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문제식(問題式) : 물극필반(物極必反)의 문제

(사물) - 현상 - 인식 - (추상) - 정신

by 나무느을보

‘물극필반(物極必反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전된다.)’는 논리는 사물에 대한 적용이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정론이었다. 하지만 존재의 최소단위가 추상과 마찬가지로 확률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현재에서 그것은 구태여 추상에만 적용할 것은 아닐 것 같다.


가령 존재의 최소 단위인 ‘있음(有)’를 가장 극한으로 응집하는 순간 그곳에는 공간에 구멍이 뚫리는 현상이 드러난다. 소위 블랙홀이라는 것이다. 가장 작은 입자를 생각했을 경우, 이 있음이 응집된 곳은 경계면이다. 대부분은 텅 비어있다. 그리고 이 형체를 유지하는 공백은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는 형이상(meta- physics 물리 다음의 논의)에서 다룰 무엇이 아니다. 형이하, 즉 물리와 과학의 영역인 것이다.


전체 사물의 극한은 추상(확률)으로 와해되는 일에 대해서도 그 출발점인 형이하에서 다루어야 마땅하다고 필자는 사료한다.


고로 필자는 추상에 있어서 그 물극필반(物極必反 줄여서 ‘극(極)’)의 개념을 다룰 것이다. 추상에서 극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 방향성이 분명해야 한다. 적어도 ‘있음과 없음’처럼 상반된 두 가지의 극점이 존재해야한다. ‘선과 악(善惡)’ ‘우와 열(優劣)’ ‘미와 추(美醜)’가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나 ‘시비(是非 ~이다/ ~아니다)’는 아니다. 이는 인식의 영역이다. 판단이다.


(例) ‘선함’을 극한으로 두었을 때 그것은 ‘악’이 되는가?


※ 도덕경(道德經) 2장에는 극(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구절이 있다. 참고삼아 수록해두었다. “…모두가 선하다고 여기는 선은 선이 아니다.(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고로 순수한 선을 추구하고자 할수록 방향성을 잃게 된다.


추상의 요점은 개인의 표상들을 합쳐서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물처럼 다루면 안 됨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추상은 확대하고 파헤칠수록 그 모호함에 마주하게 된다. 그 까닭은 추상은 그 핵심이 다른 <1.추상들은 가변상태>이며 기껏 포착된 의미도 <2.표상으로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추상은 사물과는 달리 구축방식이 반대이다. 사물은 외부에서 내부로 존재하지만 추상은 내부에서 외부로 현현하여 외부에서 내부로 다시 이해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 인식은 두 번 거쳐 가면서 형성되게 된다. 확대하고 해체하면서 다가설수록 허무해지는 까닭도 그 탓이다. 고로 이 추상의 명확함을 추구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기껏해야 텅 빈 공백과 신기루를 마주하는 꼴이다.


(例) ‘아름다움(美)’라는 개념은 “<인식체 내부의 판단근거> → <외부의 이미지(相)> → <인식체 내부의 취미판단 후 정립> → <외부의 표상으로 소통>” 의 과정을 거친다.


그와 반대로 ‘있음’이라는 개념은 인식체 내부의 판단근거가 없더라도 그 존재자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건 말건 그 책상은 존재하고, 의자는 존재한다. 아이의 분리불안처럼 사물은 있었다가 없었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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