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용기보단 공포로 저지르고만 배우 도전기
나는 4년 차 신인 배우다
이렇게만 들으면 20대 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50대이다. 아쉬운가? 나도 무척 아쉽다.
20대 신인 배우의 글이라면 어떤 이야기들이 담길지 대략 감은 잡힌다. 도전하고 넘어지고 친구들과 소주 한잔하고 의지를 다져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그런 이야기 일 듯하다. 풋풋하고 어여쁜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할 것 같다. 촬영 현장에서 만난 청순한 여배우와의 동료애와 로맨스 사이 어디쯤 이야기가 한 스푼 더해질 수도 있겠다. 독자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을 먼저 전한다.
22년 정도 직장 경력을 포기하고 '전업배우'가 된 50대 아저씨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흘러갈 듯하다. 20대 맨발의 청춘이 맨 주먹으로 일어서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진 것 다 내려놓고 캐시미어 외투 벗어던지며 벌거벗고 다시 시작하는 컨셉이랄까. 그런데 벌거벗은 몸뚱이마저 이제 봐줄 만하지 않다. 가동성도 무척 떨어진다.
이 매서운 겨울 같은 불황의 시대에 날짜 맞춰 들어오는 적지 않은 월 급여와 명함에 쓰여있는 사회적 직책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용기가 대단하다고 칭찬과 비난을 3:7 정도로 섞어서 말한다. 그럼에도 내가 '전업배우'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공포였다.
나도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말로만 했던 무게감 없는 소망은 마약을 탄것이 분명한 회사 급여에 월 단위로 반복해서 쓸려가 버렸고 한 달 두 달 지나 22년이 되도록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스크린 속의 배우들의 열연을 볼 때마다 극의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부러워했다. 이윽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버나드쇼의 묘비 문구*는 나를 괴롭히는 공포가 되었다.
용기만으로는 연봉과 사회적 지위의 안락함을 이기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며 동경만 하던 내게 점점 늘어가는 주름과 새치는 공포를 시각화했다. 늙고 있다. 이젠 진짜 늦었다. 그러나 내일은 더 늦는다. 해야 한다. 벌거벗을 용기 따윈 없었다. 아직도 두렵다. 그러나 동경만 하고 아무것도 못했다고 나중에 후회할 것에 대한 공포는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끝내 배우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지 못했다.
3년 전 빙그레 아카페라 커피 광고로 나는 처음 일을 시작했다. 이후 GS25, 한국자산관리공사, 신세계 백화점, 서울우유 등의 광고와 OTT 드라마 '허식당', '성난 사람들 시즌2', '언더커버미쓰홍', '은밀한 감사', '나인퍼즐', '당신이 죽였다' 등에 출연했고 공중파 '화려한 날들', '기쁜 우리 좋은 날', '첫 번째 남자', '김 부장'을 거쳐 '마리와 별난 아빠들'에 출연 중이다. 오늘까지 42편의 광고와 드라마,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물론 메인으로 출연한 광고도 있고 대사가 많은 드라마도 있지만 나도 나를 못 찾겠는 드라마도 있다.
드라마, 광고 촬영을 다니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춘들 틈에서 삐걱삐걱 중고 신인 배우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도전기이자 모험기이고 명랑일기 일 수 있다. 몸으로 부딪치고 상처로 새긴 이야기들이라 재미까지는 몰라도 읽을 만을 할 것이다. 누군가 흥미롭게 읽어준다면 참 좋겠다.
로맨스는 없다.
*버나드쇼의 묘비 문구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다. 지금 널리 쓰이고 있는 의미와 다르다는 지적이 있지만 그냥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