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스 게임이라며 극단적인 두 상황을 두고 어떤 쪽을 택할지 물어올 때마다 아주 난감하다. “환승 이별과 잠수 이별 중에 뭐가 더 낫다고 생각해?” 둘 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도 모자랄 판에 뭐가 낫냐니. 아무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 게임이니까 그냥 선택해 보란다. 정말이지 이건 상상으로 자해하는 끔찍한 게임이지 않은가. 눈을 질끈 감고 대답을 회피했다.
끔찍한 걸 알면서도 나도 한 번 물어보겠다. 여러분이 절친과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면 사랑과 우정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머리가 아프겠지만 잘 생각해서 대답해 주길. 질문자의 선택이 궁금할 수도 있겠다. 고약한 양자택일을 현실에서 경험한 그때의 나는 사랑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 선택을 아주아주 후회하지만.
스무 살 대학교 신입생. 같은 교양 강의를 듣게 된 나와 친구는 거기서 키가 큰 남자애를 만나게 된다. 그를 가수 인피니트의 남우현 님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아니야) 쌍꺼풀이 없고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이 그래 보였다(정말 아니야). 그 생김새에 눈길이 갔던 이유는 내가 고등학생 때 열렬한 인피니트의 팬이었고 그중에서도 우현 님을 제일 좋아했기 때문. 우현 님께 죄송스러울 만큼 그는 사람이 참 아니었는데 단지 무쌍에 가로로 찢어진 눈이 취향이어서 좋아하게 된 비극적인 이야기다.
강의는 조별 활동과 발표가 주였다. 그는 외향적인 성격이라 오가며 익숙해진 내게 인사했고 강의 참여도 적극적이어서 내가 발표하면 손을 들어 질문이나 감상을 던지기도 했다. 잡담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워지자 흑심이 커진 나는 그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고 눈이 마주치면 스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본격 짝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묘하게 그도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혹시 너도? 하는 생각이었지만 호감의 시그널이라고 단정 짓지 않았다. 그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안 그래도 짝사랑 만만치 않은데 김칫국을 사발로 마시다 체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러는 사이 내 친구도 그와 인사하고 대화하는 사이로 가까워졌다. 나의 눈은 항상 그에게만 향했으니 친구가 어떤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내 감정이 커서 친구의 감정을 느낄 새가 없었고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결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내게 고백하는 순간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그건 명확히 경고음이었다. 아찔한 순간이구나.
그때 솔직하게 나도 걜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우정을 지키기 쉬웠을까, 아니면 우정 때문에 미련하게 마음을 접고 슬퍼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를 쟁취하기 위해 정정당당한 대결을 벌였을까.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다. 내가 마음을 숨기고 침묵했기 때문에. 사랑을 버리고 우정을 택하는 선택이 아니면 둘 중 하나는 상처를 받을 게 뻔한 상황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복잡해진 머리로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느라 그다음에 친구가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의미 없이 끄덕이고 있을 뿐.
무거운 기분으로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봤다. 나 또한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해도 되는지. 모두의 답이 똑같았다. 말하지 말란다. 분명 파국일 거라고. 그래서 계속 침묵을 택했다. 근데 다음 스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친구가 그를 좋아한다고 한들 내 마음이 식지 않는데, 그를 보면 자꾸 웃음 나고 설레고 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이 이상 다가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고 이걸 당최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그러다가 나와 친구, 그가 셋이서 같이 떠들고 장난치는 순간이 오면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남자 하나 때문에 그보다 더 소중한 친구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조소하게 되는 것이다. 이야, 콩깍지 씌면 답도 없구나! 이 비열한 자식! 사랑 앞에 친구도 없는 야멸찬 자식! 그게 바로 나라니!
결국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로 종강을 맞이했다. 나보다 하루 늦게 시험을 끝마치고 종강한 그는 대학로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하루 종일 침대를 뒹굴던 나는 그와 꾸준히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일상을 공유했다. 나처럼 기숙사에 사는 그는 자리를 파하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내게 같이 술을 마시자며 나오라고 했다. 둘이 연락하는 동안에도, 만나자는 약속을 잡는 순간에도 친구가 신경 쓰였으나 그 찜찜한 마음보다 그를 향한 동요가 더 컸다. 멋모르고 자꾸 마음이 커져서 제대로 된 판단이 안 되는 시점이었다. 그 말은 즉, 그의 부름이 어떤 기회라고 여겨져서 찜찜함을 애써 무시한 채 나가야만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정 대신 사랑을 택하겠노라 결심한 순간이다.
우리는 학교 후문 편의점에서 술과 과자를 사서 바깥에 마련된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술을 이미 마시고 온 그는 조금 취해있었으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소처럼 장난치며 대화를 나눴다. 여태 긴가민가했었는데 내게 건네지는 다정함과 묘한 분위기로 확신했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인 거라고. 붕 뜨는 기분에 술이 달게 느껴졌다. 그는 웃으며 술을 계속해 권했고 나는 그게 마음이라고 되는 것처럼 주는 대로 꼴딱꼴딱 다 받아먹었다.
그렇게 함부로 단정 짓고 경계 없이 술을 마시던 게 화근이었나. 아님 그리도 쉽게 우정을 버리고 얄팍한 사랑을 택한 나를 벌하는 걸까. 누구를 꾸짖는지 알지 못하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너무 많이 취했고 그 애도 많이 취한 듯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늘어지고 뭉개진 말투로 그가 말했다. “너 나 좋아하지.” 알고 있었구나. 너무 티를 냈다 싶어 아차 싶다가도 어차피 너도 같은 마음인 것 같은데 괜찮지 뭐 하는 생각이었다. 뭐라고 대답하기 전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네 친구도 나 좋아하던데” 예상치 못한 언급에 몸이 움찔 떨렸다. 대화의 방향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에게서 친구를 평가하는 말들이 흘러나왔고 내 앞에서 친구를 아무렇지 않게 폄하하고 있었다.
넌 복잡미묘한 이 상황을, 나에게는 죄책감과 혼란스러움을 가져온 일생일대의 고민을 단순히 재밌는 게임으로 여기는구나. 오랜 친구 관계인 두 사람이 널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저 너의 콧대를 높이 세우는 것밖에 안 됐구나. 우정이 흔들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널 좋아해 이 자리에 나온 나를 얼마나 값싸게 여겼으면 그런 말을 할까.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한들, 우정을 미루고 그를 택했다고 한들, 내 친구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네가 뭔데 감히.
취기가 온 정신을 뒤덮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 말이 꺼내진 순간에서 오래 지나지 않은 어느 시점부터다. 마주 앉았던 그가 내 옆에 붙어있었고 진한 스킨쉽을 했는데 성추행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도가 지나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을 내쳤다. 거부했음에도 계속됐다. 덜컥 겁이나 몸을 뒤로 물렸고 그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휘청거리는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방금 내게 일어난 일들이 분명히 나쁜 일임을 알았다. 그에게서 느끼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불쾌함과 두려움만 느껴졌다. 벌벌 떨리는 몸을 일으켜 빗속을 전속력으로 가로지르며 기숙사로 도망쳤다. 뒤를 돌아보며 혹시 그가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텅 빈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내가 너무 초라해서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룸메이트들은 겁에 질린 채 우는 날 달랬다. 손에 붙든 폰에서 계속 진동이 울렸다. 대신 전화를 받은 룸메이트가 단호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내일 다시 연락하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문자가 계속 왔다. 악몽 같았다. 다음 날 오전. 명확한 정신으로 복기하니 울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심각한 문제였고 그에게 사과를 받고자 했다. 뻔뻔한 태도로 나온다면 성추행 건으로 공론화하겠노라고 이를 갈며 그를 불러냈다. 지독할 만큼 술 냄새를 풍기며 온 그에게 더는 어떤 호감도 들지 않았다. 환상이 와장창 깨진 후 그에게 남은 건 떨어져 있어도 코끝을 싸하게 스치는 술 냄새와 미안함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여기서 무릎이라도 꿇을까?” 하는 실속 없는 쇼맨십. 궁상맞음에 감탄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날, 그와의 모든 인연을 끝냈다.
그제야 친구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었다. 질 나쁜 그와 더 가까이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자신을 속인 내게 기분이 상했고 화를 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내심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버렸지만 너는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 끝까지 스스로 비웃어야 했다. “미안한데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 그 말을 끝으로 친구는 멀리 사라졌다. 사랑을 쟁취하지도, 우정을 지키지도 못한 나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내게서 받은 상처가 괜찮아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소식을 모른 채 교류하지 않는 시간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주위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갔다. 꿈에서 달리면 답답할 정도로 발이 느리게 움직인다. 움직이는 시계 초침이, 창밖에서 흩날리는 나뭇잎이, 내 앞을 뛰어가는 사람이 마치 꿈인 것처럼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숨이 시원하게 쉬어지지 않았다.
멀어진 이유는 확연한데 다시 가까워진 계기는 명확하지 않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 잘 지내냐며 그간의 안부를 묻고 아무렇지 않게 속내를 털어놨다. 깨진 우정을 다시 붙이기 위해 어떤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게 진정한 우정의 속성이라는 듯 우리는 꾸밈없이 다시 친구가 됐다. 같이 탄 버스에서 우연히 그 남자애를 마주쳤을 때는 그를 같이 욕하며 알게 모르게 진 응어리까지 모두 풀어냈다. 세상이 원래의 속도로 돌아가고 나는 다시 숨을 쉬었다.
5년 뒤 책 한 권을 읽었다. 최은영 작가님의 『쇼코의 미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 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었다.’ 내가 정말 두려웠던 건 검은 속내가 있던 그 남자애가 아니라,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영영 떠나버릴지도 몰랐던 친구였다. 이제는 안다. 사랑과 우정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우리는 둘 중에 무엇을 택해도 우정이 그대로인 수식을 만들어냈고 그게 15년의 세월을 쌓아온 그와 나의 신룃값이다.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 동안에 일어난 아주 사소할 일이었지.” 그의 말이 어찌나 단단하던지. 우정이 달아날까 겁이 나는 일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제 없다. 실패한 사랑과 지키지 못한 우정에 관해 썼지만 이 글은 사실 성공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