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모집

안 하면 아무 일 도 안생 긴다.

by 이섭

무심코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다 광고 하나에 스크롤을 멈췄다.


'시니어 배우 모집 - 40세 이상, 경험 없어도 무방'


백발의 노년 남녀가 환하게 웃는 사진 위 문구였다. 궁서체였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이니 그럴 법도 하다. 실버산업이 잘 된다더니 별 걸 다하네하며 나는 실소했다.


나아가 40세부터라는 문구가 불쾌했다. 그럼 내가 시니어 커트라인을 한참 지난 진정한 시니어라는 건가? 이제 궁서체에 익숙해져야 하나?


그럼에도 쉽게 이 광고를 넘겨버리지 못한 것은 '배우'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사실 20년 넘게 배우를 동경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극단에 전화도 해보고 많은 배우 에이전시에 이메일도 보내보았다. 대부분 회신조차 없었고 어떠한 관심도 받지 못했다. 이런 소심한 노크들이 무시당하면서 점차 '그럼 그렇지'하는 자조와 바쁜 회사원 생활에 더 행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연중행사처럼 갈증이 심해지며 또 검색, 연락 그리고 낙담이 반복되었다. 10대도 20대도 아닌 주제에 경력도 없으면서 배우가 될 방법이 없겠느냐고 안되냐고 물었으니 환영받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번엔 '배우'모집이란다. 경험이 없어도 무방하다지 않나.

아! 나는 시니어 카테고리에서는 어리고 또 받아 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광고 페이지 하단의 '지금 응모' 버튼이 쨍하게 반짝였다.


'언제까지 망설이기만 하실 건가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100세 시대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세요'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홈쇼핑 나레이션 같은 홍보 멘트가 들리는 듯했다. 살짝 가슴이 시큼했다. 20년 넘게 망설이고만 있는 내게 가장 근접한 실체적 행동의 실마리였기 때문이다.


'이 버튼만 누르면 죽이든 밥이든 뭔가 하는 거다'


그러나 광고 피드를 만지작 거리자니 오랫동안 행동하지 못하게 했던 현실 자아는 어김없이 솟아 손가락을 오므렸다. '내가 이 나이에 철없이 이럴 때냐', '내가 될 성싶냐', '내가 되면 다름 사람 다 됐지', '겉멋만 들어서는 쯧쯧'


좌뇌, 우뇌는 미간을 사이에 두고 아드레날린을 침처럼 튀기며 싸웠고 왼손 엄지를 관장하는 우뇌의 근소한 승리로 '응모'버튼을 눌러 버렸다. 이어진 페이지는 고심 끝에 펼쳐진 것에 비해 단출했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입한 후 페이지는 신기루처럼 닫혀버렸다.


며칠이 지나 전화 한 통이 왔다.

'3일에 걸쳐 미팅이 있으 예정입니다. 어느 날에 오시겠습니까'

여자의 목소리는 지쳐있었다. 실적 기준이 아닌 시간제 아르바이트임이 분명했다. 수십, 수백 통의 전화를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긴 세월 미련의 무게에 비해 그녀의 목소리가 대출 권유하는 스팸전화 상담원의 무심함을 넘지 않는다는 것에 섭섭했다. 예상대로였지만 연기학원의 수강생 모집 홍보였고 나는 누구나 한 번쯤 생각했을 법한 배우의 꿈을 가진 중년이자 학원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물고기였을 뿐이다.


나의 우뇌는 말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배우는 무슨' 나는 스팸전화에 대답하듯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후 며칠간 내가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에 자책했다. 40대 중반, 애들 학원비는 늘어만가고 추진하던 일도 고꾸라져서 당장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 배우라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자책으로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20년 넘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나를 위해 한 게 뭐 있나. 전 세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수 없이 많은 날을 밤낮없이 이동하며 공항에서 쪽잠 자며 일했고 심지어는 남의 나라에 6년이나 주재생활을 하면서 나 좋자고 한 게 뭐 있나. 아무리 내 신세가 한심해도 나도 한번 나 하고 싶은 거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나 그럴 자격 있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으로는 답 안 나온다. 그냥 해야 한다. 두렵긴 하다.


그러나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생긴다.


안정적인 보직에서 정치적 역할이 더 중요한 높은 사람 할 때 시작 했으면 우아한 취미라도 되는 것처럼 풍요롭게 했을 것을 등 따시고 배부를 땐 안 하다가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활이 어려워지고 앞이 캄캄한 상활이 되자 비로소 악이 받치고 삐뚤어지듯 '왜 안돼' 반문하다니. 참 알 수 없다.


나는 날이 밝자 통화 리스트에를 뒤져 그녀가 말헀던 날에 학원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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