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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선순환’

생명체는 순환이다. 선순환이냐 악순환이냐에 따라 살고 죽는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고전1:3)이십니다.

위로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해보니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줌’이더군요. 

위로는 상실이나 상처로 인한 슬픔이나 고통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소망과 기쁨으로 전환시키는 에너지인 것 같습니다.


고린도후서1장 3~5절말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요.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은 고난중에 있는 각처의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그는 환난중의 위로자입니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도 환난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결코 만만하거나 녹록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 받는 위로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갑니다. 전반전은 졸업후 사회에서 성공을 위해 살았습니다. 

첫 직장인 극동방송사에 아나운서로 입사해서 PD,기자의 일을 했습니다.

TBS 교통방송이 생기면서 이직해 10여년을 근무하고 여러 기업에서 홍보 관련 업무를 하다가 지금은 복음적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면서 후반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축복이고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어린시절 유난히 겁이 많았던 제 인생의 위로 그 자체 이십니다.


얼마전에 장신대 정은찬 교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약학 중에서 고린도서와 데살로니가서를 연구한 분입니다. 오늘 나누는 고린도 후서 1장 3절~5절이 본문 말씀입니다.  설교제목이 ‘연민하시는 하나님’인데 제 나름으로 부제목을 ‘위로의 선순환’이라고 정해보았습니다.위로는 위로부터 옵니다.


자연계는 순환합니다.강물이 위에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위로에는 발원지가 있습니다.

강물의 발원지는 샘물입니다.그러나 발원지가 물의 생산지는 아닙니다.

강물은 자연계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 물 순환의 주관자는 태양입니다.집 안의 수도물의 주관자가 에너지인 전기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태양의 열과 빛과 에너지가 지표면의 해수와 담수를 공중으로 끌어올립니다.

이것이 수증기이고 이렇게 모인 수증기의 세력이 구름이 됩니다. 수증기와 물을 머금은 구름은 기류를 타고 흐르다가 물방울이 굵어지면 중력에 의해 지구로 떨어집니다. 이 물방울이 기온에 따라 비 또는 눈 진눈깨비 등의 형태로 지구에 떨어져 순환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물의 출발지는 우주와 궁창과 삼라만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1:6, 요 1:1~3)


위로가 가장 필요한 지점은 상처받기 쉬운 인간관계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35년째 살고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갈 길이 남아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원하지않게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 힘든 시간도 있었습니다. 아내도 나도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각서를 쓰기도 했고 나는 그런 적이 없지만 아내는 이혼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10년 전, 진새골 업그레이드 부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이후 사소한 말다툼은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면서 보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숙제입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의 한마디에 삐침 모드입니다. 그래도 회복되는 시간이 많이 빨라졌습니다. 회복탄력성이 좋아진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내는 며칠 코로나에 걸려 많이 힘들었습니다.아내는 주일예배도 비대면으로 드렸습니다. 그런 아내를 제대로 위로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오해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입니다. 죄인의 특성인 근본적인 불안과 경쟁심과 의심과 확증편향의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비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열린 대화를 통해 오해와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의 관계와 더욱 깊어진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해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쫌팽이인 나를 성숙시키는 기제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오해라는 바다는 깊고 물살이 세찹니다. 분노라는 감정의 파도가 일어나 해일처럼 밀려오기도 합니다. 휩쓸리기라도 하면 물을 먹거나 익사하기도 합니다. 미움은 상대뿐 아니라 자신을 다치게합니다. 

그러므로 오해라는 바다를 항해하려면 서로의 다른 관점과 해석을 경청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번 주 담임목사님의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전반부 말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상대의 약점이나 실수는 망원경을 거꾸로 해서 멀리 축소해서 보고 강점은 현미경으로 자세히 확대해서 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 눈의 들보는 안보이고 남의 눈 속에 티는 크게 보이거든요. 저도 전반전의 많은 실수를 타산지석으로 상대가 내가 이해하기 힘든 어떤 말과 행동을 할때는 이유가 있겠지 사정이 있겠지 말하기 힘든 사연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려고 합니다. 

지난 주 새신자 모임에서 권사님 한 분이 “그 사람에게 한 가지라도 강점이나 마음에 드는 점이 있으면 그것만 계속 바라본다.” 라는 말씀도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부부로 돌아와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욕구가 다른 것 같습니다.아내는 나를 사랑해? 내 말을 들어주고 있는 거야?를 수시로 확인하려 합니다. 남편은 나를 믿어?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거야? 서로의 요구사항이 다릅니다.


부부가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은 수용과 공감입니다. 엄마가 어린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처럼 필요 이전에 서로의 존재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다. 

그러나 천사도 신도 아닌 사람 어디 그런가요?


관계의 최악은 부정적 인식에서 출발한 거부감입니다. 과거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 선입견과 편견 경쟁심(남자들이 강함)등으로 발생한 부정적 인식은 선글라스를 끼고 보는 사물처럼 색이 어둡습니다. 

실체를 제대로 보기 어렵지요. 상대를 경계해서 마음을 닫고 있거나 무시하기에 예의와 배려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눈빛이나 표정,행동,말투 등에서 감정의 표현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평소 가까운 사람일수록(가족,친구등) 감정 통제가 잘 안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관계의 발전과 성장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멀어집니다.  

이럴 때 성격이 급한 저는 복식호흡을 하거나 자리를 피해 환경을 바꾸는 등 시간을 갖고 감정 조절을 한 후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평소 가까운 사람일수록(가족,친구등) 감정 통제가 잘 안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석에서 걸러지지 않은 말이 튀어나올때가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긴장과 갈등의 맥락에서 불편한 뉘앙스를 담은 언어가 작동하면 상처가 됩니다. 칭찬도 조롱처럼 팩트도 비난으로 들리거든요. 이렇게 되면 더 격한 감정이 분출되어 쉽지 않은 상황에 돌입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되면 One Sentence (서로 한마디씩만 하고 더 이상 피드백하거나 공방하지 않기)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잘 안 지켜질 때도 있습니다. 어쩔수 없는 죄인이기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당시 바울에 대한 오해는 주도적이다. 자기주장이 강하다. 딱딱하다. 목적 지향적이다. 권위적이다. 등등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울은 따뜻한 사람이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며 상처받은 치유자로 위로의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을 온몸으로 살아냈던 사람입니다. 복음의 전도자로 살면서 슬픔과 아픔과 상처와 고통 중에서도 주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인물이지요. 약육강식,남존여비,노예시대같은 정의롭지 못한 역사의 상황속에서 코람데오의 삶을 살았던 바울에 대해 더 깊이 알고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위대합니다.그러나 바울을 쓰시는 하나님은 더욱 위대하십니다.환란과 역경속에서도 바울을 위로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그 어떤 오해나 갈등이나 고난이 있다하더라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우리를 먼저 위로하사 넉넉히 이기고 견디게 하실뿐 아니라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사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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