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버지 1

by 이순직

토요일 저녁은 언제나 아래층 집으로 내려간다. 길 건너편에 사는 동생도 약속 없으면 참석한다. 어쩌다 제수씨와 조카까지 오면 일주일 내내 정적이 쌓여있던 아래층 집은 손녀 둘, 손자 하나, 아들 둘, 며느리 둘로 집안이 왁자지껄하다. 어린 탓에 낯가림 많은 손자는 서먹서먹해한다.


옆 동네 누님과 캘리포니아 산호세(San Jose)에 사는 막내가 없는 밥상이 서운할 만도 하지만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는 아들 부부의 토요일 저녁 나들이를 즐긴다. 몇 해 전부터 서예에 부쩍 재미 붙여, 사는 일에만 골몰해야 했던 젊은 날들의 시름도 덜어낸다.


해방 앞뒤로 태어난 세대들이 거쳐야 했던 삶의 굽이를 얼추 짐작할 수 있지만, 상처 입은 속내까지 알 도리가 없다. 돌이켜 보면 식민지에서 태어나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산업화와 정보화 사회에 도착하기까지 그 세대들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힘겨움과 슬픔을 어루만져준 적이 아들 세대는 한 번이라도 있던가.


맏며느리인 아내의 수고로움이 녹아 있는 저녁상은 보통 술상으로 시작한다. 아버지와 며느리가 술잔 주거니 받거니 하고 어머니와 아들이 주거니 받거니 한다.


“이런 풍경은 다른 집엔 없을 거다.”


빈속에 소주 한잔 걸치는 아버지는 넉넉한 웃음 짓는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거침없이 진행될 즈음 서울행을 결심한 아버지가 집 팔고 땅 팔던 저녁 한때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풍산벌 너머로 짙은 노을이 가난의 전주곡처럼 들려왔을 터이고 무인도와 다름없는 서울에서 살아갈 날들에 대한 막막함 역시 는개처럼 어깨와 등을 축축하게 짓눌렀으리라.


뒤늦게 깨달았지만 삶은 살아갈수록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다. 달 없는 밤길 혼자 걷는 일이다. 낭떠러지 위 좁은 외길이거나 들판의 밤길일 수도 있다. 문제는 혼자 걷는 것과 주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삶의 풍경은 등 뒤로 밀려나야 보인다. 돌아보니 아찔한 구름다리구나.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다.


젊은 아버지는 이발사였다. 루핑 지붕 판잣집이 빼곡히 들어선 성북구 하월곡동 달동네 초입에 허름한 이발소를 차렸다. 시골 이발 기술이 통한 것은 달동네 주민들 역시 읍면리(邑面里) 출신이기 때문.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 기억 또렷하지 않지만 그 무렵 나는, 커서 이발사가 되고 싶었다.


남자에게 세상은 도전해야 할 책들로 빽빽한 도서관이지만 아버지가 되면 가족부양만 있다. 여기서 기억 하나, 물비누가 있다. 아버지는 물비누를 만들어서 다른 이발소에 공급했다. 실용신안까지 받았지만, 전쟁이 아니던가. 몇 년 뒤 물비누는 샴푸라는 이름의, 대기업이 독점하는 상품이 되었다.


어두컴컴해서야 좁은 이발소 문을 닫고 달동네 오르막 올라가면서, 1969년의 겨울바람 소낙비처럼 맞으며 젊은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양해야 할 식구들과 녹록하지 않은 현실과 끼니와 연탄 걱정에 빈 주머니만 만지작거렸을 것이다. 그 시절에도 여전히, 가난한 가장은 살아감의 힘겨움 앞에서 자식들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희망 삼았을 게 분명했다. 어떤 날은, 달동네 꼭대기에 위태롭게 매달린 사글셋방이 가까워질수록 눈가에 이슬 촉촉이 맺히기도 했을 것이다. 단칸방 칼잠으로 지친 하루 달래면서 코밑 스멀거리는 연탄가스도 자식 몫까지 도맡았을 거다.


그런 날들은 서너 해 이어졌고 가난은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이나 이름 같아졌다.


달동네의 고통스러운 내핍생활 덕분에 31번지로 이사할 수 있었다. 무허가이지만 아버지 집이고 이발소였다. 젊은 아버지의 가난이 씻기는 듯했다. 이발 기술도 서울 중심가를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었고 낯선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천성이라 동네 사랑방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방을 늘여 전세나 사글세를 놓았다. 서울 이주민 1.5세대에 속하는 자식들은 달동네에서 느닷없는 가난에 놀라기는 했지만 조금씩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은 살아낼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몇 년이 지나자,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터졌다.


강제 철거였다. 점유권은 인정되지 않았고 보상은 없었다. 이백여 가구가 넘는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던 때보다 더 초라한 빈손으로, 변두리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젊은 아버지 역시 피곤한 하루 잠재울 방 한 칸 없는 집 밖으로 내몰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거나 진배없었지.”


맏손녀의 까다로운 짧은 입을 빙그레 바라보던 아버지의 회상이 소주잔 속에서 흔들린다. 베란다 밖에는 시간처럼 차곡차곡 어둠 쌓이고 겨울 매운바람이 거리를 훑고 지나간다. 맏며느리는 아버지의 참담함을 짐작할 수 있다는 눈빛이다.


그 무렵 손때 묻은 가위며 면도칼, 바리캉이 담긴 낡은 가방 들고 아버지는 벌방으로 갔다. 지금이야 풍기역에서 차로 이십여 분 달리면 석개포가 있고 오십여 가구 남짓한 벌방이 나타나지만 사십 년 전에는 하루 두 번 비포장 길 달리는 버스가 있었을 뿐이다. 논농사와 밭농사가 전부인 벌방에 이발 손님이 많을 리 없다. 이발은 소일거리이고 가슴 저 밑바닥에 쌓인 실패의 상처를 하나씩 씻어내는 일이 더 중요했으리라. 저마다 절벽 구석에서 위태롭게 피어난 동강할미꽃 보며 경탄하고 탐스러워하듯이.


시골 이발소에서 식구를 서울에 두고 바라보는 저녁놀은 무엇일까. 풍산벌 너머로 지는 노을보다 마음 더 아리게 하지 않았을까. 벼랑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삶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는 일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늙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갑작스러운 의문을 만나던 처음 그 순간만큼이나. 먹잇감 잡기 위해 달려가는 동료들을 뒤따르면서도 염두에 두어야 할 그 무엇도 없는, 경험조차 고려할 수 없는 절대 의문 앞에서 그는 생각했을 거다. 맹수나 굶주림, 혹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엇 때문에 이윽고 마지막 숨 거둘 때도 의문 품고 있었을 것이다. 추측해보면 일생을 지탱하는 것은 의문과 살아내야 한다는 명제가 아닐까.


3년가량 살았던 31번지에서 쫓겨나 월계동 우이천 뚝방에 있는 무허가에 세 얻을 때까지 삼사 년 남짓 아버지는 벌방에 있다가, 어느 해 어린이날 며칠 앞두고 식구들에게 돌아왔다.


“서울로 와, 도배를 시작했지. 이발 가위 하나 들고.”


황혼에 접어들어 돌아보는 시간은 누구라도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돌아갈 수 없지만 그 무렵 기억은 또렷하다,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생 때였으니.


일요일이면 젊은 아버지 따라 도배 공사장에 가야 했다. 도배는 기술자와 보조자가 짝 맞춰 일하는데 기술자가 재단과 벽지 붙이기를 하고 보조자는 벽지에 풀칠했다. 커다란 고무대야에 가득한 풀을 솔에 묻혀 방바닥에 재단한 벽지 쌓아놓고 빈틈없이 풀칠하는 일은, 중학생인 나에게 세상에 대한 호기심 북돋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작업 완성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아버지의 서울 뿌리내리기가 그런 노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할 나이였다.


도배 일 주는 지물포에서 간혹 일당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때도 있지만 이발 기술이 밑바탕이 된 도배 기술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입소문도 나면서 일은 끊어지지 않았다. 일감이 아예 없는 겨울에도 가끔 연장 챙겨 나가시곤 했다. 그때마다 막내가 도왔다. 막내는 손재주도 있고 계산이 빨라 기술을 금방 배워, 용돈 궁할 땐 혼자 일을 맡기도 했다.


“사막에 떨어뜨려 놔도 살아낼 놈이야.”


빈손으로 미국에서 자리 잡았으니 아버지 짐작이 맞다. 둘째도 지점장급으로 승진했으니 만년 시간강사로 떠도는 나를 빼면 아버지의 농사가 평년작 이상은 분명하다. 더구나 둘째가 늦둥이 낳아 손자에 목말라하던 갈증도 풀어진 셈이다.


하지만 험난했던 지나온 시간들이 모두 열매 맺은 것은 아니다. 몇은 상처로 남아 마음 밑바닥 저 깊은 곳에서 소리 없이 통곡하고 있다. 외손자 죽음이 그렇다. 아니,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외할아버지인 아버지의 깊은 슬픔이 되고 있다. 대학교 신입생이던 외손자의 예상치 못한 죽음은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가족사의 치부이고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멍에가 될 것이 분명하다.


슬픔이 깊어지면 팔자가 되고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대부분 삶에 찌든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서실에서 글 쓰시는 아버지 뒷모습이 문득문득 거대한 침묵처럼 보이곤 했다.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베란다까지 밀고 들어온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둘째가 일어섰다.


“그만 가거라. 피곤할 텐데.”


불콰해진 어머니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손자와 둘째 며느리도 일어섰다. 언제나 그렇듯 둘째가 먼저 집으로 간다. 현관에서 낯가림이 사뭇 없어진 손자의 씩씩한 ‘안녕히 가세요!’를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받고 나면 맏손녀의 ‘오늘도 틀리게 말하네!’라는 목소리가 거실에서 찰랑거린다.


남은 술상 앞에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 중년인 내가 다시 앉으면 맏며느리인 아내는 설거지를 시작한다. 수고로움이 없는 편안함은 애초에 없다는 생각을 주섬주섬할 무렵 아버지는 인천집 얘기를 꺼내신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아주아파트. 아버지가 무허가가 아닌, 법이 보장한 집주인으로서 서울 이주 처음이었다.


그러나 인천에서 나 혼자, 현관문 열면 세간 하나 없는 거실과 방들 사이에서 유령처럼 살았다. 살림살이가 없어 흔적 남기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울살이가 고단해지면 인천집으로 와서 하루나 이틀 동안 삶의 힘겨움 풀어놓고는 했지만 집은 생활 터전과 거리를 감당할 수 없을 때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 급기야 낯선 집에 들어선 느낌마저 들었을 거다. 거실과 안방 가득 놓인 힘겨움을 혼자 남은 나는 내내 곱씹어야 했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들은 살아낸 아버지의 삶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것이라고 여겼을까. 아버지가 살아낸 시간의 그림자 밖으로 나가기 어렵다고 짐작했을까, 그 밖으로 성큼 걸음 내걸어야 아들일까.

이년 후 인천집을 팔고 서울에서 작은 연립주택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서울 이주 삼십여 년 만에 비로소 아버지는 생활 터전 안에 안전한 집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사 년 후에 주공 아파트로 이사했다.


“끝마디가 다르지?”


늙은 아버지는 양손 곧게 펴서 내민다. 평생 노동으로 담금질한 투박한 손등이 거대한 너럭바위처럼 보이는데 정말, 왼손과 오른손 새끼손가락 끝마디가 다르다. 오른쪽 손가락 끝마디가 더 두툼하다. 불혹을 한참 넘긴 내가 지금까지 몰랐던 아버지 새끼손가락.


“그때 생각하면 두 가지가 떠올라. 석개포와 이 손가락.”


늙은 아버지는 한동안 소주잔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들이킨다.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나? 키보다 긴 총 메고 마을로 들어왔지. 창현이 집에 묵었는데 닭 잡고 돼지 잡고 그랬어. 이북 돈 주면서. 그해 여름 오죽 더웠나. 석개포에서 홀라당 벗고 멱을 감는데 불알이 이제 막 거뭇거뭇한 거야. 석개포 물은 또 얼마나 푸르던지!”


달동네 판잣집에 살 때 밥숟가락 줄여보자는 젊은 아버지 요량으로 방학 때마다 유배 가듯 벌방 사갑리에 갔다. 나와 누나는 중앙선 열차 타고 간이역에도 정차하는 지루함 끝에 풍기역에 내렸다. 그때도 매미 소리가 쩡쩡 울리던 여름은 유난히 더워 석개포에서 물놀이하곤 했다.


“하루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그만 새끼손가락 끝마디를 뚝 하고 잘라먹었지 뭐야. 열세 살쯤 되었을 때니 낫질이 서툴렀지. 어떻게 산에서 내려왔는지, 누가 새끼손가락 붙여주었는지 기억에 없어. 군의관이었는지 의무병인지, 석개포에서 같이 멱 감던 소년병이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떨어진 것도 묶어놓으면 붙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사갑리 뒷산 어디쯤에서 새끼손가락을 잘라 먹은 어린 아버지가 그려진다. 나도 밥값 하기 위해 하루에 한 번 뒷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야만 했다. 산비탈에서 피가 철철 뿜어져 나오는 손가락 움켜쥐게 하고 서둘러 마을로 데리고 온 이는 아마도 같이 나무를 하던 소년병이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늙어버린 소년병이 아니었다면 나는 손가락 끝마디가 없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을 거다.


“며칠 있다가 이북 돈 주고는 가져가 버리는 거야. 소를 먹이고 있었거든. 그깟 이북 돈은 쓸모도 없지. 소 한 마리 값이 당시엔 얼마나 비쌌는데. 저녁때, 그래도 안 되었는지 소머리를 갖다주더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올 때처럼 모두 가버리더군.”


풍기 쪽으로 난 비포장 길을 줄지어 하염없이 걸어가는 그들 뒷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줄 맨 끝에 총과 군장을 무겁게 멘 소년병은 무사히 집에 갔을까. 충청도나 경기도 어디쯤 묻혀 있을까.


“서실에서 글 쓸 때도 문득문득 그때가 떠오르는 거야. 그립다는 거겠지. 그때가. 그해 유별나게 무더웠던 여름날이. 석개포에서 멱 감던 그때가. 형 또래 그 군인이. 막 거뭇거뭇해지는 불알들이.”


늙은 아버지는 술잔 내려놓고 일어선다. 거실 가로질러 서실로 들어가 형광등 켜고 의자에 앉는다. 책상 위에 한지가 놓여있다. 벼루에 쓱쓱 먹을 간다. 한없이 느릿느릿 간다. 이윽고 붓을 든다. 뒷모습만 보아도 표정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나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을 쓸 것 같지 않다. 회자정리(會者定離)나 수구초심(首丘初心) 쓰지 않을까. 혹은 내가 모르는 늙은 아버지만의 유년을 쓸지도.


마지막 잔을 비운 나는 토끼몰이 하듯 아내와 두 딸 앞세우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다시 토요일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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