나 이것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 뿐이다. 농업회사의 잭슨 일당이 먼슨과 갈등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돌연 ‘알칼라이 트랜시젠’의 새로운 병기 X-24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급격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로건의 유전자로 만들어져서 로건과 똑같이 생긴 X-24는 찰스를 죽이고 로라를 납치해 나가다가 로건과 싸우게 된다. 신기능 로봇답게, X-24는 로건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파워를 선보인다.

그 싸움의 마지막 부분, 죽어가던 먼슨이 트럭으로 X-24를 눌러버린 후 화력 좋은 장총으로 (일시적이나마) 죽여 버린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하려는 결정적 장면이 시작된다.

X-24를 죽인 먼슨은 다시 총구를 로건에게 겨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로건. 먼슨은 복잡한 시선으로 로건을 본다.

비롯 하룻밤이지만 좋은 관계를 맺어왔던 두 사람. 찰스의 초능력으로 먼슨은 가축을 안전하게 수습할 수 있었고, 그 보답으로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즐거운 시간을 나눴다.

그리고 선뜻 싸움을 자청하여 자신의 농장을 빼앗으려는 잭슨 일당을 물리쳐준 로건.

분명히 할아버지 찰스도 좋은 사람이고, 아버지 로건도 좋은 사람이고, 딸인 로라도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 벌어진 결과는 어떠한가?

이런저런 사소한 갈등은 있지만 화목하게 지내던 먼슨 가족은 파탄이 나 버렸다. 먼슨은 아내와 아들을 잃었고, 자신도 곧 죽을 것을 안다. 집은 난장판이 되었고, 찰스는 죽고 로라는 붙잡혔다. 로건 일행을 뒤쫓는데 이용당하던 칼리반은 ‘빛을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자폭해 죽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이 상황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 비극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분명한 것은 로건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먼슨도 그것을 안다. 로건도 희생자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먼슨이 로건에게 총구를 겨눈 이 순간, 먼슨은 방아쇠를 당겨서는 안 된다. 방아쇠를 당긴다는 것은 로건이 희생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의미이다. 자신 같은 보통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파괴자...


그리하여 먼슨은 방아쇠를 당긴다. 다행히 총알이 없어서 불발이 되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설령 총알이 있어서 로건을 쏘았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동안 로건의 몸에 총알이 박힌 것이 한두 번인가? 아무리 치유능력이 퇴화했다고 해도 로건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전보다 더 힘들기는 하겠지만 애써 총알을 빼내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먼슨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점이다. 먼슨이 로건을 쏘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사실 이 장면이 제일 슬펐다.

찰스가 죽는 것도 로건이 죽는 것도 슬프지 않았다. 로건이 ‘이런 기분이었구나’라고 말할 때도 슬프지 않았다.

그러나 먼슨이 로건에게 총을 겨누는 이 순간은 슬프다. 처음 볼 때도 슬프긴 했지만, 이 글을 쓰려고 다시 보면서 더욱 아련하게 아픔이 밀려오는 게 느껴진다.

이 장면은 일반인과 돌연변이, 다수자와 소수자, 보통사람과 특별한 사람들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간극 같은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잘잘못을 떠나, 함께 할 수 없다는 인식.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너희들이 있으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생각. 너희들은 결국 나쁜 일을 유발하는 악의 종자이므로 없어져야 한다는 믿음.


로건을 겨눈 먼슨의 총구는 그런 생각들을 대변한다. 달리 얘기하면 일반 관객들에게 그런 생각들을 심어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먼슨은 로건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기지 말았어야 한다. 영화 <로건>을 만든 감독 제임스 맨골드는 단순히 영화를 더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로건에게 총을 쏘도록 설정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선택이다.


먼슨이 로건을 겨눈 총구를 당겼을 때 ‘철컥!’하고 불발되는 소리가 난다. 먼슨은 바로 쓰러지고, 카메라는 가쁜 숨을 내쉬는 로건에게 살짝 가까이 간다.

이때 로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살아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숨을 헐떡이는 로건이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역시 우리는 영원히 저주받은 존재야.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지.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저주받은 존재. 이제 다시는 세상을 믿지 않으리라. 다시는 세상 사람들과 보통의 삶을 그리워하지 않겠다. 가자 에덴으로! 실제로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로라가 살 수 있는 땅은 그곳뿐이다!’


이 글의 처음 부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영화 <로건>은 소수자들의 정서와 입장을 대변하는 드문 영화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이 모두 돌연변이 소수자들이고, 영화는 그들의 아픔과 꿈과 희망을 다루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데 왜 결정적인 순간에 영화의 기본 정서를 배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먼슨이 만약 로건을 쏘지 않는 선택을 했다면 제작자들은 얼마나 많은 관객을 손해 봤을까? 먼슨이 로건을 쏘지 않으면 그것이 작품의 완성도에 치명적인 해를 미치는가? 왜 요즘 영화들은 한 번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와 신뢰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이야기의 논리를 너무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정말로 좀 더 과장시켜 보자.

경찰인 아버지가 있다. 어찌어찌하여 살인사건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살인자는 다름 아닌 그의 딸이었다. 딸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후 도망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따라가면서 권총을 빼들었다. 막다른 골목. 아버지는 총을 겨눈 채 다가가고, 딸은 담을 타고 올라 달아나려 한다.

이 순간, 아버지는 딸에게 총을 쏴야 하는가, 쏘지 말아야 하는가?


나는 어떤 경우라도 아버지가 딸을 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슨도 로건을 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인간의,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요즘 시대는, 요즘의 영화들은 별로 예의가 없다. 나는 그게 서글프다.

먼슨이 쓰러진 후 보이는 로건의 눈빛은, 안도의 눈빛이 아니라 그런 서글픔의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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