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소문들의 세계 -영화 <곡성>

by 천하태평


떠도는 소문들의 세계;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 <곡성> (감독 나홍진. 2016년. 한국)


2014년 4월 16일. 전날 인천을 출발하여 제주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다. 탑승자 476명 가운데 172명이 생존했고, 300여명이 넘는 사망 실종자가 발생했다. 특히 세월호에는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이 탑승, 어린 학생들의 패해가 컸다.


(이 사고는) 대한민국 수학여행 관련사고 중 역대 최대의 참사이면서 최악의 참사로 관련 사망자 수 1위를 기록했다. 이 명박 정부의 2008년 선박연령 규제완화로 일본에서는 운항이 금지된 노후선박인 세월호의 수입운항, 사주인 유 병언 일가의 부도덕한 경영,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선박 관리와 안전교육, 이러한 현실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승무원들, 이준석 선장과 항해사의 판단 착오와 늑장 대응, 그리고 그로 인한 시간 지체, “가만히 있으라. 라는 비상식적 안내 방송, 그리고 정부와 관료의 대처 등 잘못될 수 있는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던 사고였다.

-<나무 위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참조


그 깊은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날선 분노는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뼈아픈 상처는 어떤 위로로도 나아지지 않았다. 치유가 불가능한, 절망적인 심리상태에 모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차에 2014년 7월 30일, 영화 <명량>이 개봉했다. 개봉하자마자 한국영화사상 최단 흥행기록을 갈아치우며 질주한 <명량>은 개봉 12일반에 1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고, 최종 17,615,057명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역대 최고 관객 수를 기록하였다. 대한민국 인구를 5천만 정도로 볼 때, 3명중 1명 이상이 영화 <명량>을 봤다는 뜻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어차피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다. 어떤 예술작품이건 당시의 사회상황을 반영한다. 작가가 당대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와 상관없이, 그의 모든 행위는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분위기를 내포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에 빠져있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말은 ‘지못미’라는 단어로 상용화되어 있었고, 공황장애 비슷한 죽음에의 공포가 미세먼지처럼 대기를 가득 채웠다.

‘차라리 같이 죽었으면 덜 미안했을 텐데’ 하는 죽음에의 유혹과, ‘어쩌면 내 생명도 전혀 보호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죽음에의 공포가 공존했다. 영화 <명량>은 그 애국적 외피와 상관없이 죽음, 그것도 집단 죽음이라는 사회적 무의식에 불을 댕겼다.


<명량>은 죽음에 관한 영화다. 집단 죽음에 관한 영화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다. 세월호 침몰이라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고 이후 1700만이 넘는, 나올 수 없는 대박영화가 탄생한 것은 예술의 힘을 증명하는 하나의 예라고 할 만하다. 가끔 예술작품은 시대의 뇌관을 건드린다.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무수한 소문이 떠돌았다. 세월호 자체에 대한 소문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권력서열 넘버3’라느니 하는 등의 해괴한 내용도 많았다.

사회 전체에 불온한 공기가 가득했다. 수많은 말들이 넘실거렸고, 어떤 말에 대해서도 옳다 그르다 얘기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월호는 우리로부터 ‘상식’과 ‘믿음’을 침몰시켰다.




그리고 2016년 5월 12일, 영화 <곡성>이 개봉했다. ‘오컬트’라는 특수한 장르영화였고 극적 완성도에 대해 찬반양론이 분분했지만 687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흥행에 성공했다고 말했지만, 설령 흥행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곡성>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시대적 무의식 폭탄에 불을 붙이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최소한 당대의 서늘하고 불길하고 오리무중이고 답답한 공기를 충분히 느끼게 한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증명할 수 없는 수많은 말들이 떠도는 영화 속 상황은 세월호 이후 우리나라의 그것과 똑같이 닮아있다.

그리고 그해 7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그 불온한 공기는 폭탄이 된다. 그리고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 파면시키는 촛불혁명으로 폭발한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곡성> 메인 포스터의 카피였던 이 말은 오리무중처럼 보이는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이다. 아울러 ‘이제부터 당신을 현혹시킬 테니 현혹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하는 감독의 경고일 수도 있다.

사방에 널려있는 미끼를 무는 순간 우리는 이야기의 덫에 걸려든다. 정신 차리고, 최대한 자신을 보호하면서 영화를 봐야 한다. ‘뭣이 중헌지’ 살펴가면서,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떠도는 소문은 사실이 되고, 의심은 현실이 된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복음 24장 37~39절)


어두운 화면에 위와 같은 자막이 보이면서 영화 <곡성>은 시작한다. 알다시피 이 자막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난 장면을 말하고 있다. 하늘나라에 오르기 전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가 자신의 몸을 ‘보고’ ‘만져보라’고 한다는 점이다. 흔히 알고 있듯이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몸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과 죽음의 구분이, 영혼과 몸의 경계가, 있음과 없음의 차이가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무엇을 의심하는 것인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이것을 의심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을 의심하는 우리 자신을 의심해야 하는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감각적 행위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곡성>은 그 체험의 과정이 맞는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소문과 사실이, 꿈과 현실이 서로 넘나든다.

드라마의 맥락은 관객을 현혹시키고, 믿어지지 않는 현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면서 미끼를 던진다. 드라마 자체의 신뢰도를 훼손하면서까지, 감독은 관객의 믿음을 흔들려고 노력한다. 관객을 ‘의심의 상태’로, 부활한 예수를 대면한 제자들의 상태로 남겨두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믿음에 대한 질문을 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의 주체인 나의 판단은 믿을만한 것인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묻는 것이다. <곡성>은 ‘질문의 영화’다.


물론 <곡성>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간편하고 쉽다. 보고 만져보라는 예수의 말을 믿고 그대로 따르듯 영화의 흐름을 따르면 편하게 이해가 가능하다. 선과 악,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 믿음과 불신의 대립구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은 친절하게 다양한 기독교적 요소들을 배치해 두고 있다. 심지어 결말부의 동굴장면에서는 노골적으로 부활한 예수의 상황을 재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알아야할 것은 그것이 감독의 미끼라는 사실이다. 감독은 미끼를 던진 것이고, 관객은 그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태도이고 잘못된 것은 없다. 다만 한 가지, 미끼를 문 자는 죽을 것이고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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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단순한 살인이 아니다. 피살자는 난도질당하고, 살해자는 여기저기 붉은 반점을 한 채 정신이 나가있다.

살인범의 집에 가보니 촛불이 켜진 이상한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집 기둥에는 시든 금어초 꽃이 걸려있다.

“씨벌 새끼, 이거... 이 새끼가 도대체 뭐 허는 새끼여?” 라는 형사의 말대로,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냥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주인공 종구(곽도원이 연기)의 직업은 경찰이다. 이상한 일들에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금어초가 보이는 것도 종구의 직업과 연관이 있다. 금어초는 시들면 해골모양이 나타난다고 해서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품이지만, 그 꽃말이 ‘탐욕, 주제넘은 참견’이라고 한다. 참견을 하는 게 직업인데 그걸 주제넘다고, 탐욕이라고 한다. 그의 앞날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계속되는 사건을 두고 소문이 무성하다. ‘먹으면 헥가닥 도는’ ‘요상한’ 버섯 때문이라고도 하고, 최근 들어온 일본인 남자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영화의 처음에서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강가에 앉아 낚시질을 하는 모습.

그가 낚싯바늘에 미끼를 꽂는 게 영화의 시작이었고, 살인사건 묘사 후 제목 ‘곡성’이 나온 다음 본격적인 시작도 그 일본인에 대한 소문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산 속을 벌거벗고 다니면서, 짐승을 잡아 생살을 뜯어먹고 산다는 소문...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믄 뭔가 이유가 있는 거시여.”


후배경찰 성복의 말이 맞다. 모든 소문에는 이유가 있다.

소문이란 떠도는 말이다.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불확실한 이야기다. 믿을 수 없을 때 소문은 무성해지고, 사회의 공기는 불안감으로 채워진다. 작은 일에도 댓글처럼 수많은 소문이 달리고, 그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재생산되고 커져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무엇이 시작인지 끝인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태로 빠져든다.

그렇게 우리의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신들의 시간이 도래한다. 각종 신들이 등장하여 신나는 향연을 벌인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우리는 미끼를 물었고, 현혹이 되어버린 것을.


무성한 소문은 불안을 부르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고 잠식된 영혼은 육체를 훼손시킨다.

애써 소문을 무시하던 종구는 딸 효진(김환희가 연기)이 이상한 증상을 보이자 점차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하기 시작한다.

몸에 붉은 반점이 돋고 비정상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등 효진의 이상증세가 심해진다. 마음이 급해진 종구가 성복과 통역 양이삼을 데리고 소문의 진원지 일본인을 찾아간다.

그리고 집에서 보게 되는 죽은 자의 사진들과 산 자들의 사진. 불길한 느낌의 제단이 보여지면서 영화가 본격적인 오컬트 계열의 영화임이 확실히 드러난다.


오컬트(Occult)란 통상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 · 초자연적 현상, 또는 그에 대한 지식을 뜻한다. 오컬트 영화는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나 악마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 철학자인 그에게는 정당한 말이지만, 그 순간을 말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다. 솔직한 태도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절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오컬트 영화로는 1968년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한 <악마의 씨>(Rosemary's Baby)와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The Exorcist, 1973) 등이 있다.


침묵할 수 없는 것은 예술가뿐만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파괴되어가는 딸을 가진 아빠 역시 무언가 행동을 해야만 한다. 딸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뎅이가 쥐좆만 헌데다 성격이 가시내 같은’(파출소장의 말) 종구는 용감해진다. 무서운 일본인에게 찾아가 행패를 부리며 ‘3일 안에 떠나라’고 협박을 하고, 험상궂은 검은 개를 때려잡는 놀라운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일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뜻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원치 않는 일들이 자꾸 우리에게 닥친다.

그럴 때 우리가 의지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하나는 과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 즉 신이다.


종구도 그렇게 한다.

일단 장모의 뜻대로 무당을 부르는데, 효진이 무당의 굿을 견디지 못하므로 중단시킨다.

과학의 힘을 믿고 병원에 가 보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상한 버섯으로 인한 증상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 별 소득이 없다.

종교의 힘을 빌기 위해 성당을 찾아가지만 신부는 ‘소문을 믿지 말라. 직접 보았느냐?’면서 종구를 비난하고 ‘병원에 도로 가셔갖고 의사를 믿고 따님을 맽기라. 교회에서는 해드릴 게 없다’고 충고한다.


이렇게 되면 종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직접 해결하는 것이다.

종구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일본인을 죽이러 간다. 일본인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고, 일본인을 죽이는 것만이 효진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종 농기구를 챙겨 찾아간 일본인 집.

그러나 일본인은 도망가서 없고, 난데없이 죽었던 박춘배가 좀비로 살아서 덤벼든다.

한바탕 소동 끝에 좀비를 잡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종구 일행.

그때 산비탈에서 떨어진 일본인이 종구 일행의 차에 치게 되고, 종구는 일본인의 시체를 산 아래로 굴려버린다.

그리고 병원으로 간 종구는 깨어난 효진에게 ‘이제 괜찮냐’고 묻고 효진은 울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얼싸안고 우는 종구와 효진. 악몽이 끝난 것이다.


일반적인 오컬트 영화라면 여기서 끝나야 한다. 초자연적 악의 존재는 밝히지 못했지만 드러나는 증상은 일단 해결되었고, 나마지는 미해결로 남겨놓는다. 미지의 영역,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묘사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곡성>은, 아니 <곡성>의 감독 나홍진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모르는 세계,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로 작정하고 그걸 그려낸다. 사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거나 ‘왠지 모르나 이렇게 보여주는 게 맞을 것 같다’고 하는 것은 예술가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비겁하다고 할 수도 있고,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지의 영역에 정해진 길은 없다. 그냥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나의 전심전력을 다해 전진할 뿐이다.

이건 모험적인 시도다. 무모하지만, 비겁하거나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나홍진은 <엑소시스트>같은 영화가 끝난 자리에서 한걸음 더 들어간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효진의 증세는 다시 시작되고, 오히려 가까웠던 후배경찰 성복이 발작을 일으킨다.

이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신들의 세계에 집중한다. 무당 일광(황정민이 연기)과 토속신 무명(천우희가 연기), 그리고 외지 일본인(쿠니무라 준이 연기)이 그들이다.


성복이 발작으로 살인사건을 일으키자 부사제 양이삼(김도윤이 연기)은 일본인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다시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이 대목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도적인 패러디로 보인다.

‘너는 악마냐?’는 이삼의 물음에 악마의 모습으로 변한 일본인은 “보아라. 이게 나다‘면서 부활한 예수의 말을 그대로 들려준다.


그동안 소극적으로 사태를 주시하던 무명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일본인이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의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시 말해 무명과 일본인은 서로 대척점에 서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처음에 일본인과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던 일광이 사실은 일본인과 동류의 무당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신세계(神世界)는 제도권 종교 가톨릭과 비제도권의 일광-일본인, 그리고 토속신앙 무명의 세 부류로 구분된다.

드러난 결과만 놓고 보면, 제도권 종교는 나태하고 토속신앙은 무력하며 비제도권 종교들은 혹세무민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결과 일반 대중들만 속절없이 질환에 시달리고 비명에 죽어가고 있다.

곡소리(哭聲) 가득한 시골 마을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나홍진은 질문한다.

각종 소문이 난무하는 이 질환의 시대에, 이 환란의 시대에 ‘과연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곡성>은 신을 믿지 않는다. 불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한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누가복음 24장 37~39절)로 문을 연 영화는 일본인이 낚시질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낚시질은 현혹이다. 속여서 낚는 것이다.

낚싯바늘에 걸리지 않으려면 믿어야 하는가, 의심해야 하는가? 믿는다면 무엇을 믿어야 하고, 의심해야 한다면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가?

가톨릭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무명을 믿으라는 말인가, 일본인을 믿으라는 말인가, 아니면 일광을 믿으라는 말인가?

우리의 생명을 지키고, 우리의 가족을 질환으로부터 안전케 할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그런 것이 있기는 한가?

신이 있다고 치자. 그 신이 과연 내 편인가? 내 편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곡성>의 대답은 ‘신은 인간 편이 아니다’이다.

신은 인간을 편들지 않는다. 신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세계에 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이익, 자신들의 계획, 자신들의 영역싸움에만 관심이 있다.

가톨릭 사제가 마을의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던가? 무명이 한 일이, 일광과 일본인이 벌인 굿이 과연 마을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던가?

마지막에 보이는 그들의 싸움을 보라. 어느 한 대목,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가?

딸 효진을 찾아 집 앞을 헤매는 종구를 두고 무명과 일광이 자신의 입장에서 현혹시키는 장면을 보라. 그들은 간절히 종구를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영역싸움에 몰두해 있을 뿐이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수록 사태는 점점 나빠지고, 우리 인간들의 세계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간다.

그래서 <곡성>의 포스터는 말하고 있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라고.


현혹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낚싯바늘에 걸리지 않으려면 미끼를 물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의 질환으로부터, 소문의 아우성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끼에 걸려서 발버둥치는 딸을 보면서, 피를 뚝뚝 흘리며 울부짖는 어린 소녀의 넋 나간 눈빛을 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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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효진이... 아빠가 경찰인 거 알제? 아빠가 다 해결할 겨... 아빠가.”


거의 죽어가는 듯한 말투로 혼자 중얼거리는 종구의 얼굴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제 영화는 끝났다. 신들의 싸움도 끝나고, 신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산 사람은 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채, 신들은 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그게 그들의 일이니까.

우리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리 나름대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 신들의 싸움판에서 우리 나약하고 흔들리는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곡성>의 마지막 장면을 되짚어보면서 그 대답을 찾아보자.


‘우리 효진이’라는 말은 관계를 설정한다. ‘효진이는 내 딸’이고 ‘우리는 가족’이라는 강한 가족주의를 전제한다. 엄마와 할머니가 죽었지만 딸과 아빠는 아직 살아있다. 사회를 형성하는 최소단위가 이것이라고, 이 관계가 깨지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이다.

‘아빠가 경찰인 거 알제?’ 라는 말은 자기정체성의 확인이다.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자각함으로써,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한다. 의심이, 소문이 끼어들 여지를 두지 않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간다’는 명확한 인식이 이제야 생긴 셈이다.

그 명확한 인식은 확신을 부르고, 그렇게 의심이 사라지면 자신감이 생긴다. ‘아빠가 다 해결할 겨’라는 말은 그런 확실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다시는 의심의 수렁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이고, 어떤 달콤한 미끼에도 현혹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래봐야 또 실패하고 말 거라고?

어차피 인간의 삶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고?

뭐, 그럴지도 모른다. 물질주의-외세-변화의 경향을 취하는 일광-일본인은 점점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듯하다.

자연주의-전통-보수의 경향인 무명은 얼핏 인간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인간을 위해 하는 일이 없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이용할 뿐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평 하나.

처음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나는 무명에게서 정치인 박근혜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여자라는 것과 처음 등장할 때 군복 상의를 입었다는 것과 자기 역할이 없이 남의 말을 전하거나 고자질하는 것 등이 그런 오해를 유발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일본인-무명’의 관계를 ‘변화-보수’의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그런 해석이 불가능한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 첫 감상의 착각이었다고 본다.)


물론 또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우리 인간의 길이다. 실수하고 실패하지만, 그걸 통해 변화하고 발전한다.

신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 인간은 변한다. 처음 게으르고 겁 많던 시골경찰 종구가 단호하고 용감한 주체적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을 우리는 보았다.

다시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면, 아마 종구는 좀 더 좋은 결과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종구가 ‘나’를 믿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남의 말, 떠도는 소문, 신의 충고가 아니라 나의 판단을 믿게 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의 기초이고 출발점이니까.


나를 지켜가면서, 나와 함께 사는 사람과 내 옆에서 같이 일하고 공부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생활을 하면 된다.

나와 내 곁의 사람을 믿는 것만이 우리를 지켜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한 시간이다.

내가 없으면 신도 없고 세상도 없다. 신도 세상도 나를 믿는 것에서 출발한다.


<곡성>의 곡소리는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과, 거짓을 믿는 자들과, 현혹당하는 영혼들에 대한 경고의 나팔소리이다.


<곡성>은 문제작이다. 문제가 많은 작품이다. ‘잘못 지은 집’이다.

그러나 그게 <곡성>의 장점이다. <곡성>은 ‘세상이 잘못되어 있지만,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과정에서 모호한 형태가 만들어졌다. 나쁘게 말하면 ‘이현령 비현령’ 식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박춘배의 경우를 보자.

무명이 ‘박춘배’의 군복상의를 입고 등장하고, 나중에 산 속 트럭에서 춘배의 시신이 보여진다.

일본인이 춘배를 두고 굿을 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갑자기 춘배가 좀비로 나타나 한바탕 소동극을 벌인다.

나는 박춘배가 좀비가 된 것은 일본인의 굿이 실패한 결과라고 본다. 일본인은 죽은 자를 되살려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하고 있는데, 그 과정이 진행되다가 실패함으로써 좀비가 되고만 것이다.

굿의 결과 일본인의 기력이 급격히 소진되는 것은 그 증거의 하나이다. 기력을 박춘배의 부활(?)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같은 무당 계열이지만, 일본인은 일광보다 훨씬 과격하고 급진적이다. 도덕적인 처단도 불사하고, 죽은 자를 되살려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 노선의 차이가 확실한 것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나의 해석이다. 감독이나 그 밖의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작품의 내용이 풍성해서 열려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설명이 부족하고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곡성>의 그런 점에 오히려 끌렸다. 솔직히 나는 나홍진 감독의 이전 작품들, <추격자>와 <황해>를 좋아하지 않는다. 만드는 솜씨는 좋으나 이야기하는 바가 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무리 멋진 솜씨로 말해봐야 ‘이미 죽은’ 이야기일 뿐이다.

‘다 알고 있다’는 태도는 신의 입장이다. 인간은 ‘나는 모른다’는 입장을 취할 때 진실해지고 생기가 돈다.

나는 ‘잘 만들었지만 죽은’ 나홍진의 전작들보다 ‘엉성하지만 살아있는’ <곡성>을 더 좋아한다.



*** 결정적 장면 ***


<곡성>은 ‘믿음’에 관한 영화다. 다시 말하면 ‘의심’에 관한 영화다. 그래서 질문을 한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그 믿음의 기초는 ‘나’이고, 그 의심의 출발도 역시 ‘나’이다. ‘나’에서 출발한 믿음과 의심은 ‘너’에게로 간다.

‘나-너’의 관계는 개인을 넘어 사회를 형성하는 토대다. 가장 기초적인 이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 사회의 건강함이 결정된다. 소통이 잘 되고 민주적 교류가 원활할수록 사회는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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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구와 효진의 관계도 ‘아빠-딸’로서 건강한 관계였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의심이 끼어들면서 균열이 생겼고, ‘어떤 아재가 자꾸 들올락’ 하는 상황을 맞더니 결국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이 장면, 아빠와 딸의 행복한 시간을 보노라면 약간 슬퍼진다. 이 다정한 행목의 시간이 어떻게 해서 깨지게 되었을까? 우리의 행복은 정녕 지속될 수 없는 것인가?


마을 흉흉한 사건의 영향을 받아 종구가 악몽에 시달리던 때, 아직 집안은 평화롭다.

종구와 아내는 차에서 정사를 벌이다가 효진에게 목격되고, ‘시방 여기서 뭐 허는 겨?’ 하며 자동차 문을 열려는 효진을 피해 종구는 급히 달아난다.

그리고 한가한 강가에 앉아서 종구와 효진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

간단히 정리를 해보자.

그림같이 아름다운 강가에 앉은 두 사람. 효진은 오카리나를 연주하고 자랑스럽게 아빠를 쳐다보지만 종구는 건성 박수를 친다. 그의 마음엔 다른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종구; 언제부터 봤냐?

(효진은 못 들은 체 딴 짓을 한다. 종구가 조바심이 나서,)

종구; 어디까지 봤는디?

효진; (별거 아니라는 듯)걱정 말어. 아무 말 안 할랑께,

종구; (한숨 쉬며)아이구! 다 봤네.

효진; (딴 짓을 계속하며)걱정 마라고. 첨 본 것도 아니여.

종구; 응?

(낙담하는 종구. 효진이 자신의 음료수를 종구에게 내민다.)

효진; 여... 괜찮애. 어여 먹어.

(효진이 종구의 입에 빨대를 넣어주고,

한모금 마신 종구가 편안한 표정이 된다.

그리고 다음 커트. 멀리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는 일본인이 보인다.

이제 평화의 시기가 끝난 것이다.)


이 장면은 아름답고 편안하다.

마지막 부분, 놀이기구를 타는 플래시 백 커트를 제외하면 영화 전체를 통틀어 단 하나의 행복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아름답고 편안한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름다운 풍경? 조금의 연관은 있겠지만 큰 상관은 없다.

사실 <곡성>은 영화의 과정 내내 아름다운 시골의 풍경이 보인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중에도 산천은 변함없이 아름답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사의 아름다움은 같이 하지 않는다.


이 장면이 주는 아름다움과 편안함은 아빠와 딸이 주고받는 감정과 대사 때문이다.

서로 적당한 박자와 템포로 교류한다.


종구의 첫 대사 ‘언제부터 봤냐?’는 물음은 재미있지만 평범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효진이 모른 체 시치미를 떼는 것도 무난한 대응이다.

그 다음 종구의 대사 ‘어디까지 봤는디?’는 첫 대사의 변형이면서 한 발 전진한 내용이다. ‘언제부터’와 ‘어디까지’가 서로 대구를 이루어 박자감이 생겨난다. 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제는 효진의 차례. 앞에서 대답을 안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대답을 해야 한다. ‘언제부터’에 대한 답일 수도 있고, ‘어디까지’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그러면 일반적인,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화가 된다.


그런데 효진은 그 대답을 건너뛰고 ‘걱정 말어. 아무 말 안 헐랑께.’ 라고 대답한다.

종구가 묻는 구체적 사실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그 본질, 종구의 마음을 헤아려 대답하는 것이다.

박자가 크게 진폭을 그리며 전진한다. 그에 따라 감정도 크게 요동치고, 종구는 ‘아이구! 다 봤네.’ 라는 말로 그 진폭에 대응한다. 두 사람이 기분 좋게 감정을 교류하고 있다는 말이다.

효진은 자신이 크게 진폭을 올린 대화를 수습하며 ‘걱정 마라고. 첨 본 것도 아니여.’라고 말하는데, 요게 반전이다. 수습하는 척하면서 한 방 더 먹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음료수를 건네주며 상처 난 종구의 마음을 달래준다.

짧은 대화 장면이지만 잘 구성된, 박자감이 훌륭한 좋은 장면이다.


이 다정한 사이가 왜 부서져 버렸을까? 무명의 말대로 ‘니 딸의 애비가 의심’한 결과일까? 모를 일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이 한편의 소동극을 통해 얻는 교훈은 의심이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의심하지 않으면 그나마 살아날 기회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을 통해서 소문과 현혹의 미로를 건너가야 한다.

의심이 불신이 아니라 확신이 될 때까지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의심하면서 나의 길을 가야 한다. 남의 말을 믿지 말고, 나의 마음까지 의심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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