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의 형성과정 연구
― 담론(discourse)을 중심으로
- 모든 인식은 선택적이지 않는가?①
1. 연구자세
임화의 이식문화론은② 극복의 대상이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현대적 형태를 갖춘 단편소설이 오로지 자생적이었다는 판단도 경계의 대상이다. 왜냐면 문화는 충돌과 흡수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재생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땅이 비의 길이 되듯이 세상 모든 사람이 문화의 길이다. 손쉬운 예로 콩쥐팥쥐와 같은 설화로 묶을 수 있는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서 채집되고 있으며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 서구적 합리주의에 기초를 둔 지식을 들고 식민지 무렵에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 역시 문화의 길이었다.
문화의 충돌과 흡수는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는 식의 설명은 불가능하고 설득력도 없다. 하나의 문화적 토양 위에 이질적인 문화가 유입되는 초기에 반드시 문화제휴가 나타나며 이러한 제휴 속에서 충돌과 흡수라는 문화 현상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유입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단편소설의 형성에 기여한 작가들이 유학생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화 양식 중에서 문학은 의미와 더욱 밀접하다.③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가 말하는 의미와 구속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는데 의미는 참여 수단이며 의미를 통해서만 자신을 스스로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구속한다는 것은 사회에의 참여를 뜻한다.④ 실존철학자로서, 참여 문학자로서 그의 정신 단위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그에게 의미는 곧바로 언어와 연결된다.⑤
문학을 제외한 다른 문화 양식, 즉 연극·무용·음악·미술 등이 의미와 관계없거나 그가 얘기한 뜻으로의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문학은 다른 문화 양식보다 의미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문학의 재료인 언어는, 시인에게 언어는 기호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이지만, 도구로써 언어를 선택한 산문은 다른 문화 양식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며 포괄적인 수용력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굳이 사르트르의 의미를 좇지 않아도 문학은 의미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문학연구가 의미연구로 치중되는 경향을 막을 순 없다. 문제는 문학연구가 자칫하면 사회학의⑥ 영역으로 귀속되거나 철학의 영역에 머무르는 결론을 맺을 때이다. 그런 결론은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문학의 존재 이유를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문학의 관심은, 특히 소설의 관심은 역사를 통해 수없이 반복하는 인간의 속성이나 사건의 유사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전형성이나 가능성의 최대치가 아니라 예외성이다. 즉 예외적 개인과 예외적 사건이다. 영생을 거부한 인간과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에 관심을 둔다.⑦ 그러한 측면에서 문학은 사회학이나 철학과 차원을 달리한다.
본 연구는 단편소설의 형성과정 중에서 특히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초점을 맞춘다.
2. 현대 단편소설은 무엇인가
‘소묘(Sketch)·허황한 이야기(Yarn)·비유담(Parable)·동화(Märchen)와’⑧ 다른 형태인 문학 장르로서 단편소설을 정의하기 위해 네 가지 항목을 설정한다. 정신의 측면에 속하는 것은 언어의식과 작가의식이며 담론에서 표현의 기교에 속하는 것은 소설의 시간과 강렬성이다.
언어의식은 문학의 재료가 언어라는 점에서, 시간은 소설이 유기적 관계의 묶음이라는 점에서, 강렬성은 단편소설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미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구성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져 작가 특유의 개성과 작의를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힘으로써 작가의식이 있는데 단편소설의 담론과 정신을 어우르는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1) 언어의식
현대는 언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에서 그 출발을 찾을 수 있다. 라틴어가 고급스럽고 기품 있으며 사회적 신분을 드러낸다는 인식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민족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유럽의 예를 우리에게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 언어의식이 민족의식과 연결되고 민족의식이 국가의식과 연결된다는 공식은⑨ 단일민족인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이 속된 글(諺文)이라고 불리며 천대받다가 문학 언어로 자리를 잡은 것은 갑오경장(1894) 이후이다. 물론 김만중의 모국어 선언이 있고 구운몽이 한글로 쓰여졌다는 설도 있으나 모국어 선언 자체를 한문으로 기록하였고⑩ 한자로 기록한 구운몽이 발견된 이상 한글설은 신빙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또한 노모를 위해 구운몽을 지었다고 하지만 기생 신분에 불과한 매창(梅窓) 이계생(李桂生, 1573∼1610)이 57수의 한시를 남긴 것과⑪ 비교해 볼 때 사대부의 안방마님이 한문을 모른다는 것은 상식으로 납득 가지 않는다.
이외에도 많은 시조가 한글로 쓰여졌으나 문학을 여기(餘技)로 인식한 정치가들의 작품이어서 엄격하게 말해 문학언어로 정착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갑오경장 이후 안국선(1854∼1928)·장지연(1864∼1921)·신채호(1880∼1936) 등이 주장한 소설의 공리성은 한글이 문학언어로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⑫ 이후의 한글 문학 창작자들은 신소설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인직을 비롯해 일본 유학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나 신소설은 집단창작에 뿌리를 둔 설화형 소설의⑬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작품의 전개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인물의 전형성을 고집하고 있으며 권선징악의 문학적 신념에 묶여 있다. 또한 한글을 문학언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생활어가 아닌 불완전한 언문일치는 현대소설이라 하기에 한계가 있다.
언어의식이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켜 현대의 출발선을 이루었다면 언문일치는 현대문학의 출발 신호이다. 언문일치는 단순히 서술어 처리에서 고대소설의 어법을 버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분리된 말과 글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며 좀 더 과장스럽게 얘기한다면 행동과 글의 일치이다. 소설은 육체적·정신적·심리적 행동에 대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청춘 8호에 게개된 현상문예 응모 광고의 ‘漢字 약간 석근 時文體’는 문학언어가 언문일치(생활어)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형태이다. 실제로 이 응모에 당선된 작품들은 완전한 언문일치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으나 춘원의 <김경>보다 진전된 형태이다.
이 後에 다른 일이 없었던들 少年 金鏡의 靈은 或 즐겁고 安穩하였으리라. 그러나 造物은 그에게 安穩하기를 許하지 아니하여 洪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이런의 「海賊」과 「天魔의 怨」을 보이게 하여, 安穩하던 이 少年의 靈을 散亂하게 한 뒤에, 「文界의 大魔王」이라는 바이런의 傳記를 빌리어, 일찍이 「火の柱」로 불 일던 속 그 모양으로 金鏡의 가슴에 불길을 일으켰다. 이에 少年 金鏡의 靈에는 善天使와 惡天使가 政權을 다투게 되니, 이에 비로소 새 少年은 큐피드의 화살을 맞아 內的 苦悶이란 맛을 보게 되고, 그의 日記에는 「煩悶」이니 「苦痛」이니 「死」니 하는 글자가 자주 나오게 되었더라. (春園, 金鏡, 靑春, 4號, 1915년)⑭
汽車가 南大門 驛에 到着 하였다. 서로 蓮한 七輛 客車는 數百名 乘客을 플랫폼으로 吐하였다. 男兒도 있고, 女子도 있고, 老人도 있고, 少年도 있다. 머리꼬리 길게 늘어뜨리고 퍼런 옷 입은 支那人도 있고, 총대바지를 입고 電線柱 같이 우뚝이 높은 西洋사람도 있고, 서울사람 시골사람 形形色色이 다 섞기여 있다. (李常春, 岐路, 靑春 11號, 1917년)
현재를 기준으로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언문일치가 현대 단편소설의 출발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학의 재료는 언어이고 따라서 언어의식(민족의식과 언문일치)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2) 작가의식
작가가 거리로 나가 구호를 외치고 머리띠를 둘러매야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식의 인식은 사르트르의 생각이다. 시나 소설이 연필 가는 대로 써지지 않는 이상 창작 자체가 ‘행동하는 것’이다. 창작의 본질이 세계에 대한 개인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돈키호테>를 쓰게 했다는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의 경우는 이미 고전이 된 예이다.
창작욕구가 어떤 내용의 결핍이든 혹은 타인에 대한 콤플렉스이든 작가의식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통찰은 생관으로 가능하다. 생관은 자신을 포함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자세와 삶을 사는 자세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의 깊게 생각할 것은 생관과 가장 큰 영향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관이라는 점이다. 태어남은 자의가 아니지만 죽음은 자의일 수 있다. 삶의 끝에서, 죽음에 서서 삶을 바라보고 삶을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순차적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태어남에 서서 삶을 바라보는 자가 있다.
모든 욕망을 벗는 이들은 죽음에 서서 삶을 바라보고 삶을 계획하는 자들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는 나이가 없다’고⑮ 한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ilovich Dostoevski, 1821∼1881)의 삶에 대한 자세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해도 그들을 발견하고 경악하고 머리 숙이는 이들이 시인과 소설가이다. 자신들도 그렇다고 여기면서!
작품을 통하여 작가의 정신을 밝혀 보려는 작업은 평론가의 의무이다. 문제는 많은 종류의 비평이론이 작가들의 더 많은 정신의 문을 여는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린이가 사물을 가장 정확하게 바라보듯이 순수한 독자가 작가의 정신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한다.
작가의식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입장과 인간에 대한 문학의 역할을 축으로 하고 있다. 사회에 무게 중심이 놓이면 참여의 성격이 강하고 인간에 무게가 놓이면 순수의 성격을 가진다. 이때 작가의식이 한쪽으로 반드시 치우쳐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작품의 이해를 위한 도식적 평론이 그러한 인식에 빠지기 쉽지만 개개의 구체적 작품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관념화하기⑯ 즉 지식화 단계에서 곧잘 빠지는 함정이다.
1910년대와 1920년대 단편소설의 작가들은 현상응모나 잡지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세계에 대한 개인의 발언으로써 작품을 구상하고 썼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작가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소설의 시간과 실존적 시간
소설은 두 가지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⑰ 서술시간과 허구시간이다. 서술시간이 창작자의 시간이라면 허구시간은 독자의 시간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문치명은 보통학교 선생인 김만제(털보 선생)의 주선으로 서울로 유학 온다. 그는 털보선생의 집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다가 털보선생의 아들인 김철수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숙을 옮겨 온갖 고생 끝에 학교를 무사히 마친다. 여기까지 소설을 끌고 가는 것은 대부분 전지적 화자의 말하기다. 전지적 화자는 인물의 선견지명을 통해서 고대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평적 말하기에 가까운 진술을 보여준다.
自己의 집은 그 兄 致善으로 因하야 亡함을 免치 못할 줄을 알았다. 그 兄이 亡하야 놓은 後에는 自己에게 復興할 義務가 돌아올 줄로 確信하였다. 自己가 一時의 不孝를 끼치지 아니하면 自己의 집은 永久히 亡할 것으로 認定하였다. (李常春, 岐路, 靑春 11號, 1917년).
전개의 기교적 미숙성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기로>에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후일담 또는 에필로그로 볼 수 있는 결말 부분이다. 후일담과 결말은 성격 자체가 다르다.
<기로>의 끝 부분을 결말로 볼 것인지 아니면 에필로그로 볼 것인지는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문치명이 무사히 학교 공부를 마친 뒤 귀향하던 중 집안의 몰락을 가져온 형 치선의 자살 소동을 목격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는 식의 매듭은 신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주제로의 성급한 집착 탓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이미 예고된 결말이라는 측면에서 결말의 성격보다는 에필로그의 성격이 강하다.
현대 소설에서 주목하는 실존적 시간이 성장 소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실존적 시간은 결말 부분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기로>의 결말에서 실존적 시간이⑱ 나타난다면 충분히 암시된 결말이라 할지라도 에필로그의 성격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서술시간과 허구시간은 말하기와 보여주기라는 담론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다. 말하기는 긴 허구시간을 짧은 서술시간으로 대체한다. 반면 보여주기는 짧은 서술시간을 긴 허구시간으로 만든다. 말하기의 속성은 설명이며 보여주기의 속성은 묘사이기 때문이다.
三年이 지났다(李常春, 岐路, 靑春 11號, 1917년)
房안 아랫목으로 당기어 길게 펴놓은 病席에는 해쓱한 얼굴이, 사람으로 한 번 보면 혼이 떠서 달아나리만큼 무섭게 여윈 婦人 한 명을 누이고, 머리 쪽으로 向하야 左右로 나이, 열 이 삼세 쯤 되는 男子 하나와 열 살이 되었을 낙, 말 낙한 女子 하나가, 갈라 앉아서 이제 곧 숨이 끊어 질듯이 보이는 婦人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앉았고, 발밑으로 멀찍이 親戚인 듯한 늙은 婦人 두 사람이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 있다. 해는 半나절이나 남아 되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물로 씻은 듯이 고요하게 있던 房속은 맥없는 팔로 베개 밑에 앉은 두 아이의 손목을 당기어 마주 잡으면서 마음대로 돌지 않는 혀로 "元아, 永愛야"하는 소리에 寂寞이 깨어졌더라. "너, 너희들 둘은 부디 잘 살아라. 誼 좋게……응 내내……나는 죽어도". (小星 玄相允, 恨의 一生, 靑春 2號, 1914년)
전자는 불과 여섯 음절의 허구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임종의 순간을 묘사를 통하여 독자에게 보여주는 후자의 허구시간은 훨씬 길다. 작의가 말하기나 보여주기를 취사선택한다고 할 때 담론의 구성은 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담론을 어떻게 구성 하였으냐를 통하여 주제에 다가설 수 있다.
그렇다면 “三年이 지났다”라는 말하기는 신학문을 배우는 과정에서의 악전고투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신학문이 몰락한 집안을 재건할 수 있다는 주제에 있다. 단순한 도식에 가까운 플롯은 단편소설의 특징인데 비단 <기로> 뿐만이 아니다. 마을 전체가 구시대의 공간으로 읽을 수 있는 주낙양의 <마을집>도 마찬가지여서 창호는 마을에서 견디기 힘들어한다.
마침내 昌浩는 다시 먼 길을 떠나기로 決心하였다. 바람이 몹시 불어서 생생하던 포플러 잎이 뚝뚝 떨어지는 날 그는 英瑞한테 片紙를 썼다.
-英瑞兄 참 견디지 못하겠소. 참 살 수 없소. 모든 것이 다 꽉 막혔소. 의논할 데가 없소. 그네들의 눈에는 아무 熱도 없소. 아무 感情도 없소. 다만 그저 먹고 입기밖에 할 것이 없는가 보오. 나는 다시 가고자 합니다. 참으로 견딜 수 없소. 그네들은 밤낮 울기만 하오. (……) 나는 이 땅을 咀呪하고 떠나려 하오. 나의 父母의 땅, 나의 先祖의 땅, 이 땅을 咀呪 하려 하오. 아아. (朱落陽, 마을집, 靑春 11호, 1917년)
창호가 가고자 하는 곳은 개화된 공간이다.
<기로>에서 실존적 시간은 설 땅이 없다. 인물이 작품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일구어 낸 결과, 흡사 전리품을 연상하게 하는 성취물이 무게를 지탱한다. 이러한 결론은 서술시간과 허구시간을 통해서 접근해도 같다.
4) 강렬성(intensity)⑲
포우(Edgar Allan Poe, 1809∼1849)에 의하면 단편소설은 반 시간에서 두 시간 사이에 단숨에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세부들이 유일하거나 단일한 효과에 집중되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단편소설은 짧지만 강렬성이 있어야 한다. 이때 강렬성은 결말의 의외성이나 놀라움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작위의 흔적을 지우는 쪽으로 관습을 형성한다.
즉 19세기 작가들의 단편소설에 비해 20세기 작가들의 단편소설은 ‘산뜻하고 인상적인 사건의 정연한 결합’이⑳ 아니다. 삶은 19세기의 단편소설처럼 질서정연한 인과율에 지배받지 않으며 인상적인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는 통찰의 결과이다.
오늘날은 19세기의 강렬성보다는 약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단편소설의 미덕은 강렬성(single effect)에 있다. 그러나 작위적 매듭이 불거지는 결말을 피하고 자연스러우며 설득력 있는 결말로의 강렬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성격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며 작중인물이란 사건의 한정 이외의 무엇이며 사건이란 인물의 설명 이외의 무엇이겠는가?’라는㉑ 인식은 삶을 투명하게 조감함으로써 얻는 문학적 정의 이상으로 단편소설의 작의에 커다란 도움말이 된다.
이상과 같은 언어의식과 소설의 시간, 강렬성과 작가의식을 논의의 바닥에 깔고 담론(discourse)에서㉒ 표현의 기교를 중심으로 단편소설의 형성과정을 더듬어 본다.
3. 단편소설의 형성과정
한문소설과 달리 현대 단편소설은 언어의식에서 비롯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배경이 우리 삶의 터이고 사회이다. 배경이 중국이나 익명의 장소가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시대·관습)에 대한 작가의 자세를 알 수 있다. 또한 고대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의 규격성이㉓ 파괴되고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비록 전지적 화자이기는 하나 고대소설에서 볼 수 있는 논평적 요소가 상당히 사라진다.㉔
소설은 담론과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형식과 내용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이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담론과 이야기는 상호투시적 영향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작의의 궁극적인 목적이 새로운 세계관의 제시라고 볼 때 그것은 담론과 이야기의 이중 구조를 통해 성취되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이 현대 단편소설의 형성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第一段階는 주로 1900年代에 활약한 李人稙∙白岳春史∙夢夢∙安國善∙李鍾麟 等에 의한 準備期요, 第二段階는 1910年代 “靑春”을 主舞臺로 한 玄相允․李光洙에 의한 摸索期, 그리고 第三段階는 “創造” 이후 1920年代의 金東仁∙玄鎭健∙廉想涉∙羅稻香 등에 이어지는 그 完成, 定立期 等의 三段階化가 그것이다.㉕
1) 1인칭 화자 — 현상윤의 <逼迫>
현상윤은 6편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핍박>을 제외하면 모두 전지적 화자가 담론을 이끌어 가고 있다. <핍박>이 가지고 있는 현대 소설의 요소는 1인칭 화자라는 시점에 있다. 1인칭 화자를 선택함으로써 전지적 화자의 논평적 요소를 처음부터 막을 수 있다.
현상윤의 1인칭 화자에 대한 인식은 <핍박>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을 듯하다. 작품을 발표함에 따라 쌓이는 작의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담론 구성력의 축적은 창작욕구가 작가의식으로 승화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즉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보다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효과적인 담론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무슨 病인지는 나도 스스로 알 수가 없다 - 오직 이 便 저 便에서 쏘아 오는 視線이 나로 하여금 못살게 군다. 얘 이놈아 精神 차려라 하는 듯 하다, 이 便에서는 휩싸고 때리는 듯 하면 저 便에서는 내리쓸며 달래는 듯 하다.
“엑 이놈아! 용렬한 놈아……”
“얘 미욱한 놈아 말 들어라……”
라고 하는 듯이 생각한 즉 후루룩 떨리며 땀이 바싹 흐름에 부릅뜨고 보던 눈은 더욱 꺼지는 듯 하다.(玄相允, 逼迫, 靑春, 第8號, 1917년)
1인칭 화자의 시점은 인물의 심리적 움직임을 담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일반적인 담론 주체인 전지적 화자와 크게 구별된다. 화자의 무력감은 병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러나 독자는 여기까지 읽어도 병이 상징하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작품을 모두 읽고 나서 병이 지식인으로써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자괴감과 자조적 피해망상’이라는㉖ 것을 알 수 있다.
"얘 이놈아. 우리는 우리 이마에 흐르는 땀을 먹는다. 손이 조금이나 未安이나 苦痛이 있을 소냐…… 어리고 철없는 놈아. 무엇이 어째 - 權利니 義務니 倫理니 道德이니 平等이니 自由이니 무엇이 어째. 나는 다 모른다. -를 連해 連方 부른다. 빨리 걸어도 천천히 걸어도 이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나는 人生과 行樂이란 것을 생각하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다. 목은 더욱 타고 손은 더욱 탄다.(玄相允, 逼迫, 靑春, 第8號, 1917년)
독자가 인물이 놓인 상황을 판단할 수 있도록 담론을 구성하였다는 것은 현상윤의 다른 소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은 획기적인 발전인데 작가가 인물과 소설의 공간에 대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며 1인칭 화자의 선택으로 효과적인 담론을 구성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현상윤의 다른 소설을 보면 분명해진다.
이렇게 밀려가고 밀려오는 內的 苦痛과 外的 苦痛에 艱辛하게 여윈 몸을 扶持하면서 十餘年 光陰을 정한 곳 없이 꿈같이 지내다가, 하루는 十二月 中旬 때쯤 되는 어느 겨울날인데 通化縣 地方에서 몇 달 동안 돌아다니던 申參奉은 懷仁縣이라는 地方에 오느라고 兩縣 사이에 가로질러 있는 어떤 큰 벌판을 向하고 떠나오던 일이 있었다. (玄相允, 曠野, 靑春, 第7號, 1917년)
<핍박>의 주된 담론 형식은 1인칭 화자의 보여주기이지만 불과 1년 전에 발표한 <광야>는 전지적 화자의 말하기이다. 둘 사이의 독서 효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전지적 화자는 독자와 이야기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는데 소설 상황에 대한 독자의 판단을 오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1인칭 화자는 전지적 화자에 비해 소설 공간에서의 존재를 거의 느낄 수 없다. 독자는 매개 역할을 하는 화자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2) 갈등 — 이상춘의 <岐路>
‘갈등은 플롯을 지탱하는 요소이자 원리가 되면서, 인물구성 및 세계관이나 가치관의 대립을 형상화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㉗ 즉 소설 전개의 추진력은 갈등에 있다. 갈등은 인물들 사이에서, 혹은 인물과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는 외적 갈등이다. 반면 인물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내적 갈등이다.
<기로>는 문치선과 문치명 사이의 갈등 구조를 가지고 있다.
致明의 實兄 致仙은 今年 二十五歲다. 聰明이 卓越하여 일찌기 四書三經을 읽고 外家書도 別로 아니 본 것이 없어 延安郡에서는 屈指하는 文章家이었다. 性質이 寬厚할 뿐 아니라 詩調三章을 제법 부르고 律 한 章 똑똑히 하고 술 잘 먹고 놀기 좋아함에 사람마다 風流男兒라 일컬었다. 致明과 비록 兄弟이지마는 意志와 趣味가 氷炭과 같았다. 簡單히 말하자면 致仙은 理想界에서 精神上 快樂을 얻으려 하고 致明은 現實界에서 肉體的 辛苦를 免하리라 하였다. (李常春, 岐路, 靑春 11號, 1917년)
문치선은 구학문을 상징하고 문치명은 신학문을 상징한다. 단순한 인물 갈등이 아닌 이중적 갈등을 가지고 있어 <기로>는 주제의 형상화에 손쉽게 다가선다. 이것은 단편소설이 가지는 길이의 제약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작의를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계산된 복선이어서 이상춘의 작가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소설은 시와 달리 각각의 작품마다 세계관 자체가 변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주는 장르이다. 그만큼 창작의 필요 조건들이 까다롭다. 즉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 주지 않는 소설은 여러 편이 같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시에 비해 생명이 짧다.
어느 한 지점에서 같은 눈높이로 여러 사물을 보았을 때 각각의 사물이 한 편의 시가 된다면 소설은 서 있는 지점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문학적 가치가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소설은 시에 비해 담론이 발달했다. 즉 소설은 시와 비교해서 보다 철저하게 담론을 어우를 수 있는 작가의식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정서가 시대적․사회적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은 결국 작가의 순수한 몫은 독특한 이야기의 만듦이 아니라 담론의 효과적인 어우름에 있다는 다른 표현이다.
이상춘의 다른 작품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㉘ <기로> 한 작품으로 갈등이 소설에서 어느 정도의 추진력과 효과를 잉태하는가를 보여준 것은 주의할 만한 점이다.
3) 3인칭 객관적 시점 — 주낙양의 <마을집>
화자는 시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㉙ 즉 시점은 화자의 눈높이다. 시점은 화자가 소설 공간을 어느 정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분류한다.㉚
대부분의 고대소설과 신소설은 3인칭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소설의 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화자의 논평적 참여가 특징이다. 그러나 주낙양의 <마을집>에서는 인물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논평적 참여는 제거된다.
昌浩는 自己 본 곳에 돌아왔다. 조그마하고 亂雜한 마을로 돌아왔다. 그의 둥글고 검붉은 얼굴은 그가 感情에 優越한 것을 나타내었다. 그의 肉體는 살찌지는 않았으되 튼튼하다. 크지는 못하되 맑은 눈동자 속에는 사람을 뚫는 熱情이 보인다. 그의 나타남은 마을 안의 한 驚異가 되었다. 그는 自己 家族에게도 놀램을 주었고, 온 동내에도 注意를 받을 만한 影響을 끼쳤더라. (朱落陽, 마을집, 靑春 11號, 1917년)
고향을 떠나 신학문을 배우고 돌아온 창호의 귀향은 이처럼 담담하게 그려진다. 화자가 소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며 창호가 고향에서 처음 맞닥뜨린 것은 마을 사람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저런 소리 끝없이 나온다. 달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모기 피우는 쑥의 烟氣가 어렴풋 오르는 것이 보인다. 박쥐가 푸드덕푸드덕 날며 어린아이들은 반디를 잡노라 몰려다닌다. 그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지 알 수 없다. 그 사람들은 前이나 이제나 變한 것이 없는 듯 하다. (朱落陽, 마을집, 靑春 11號, 1917년)
농사일을 마치고 동네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서 창호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는데 두 개의 사건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된다. 하나는 친구의 결혼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시집간 고모가 집으로 돌아온 일이다. 친구인 영서는 어머니가 정해 놓은 여자와 사귀던 혜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아, 어머니는 病床에서도 그냥 안된다, 안된다는 소리만 하니, 차마 낸들 病母의 말을 어길 수야 있나. 그렇다고 나의 主義로 말할 것 같으면 저 惠秀와 結婚을 하는 것은 마땅한 義務인 줄까지 여기는데…… 요새 너무 답답해서 도무지 一平生 獨身으로 살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네……” 그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바깥을 내다보면서 묵묵하다.
“慈親님은 아직 그냥 그 고집이신가”
“글쎄 문벌인지 地位인지 무언지 해 가지고 있네 그려. 요새는 잠꼬대까지 그 소리라네” 英瑞는 이따금 이따금 말을 멈춘다. “그뿐인가 어제는 부르시더니 무슨 金德川인가 李德川인가의 딸을 장가 들라고 야단이데. 마지막에는 말 안 듣겠거든 나가라고, 너 같은 不孝한 子息은 못났다 야단이야” (朱落陽, 마을집, 靑春 11號, 1917년)
사흘이나 지난 날 아침 P市에서 工場을 열고 있는 姑母의 男便이 왔다. 祖父는 그가 오자마자 바깥으로 나가 버리고 姑母는 房안에 꼭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祖母만 머리를 득득 긁으면서 마중 나갔다. 아직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 昌浩는 表叔에게 인사를 하였다.
祖母와 表叔은 둘이 앞뜰에 앉아서 가만가만 이야기를 한다.
“이번엔 아무래도 三百圓은 있어야”함은 表叔의 소리다.
“글쎄, 이 사람아 무슨 돈이 三百圓이 있겠나”
(……)
“애이 놈, 우리 딸을 十年이나 苦生 시키고, 우리 돈을 얼마나 빼내서 먹고, 이놈, 이제 와서 우리 딸을 버려 응 이놈” (朱落陽, 마을집, 靑春 11號, 1917년)
가문을 따져 배우자를 선택해 주는 어머니와 사귀던 혜수 사이에서 영서의 고민은 직접화법으로 처리되어 있다. 물론 고모부가 고모를 쫓아내고 찾아와서 돈을 요구하는 것도 직접화법이다. 직접화법은 화자의 존재가 느껴지는 간접화법보다 더욱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직접화법의 사용은 3인칭 객관적 시점을 철저히 이해했다는 것이며 효과적으로 담론을 어우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4) 단편 담론의 완성 — 김동인의 <감자>
바흐찐(Mikhail Mikhailovich Bakhtin, 1895∼1975)이 가지고 있었던 형식에 대한 생각들을 담론에 원용할 수 있다.㉛ 즉 소설이 가지는 담론을 이야기 안에서 실현되는 ‘내용의 형식’으로 인식할 수 있다. 즉 담론은 ‘이야기 안에서 철저하게 실현되고 소재에 붙박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감자>에서 찾을 수 있는 담론의 요소들을 분석하여 그것들이 이야기에 어떤 식으로 용해되었는가를 혹은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그리하여 담론의 총체적 효과가 이야기를 어떻게 하여 강렬성에 이바지하도록 했는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1) 창작자세
창작활동에서 개인은 때때로 ‘요동하는 생’에서 빠져 나오듯이 ‘영감, 달콤한 음향과 기도’의㉜ 세계로 들어간다. 그러나 요동치는 현실 속의 인과율이 현실보다 영감, 그 달콤한 허구에 더욱 냉혹하게 적용하는 것이 창작자세의 기본이다. 소설은 현실의 예민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감자>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창작자세는 1910년대 작가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오늘날 ‘문학가’라기 보다는 ‘사회과학자’로 남아 있는㉝ 테느(Hippolyte Taine, 1828∼1893)의 환경결정론이 대표적이다. 환경결정론은 졸라(Emile Zola, 1840∼1902)를 주축으로 하는 자연주의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것인데 인물이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졸라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자연주의를 문학에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연주의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규모에서는 궁색하지만 창작자세의 측면에서 <루공 마까르叢書, Les Rougon-Macquart>와㉞ 비교할 수 있는 것이 <감자>이다.
작가는 복녀의 성격 변화의 요인이 복녀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환경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남편의 게으름, 칠성문 밖 빈민굴의 생활양식, 매춘의 공공연한 인정 등이 복녀의 성격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작가가 인물 외적인 요소를 성격 변화의 근거로 삼으려고 한 것은㉟ 인간의지를 무시한 측면에서 한계가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환경을 파악하는 인간의 인식이 더욱 중요하다’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아무튼 <감자>의 경우 비교적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남편의 게으름은 천성에서 찾을 수 있고 왕서방의 결혼은 재력으로 합리화된다. 뿐만 아니라 왕서방은 복녀와 매춘행위를 한 것이지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㊱ 이러한 치밀한 플롯은 보다 객관적으로 보다 냉혹하게 삶의 밑바닥을 투시하고자 하는 창작자세에서 비롯된다.
(2) 선택적 전지 시점
작가는 이야기에서 작의를 결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시점을 선택한다. 시점은 이야기를 재단하는데 독자는 어쩔 수 없이 화자가 펼쳐 놓은 이야기만 읽게 됨으로 화자의 시점 안에 갇힌다.
선택적 전지 시점은 화자가 여러 인물 중에서 특정한 한 두 명 인물에게만 전지적 시야를 갖는 경우를 말한다. 화자는 선택한 인물의 과거와 심리, 정신의 양태까지 포착할 수 있어 사건에 대한 그 인물의 심리적 반응이나 정서, 과거 사실의 연상 등 전방위(全方位)의 조감이 가능하다. 그러나 선택적 전지 시점이기에 선택하지 않은 인물과의 관계를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왜냐면 아무리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일지라도 인물들 사이의 관계의 망이 의미의 망을 형성하고, 의미의 망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불행한 결말은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8∼1962)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1940>처럼 예기치 않는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오해나 편견 등으로 생긴 뒤틀린 관계에 원인을 두는 것이 설득력 있다.
<감자>의 불행한 결말이 감동을 일으키고 현실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 수 있는 이유는 오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복녀는 화자가 전지적으로 투시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독자는 복녀의 강짜나 질투를 읽을 수 있지만 왕서방이 ‘돈 백 원으로 어떤 처녀를 하나 마누라로 사 오게’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복녀의 집에서, 자신의 집에서 복녀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한참 왕서방이 눈만 멀찐멀찐 앉아 있으면 복녀의 남편은 눈치를 채고 밖으로 나간다. 왕서방이 돌아간 뒤에는 그들 부처는 1원 혹은 2원을 가운데 놓고 기뻐하곤 하였다. (……) 왕서방이 분주하여 못 올 때가 있으면 복녀는 스스로 왕서방의 집까지 찾아갈 때도 있었다.
(……)
“복네 강짜하갔구만.”
동네 여편네들이 이런 말을 하면 복녀는 ‘흥’하고 코웃음을 웃곤 하였다.
“내가 강짜를 해?” 그는 늘 힘있게 부인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생기는 검은 그림자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놈 왕서방, 네 두고 보자.”
독자는 화자에게 어떤 설명도 요구할 수 없다. 화자 역시 왕서방의 마음속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하거나 분석하여 복녀의 죽음을 해석해야 한다. 죽어야 할만큼 복녀는 왕서방에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왕서방의 결혼에 복녀는 아무리 적은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 매춘부에 불과하다. 복녀가 왕서방에게 이쁘게 보이기 위해 얼굴에 하얗게 분을 바르고 신혼방에 들어가자 신랑 신부는 놀란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라는 식으로 놀라는 것이지 와야할 일이 결국 왔다는 식으로, 예상은 했으나 때를 알 수 없는 일이 닥쳐왔을 때의 놀라움은 아니다. 이런 왕서방의 태도에서 복녀가 자신은 매춘부에 불과하며 왕서방의 결혼에 결코 강짜나 질투를 부릴 입장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오해로 인한 불행한 결말은 피할 수 있다.
복녀의 오해는 왕서방을 상대로 사랑을 나눈 것이지 매춘을 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질투나 강짜는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며 매춘행위에는 뿌리를 둘 수 없는 감정이다. 반면 왕서방은, 그의 결혼이 암시하는 것이지만, 복녀에게서 몸을 산 것이지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복녀의 오해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나타난다. 선택적 전지 시점은 죽음에 이르는 불행한 결말을 극대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왕서방의 내면까지 꿰뚫을 수 있는 무제한적 전지 시점은 이러한 결말을 이끌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자>의 경우 이야기 속에 작의를 심을 수 없게 할 가능성이 높다.
(3) 냉정한 화자
‘화자문제는 시점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두 가지는 같은 문제는 아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물의 안과 밖이다’고㊲ 하면서도 그 차이점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시점은 인칭과 밀접하다. 1인칭 시점이니 3인칭 시점이니 하는 용어가 그렇다. 그리고 주관적이니 객관적이니 전지적이니 하는 용어는 서술할 수 있는 범주를 뜻한다. 즉 1인칭 주관적 시점은 자신의 이야기를 주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 안에서 전개하는 것이다. 이때 타인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며 상황이나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3인칭 무제한 전지적 시점은 모든 상황과 인물의 겉과 속을 신의 눈으로 파악하고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을 말한다. 즉 시점은 화자의 눈높이다.
‘화자는 설화자(구인환․구창환, 문학개론, 삼영사), 서술자(이재선, 한국현대소설사, 홍성사), 작중설자(라보크, 송욱 옮김, 소설기술론, 일조각) 등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화자로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㊳ 본다.
연구자는 두 종류의 화자가 있다고 본다. 존재론적·인격적 구체성을 가지는 화자적 작중인물과 인격적 자질만을 가지는 화자가 있다는 것이다. 즉 화자는 인격적 자질만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존재론적 구체성을 더하면 화자적 작중인물이라는 쪽으로 용어의 구분이 가능하다.㊴ 이것은 시점에 의한 화자이론의 이론적 오류 ― 한 편의 소설에서 오직 하나의 시점이 존재한다는 이론적 오류를 극복할 수 있으며 시점이론을 포괄할 수 있는 화자이론의 정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㊵
인격화된 일인칭 서술자와 작가적 삼인칭 서술자의 주된 다른 점은 전자가 재현된 현실(represented reality), 인물들이 살고 있는 허구적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 후자는 그렇지 않다. 일인칭 서술자는 그가 허구 세계 안에 신체적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작가적 삼인칭 서술자와 구별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일인칭 서술자는 인물들의 세계 속에 구체화(embodied) 되어 있다. 작가적 삼인칭 서술자도 자신을 부를 때 ‘나’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는 허구 세계의 안에도 밖에도 구체화되어 있지 않다. 인격적인 자질(features)들은 물론 작가적 서술자한테도 마찬가지로 보이게 되지만, 그 때문에 신빙성이라는 규준이 그에게도 역시 적용되는 것이지만 - 그러나 이 인격적인 자질들은 그의 신체적 존재와 구체성(corporeality) 개념과 연계되지 않는다.㊶
구체화란 감정·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육체화하기, 정신에 형태를 부여하기 따위를 말한다. 슈탄젤이 말하는 구체화는 결국 육체화된 작중인물을 뜻한다.
인격적인 자질은 무엇인가? 인격이란 윤리학의 측면에서, 도덕적 행위의 주체로서 진위․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율적 의지를 가진 존재를 뜻하며 심리학의 측면에서는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유일하고도 지속적인 자아라고 의식하는 작용을 뜻한다.
슈탄젤은 육체화된 작중인물과 인격적 자질이 연계되었을 때는 소설 공간에 화자가 존재하는 것이고 화자가 비록 육체화되지 않더라도 화자의 인격적 자질들은 소설 공간의 적재적소에 숨어 있다고 정의한다. 인격적 자질은 화자의 말하기나 보여주기를 통하여 대상을 가치판단하고 사건의 중요성에 대한 등급을 정하고 상황 전개에 따라 사건의 폭을 조절한다.
화자는 하나의 사건에 의해 유발되는 심리적 영향을 주요 인물에게 집중시키면서 주변 인물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제한한다. 그리고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보편적 편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화자가 펼쳐 놓은 범위 안에서만 소설을 읽는 것이다.
<감자>의 화자는 인격적 자질만 있는 화자이다. 화자의 가치판단이 보이는 부분은 두 곳이다.
싸움, 간통, 살인, 도둑,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밀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 (사 농 공 상의 제2위에 드는) 농민이었다.
칠성문 밖을 한 부락으로 삼고, 그곳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정업은 거러지요, 부업으로는 도둑질과 (자기
끼리의) 매음, 그밖에 이 세상의 모든 무섭고 더러운 죄악이 있었다.
이러한 냉정한 화자는 창작자세와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 1910년대 작가들과 달리 환경에 영향을 받는 보편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작의와 만나 허구에 대한 극단적인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냉정한 화자가 나타났다. 즉 냉정한 화자는 복녀의 삶에 대한 판단을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고 있는 것이다.
(4) 플롯
‘플롯은 행위의 배열이다.’㊷ 그러나 플롯 속의 행위는 영향관계를 가져야 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영향관계는 인과율이다. 행위는 인과율에 의해 짜여져야 하며, 그것들이 뭉뚱그려져 처음․중간․끝의 형태를 가질 때 플롯이 된다.
<감자>에서 읽을 수 있는 행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배열할 수 있다.
㉮ 복녀는 80원에 팔려 20년 연상의 홀아비에게 시집간다.
㉯ 부부는 막벌이 끝에 막간(행랑)살이로 들어간다.
㉰ 남편의 게으름 탓에 쫓겨난다.
㉱ 부부는 칠성문 밖 빈민굴로 들어간다.
㉲ 복녀는 송충이를 잡는 인부로 뽑힌다.
㉳ 복녀는 일 안하고 품삯 많이 받는 인부가 된다.
㉴ 복녀는 동네 남자를 상대로 매춘을 한다.
㉵ 복녀는 도둑질하다 왕서방에게 들켜 매춘을 한다.
㉶ 왕서방은 무시로 복녀를 찾는다.
㉷ 왕서방이 처녀를 백 원으로 사, 결혼한다는 소문이 퍼진다.
㉸ 복녀는 강짜를 한다.
㉹ 왕서방은 결혼한다.
㉺ 복녀는 신혼방에 들어가 왕서방을 유혹한다.
㉻ 복녀는 낫으로 왕서방을 위협한다.
㉠복녀는 낫을 빼앗겨 죽는다.
㉡시체는 왕서방과 남편, 한방의사의 합의로 뇌일혈로 죽었다는 진단으로 공동 묘지에 묻힌다.
㉮에서 까㉲지는 남편의 게으름으로 묶을 수 있다. ㉳에서 ㉶까지는 도덕관의 변화이다. ㉷에서 ㉠까지는 복녀의 오해이다. ㉡는 남편의 게으름과 도덕관의 변화, 복녀의 오해로 빗어진 결과이다. 이렇게 본다면 <감자>의 핵심적인 사건의 동기는 오해다.
오해를 가능하게 한 것은 크게 보아 환경이지만, 좁게 보았을 때는 환경을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는 복녀의 인식이다. 즉 남편의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은 매춘을 정당화시켜 주지만, 왕서방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생각한 것은 오로지 복녀의 인식에 달려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작의는 ‘환경의 영향으로 인간이 어떻게 변해 가는가’이지만, 재해석의 미덕이 반드시 희곡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환경을 파악하는 인간의 인식이 더욱 중요하다’로 <감자>의 주제를 새롭게 읽을 수 있다.
(5) 서술시간과 허구시간
<감자>을 읽으면서 독자가 느끼는 허구시간은 불과 30분에서 40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서술시간은 6년이다. 복녀는 ‘열 다섯 살에 동네 홀아비에게 80원에 팔려서’ 시집가고 스물 한 살에 죽는다.
좀처럼 꼼꼼한 독자가 아니면 <감자>가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을 담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 왜 그럴까? 독자가 서술시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극도로 짧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 그는 열 다섯 살 나는 해에 동네 홀아비에게 80원에 팔려서 시집이라는 것을 갔다.
○ 복녀가 시집을 온지 한 3, 4년은 장인의 덕으로 이렁저렁 지내 갔으나 (……)
○ 복녀는 열 아홉 살이었다.
○ 가을이 되었다.
○ 그 겨울도 가고 봄이 이르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서술시간과 허구시간이 엄청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가? 작가는 1년이나 많게는 3년의 시간 안에서는 도덕관이 변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긴 서술시간을 짧은 허구시간으로 처리한 것은 작가의 계산된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만일 복녀의 도덕관이, 무려 15년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몸에 붙은 도덕관이 1년이나 3년만에 변했다면 의혹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6년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다. 그것은 6년 전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다르다는 걸 피부로 실감할 정도로,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경험을 담고 있는 시간의 양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작가의 계산된 의도를 꼽자면 작의를 보다 선명하게 하기 위한 배려를 들을 수 있다. 6년 동안 복녀가 겪을 수 있는 많은 일들 중에서 작의를 또렷하게 드러내는데 매우 적절한 것들만 채용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술시간을 짧게 처리한 것은 단편소설의 미덕인 강렬성에 충실하기 위한 의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담론의 요소들은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내용의 형식’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감자>는 문학적으로 성숙한 완결미를 갖춘 단편에서 한 걸음 나아가 단편 담론의 완성에 도달하고 있다.
이처럼 치밀한 담론의 구성은 1910년대 작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감자>의 김동인은 1910년대 작가로부터 확실한 변별성을 획득하고 있다.
5) 삽입가요 — 현진건의 <고향>
가난은 작의에 따라, 작품이 발표된 시대에 따라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뚜렷한 작의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여러 소설에 간간이 드러나는 1910년대의 가난은 신학문 또는 신문화로 불려지는 서구문물과 비교해서 뒤떨어진다고 믿은 유교 혹은 전통문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예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이상춘의 <기로>와 주낙양의 <마을집>이다.
<고향>의 삽입가요가 차지하는 작의는 매우 크다.
나는 열차 안에서 한 사내를 만난다.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玄鎭健, 고향, 1926)
옷차림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내가 17세 때까지 그의 가족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세상이 바뀌자 그 땅은 전부 동양척식회사’에게 빼앗겨 간도로 떠난다. 간도에서 부모를 여의고 큐우슈우(九州)의 탄광 등지에서 품을 팔다가 ‘화도 나고 고국 산천이 그립기도 하여서’ 고향에 들렀다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에 ‘나’를 만난다.
사내는 ‘나’에게 혼인 말이 있던 궐녀를 얘기한다. 그녀는 ‘열 일곱 살 된 겨울’에 돈 이십 원에 대구 유곽으로 팔려 간다. 유곽에서 늙어 버린 폐물이 되어 지금은 일본인 집의 하녀로 있다.
궐녀와 우연히 만난 사내는 ‘얼른 우동집에 들어가서 둘이서 정종만 열 병’ 나누어 마시고 헤어진다. 한 개인의 의지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나라 없음에 대한 원망과 신세 한탄의 내밀한 관계를 ‘정종만 열 병’에서 읽을 수 있다.
작의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삽입가요에서이다. 결국 이 노래의 함축적인 의미를 보다 설득력 있도록 하기 위해 확장하기 위해 사내와 궐녀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즉 ‘정종만 열 병’의 의미를 심화하고 가락의 도움을 받아 피지배 민족의 신세 한탄의 극대화로 나갈 수 있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 (玄鎭健, 고향, 1926)
사내와 궐녀의 처지는 삽입가요를 통하여 비로소 개인적인 행·불행의 차원을 뛰어넘어 보편성을 가진다. 즉 개인의 차원을 민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사내와 궐녀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인 다수를 대표하는 인물로 읽을 수 있다.
삽입가요는 소설에 덧붙여진 후렴구나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하여 드러낼 수 없는 내용을 압축하여 의미의 폭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향>의 가난은 땅을 잃는 것에서 시작하여 말을 잃거나 공동묘지로 가거나 유곽으로 가는, 급기야 고향은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는 황폐한 마을이 되어 버린다.
단편집 "조선의 얼굴"에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결론이 <고향>이라면 조선의 얼굴은 기름진 땅을 가진 농촌이 아니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거칠고 메마른 황무지이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 싶었다. (玄鎭健, 고향, 1926)
인용문처럼 우리는 <고향>을 통하여 당시 식민지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윤영천, 韓國의 流民詩, 실천문학사, page 83∼205 참고. 특히 page 140을 보면 “(……) 이미 ‘왜국(倭國)’으로 변모되고 만 ‘고향’을 찾아 든 ‘귀향이민’에 의해 포착된 농촌의 피폐상, 술집 작부와 창녀로 전락한 여인의 기구한 개인사(……)” 등의 실상은 현진건의 <고향>의 이야기(story)와 매우 흡사하다.)
4. 맺음말
장편소설이 계몽의 수단으로 출발하여 오락성을 추구하는 신문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단편은 시대적·사회적 상황을 적절하게 담아내는 한편 예술성을 추구했다는 것이 모색기와 정립기의 특징이다.
이것은 1950년대까지의 한국 단편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기성 작가들의 중·단편에 대한 문학상은 있으나 장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을 보면 소설사적인 전개 과정의 여진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다수의 문학연구에서 담론의 변화에 따른 정신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문학연구가 의미연구에서 벗어나려면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한다. 담론의 형식에 따라 정신의 모습도 달라진다.
문학연구에서 담론은 단순히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담론 자체가 하나의 내용물이어야 한다. 바흐찐의 지적처럼 예술적 형식은 내용의 형식이며 재료 안에서 철저하게 실현되고 재료에 붙박혀 있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① René Wellek & Austin Warren, Theory of Literature, Peregrine Books, Reprinted, 188쪽.
“Is not every perception selective?”
② 임화, 문학의 이론, 학예사, 1940. 827쪽.
“신문학이 서구적인 문학 장르(구체적으로 자유시와 현대 소설)를 채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 문학의 자극과 영향과 모방으로 일관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문학사란 이식 문화의 역사이다.”
③ Jean Paul Sartre, 이휘영 옮김, Qu'est-ce que la littérature?, 삼성출판사, 1976. 363쪽.
“요컨대, 화가는 의미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작곡가가 음악에 의미를 붙여 주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누가 감히 화가나 음악가에게 그 자신을 구속할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이상 말한 바 화가나 음악가의 경우와는 반대로 작가는 의미와 관계있는 것이다.”
④ Jean Paul Sartre, 앞의 책, 359쪽.
“저당물·인질·보증이란 명사 gage어가 주어 자신으로 되면, 결국 <자기 자신을 끌어넣다.(구속·속박한다)>의 뜻이 된다. 사르트르에 의해 유명해진 이 말은 그의 철학의 근본 명제인 <인간은 자유에 처단되었다>에서 출발하여 그 <쓸모없는 허공에 뜬 자유>에서, 현실 속에, 사회 속에, 역사 속에 <자기를 이끌어 넣고>, <그 속에 옭아매는 것>, 다시 말하면 <사회(현실․상황․역사) 속에 참획한다>는 뜻.”
⑤ Jean Paul Sartre, 앞의 책. page 363.
이후의 논조는 그의 유명한 명제인 “시인에게 언어는 외부 세계의 한 구조물이다”로 집약된다.
⑥ C. Wright Mills, 이해찬 옮김, Sociological Imagination, Pelican Books, 기린원, 1991, 참고.
최근 사회학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떠오른 관심은 사람들에게 “인간과 사회, 개인의 일생(biography)과 역사(history), 그리고 자아(自我)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데 긴요한 정신적 자질”을 갖추게 하는 데에 있다.
⑦ 이러한 측면에서 Milan Kundera가 Die unerträgliche Leichtigkeit des Seins(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Friedrich Nietzsche의 영원한 재귀를 도입 부분에 이용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Gabriel García Márquez의 Cien Años de Soledad(백 년 동안의 고독)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René Wellek & Austin Warren의 Theory of Literature의 18쪽 보면 ‘(……) attempts to find general laws in literature have always failed.(문학에서 일반적인 법칙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고 밝히고 있다.
⑧ Ian Reid, 김종운 옮김, The Short Story, 서울대학교 출판부, 50∼67쪽 참고.
⑨ 언어권으로 국가를 분리하자는 운동이나 투쟁이 Canada의 Quebec市 뿐만이 아니라 Belgium에서도 있었다.
⑩ 서포만필(西浦漫筆)을 말함. 신라 이래의 명시(名詩)에 대한 평론과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의심나는 곳을 풀이하였다. 여기서 한글의 참된 가치를 밝혔고, 송강(松江)의 가사를 칭찬했다. 책 끝에 신라 이후의 유명한 시를 약평(略評)하였다. 전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⑪ 허미자의 李梅窓 硏究(성신여대 출판부)와 허진경의 매창 시선(평민사) 참고.
그녀의 시는 梅窓集에 漢詩 58 수가 실려 있는데 연구 결과 이원형의 시로 밝혀진 “尹公碑”를 제외하면 57 수이다. 여기에 그녀의 작품으로 분명하게 가려진 시조 “梨花雨”를 더하면 모두 58 수이다.
⑫ 권영민, 한국 민족문학론 연구, 민음사, 11∼93쪽 참고.
⑬ 설화를 뿌리로 하여 구비전승된 이야기가 소설로 정착한 것들. 육전소설도 대부분 이에 속한다.
⑭ 인용한 소설은 의미가 왜곡되지 않는 범주 안에서 현행 맞춤법에 맞도록 연구자가 고쳤다.
⑮ Fyodor Mikhilovich Dostoevski, 박형규 옮김, 白痴, 금성출판사, 1992. 399쪽.
⑯ 연구자의 규정하는 습관을 통해 얻어진 결과지만, 모든 지식은 관념(metaphysics·형이상학)이다. 개개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하나로 묶어 설명할 수 있는 관념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관념의 옷을 입고 있다’가 가능하다. 소설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생생함’이며 그것은 ‘단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사건’이며 ‘상황’이다. 바로 여기에서 창작과 학문의 갈림길이 생긴다.
⑰ Jean Ricardou, 최상규 옮김, Problémes du nouveau roman, 현대소설의 이론, 대방출판사, 487∼496쪽 참고.
이외에도 한용환의 소설학사전(고려원, 1992.) 271쪽을 보면 담론의 시간과 이야기의 시간(채트먼), 연대기적 시간과 의사 연대기적(허구적) 시간(멘딜로우), 말하는 시간과 말해진 대상들의 시간(크리스티앙 메츠) 등이 있다.
⑱ John Henry Raleigh, 최상규 옮김, The English Novel and the Three Kinds of Time, 앞의 책, 477쪽.
“Nicholas Berdyaev에 의하면 시간-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세 개의 기본적인 범주와 상징이 있다. 첫째로, 宇宙的 時間이 있다. 이것은 圓으로 상징될 수 있으며 사물의 무궁한 반복을 가리킨다. 즉 밤과 낮의 교체, 계절의 바뀜, 출생과 성장과 사망의 순환 등 한 마디로 인간과 자연의 경험의 순환적 특성을 가리킨다.
둘째로는 歷史的 時間이 있다. 이것은 수평선으로 상징되며 시간을 통한 국가와 문명과 종족들(즉 집단을 이룬 인류)의 경과를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개인은 시간에 대해서 순환적 관계와 함께 線的인 관계도 갖는다.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에게 있어서의 이 線은 上向的이어서 진보를 나타낼 수도 있고 下向的이어서 퇴보를 나타낼 수도 있다.
수직선으로 상징되는 세 번째 것은 實存的 時間인데 이것은 베르그송(Bergson)의 <持續>(durée)과 비슷한, 종교적이고 신비적 성질을 가진 시간을 가리킨다. 이 실존적 시간의 개념은 사실상 개별주의(individualism), 또는 베르자예프의 말로는 “개인주의(personalism)의 극단적인 형식이며, 순환적 또는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개인의 능력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요컨대 실존적 시간은 시간-역사의 타당성을 부정한다. 역사상으로 이 시간 관념은 초기 기독교의 묵시적 경향 속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세속적인 견지에서 몇몇 무정부주의적 교리 속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중적인 면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전생애가 단 한 순간에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는 늙은 아낙네의 이야기 속에 평범하게 표현되어 있고,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심리적 경험 속에서는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고 어떤 중대한 순간에는 거의 정지해 버리는 듯이 보인다는 생각 속에 나타나 있다.”
⑲ Willian Kenney, 엄정옥 옮김, 소설분석론,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0. 128∼130쪽을 보면 단편소설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강렬성(intensity)’, ‘구성과 강렬성(plot and intensity)’, ‘인물과 강렬성’, ‘시간과 강렬성’의 항목이다.
⑳ 한용환, 소설학사전, 고려원, 1992, 103쪽 참고.
㉑ Robie Macauley & George Lanning, Characterization, 최상규 옮김, 현대소설의 이론, 대방출판사, page 251∼291 참고.
㉒ 한용환, 앞의 책, page 103, 참고.
“언어학적 의미로는 한 문장(sentence)보다 더 큰 일련의 문장들을 가리키지만 시학에서는 서사 텍스트를 구성하는데 동원된 언술의 총화, 혹은 서사 구조의 표현적 국면을 총칭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텍스트로부터 추출되어지는 추상적 내용물인 서술된 사건 - 곧 스토리(story)와 대립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좀더 넓거나 좁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상이한 용어를 통해 제시되고는 있지만 하나의 서사 텍스트가, 표현 차원인 담론과 내용 차원인 스토리로 짜여진다는 것은 구조 시학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구조 시학은 담론과 스토리라는 이분법적 국면의 역동적인 관련성을 밝힘으로써 허구 서사물을 연구하는 입장에 다름 아니다. (……)
이 용어가 예외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웨인 부드는 「discourse」를 독자들에게 특수하게 전달되는 언술 행위 - 작중 인물의 행위에 대한 화자의 평가, 해석, 판단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한다. 부드적인 개념으로는 「장면적」이거나 「극적」인 서술은 제외된다. S. 채트먼에게서는 「discourse」는 좀더 확장된 의미 - 내용이 소통되는 모든 수단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의 경우 「서사 담론 narrative discourse」은 관례화된 담론의 의미에 근접한다. 하나의 언어 기호(sign)가 기표(記標·시니피앙)와 기의(記意·시니피에)의 두 국면을 가진다는 구조언어학의 견해는 story/discourse의 텍스트 이분법적 인식이 발전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다.
즉 텍스트 내에 동원된 서수의 기의(記意)는 스토리고 기표(記標)는 discourse라는 인식에서 이 용어는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좀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하나의 문학 작품이 표현의 국면과 내용의 국면을 지닌다는 이분법적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전통 시학에서도 꾸준히 지속되어 온 것이다. 세계에 대한 모방이 이야기의 줄거리(로고스)를 형성하고 다시 이것이 플롯을 형성하는 단위(미토스)를 낳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언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소산이다. (……)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 인식을 파불라(경험 그 자체로서의 이야기)와 수제(표현행위에 의해 구조화된 이야기)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수제」의 특징들이 텍스트를 드러내는 기법과 관련해서 문학 텍스트 표면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파불라」는 일종의 심층 구조적 이야기를 의미하며, 그런 면에서 이 두 용어는 story/discourse의 개념과 거의 일치된 인식을 보여 준다. 플롯의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거나 혹은 소멸되었다고 하는 현대의 서사물에 대한 분석에서 이 용어는 종래에 사용되어 왔던 「서술」, 「플롯」, 「표현」 등등의 용어를 누르고 점차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가고 있다.”
㉓ 인물의 규격성은 전형성과 혼동될 수 있는 개념이다. 전형성과 규격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볼 수도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인물이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이 둘을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을 때 전형성을 획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김동인의 <감자>가 그렇다. 반면 규격성은 인물의 규격성이 사건을 이끌어 가는, 즉 독자가 인물만 파악하면 읽지 않고도 사건의 내용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 이상춘의 <기로>나 계모(繼母)가 등장하는 고전소설에서 계모의 역할이 어떤가를 추측할 수 있는 소설이 여기에 속한다.
현대 소설에서 전형성은 단편소설을 이끌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물에 대하여 많은 원고지의 분량을 배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분량이 많아질수록 인물의 전형성은 작가의 생관(生觀)과 작의(author’s intention)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다.
㉔ 감상태, 한국현대소설론, 학연사, 1993. 고대소설과 신소설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31∼38쪽 참고.
㉕ 주종연, 한국근대단편소설연구, 형설출판사, 5쪽.
㉖ 주종연, 앞의 책, 83쪽.
㉗ 한용환, 앞의 책, 17쪽.
㉘ 주종연, 앞의 책, 142∼145쪽 참고.
㉙ 김천혜, 소설 구조의 이론, 문학과 지성사, 71쪽.
“화자 문제는 시점(視點)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두 가지는 같은 문제는 아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물의 안과 밖이다.”
㉚ 김천혜, 앞의 책, 110쪽에서 시점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1인칭 객관적 시점, 1인칭 전지적 시점, 3인칭 객관적 시점, 3인칭 전지적 시점. 특히 마지막 시점은 무제한적 전지 시점과 선택적 전지 시점으로 나눈다.
㉛ Mikhail Mikhailovich Bakhtin, 이득재 옮김, 바흐찐의 소설미학, 열린책들, 79∼96쪽 참고.
특히 주목할 인식은 “예술적 형식은 내용의 형식이며, 재료 안에서 철저하게 실현되고, 재료에 붙박혀 있는 형식이다”와 “뭔가 수용적인 것으로서의 형식은 내용과 대립된다”와 “말은 자신의 힘으로 완성하는 형식을 내용으로 변형시킨다”와 “말의 예술 안에서 미적 대상의 사건 성격은 특수한 명확성을 획득하는 바 - 여기서 형식과 내용의 상호영향은 거의 극적으로 일어난다. 여기에서 특별히 분명한 점은 육체·영혼·정신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작가가 대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등이다.
㉜ Mikhail Mikhailovich Bakhtin, 앞의 책, page 17.
㉝ C. Wright Mills, 이해찬 옮김, Sociological Imagination, Pelican Books, 기린원. 1991. 25∼26쪽 참고.
㉞ Peter N. Skrine & Lilian R. Furst, 천승걸 옮김, Naturalism, 서울대학교 출판국, 61쪽.
“<루공 마까르叢書>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1871년부터 1893년 사이에 쓰여진 20개의 일련의 소설들에 집합적으로 붙여진 제목이다. 이 소설들은 각각 그 자체로서 완성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소설들과 연관을 맺고 있다. 이 연관은 ‘第二帝政下의 한 家門의 자연적·사회적 역사’라는 그 叢書의 副題로 주어져 있다. 루공家와 마까르家는 5代에 걸쳐 그 추이가 추적되고 있는 한 방대한 가문의 두 支流이다. (졸라는 그 계보까지 그리고 있다.)
그들의 ‘자연적 역사’는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질병의 놀라운 결과로 <루공 마까르叢書>에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유전의 역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사회적 역사’는 그 가문의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직업들, 즉 농업·법률·광산업·의학·매음·은행·철도업·부동산 투기·세탁업·군대·소매업·관직·매매업 등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들 각 분야는 놀라울 정도의 鑑識力으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루공 마까르叢書>를 읽으면서 개인에 미치는 환경의 영향 그리고 그 시대의 프랑스의 사회적 풍토를 잘 알게 된다. (……) 그리고 근본적으로 생리학적인 인간관과 객관적 방법의 시도에 있어서 <루공 마까르叢書>는 소설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의 뛰어난 업적이다.”
㉟ 자연주의는 인간의 의지보다 환경과 유전 따위의 외부적 요인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다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감자>의 자연주의적 색채 때문에 졸라의 <루공 마까르叢書>와 비교된다.
㊱ 작가는 이 점에 대해서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 즉 복녀는 왕서방하고만 성적 접촉을 한 것은 아니었다.
㊲ 김천혜, 앞의 책, 71쪽.
㊳ 김천혜, 앞의 책, 70쪽.
㊴ Franz Karl Stanzwel, 김정신 옮김, Theorie des Erzählens, 탑출판사, 219쪽.
Stanzwel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인 화자-인물, 반성자-인물이라는 용어는 작가의 작의와 관계없는 전달의 방식에 따른 분류로 보여진다. 즉 Stanzwel이 구분하기를 “화자-인물은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것을 항상 알고 있지만, 반성자-인물은 그러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존재한다.”고 했다.
㊵ 최상규의 단편소설은 이중시점이 특징이다. 예로 <포인트>, <농군(農軍)>, <신지군(申之君)>, <동춘(凍春)>, <밤의 끝에서> 등이 있다. 이들 소설은 작가의 논평이 드러나는 3인칭 작가시점, 인물의 1인칭 주관적 시점, 작가의 논평이 없는 3인칭 관찰자 시점 중에서 두 개 이상 결합되어 나타나는데, 시점의 일관성 측면에서 단점으로 작용하나, 독서효과의 측면에서, 그리고 인물의 생동감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㊶ Franz Karl Stanzwel, 앞의 책, 141쪽.
㊷ Elizabeth Dipple, 문우상 옮김, Plot, 서울대학교 출판부, 54쪽.
○ 참고문헌
권영민, 한국 민족 문학론 연구, 민음사.
김동인, 감자, 삼성출판사(한국현대문학전집2).
감상태, 한국현대소설론, 학연사, 1993.
김천혜, 소설 구조의 이론, 문학과 지성사.
윤영천, 한국의 유민시, 실천문학사.
임화, 문학의 이론, 학예사.
주종연, 한국근대단편소설연구, 형설출판사.
청춘 1호∼15호.
한용환, 소설학사전, 고려원.
현진건 外, 운수 좋은 날, 삼성출판사(한국현대문학전집4).
C. Wright Mills, 이해찬 옮김, Sociological Imagination, Pelican Books, 기린원.
Elizabeth Dipple, 문우상 옮김, Plot, 서울대학교 출판부.
Franz Karl Stanzwel, 김정신 옮김, Theorie des Erzählens, 탑출판사.
Fyodor Mikhilovich Dostoevski, 박형규 옮김, 白痴, 금성출판사.
Ian Reid, 김종운 옮김, The Short Story, 서울대학교 출판부.
Jean Paul Sartre, 이휘영 옮김, Qu'est-ce que la littérature?, 삼성출판사(세계문학전집34).
Jean Ricardou, 최상규 옮김, Problémes du nouveau roman, 현대소설의 이론, 대방출판사.
John Henry Raleigh, 최상규 옮김, The English Novel and the Three Kinds of Time, 현대소설의 이론, 대방출판사.
Mikhail Mikhailovich Bakhtin, 이득재 옮김, 바흐찐의 소설미학, 열린책들.
Peter N. Skrine & Lilian R. Furst, 천승걸 옮김, Naturalism, 서울대학교 출판국.
René Wellek & Austin Warren, Theory of Literature, Peregrine Books, Reprinted.
Robie Macauley & George Lanning, 최상규 옮김, Characterization, 현대소설의 이론, 대방출판사.
Willian Kenney, 엄정옥 옮김, 소설분석론, 원광대학교 출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