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참 여러모로 매력 없는 나라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음식이지만 두 번째로 심각한 것은 날씨다. 특히 겨울은 화창하게 맑은 날은 드물고 하늘에는 항상 우울한 먹구름이 드리워져있다. 기온은 크게 춥지 않지만 고위도 지역이라 밤이 길어 많은 이들이 겨울 우울증을 호소한다. 가끔 날씨가 화창하더라도 특유의 칙칙한 건물 색과 높은 습도 때문에 우울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내가 지내던 곳은 주변에 잔디밭이 넓게 조성되어 있었는데 이 잔디밭은 언제나 젖어있어 조금만 걸어도 신발에 진흙이 가득 묻어났다.
외출옷차림은 항상 방수처리된 재킷을 입는다. 뒤에 커다란 후드가 달려있어 머리와 얼굴 앞까지 깊숙이 가리고 기장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재킷을 즐겨 입었다.
그래서 언제나 영국인들은 여름을 갈망한다. 여름은 해가 길고 건조할 정도로 비가 오지 않는다. 이때 영국의 각 지역에서는 록페스티벌이 열리기도 하고 윔블던 테니스 대회나 F1 그랑프리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아 물론 각종 축구 경기도.
그러나 이런 축제들 속에서도 여전히 뭔가 속 시원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브라질이나 멕시코에서 놀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즐기는 게 아니라 일상의 우울함을 잠깐의 일탈로 간신히 달래는 기분이다. 마치 고등학생이 매일 같은 급식을 먹다가 오랜만에 특식으로 양념치킨이나 매운 마라탕을 기대했는데 그나마 나온 게 코다리 조림인 것처럼.
영국인들은 지독할 정도로 내려놓고 노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항상 즐거움으로부터 자신을 절제하고 억누른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인들은 과거부터 알코올중독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영국 북쪽 끝 스코틀랜드도 날씨는 마찬가지다. 스카이섬까지 북쪽 끝으로 올라가면 해풍이 점점 강해지면서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이 하루 종일 불어온다. 하지만 스카이섬에서 맞는 영국의 겨울날씨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여행자의 입장이라 그러겠지만 스코틀랜드 특유의 척박한 땅과 사람의 흔적이 남지 않은 넓은 자연에 영국의 날씨가 더해지면 오히려 조금은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아침 일찍 스카이섬 탐방을 떠나면 온 세상이 습한 안개와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실제로 스카이섬에는 Fairy's Pool이나 Fairy Glen과 같은 요정과 관련된 명소들도 있다. 기나긴 겨울밤도 스카이섬에서 맞으면 스카치위스키를 마시며 별구경을 하느라 심심할 새가 없다.
애증의 영국이지만 그래도 가끔 영국을 추억할 때 영국의 날씨마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영국의 날씨는 세계 그 어떤 나라에서도 보기가 드물다. 영국의 날씨가 만들어낸 독특한 식생과 진흙과 흙탕물, 그리고 우울한 분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가끔씩 영국을 추억하게 한다.
내가 지금 영국을 탓할 때가 아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별로 날씨에 신경 쓰고 살지 않는다. 짙은 스모그와 미세먼지에 너무 익숙해져서 별로 하늘을 쳐다보고 살지 않게 되었다. 여름에 기온이 너무 높거나 겨울에 기온이 너무 낮으면 제발 적당히 좀 하지라는 마음에 성질만 부렸지 쾌적한 날씨에 야외에서 맑은 하늘을 마음껏 누리면서 산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