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의원 출마 준비
25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예비후보자 공모]라는 제목으로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출마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당에서 제공하는 서식에 맞춰 먼저 서류를 작성해 제출해보라는 거다.
이 절차는 이제 막 정치를 결심한 이들에게는 가장 먼저 마주하는 물리적인 장벽과도 같다. 당이 후보자를 검증하겠다는 선언이자, 출마를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비로소 '선수'로서의 자격을 묻는 첫 번째 시험지이기 때문이다.
첨부된 서류 목록을 하나하나 훑어 내려갔다. 예비후보자 자격심사 신청서와 서약서 정도야 예상했던 범위였다. 하지만 '범죄경력회보서', '소득금액증명원', '납부내역증명서'와 같은 명칭들을 직접 마주하자 마음이 이내 무거워졌다.
나라는 개인이 공직자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숫자가 적힌 서류로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그동안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음에도, 막상 서류 뭉치 앞에 서니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과오가 있으면 어쩌지?'
기록은 기억보다 힘이 세다. 나조차 잊고 있었던 사소한 실수나 행정적인 빈틈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이 덜컥 들었다. 기초의원이 되겠다는 결심은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심의 무게를 감당할 만큼 내 삶의 궤적이 투명했는지 스스로를 끝없이 되묻게 되는 밤이었다
단순히 등본 한 통 떼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떤 서류는 경찰서에 접수를 하고 서너일을 기다려야 했고, 어떤 서류는 서류 신청 후 행정복지센터를 직접 방문해 가져와야 했으며, 또 어떤 서류는 기준일(12.31)에 맞춰 발급을 받아야 했다.
‘이걸 다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단순히 종이 몇 장 모으는 일이라 치부하기엔 요구되는 세밀함의 밀도가 높았다. 연말 연휴와 겹친 관공서의 일정, 그리고 익숙지 않은 발급 절차들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니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기초의원이라는 도전이 본격적인 레이스에 서기도 전, 이 종이 뭉치들을 채우는 인내심 테스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진짜 당혹감은 스크롤을 내릴수록 짙어졌다. 준비해야 하는 서류 목록의 1번부터 20번까지 길게 이어진 항목들 일부에는 괄호가 따라붙어 있었다.
(직계존비속 포함)
마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그 다섯 글자가 생경하고도 엄중하게 다가왔다. '직계존비속'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 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나를 기준으로 위로는 부모님(존속), 아래로는 자녀(비속). 결국 나를 둘러싼 가장 가까운 이들의 삶을 모조리 증명해내라는 뜻이었다.
단순히 한 페이지의 서류가 늘어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매 항목을 확인할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공적인 검증의 영역으로 호출되었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아이, 그리고 어린이집에 다니는 미취학 막내의 이름까지 서류 목록에 올려야 했다. 아직 세상의 복잡한 규칙조차 모르는 아이들의 깨끗한 이름 옆에 '재산신고'니 '체납여부'니 하는 무거운 단어들이 덧씌워지는 것을 보며 묘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마음을 눌렀던 건 부모님이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의 지난 시간을 서류로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죄송스러웠다. '엄마, 아빠. 저 출마하려고 하는데 두 분 서류가 필요해요.'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필요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나의 꿈을 위해 가족의 사생활까지 시험대 위에 올려야 하는 것. 그것은 공직에 도전하는 이가 짊어져야 할 첫 번째이자, 가장 아픈 책임감이었다. 출마하겠다는 나의 결심에 따른 과정은 결국 나뿐만 아니라 내 소중한 사람들의 삶까지 책임지겠다는 서약과도 같았다.
막막함을 뒤로하고 우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국세청 홈택스, 정부24,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까지.
예전처럼 수많은 보안 프로그램을 깔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간편인증 클릭 몇 번이면 나라는 개인의 기록이 모니터 위로 투명하게 쏟아져 나온다. 기술은 편리해졌지만, 그 편리함이 주는 속도는 오히려 묘한 긴장감을 더했다. 클릭 한 번에 나의 소득이, 나의 납세 실적이, 그리고 내가 잊고 있었던 과거의 흔적들이 여과 없이 서류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화면마다 띄워진 나의 데이터들을 응시하며, 나는 정치의 시작이 화려한 연설이나 대단한 선언이 아니라, 이 건조한 숫자들을 묵묵히 마주하고 정리하는 일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