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原型)의 울림

장용학의 <원형(圓形)의 전설>과 관련하여

by 이순직

원형적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는 마치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또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사로잡혀 버린 것처럼 갑자기 특이한 해방감을 경험한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종족이 되며, 그래서 모든 인간의 소리가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다.①


1. 연구자세

문학과 신화가 매우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생각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발상이다. 영문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둘의 관계가 너무나도 밀접해서 하나의 운명이 다른 하나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식으로 믿어 왔는데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은 ‘신화와 문학은 하나이며 불가분의 것’이라고② 말할 정도이다.


신화가 원시 의식에 내재하는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문학과의 유사성을 이야기할 때 슐레겔의 정의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며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신화의 위대한 영향력이 상실한 시대에 신화의 문학적 효용성을 부각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신화가 부재하는 공간에 문학이 존재한다는 견해나 다소 과장되기는 하지만 문학이 신화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신화를 문학의 전신으로까지 소급하여 신화가 전설과 민담을 거쳐 문학이 되었다는 진화론적 관점도 있다.③


이러한 진화론적 관점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하는데 광의에서 논의가 가능할 뿐이지 섬세한 협의로서 이 문제를 언급할 때에는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문학은 각기 대상으로 삼고 있는 소재가 다르고 독자층과 얻고자 하는 효과도 다르다. 특히 문학은 신화나 전설과 뚜렷한 변별성을 가지고 있는데 생산자의 개성과 세계관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집단 생산자에 의해 생산되는 신화나 전설은 민족이나 좁게는 지역을 단위로 하는 반면, 문학은 시대 상황이나 작가의 세계 인식을 생산의 토대로 하고 있다.


신화가 인간의 원시 의식의 소산이라는 측면에서 원형적 이미지를 찾을 수 있고 신화와 문학의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예의 원형적 이미지들이 문학에도 존재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신화 비평 또는 원형 비평이다. 그렇다면 원형이란 무엇인가?


융에 의하면 원형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병아리가 알에서부터 나오는 생래적인 방법에 비견될 수 있는 물려받은 기능적 행동의 양태를 뜻한다. 우리가 뇌세포의 구조 속에서 생리적으로 물려받는 것은 이미지들이 아니라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따라서 원형과 원형적 이미지는 서로 다른 것이며 원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집단 무의식이다. 융은 집단 무의식을 이루는 내용을 원형(archetype)이라 불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던 1948년 8월 15일부터 정치군인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1961년의 5․16 쿠데타 전까지를 문학사적 1950년대의 시공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50년대를 해방 공간에 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일제의 경제적 수탈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경제적 궁핍, 분단을 이데올로기의 대결 구도로 만든 한국전쟁, 4․19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과 그 실패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가운데 놓고 시작해야 할 50년대 소설에 대한 연구는 시대를 개관하고서 연구하기보다는 단편적인 작품론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거나, 전후 문학이라는 틀 속에 50년대 전체를 통째로 쑤셔 넣으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④ 전후 문학은 50년대의 시공간에 속하는 하나의 지류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전후 문학에 이어 분단문학이 뒤따르는데 분단 이후 현재까지의 문학 전체를 분단문학 하나로 옭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시야이기 때문이다.


<원형의 전설>이 쓰여지던 사회적·역사적 배경을 논의의 바닥에 깔고 원형 비평의 입장에서 작품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즉 원형적 이미지를 살펴봄으로써 그것들이 작품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밝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신화를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들


1) 신화와 역사


신화를 바라보는 방법에 따라 신화의 의미나 가치가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데 신화를 역사나 유사역사로 보는 유히머러스주의가 있다.


유히머러스(Euhemerus)는 기원전 4세기 경 시실리 사람으로 오늘날 남아 있지는 않으나 <聖史>를 썼다. 이 소설에서 그는 인도양에 있는 판키아(panchaea)라는 상상의 섬을 찾아갔는데, 이곳의 제우스 신전 안에 있는 명문(銘文)에서 제우스가 실은 크레타 출신이며, 동방으로 가서 신이 되었으나 후에 다시 돌아와 크레타에서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썼다. 이것은 인도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한 일을 풍자하는 것으로 자기 신격화를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추천하고 있는 셈인데, 결국 유히머러스가 무신론을 온 세상에 퍼뜨린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받게 하였다.


이교도들의 신이 인간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이었다는 유히머러스의 폭로는 초창기 기독교인들에게 큰 위안을 주어 신바람 나는 논쟁거리로 애용되었을 터이지만 우리는 유히머러스의 입장에서 역사적 삶을 산 인간으로서 예수를 종교에서 분리해낼 수 있다.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민중을 선동하는 열심당(zelotes) 당원으로서 예수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⑥ 이처럼 유히머러스주의(Euhemerusism)는 성경을 이스라엘의 역사나 유사역사(parahistory)로 본다.⑦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그 사건을 기술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점과 신화가 개인의 생산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가감삭제를 통해 구비전승 되었다는 점에서 신화의 집단 생산자는 고대의 역사가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단군신화를 건국 과정의 역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호랑이로 상징되는 부족과 곰으로 상징되는 부족이 있는데 환웅의 무리를 따르는 세력이 곰의 세력이며 호랑이의 세력은 반대하거나 반항하는 세력이어서 추방 또는 도태(淘汰)되고 환웅이 곰의 세력을 흡수,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이때 단군은 정략결혼에 의해 태어난 인물로 두 부족간의 통일과 단합을 상징한다. 이처럼 유히머러스주의는 신화를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본다.


2) 신화와 정신분석학


프로이트(Sigmund Freud, 1865∼1939)는 신화를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즉 신화를 무의식의 침전물, 또는 무의식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고 본다.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의식이 알고 싶어하지 않은 온갖 성적인 환상들이 가득 쌓여 있는 지하 창고와 같은 것이다. 지하 창고는 억압된 성적 충동의 수용소인 셈인데, 의식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이 자연스럽게 투사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 신화이며 따라서 신화를 원시인류의 무의식의 보물 창고로 본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투사 이론은 융에 의해 수정된다.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의식의 수면 밑에 이층 구조의 무의식이 있는데 모든 억압의 수용소로서 개인적 무의식이 있고 그 밑에 보편적이며 초개인적인 성격의 공통적 심리 심층인 집단 무의식이 있다고 한다. 그는 집단 무의식의 내용을 원형이라고 이름짓고 이러한 원형이 원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고 설명한다.


‘고대인에게 신화가 정신요법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⑧ 신화는 집단 무의식의 투사이지 프로이트가 보듯 개인 무의식의 투사로 보기에는 어렵다. 신화에는 인류의 공통적인 원형적 이미지의 패턴이 있어 치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집단 무의식이 유전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가령 상상의 동물로 알려진 용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공룡의 시대 - 중생대의 주라기와 백악기 - 에 인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를 가졌을 것이다.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한다 해도 공룡과 맞닥뜨리면 인간의 목숨은 하찮은 하루살이보다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공룡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집단 무의식에 깊숙이 뿌리 박힐 수밖에 없다. 공룡이 멸종하고 난 뒤에도 인간의 집단 무의식은 유전되어, 만들어진 것이 용이다. 그러나 공룡에 대한 공포감은 두 가지의 양태로 나타난다. 서양은 용을 해로운 동물로 보는 한편 동양은 상서로운 존재로 용이 비를 가져온다고 믿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공포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상징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정신 세계의 무의식적 내용들이 외계에 투사되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 꿈이나 환각과 망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꿈이나 환각과 망상의 내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집단 무의식에 속하는 원형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원형들은 시공을 넘어서 무의식 심층에 선험적이고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조건으로 어떤 사람이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맞거나,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을 겪는 동안 원형상으로 의식의 표면에 나타난다.


<원형의 전설>의 주인공 이장이 복수의 장소로써 동굴을 택하는 것도 원형이 시공을 뛰어넘어 의식의 표면으로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다.


융의 지적처럼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원형적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독특하고 특이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때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종족이 되며 모든 인간의 소리가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지는데 집단 무의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3) 신화와 계몽주의


계몽주의는 무엇인가?


17세기 서구에서 발전하여 18세기에 정점에 달했던 지적(知的) 운동과 문화적 분위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공통적인 요소는, 인간의 이성이 모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의 필수적인 규범을 설정하기에 적합하다는 신뢰와 아울러, 이성의 활용이 미신과 편견과 야만성이라는 암흑세계를 급속히 무산시켜 주고, 단순한 권위와 무비판적인 전통에의 지난날의 의존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이상적 생존을 이룩할 태세를 갖추게 해준다는 신념이다.


즉 이성만이 모든 불합리한 인간의 존재방식을 혁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신화는 마땅히 폐기 처분해야 할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확립하는데 신화는 귀찮고 성가신 물건이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합리적인 사고만이 성숙한 것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정신적 관습은 미숙한 것으로 본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신화는 항상 구시대적이고 유치하며 미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계몽주의가 휩쓸던 17세기 무렵의 유럽의⑪ 경우는 물론이고 우리의 경우를 보아도 신화를 거짓이나 지어낸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 정도로 무시하던 때가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계몽 운동은 신학문이라고 불려지던 서구 문화의 무분별한 학습에서 비롯되었으며 서구 문화는 세계 종교인 기독교와 이성적인 합리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우리의 계몽 운동은 독립운동의 지류로 시작되었다. 브 나드로 운동인 농촌계몽운동, 이광수로 대표되는 문학을 통한 계몽운동, 국채 보상을 위한 물산장려운동 등을 손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계몽운동 역시 신학문의 학습으로 이어졌다.


신학문의 열풍은 우리의 유산에 대한 경시 풍조를 낳았고, 우리의 신화 역시 잊어도 좋을 터무니없는 옛날 이야기로 취급당해 왔다. 어디에서도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는 애기장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어른 장수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웅녀의 변신은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다. 일부 해명신화도 계몽주의자들에게는 얼토당토않은 거짓말로 받아 들여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신화가 어김없이 천덕꾸러기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신화가 일반 대중의 사고방식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도 그 출발을 이성적인 합리주의에 기초를 두고 우리의 계몽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사고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신화가 계몽주의 시대에 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야 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적인 합리적인 이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자연과학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인문학은 인간학(Humanics)과 밀접하다.


즉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탐구․존재의 궁구에 목적을 둔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과학은 18세기 산업 혁명으로 기틀을 마련하여 급속하게 발달하였다. 이제는 인문 영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인문학의 중추신경이자 척추라고 할 수 있는 종교에서도 자연과학의 성과를 중세 시대와 달리 외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형편이다. 급기야 인문학이 인문과학이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이다.


신화는 질곡의 계몽주의 시대에서 살아 남음으로써 이성적이며 합리주의적인 척도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였는데, 현대에 이르러서야 정신분석적 방법으로 해석되거나 문화인류학의 측면에서 연구되고⑫ 있다.


3. <원형의 전설>에⑬ 드러나는 원형적 이미지들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의이다. 작의가 중심에 놓이고 상상력과 삶에 대한 이해, 예술관 따위가 주위에 놓인다. 현대소설의 인물이 영웅의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작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작의를 훌륭하게 형상화 해내지 못한다면 작품은 실패작이 되기 십상이다.


<원형의 전설>이 가지고 있는 원형적 이미지들을 살펴보기 전에 원형적 이미지들을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서 인물의 영웅적 요소들을 밝혀보고자 한다.


<원형의 전설>의 「圓形」은 그 작품에, 줄거리가 近親相姦에서 시작되어 근친상간으로 끝나는 등 제 자리로 돌아오는 圓運動이 몇 가지 있고, 圓은 하나의 線이어서 2원론에 대한 1원론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 작품은 세계를 선악 등의 2分法에 의해 왜곡되고 병든 것으로 보고, 근친상간이라는 터부를 場으로하여 그 세계의 벽을 뚫어보려는 하나의 시도였던 셈이다.


이러한 작의가 실제로 소설공간에 형성되어 있는 작의와 상당히 다름은 <원형의 전설>에 대한 찬사와 비난을 접해보거나 작품을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로 작가의 지나친 관념에의 집착 때문이다. 그것이 화자의 관념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시점의 탓도 있고 전설의 양식에 의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폭로의 방법은 직설적인 것이 아니라 전설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택해서 보다 우원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작품의 시점을 먼 미래에 의탁함으로써 현재적 긴장감은 상실되나 풍자적 신랄성이 날카롭게 구사된다.⑮


전설의 양식에 의탁했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틀림없는 현대소설이다. ‘국군·동무·유우엔軍·공산주의’와 같은 말들이 증거이다. 따라서 <원형의 전설>은 1990년대의 소설미학으로 볼 때 미숙성한 작의를 가지고 쓰여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작가 개인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행했던 시대의 산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전설적이라는 측면에서 이장의 영웅적 요소를 찾아보고자 한다.


전형적인 영웅의 22가지 요소⑯


㉠ 그의 어머니는 공주이다. ㉡ 아버지는 왕이거나 ㉢ 어머니와 가까운 친척이다. ㉣그가 수태되는 환경이나 경우는 일상적이지 않다. ㉤ 그는 신의 아들이라고 불려진다. ㉥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려고 하지만 ㉦ 기아(棄兒)가 되고 ㉧ 먼 나라에서 양부모에게 의해 길러진다. ㉨ 어린 시절에 관해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으며 ㉩ 어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거나 미래에 자신의 왕국이 될 곳으로 간다. ㉪ 왕이나 거인, 용이나 야수에게 승리한 이후에 ㉫ 그는 공주나 종종 그의 선조의 딸과 결혼하고 ㉬ 왕이 된다. ㉭ 얼마 동안 그는 별다른 일이 없이 왕국을 통치하고 ㉮ 법을 제정하나 ㉯ 신이나 백성들의 호의를 잃고서 ㉰ 왕좌와 왕국에서 쫓겨난다. ㉱ 종종 언덕 꼭대기에서 ㉲ 그는 신비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 그의 후손이 그를 계승하지 못하며 ㉴ 그는 묻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 성스러운 사당(祠堂)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

위와 같은 기준을 적용하기 전에 현대 소설의 경우에는 약간의 융통성이 필요하다. 가령 영웅의 어머니가 공주이거나 아버지가 왕일 수 없다는 것인데 왕이나 공주라는 계급적인 신분은 영웅의 핏줄이 고귀하다는 뜻 이외에 보통 여자와 확실히 다르다는 뜻으로 광의(廣義)의 해석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장의 어머니는 공주의 신분과 맞먹는다.


동경에 있는 M學院 영문과에 적을 두고 있는 기미가 한 달 전 무릎까지 올라온 하늘색 스커어트에 斷髮을 하고 크고 작은 빨간 동그라미가 노랑 바탕에 무늬져 있는 파라솔이라는 것을 펴들고 평양 驛頭에 내려 섰을 때 바지 저고리나 치마 저고리나 할 것 없이 모두들 한 번은 발을 멈추고 바라보고 쳐다보고 하였는데, 그 新式女性이 누구의 딸인가를 알아 낸 사람은 다시 한 번 눈을 휘둥그렸던 것이 오빠인 오택부였을 것이다.


이장의 어머니인 기미는 신식 여성일 뿐만 아니라 살결은 스스로 애무하고 싶을 정도로 곱다. 아버지는 기미의 친 오빠인 오택부이다. 비오는 날 과수원에서 기미는 오빠에게 겁탈을 당한다. 이장이 태어나자 오택부는 간호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서 이장을 죽이려 한다.


그 병원으로 찾아간 택부는 간호부를 겸하고 있는 의사의 부인이 잠시 자리를 떠서 방안에 아무도 없이 되었을 때, 이불을 갓난애의 얼굴에 가져가더니 그대로 덮어서 꾹꾹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장은 죽지 않고 이도무라는 사람에게 넘겨져 남쪽에서 양육된다. 우리는 이장의 유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 이장은 고향으로 간다. 고향인 방골마을에서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고 간첩 교육을 받고서 남쪽으로 내려온다.


남쪽으로 내려와 오직 자신의 생부이자 여동생을 겁탈한 오택부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불태우다가 이복 여동생이며 화류계의 여왕인 안지야와 사랑을 하게 되며 동굴의 함몰에 의해 함께 죽는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노파에 의해 가려진다.


“獄이 깨어지는 것이다! 「올 것」이 오고 「온 것」이 부서진 것이다. 芝夜, 이제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다! 꽃이 지는 것이다! 꽃이 지면……”

무너져 내린 흙과 바위는 순식간에, 서로 손을 쥐고 쓰러진 男女를 땅 속으로 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洞窟은 무너졌다기보다 꺼져 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여간 시체라도 파내자고 했는데, 그 늙은 生物이 나서서 공연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은제 그 몹쓸 것들이 들어가서 잔 것 같다구 했지, 나아리를 쏴 놓구 저 산 위로 뺑소니치는 것을 이 두 눈으루 똑똑히 봤다오!”

(……)

동굴이 꺼진 자리에서는 복숭아 나무가 한 그루 솟아났습니다. 꽃이 피었다 지니 그 가지에는 몇 알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오랜 옛날의 일이어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傳說에 의하면 우리가 즐기는 봉숭아는 그 가지에 맺혔던 열매의 씨가 四方에 흩어져서 繁殖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장의 영웅적 요소는, 어머니 기미는 동경 유학생으로 지식인이고 상당히 미인임으로 ㉠ 공주라 할 수 있으며 ㉢ 아버지는 어머니의 친오빠이고 ㉣ 수태되는 경우가 겁탈이므로 일상적이지 않고 ㉥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하려 하지만 ㉧ 먼 곳에서 양부모에 의해 길러지며 ㉨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고 ㉩ 어른이 되어 고향인 방골마을로 돌아가며 ㉫ 이복 여동생인 안지야와 첫날밤을 보내고 ㉱ 언덕은 아니지만 동굴에서 ㉲ 신비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동굴은 벼락에 의해 무너진 것이지 결코 무덤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 묻히지 못하고 ㉵ 성스러운 사당은 아니지만 봉숭아 나무를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이장은 12개의 전형적인 영웅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장의 영웅적 요소를 작의의 바닥에 깔아둠으로써 신화나 전설에서 다루는 원형적 이미지들을 현대소설에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다.


1) 근친상간


왕족이나 민족의 영웅 등의 걸출한 인물을 버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은 신화나 전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제재를 외면한다. 상당히 오래 동안 신화나 전설은 해명이나 탐색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신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화나 전설의 힘이 약화되면서 나타난 소설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원형의 전설>은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가장 주된 추진력을 신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근친상간에서 얻고 있다. 주인공 이장이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사생아이고 자신의 출생 비밀을 밝히고 아버지로부터 그 사실을 실토 받는 것이 이야기의 뼈대이다. 이 소설에는 세 개의 근친상간이 있다. 하나는 털보와 윤희이고 다른 하나는 오택부와 기미, 마지막으로 이복 오누이인 이장과 지야의 근친상간이다.


국군 낙오병인 된 이장은 동굴에서 사냥꾼 털보의 도움을 받아 털보의 집으로 간다. 털보는 윤희를 강제로 이장의 방으로 들여보낸다. 이장은 바라보기만 할 뿐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급기야 털보는 이장에게 ‘왜 딸을 귀여워해 주지 않느냐’고 항의한다. 항의 끝에 또다시 윤희를 이장의 방으로 보낸다. 안방에 있는 털보의 성화에 윤희는 불을 끄고 이장의 품에 안긴다.


“아…… 이렇게 한번만 안기고 싶었어요……”

그 윤희는 이튿날 새벽, 집 뒤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화려한 그 푸른 치마와 붉은 저고리를 입고.

“어허 끝내 죽었구나……”

털보는 축 늘어진 딸의 시체를 쳐다보며 이렇게 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슬퍼하는 빛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장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엽총을 들고 나와 총알을 재면서 털보의 가슴에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저 배 안에 있는 것은 누구의 아이요!”

“아니야! 아니야!”

“바른 대로 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참구 참구. 내 말두 들어보! 딸의 뱃속에 어떻게 애비의 새끼가 들 수 있단 말이오?”

“뭐라구?”

세상에 이런 소리가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공포에 질려 이장은 소나무 가지를 쳐다보았습니다. 푸르고 붉은 옷에 잠긴 <불륜>은 새벽바람에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털보의 성화에 등불을 끈 윤희는 ‘이렇게 한번만 안기고 싶었어요’라며 타성받이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짧은 삶을 만족하고 자살한다. 아버지가 딸을 강간하는 것으로 읽혀지는 첫 번째 근친상간은 딸의 죽음으로 끝맺음된다. 윤희의 고통과 번민은 어떤 식으로든 그려지지 않고 단순하게 자살로 처리될 뿐이다. 첫 번째의 근친상간이 소설 전체의 줄거리와 이렇다 하게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에피소드라⑰ 볼 수 있다.


작가는 피해자 윤희의 심리적 고통이나 인식의 변모나 추이를 더듬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은 두 번째 근친상간의 피해자인 오기미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오기미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다.

두 번째 근친상간의 결과로 이장은 태어나는데 오빠가 여동생을 간강하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처리되어 있다.


슈미즈까지 벗어버리니 노랑 빛깔의 수영복에 가려진 하얀 육체가 묵직하게 나타났습니다.

부끄러운 듯해 하던 육체는 대담해 갔습니다. 몸을 쭉 뻗으며 야릇한 포오즈를 취해 봅니다. 눈 가에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피었습니다.

몸을 돌리며 나른해진 손을 머리로 가져가던 기미는 그만 소리를 질렀습니다. 쓰러지듯 두 손으로 앞을 가리면서 힐끔 거울 속으로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들창에는 이미 사내의 두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가씨의 비명 소리에 빗속을 뒷마당으로 뛰어온 식모는 아가씨의 방문이 탕 하고 닫히면서 머리부터 우비를 뒤집어 쓴 사내가 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고, 들창까지 닫히는 소리를 또한 들어야 했습니다.

의자가 어디에 부딪치는 소리, 경대가 넘어지는 소리, 몸과 몸이 다투는 숨결…… 그러나 끝내 그 방에서 비명 소리는 터져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방 안은 조용해졌습니다.

아가씨가 지르는 소리가 나기만 하면 뛰어들려고 벼르고 있던 식모는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허위적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하나님 맙시사아> 하고 비오는 사과밭 속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었습니다.


동경 유학 시절에 오빠와 여동생이 마치 연인처럼 붙어 다니지만 오기미의 공주병과 오택부의 유별난 성적 호기심의 결과로 보여질 뿐이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서 남매 관계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오기미의 누드를 과수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오택부는 억누를 수 없는 성적 충동에 휩싸여 여동생에게 달려든다. 먼 친척이 된다는 식모는 그 후로 종적을 감추고 오택부의 죄상은 밝혀지지 않는다.


오기미는 자신을 강간한 사람이 오빠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기미의 배가 불러오자 집안은 발칵 뒤집어지고 멀리 도망갔던 식모는 모른다고 하다가 결국 ‘과수원지기 맹팔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강간의 죄는 과수원지기 맹팔이 뒤집어쓰고 기미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있다가 이장을 낳는 날 밤, 벼락을 맞은 나무가 방문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면서 나뭇가지에 가슴이 찔려 죽는다. 오택부는 갓난아이인 이장을 죽이려고 하다가 의사의 제안으로 이도무라는 사람에게 돈 삼 백원과 함께 멀리 가서 산다는 조건으로 보낸다.


마지막으로 이장과 지야의 근친상간은 복수의 수단으로 이용되는데 국회의원 오택부의 지역구에 있는 집의 뒷산 동굴 속에서 관계한다. 앞의 두 경우와 달리 마지막의 근친상간은 사랑이 매개가 되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이며 하늘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랑이다.

이장의 연락을 받고 오택부는 부랴부랴 동굴 입구로 달려온다.


“이놈아! 너 너, 지야를 어쨌느냐? 이리 내놔라!”

“지금 벌거벗고 있어서 부끄럽다나요.”

“거짓말 말아라! 거짓말이다! 아직 아무 일도 없다. 공갈을 떨자면 아무 일두 없어야 한다! 응 안 그래?”

“이미 다 아는 사실두 공갈감이 되나요? 더구나 당신은 철면피로 천하에 드문 인물인데…”

“뭐잇!”

주먹을 해 가지고 다가서는 것이었으나 우산이 창살에 걸렸습니다.

하늘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싶어서인지 그렇게 퍼붓던 빗발도 기세를 누그리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비켜라! 나는 네놈 같은 놈은 상대 않는다! 말겠느냐? 네 공갈에 끄떡할 오택부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두란 말이다!”

고개를 쳐들고 안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지야! 들어라! 너는 이놈에게 감쪽같이 속고 있는 거다. 이놈은, 알겠느냐, 네 외사촌이라는 게 아니구, 그보다 더한 놈이다! 알겠느냐, 더한 놈, 더한 놈 말이다. 이만하면 알겠지? 알았으면 얼른 나와서 이 놈의 얼굴을 할켜 놔라!”

“……”

“왜 안 나오느냐! 이 놈이 그렇게도 무서우냐!”

“이미 늦었습니다.”

“늦었다구?”

“우리는 신혼부부가 되어 있지요.”

“관계를 했단 말이냐?”

“지야는 오빠를 남편으로 삼는 것은 좀 뭣하다구 했지만요.”

“뭐라구! 지야두 알구서 그 지랄을 했단 말이냐?”

“강간이 못 된 것이 유감이었지요.”

“이놈들 봐라. 내보다 더한 놈들이다! 양심의 가책두 모르는 놈이다. 너희들에 비하면 이 나는 그래두 맹자다!”


이장의 주도면밀한 복수를 질타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오택부가 이장과 지야에게 ‘너희들에 비하면 나는 맹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파렴치한 강간을 인정하는 다른 말에 불과하다. 즉 이장과 지야처럼 서로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성적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우발적인 행동과 성윤리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장과 지야의 근친상간은 분명 다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선사시대가 역사시대보다 더 길고 더 오랜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아래 근친상간의 유혹과 감추어진 욕구는 부계 사회와 도덕적 성윤리가 확립되면서 의식의 수면 밑으로, 무의식의 밑바닥으로 침전되었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은 특히 집단 무의식은 유전된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에 의해 제창된 진화론이 인간의 꼬리뼈가 퇴화된 꼬리의 흔적이라고 말하듯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도덕적 성윤리와 생물학적인 이유들에 의해 퇴화된 근친상간의 습성이 있다.


모계 사회에서의 근친상간은 오늘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성행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직도 오지의 원시 부족에게 남아 있는 배우자 얻기의 어려움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최악의 경우에는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데 그러한 위험이 도사리는 다른 집단과의 성혼은 극히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또한 성의 문란 시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는 도덕적 퇴폐 때문에 하늘에서 쏟아진 유황불에 의해 멸망되는 도시이다. 도덕적 퇴폐는 성적 문란의 다른 이름이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다. 롯과 두 딸이었다.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 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성경을 비유와 은유로 읽지 않고 유히머러스주의 입장에서 글자 그대로 읽을 때 롯의 두 딸은 아버지와의 근친상간을 통하여 새로운 부족의 시조를 잉태한다. 성도덕의 문란 때문에 멸망하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세 사람이 근친상간으로 새로운 부족의 시조를 잉태한다는 아이러니를 차치하고서 이러한 경우를 볼 때 기록되지 않은 근친상간은 석기 시대를 비롯한 선사 시대에 흔히 있는 일로 볼 수 있다.


아직 도덕적 성윤리가 형성되기 이전이고 이성보다는 동물적 충동과 본능이 인간을 지배하던 시대였으므로 근친상간은 종족보존의 가장 올바른 방법의 하나로 인식되었을 것이다.⑲


이성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동시에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성윤리가 뿌리를 내리면서, 근친상간의 습성은 억압되고 내면화되어 무의식으로 가라앉는다. 따라서 근친상간은 불행이나 비극의 원인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신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관계함으로써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방황의 길을 떠나는데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존속 살인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도덕적 죄책감에 빠진다. 모르는 상태가 무의식의 상태이고 생부와 생모임을 깨달은 상태를 의식의 차원으로 보고서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생각해냈다면 오이디푸스의 시대와 달리 이제 그러한 무의식은 성윤리의 도덕성에 짓눌려 억압될 수밖에 없는데 유아기의 백일몽이나 한층 약화된 무의식으로 남아 있다.


도덕적 성윤리와 이성이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근친상간은 존재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사람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회의의 돌풍을 만나게 된다. 이장의 경우가 그렇다.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불구성을 사생아적 의식에 연결시켜 그 원죄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는⑳ <원형의 전설>에서 이장의 존재에 대한 회의는 이복 여동생인 지야와의 근친상간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기존의 성윤리에 대한 도전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그러한 무모한 행동은 용납될 수 없기에 동굴의 함몰로 인한 죽음이 앞에 놓이게 된다.


<원형의 전설>에서 근친상간의 결과는 예외 없이 죽음으로 그려진다. 윤희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면 기미와 이장, 지야는 천벌이라고 할 수 있는 벼락으로㉑ 죽는다. 오택부만이 자신의 손에서 불발되어 튕겨져 나간 권총에 의해 죽지만 자의가 아니라는 점과 이장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천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이디푸스의 불행보다 한층 극단적인 이와 같은 근친상간의 결과는 도덕적 성윤리와 이성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마저 풍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근친상간을 성윤리와 합리적인 이성의 영향력 아래 놓음으로써 이장의 성윤리에 대한 삐뚤어진 도전이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2) 동굴


신화나 전설에서 동굴은 변신의 공간으로 자주 이용된다. 단군신화에서도 곰이 웅녀로 변신하는 공간은 동굴이다. 앞에서 인용한 성경의 부분에서도 두 딸이 임신하는 공간은 동굴이다. 임신을 하면 육체적·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데 이 경우도 변신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암굴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된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경우에도 동굴은 변신의 공간으로 읽혀진다.㉒


또한 동굴은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거주 공간이며 기원의 공간이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시 의식은 동굴 벽에 들소를 그려 넣음으로써 보다 많은 사냥물과 안전을 기원하였다.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이었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의 사냥꾼 예술가는 그림을 통해 실물 자체를 소유한다고 믿었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려진 사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다.’㉓


이장이 동굴에 들어가서 원시인이 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는 시공을 뛰어넘어 변신을 시도하는 잠재된 무의식적 욕망으로 볼 수 있다.

이장은 국군 낙오병이 되어 동굴에 홀로 남게 된다.


양지바른 동굴에도 해가 떨어지면서부터는 추위가 스며들어서 몸이 오슬오슬해졌습니다. 하늘에는 언제 구름까지 깔리었습니다. 그런데도 연일의 피로 때문에 눈이 자꾸 감기려 하던 이장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총을 안아 들고 굴 밖으로 기어나가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황혼이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저쪽 소나무 그늘에서 토끼가 껑충 뛰어 올랐다가 그대로 솜뭉치처럼 뒹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도 맞으면 죽는 총알을 그렇게 가까이서 당한 토끼는 형체도 찾아볼 수 없는 핏덩어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면서 껍질을 벗기노라니 자꾸 원시인이 되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원시 시대에 사람이 하던 일은 한 가지도 없어진 것이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장은 원시인과 조금도 다름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토끼 껍질을 벗기는 동작이 원시 의식으로 자신을 이끌고 간다고 여긴다. 그러나 동굴이 원시 의식으로 회귀하는 공간이라는 인식은 아직 불투명하고 뚜렷하지 않다. 즉 동굴의 원형적 상황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동굴에 갇히게 되는 상황에 맞닥뜨려서는 흐릿하게나마 원형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이장은 국회의원인 오택부의 지역구에 갔다가 지서 주임의 속임수로 뒷산의 동굴에 갇히게 된다.


굵직한 쇠창살은 가로로 세 줄, 세로는 여남은 줄이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사면 바위에 박혀 있어서, 코끼리의 힘으로나 여우의 몸집으로도 여기를 이별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한쪽 아랫구석에는 기어서나 겨우 드나들 만한 문이 있는데, 밥공기만한 자물쇠가 밖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갇히고 보니 자기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존재인 것 같았습니다.

굴은 오래된 것이었지만 콘크리트며 하꼬방의 얼 따위는 금방 손질한 새 것이었습니다.

침상 밑에는 두둑한 이불이 예비로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면, 당분간이 아니고 적어도 겨울은 여기서 지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장기계획에 비해 비품이라곤 그 이불과 침상과 변기뿐이니, 말하자면 동물로서의 조건만이 고려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형적 상황으로서 오로지 동물의 생존 조건만이 갖추어진 동굴은 이장의 원시 의식(집단 무의식)을 자극한다. 개인 무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한 집단 무의식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원시 의식은 치밀한 복수의 장소로써 동굴을 선택한다. 원시 의식에게 근친상간은 아무런 죄의식도 주지 않는다.


원시 의식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이장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원형적 상황인 동굴 안에서의 근친상간은 성윤리의 지배 밖에 있으며 이는 이장의 성행위를 긍정하는 쪽으로 작용하나 근친상간을 확인하는 동굴 밖의 오택부에게 그것은 성윤리의 그늘 안에 있다. 이제 동굴은 이장에게 고향과 같은 정취를 풍기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동굴에 들어갈 때 이장은 오택부의 딸 지야와 함께 오택부의 지역구로 내려가 스스로 동굴로 들어간다.


“이게 뭐예요? 별장이라는 게 이거예요?”

“나는 고향에 돌아온 기분인데……”

(……)

“여기는 무슨 어망과 같아서 여간해서는 도루 나오지 못한다는 것두 알아둘 필요가 있지.”

자기가 먼저 기어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지야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이 하늘 아래 여기 뿐이오. 그러니 두려우면 간단하오. 돌아서서 터덜터덜 도로 내려가면 되오.”

“……”

지야는 모든 것을 단념한 듯 무릎을 꿇고 기는 것이었습니다.

(……)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땅에 놓고 끄르는데, 꺼내는 것은 끝에 큰직한 자물쇠가 달린 기다란 철쇄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문을 징징 얽은 다음, 자물쇠를 채워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는 지야의 표정은 그늘이 지어져 있어서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세계를 잠가 버렸어.”

일어서며 손가락 끝에 쥐고 있던 열쇠를 멀리 바깥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동작이 있을 뿐이야!”

(……)

“여기는 밀림이야!”

(……)

“어젯밤에 말한 것처럼 내 어머니는 오택부의 동생이다.”

“……”

“아까 낮에 들은 것처럼 오택부가 내 아버지다!”

“……”

“모르겠어? 나는 지야의 오빠란 말이다!”

(……)

“지옥에 떨어질 여자죠?……”

“지옥이 아니다! <에덴> 저쪽이다! 아담 이브를 넘어 에덴 저쪽에 가서 우리는 사는 것이다! 거기에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말은……”

그리하여 그 동굴에는 등불이 꺼졌습니다.


동굴로 들어감으로써 근친상간은 도덕적 성윤리와 이성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난다. 동굴은 세상의 가치관이 없는 곳, 아득한 태고의 공간이다. 이장에게 동굴은 고향 같은 곳이며 밀림이며 에덴이다. 이장은 서슴없이 원시 의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㉔ 그리고 이장은 동굴에서 지야와 첫날밤을 치른다. 스스로 아담과 이브가 되는 것이다. 이들의 첫날밤은 이미 근친상간이 아니다.


세계를 잠가 버린 동굴은 아득한 원시인류의 주거 공간으로서 동굴이다. 그곳은 성도덕과 합리적인 이성이 온갖 미사여구와 그럴듯한 명분으로 활개치는 곳이 아니라 오로지 동작이 있을 뿐인 공간이다. 오택부가 허겁지겁 달려와 이들을 동굴에서 끌어내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들씌워 근친상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죄악을 드러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지야가 끝내 동굴 밖으로 나가기를 꺼리는 것은 아담으로서 이장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저는 같이 죽는 길을 찾아 여기까지 따라온 거예요.”

열쇠를 창살 밖으로 멀리 멀리 던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요!”

멍하니 열쇠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장의 가슴에, 두려움과 애원과 눈물로 꾸겨진 얼굴을 갖다 대는 것이었습니다.

“바깥 세계에 나가면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고 말아요!”

이장을 안으로 안으로 밀어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장은 오택부에 대한 복수로써 근친상간을 계획하였으나 결국 지야를 사랑하게 된다. 이들 이복 남매의 사랑은 동굴 밖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근친상간이지만 동굴 안에서는 가능하다. 동굴은 원시 의식으로 회귀하는 공간이며 또한 세련된 도덕적 성윤리와 이성이 원시 의식으로 변신하는 장소이다.


앞의 두 개의 근친상간은 억누를 수 없는 성적 충동의 우발적인 사건인 반면, 마지막의 근친상간은 동굴이라는 원형적 상황이 사랑으로 이끌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장의 동굴은 변신의 동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원의 동굴이기도 하다. 불가능한 것을 갈구하는 공간이다. 이장의 변신은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동굴이 벼락을 맞은 거대한 나무에 의해 함몰되도록 함으로써 기원의 동굴이기도 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3)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독립된 자아를 가진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가벼운 거부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발단으로 볼 수 있다. 이때의 거부감을 억압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는 행동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으나 거부감은 보편적인 심리적 현상이다. 유교적인 가정 윤리가 엄격했던 예전의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현재로 내려올수록 효의식의 실종과 왜곡된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핵가족이 발달하면서 일반화되었다.㉕


이장은 오택부로부터 누이동생인 오기미를 강간하여 자신을 낳게 했다는 자백을 듣고자 한다. 이는 국회의원인 오택부를 사회적·도덕적으로 살해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서 근친상간의 죄목을 인정받고 스스로 그 잘못을 뉘우치게 한다는 것은 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주요 등장 인물 대부분이 등장하는 반도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이장이 나타나 오택부에게 말한다.


“살인 같은 것은 아무 것두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유전은 그게 아니고, 거 뭡니까,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식으로 정욕에는 인륜도 없다는 게 있지 않습니까.”

“……”

폭발하는 감정을 그렇다고 터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말에 시인을 하시면……”

“네가 하겠다는 말이 뭐냐! 들어보자.”

“왜 전에 통고해 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네 에미를 강간한 네 아버진데 그 네 어미는 내 여동생이었다>”

“오, 이 놈! 이 간장 탱크에 쳐넣어두 시원치 않을 놈이! 기어이 정신병원에 가고 싶으냐!”


오택부는 벌컥 화를 낸다. 이장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틀림없는 사실이나 그것이 세상에 밝혀져서는 안되기에 화를 내는 것이다.


이장의 이러한 심리적 풍경이 드러나는 곳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장이 오택부의 지역구에 내려왔다가 지서 주임에 의해 동굴에 갇힌다. 두 번째로 동굴에 들어가는 때다. 그때 오택부의 아들이 찾아와 도움을 주려 한다. 이장은 아들에게 말한다.


“한 가지 말해 두겠는데 오택부란 사람은 나의 원수요. 그러니 그 원수의 아들에게 동정을 받는다는 것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되오. 나는 지금 이래두 어디에 서 있는 것이니까 노형이 참견할 일은 못되오.”

돌아서는 것입니다.

“동정이 아닙니다. 의무입니다! 나는 아들이기 전에 한 인간입니다.”

“<인간>이 무슨 고약인 줄 아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필요 없소.”


이장은 아버지 오택부를 원수라고 말한다. 오택부는 자신의 뿌리이지만 근친상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장의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불을 보듯 환하다.

이장은 마지막으로 동굴에 갇힌 상태에서 오택부와 마지막 담판을 짓는다.


“자백이라구, 내가 언제 자백했나!”

권총을 도로 꺼내 들고 으르렁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자백한 적이 없다! 유도 심문을 좀 해 본 것 뿐이다!”

“지야, 여기 나와 이 치사스러운 우리 아버지를 좀 봐요.”

“오오, 이 튀기 같은 놈이!……”

“지야, 아까 이 백정께서 자백하는 것을 들었나? <맹자 같은 내가 강간한 네 에미는……>”

“닥쳐라! 닥치지 못하겠느냐!”

“<나팔꽃 같은 내 여동생이었다.>”

“죽어 봐라!”

탕!


오택부는 권총을 쏘지만 총알은 총신에서 터지고 그 반동으로 권총은 오택부의 얼굴을 강타한다. 오택부는 죽는다. 벼락과 크게 다름없는 천벌이다.


이장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근친상간과 인간 존재에 대한 혐오감을 뿌리로 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근친상간이 원인이라면 인간 존재에 대한 혐오감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원인과 결과는 하나의 몸뚱이다. 이장이 오택부의 아들에게 ‘인간이 무슨 고약인 줄 아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필요 없다’는 말이나 소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관념 덩어리는 주로 인간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이다.


불행하게도 관념 덩어리는 이야기를 만나 섞이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이야기와 관념이라는 양쪽 끝에 모여 있다. 따라서 인간 존재에 대한 혐오감은 실존이나 존재의 부조리로 이어지지 못하고 근친상간을 향한 혐오감에 머물고 말았다.


4. 맺음말


이장은 근친상간으로 태어났으며 출생 비밀을 아버지로부터 자백 받고, 동시에 복수로써 이복 여동생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 비록 그것이 사랑으로 승화된다고 하더라도 동굴의 함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이다 ─ 소설의 줄거리인데, 권영민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장이 가지고 있는 사생아적 의식이 민족사의 불행인 분단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먼저 사생아적 의식은 이도무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비롯되는데, 결국 자신의 출생 비밀을 밝히는 것으로 이어지고, 출생의 비도덕성·비윤리성을 확인하고 남파 간첩으로 월남한다. 월남 이후 행적의 초점은 오택부라는 인물로 모아지며 생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으로 끝난다.


이장의 사생아적 의식이 분단과 연결되는 곳은 거의 없다. 설령 그 흔적이 있다 해도 근친상간이라는 파격적인 소재에 짓눌릴 수밖에 없는 관념뿐이다. ‘전쟁은 개인과 사회의 정조를 유린하는 일종의 강간이며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은 근친상간에 해당된다’는㉖ 식의 발상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집단사와 개인사의 등가성은 상호 침투가 일어나야 설득력을 가지는데, 이념의 대리 전쟁인 한국전쟁과 남매의 근친상간은 공통분모가 없다. 또한 인물형을 중심으로 보는 장용학론에서㉗ 사생아의 의미를 찾아보고 있으나, 소설의 상황과 그 전개를 도외시하는 일면이 있어 포괄적인 논의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원형의 전설>이 화제작은 될지언정 문제작이 될 수 없는 것은 무모한 도식적 발상의 몫도 있지만, 지나친 관념에의 집착 때문이다. 문학이 관념을 탐닉하게 되면 십중팔구 말장난으로 전락한다. 이때 작가는 비타협적인 독단에 외골수로 집착하는 경향을 띄는데 <원형의 전설>도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이용하여 작가의 등장이 등장 인물보다 앞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관념으로 빠질 수 있는 구멍은 미리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작가가 등장 인물이나 독자보다 앞서 나가는 경향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다.


작가는 독단이나 궤변적인 관념에 빠지기 쉽고 이 경우 독자는 작가의 주관적 관념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급기야 소설이 독자와 관계 있는 예술 작품으로 자리잡기보다 작가 개인의 사변적인 논리를 쏟아 붓는 그릇이 되거나 편집광적인 달변만이 가득 찬 작가의 밀실로 전락하고 만다. 작가는 철학자가 될 수 있으며 사회병리학자나 타임머신의 주인이 될 수도 있지만 엄격히 말해서 철학자나 사회병리학자․타임머신의 주인은 아니다. 작가는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만이 작가일 수 있으며 이때 작가는 독자의 삶과 그 사회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는 자일뿐이다.


근친상간과 동굴·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원형적 이미지들이 자칫 작가의 독단적인 관념의 덩어리로만㉘ 읽혀지기 쉬운 <원형의 전설>을 좀처럼 쉽게 접근할 수 없는 50년대의 화제작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즉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서 작가는 비로소 독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셈이다. <원형의 전설>이 화제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원형적 이미지의 적절한 이용 때문이다. 원형적 상황을 이용하여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모색이나 분단 상황의 불구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흔적은 아쉽게도 보이지 않으나 원형적 상황 자체가 던져 주는 감동의 무늬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원형적 상황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개인이 아니라 종족이 되기 때문이다.




① C.G. Jung, Collected Works, ED. Herbert Read, et al., London, 18 vol. xv, 82쪽.


② K.K. Ruthven, 김명열 옮김, Myth,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76쪽.


③ Mark Schorer는 “신화는 시의 필수 불가결한 토대이다”라고 했으며 Richard Chase는 “시는 신화의 필수 불가결한 토대이다”라며 Mark Schorer의 견해에 동조했다. Mallinosky도 “신화는 미래의 서사시, 로맨스, 그리고 비극의 씨를 속에 갖고 있다”고 했으며 Vickery는 “신화는 역사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문학이 태어난 모태”라 했다.


④ 1950년대 문학을 전체적으로 조망(眺望)하고자 하는 의도를 '1950년대의 소설가들'(송하춘·이남호 편, 나남, 1994)에서 찾아 볼 수 있으나 단편적인 작가론에 머물러 있거나 그 작가론 또한 성실한 작품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논의 되었던 주제로의 성급한 집착 탓으로 충실한 조감도를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작가들 사이에서 시대의 의미망을 형성하도록 하는 비교문학적 관점을 철저히 배제하여 1950년대 소설문학의 전체적인 윤곽 지도조차 그려낼 수 없다.


⑤ K. K. Ruthven, 앞의 책, 7쪽.


⑥ 간단한 예로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의 해방신학(解放神學)을 들 수 있다. 해방신학은 중남미에서 태동하여 제3세계로 퍼지고 있는 카톨릭 신학 사조의 하나인데 인권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신부의 의무로 여기며 일부 과격론자들은 예수를 해방운동가로 본다.


⑦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유히머러스의 시선을 이용한 소설로 보인다. 아하스 페르츠라는 인물이 역사적 인간인 예수라고 한다면 나사렛의 그리스도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 예수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동팔과 요섭이라는 대립되는 인물도 현재에 재생된 아하스 페르츠와 나사렛의 예수로 볼 수 있다.


⑧ K. K. Ruthven, 앞의 책, 28쪽.


⑨ 연병길, “한국의 물의 상징성에 관한 소고”, 심성연구, 제 5권 제 1호 1990년 여름, 한국분석심리학회. 1쪽.


⑩ M. H. Abrams, 최상규 옮김,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대방출판사, 79쪽.


⑪ René Wellek and Austin Warren, Theory of Literature, Harcourt, Brace & World, 1956, 190쪽.

“The fourth of our terms is ‘myth’, which appears in Aristotle's Poetics as the word for plot, narrative structure, ‘fable’. Its antonym and counterpoint is logos. The ‘myth’ is narrative, story, as against dialectical discourse, exposition; it is also the irrational or intuitive as against the systematically philosophical: it is the tragedy of Aeschylus against the dialectic of Socrates. ‘Myth’, a favorite term of modern criticism, points to, hovers over, an important area of meaning, shared by religion, folklore, anthropology, sociology, psychoanalysis, and the fine arts. In some of its habitual oppositions, it is contraposed to ‘history’, or to ‘science’, or to ‘philosophy’, or to ‘allegory’ or to ‘truth’.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the Age of the Enlightenment, the term had commonly a pejorative connotation: a myth was a fiction - scientifically or historically untrue.”


(우리가 네 번째로 다룰 용어는 신화이다. 신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줄거리와 구조와 우화의 용어로서 쓰였다. 신화의 반의어와 반대어는 logos이다. 신화는 변증법적인 담화가 설명적인데 반하여 이야기이며, 체계적으로 철학적인 데 반하여 불합리하고 직관적이다. 또한 신화는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에 반하여 아스킬루스의 비극이다. 신화는 현대 비평에서 즐겨 쓰여지는 용어인데 종교․민속학․인류학․사회학․정신분석학․미술이 공유하는 중요한 의미의 영역을 가리키거나 영역 위에 맴돌고 있다. 신화와 습관적으로 대립하는 것들 중에서 일부인 역사·과학·철학·풍유·진실 등은 신화와 대치된다. 17세기와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에서 신화는 일반적으로 경멸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진실이 아닌 허구였다).


⑫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Lévi-Strauss의 연구가 주목되었다.


⑬ 장용학, 원형의 전설, 현대한국문학전집 4, 신구문화사, 1965.


⑭ 장용학, 소설문학, 1983, 6월호, 15쪽.


⑮ 전영태, 4차원적 세계의 실상과 허상, 광장, 1983. 8월호. 194쪽.


⑯ Alom Dundes ed. The Study of Folklore, The Hero of Tradition, Prentice-Hall, Englewood Cliff. NJ. 1965. 145쪽.

Story of the Hero of Tradition. ㉠ His mother is a royal virgin. ㉡ His father is a king, and ㉢ Often a near relative of his mother, but ㉣ The circumstances of his conception are unusual, and ㉤ He is also reputed to be the son of a god. ㉥ At birth an attempt is made, often by his father, to kill him, but ㉦ He is spirited away, and ㉧ Reared by foster parents in a far country. ㉨ We are told nothing of his childhood, but ㉩ On reaching manhood he returns or goes to his future kingdom. ㉪ After a victory over the king and/ or a giant, dragon, or wild beast, ㉫ He marries a princess, often the daughter of his predecessor, and ㉬ Becomes king. ㉭ For a time he reigns uneventfully, and ㉮ Prescribes laws, but ㉯ Later he loses favor with the gods and/ or his subjects, and ㉰ Is driven from the throne and city. ㉱ He meets with a mysterious death. ㉲ Often at the top of a hill. ㉳ His children, if any, do not succeed him. ㉴His body is not buried, but nevertheless ㉵ He has one or more holy sepulchers.


⑰ 굳이 에피소드의 필요성을 찾자면 인간은 가능한 상황 아래에서 얼마든지 근친상간을 할 수 있다는 개연성 정도이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욕과 동물로서 인간의 상관성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형상화는 찾아볼 수 없다. 현대 소설에서 이러한 에피소드의 변형으로 자주 그려지는 것은 의붓아버지가 딸을 강간하는 사건이다.


⑱ 오픈성경편찬위원회, 오픈 성경, 아가페 출판사, 1989. 24쪽. (창세기 19장 30절에서 38절)


⑲ 중세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사촌간의 성혼은 종족보존, 즉 순수 혈통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도 크게 보아 근친상간의 범주에 속한다.


⑳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1945-1990, 민음사, 1994. 151쪽.


㉑ 기미는 벼락맞은 나뭇가지에 의해서, 이장과 지야는 벼락맞은 거대한 나무가 뿌리 채 뽑히면서 동굴이 함몰되어 죽는다.


㉒ 몽테크리스토가 독방 감옥인 암굴 속에서 옆방의 노인으로부터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알게 된다든지, 탈출하여 백작으로 변모하게 되는지 하는 것들은 암굴을 통한 변신으로 볼 수 있다.


㉓ Arnold Hauser, 백락청 옮김, Sozial 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고대․중세편), 1977. 13쪽.


㉔ 원시 의식을 잠재된 집단 무의식으로 보면 이는 원형적 상황이다.


㉕ 농경 사회에서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노동 단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가족 구성원이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는 각각의 노동 단위가 된다. 또한 농경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농경의 경험이 풍부한 연장자인데 우리의 왜곡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험이나 지식이 아니요 경제력이다.


㉖ 전영태, “4차원적 세계의 실상과 허상”, 광장, 1983. 8. page 199.


㉗ 김성렬, 완벽한 주체의 추구, 그 시대적 성격 - 장용학론, 1950년대의 소설가들, 나남, 1994.


㉘ 정호웅은 '한국문학 50년'(문학사상사, 권영민 엮음, 1995)에 실린 “길의 열림과 끊김”에서 장용학의 문학을 ‘자아의 관념 회로만이 메마른 기계음을 내며 공전하는 황량한 주관성의 세계’라고 평했다.




○ 참고문헌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1945-1990, 민음사, 1994.

정호웅, 길의 열림과 끊김, 한국문학 50년, 문학사상사, 1995.

김성렬, “완벽한 주체의 추구, 그 시대적 성격 - 장용학론” 1950년대의 소설가들, 나남, 1994.

연병길, “한국의 물의 상징성에 관한 소고”, 심성연구, 한국분석심리학회, 제 5권 제 1호 1990년 여름.

오픈성경편찬위원회, 오픈 성경, 아가페 출판사, 1989.

장용학, 원형의 전설, 현대한국문학전집4․張龍鶴集, 신구문화사, 1965..

전영태, “4차원적 세계의 실상과 허상”, 광장, 1983. 8.

Alom Dundes ed. The Study of Folklore, The Hero of Tradition, Prentice-Hall, Englewood Cliff. NJ. 1965.

Arnold Hauser, 백락청 옮김, Sozial 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고대․중세편), 1977.

C.G, Jung, 설영환 옮김, Analysis of Unconsciousness, 선영사, 1990.

C.G, Jung, Collected Works, ED. Herbert Read, et al., London, 18 vol. xv.

K.K. Ruthven, 김명열 옮김, Myth,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M. H. Abrams, 최상규 옮김,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대방출판사.

René Wellek and Austin Warren, Theory of Literature, Harcourt, Brace & World,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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