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묘한 감정들
사람들이 갑자기 몰리는 출퇴근 시간대를 이용하거나 조금 유별난 승객을 마주하게 됐을 때는 지하철을 타는 일이 마냥 즐겁기만 할 순 없다. 나 역시 오늘날까지 지하철을 타면서 이런저런 별 일들을 겪었던 거 같은데 10년이 지나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10년 전쯤 승객이 거의 없는 늦은 시간에 전철에 올랐던 날이었다. 거의 항상 탈 때마다 사람들로 빼곡했던 자리가 텅 비어있는 낯선 광경을 보면서 한산한 분위기에 적응하는 사이 어떤 커플이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한눈에 봐도 그들은 술에 취해있었는데 앳된 느낌의 새내기 대학생인 듯했다. 과잠을 입은 여자는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남자의 어깨에 기대 있었고 어깨를 내준 남자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을 왜 저렇게 많이 마셨대, 집에 어떻게 갈라고. 아마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휴대폰을 봤던 것 같다. 그렇게 몇 개의 역을 지나치면서 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승객이 타기도 하고 있던 승객이 내리기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곤히 잠을 자던 여자가 쿨럭쿨럭 기침을 하더니 그만 속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황한 남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양손을 모아 여자의 입에 갖다 댔다. 물론 그걸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정말 대단한 커플이네. 나는 내려야 할 역까지 더 남아서 재빨리 출입문 옆으로 몸을 피했다. 전철을 타려면 때로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도 감수해야 한다.
최근에는 좋은 의미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평소처럼 환승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역을 지나 마침 생긴 빈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였다. 왔다 갔다 출퇴근 길에 틈틈이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그날도 몇 줄이나 읽었을까 언제나처럼 금세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렇게 몇 번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기를 반복하고선 못 이기는 척 책을 덮었다. 그래도 간간이 졸지 않고 책을 읽는 날도 적지 않다. 어쨌든 역을 지나칠 걱정을 안 하고 눈을 붙일 수 있는 건 마지막 역에서 내리기 때문이었다.
신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졸고 있는데 역에 다다랐을 즈음 신기하게도 알아서 눈이 떠졌다. 그래도 여전히 묵직한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왔다. 그때 “다 왔어요~” 하고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바로 옆자리에서 들렸다. 조금 큰 말소리로 말끝을 올리던 음성에서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어떤 아저씨가 옆자리에 앉던 장면이 떠올랐다.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 나는 약간 멀뚱멀뚱하게 있다가 괜히 기지개를 켜면서 가방을 챙겼다. 잠시 후 열차가 멈춰 서고 출입구 앞에선 아저씨의 뒷모습을 살폈다.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평범한 아저씨의 뒷모습.
혹시 따님이라도 생각나서 깨우셨을까? 그래서 혹시 잠에 취한 내가 내려야 할 곳에 못 내린 채로 예정에도 없던 강제 여행이라도 할까 싶어서 깨워주신 걸까? 아니면 본인이 이미 그런 식으로 난감한 여행을 해본 적이 있어서 그러셨을까? 나는 멀어지는 아저씨를 보면서 말없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선물이라도 받은 듯 기분이 좋아져서는 이 느낌 그대로 기필코 좋은 하루를 보내리라 하고 다짐까지 했더랬다.
지하철의 가장 큰 묘미는 생전 처음 본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몰려있다 보면 당연히 좋은 순간보다는 나쁜 순간이 더 많기도 하지만 말이다. 근데 그게 또 알다가도 모를 인생을 닮은 것도 같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