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은 유행이 아닌, 모든 비평의 근거가 되는 가치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가치평가는, 더 이상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니체에게서처럼 고귀한 것과 천박한 것의 대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신구의 대립에 달려 있다.①
1. 서론
소설은 사회역사적 의미망의 연장선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당위론이 오랫동안, 지금도 여전히 지지받고 있다. 이는 소설이 사회적 모순이나 부조리를 반영 내지는 저항·고발하는 역할을 염두에 둔 인식이다. 그러나 소설의 사회적 역할과 상관없이 작가의 욕망에서 비롯하는 자족적 생산물이라는 관점도 있다.
당위론의 입장은 전문적인 독자의 몫이지만 소설이란 결국 작자 자신의 이야기 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는② 입장이라든가 소설가는 인간이기에 다른 많은 예술 형태에는 없는, 주제와 소설가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있다는③ 관점과, 소설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 그대로 보는 관점이 아니라 관찰하는 주체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석되어 재구성된 세계를 담고 있다는 관점④ 역시 소설이 개인적 차원의 자족적 생산물이라는 인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러한 두 관점과 관련하여 양시론이나 양비론을 개진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은 왜 손창섭의 작품들이 많은 평자의 논의 중심에 놓이는가 하는 것이다. 가장 커다란 이유로 현대문학의 연구 범위가 50년대로 확장되면서 시대적 관심과 문학적 관심이 중첩되는 지점에 손창섭이 놓인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시대적 관심으로 분단의 고착화와 기형적인 민족적 삶을 양산하는 모태로서 한국전쟁을 들 수 있다면 문학적 관심은 손창섭의 독특한 삶의 편력에서 비롯하는, 즉 사회적 자아보다 개인적 자아를 앞세우는 소설관이⑤ 될 것이다.
시대적 관심을 중심으로 하는 논의는, 인간의 공허한 존재상·자조적인 위악·운명의 조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허수아비적 행태 등 그의 의식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패배주의 사상은 전쟁과 전쟁 직후의 사회적 공항과 내면적 파탄이라는 세기말적 징후와 아주 잘 영합하여 우리 전후문학의 핵심적인 모티프를 제공한다는⑥ 것으로 모아진다.
손창섭의 패배주의 사상이 전후현실을 매우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논의인데 문맥을 짚어보면 소설해석의 결정적 계기로써 사회역사적 관점을 꼽을 수 있다. 즉 손창섭은 전후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소설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가치판단이다.
그러나 전쟁이라든가 그로 인한 1950년대 현실의 황폐상 등 객관적인 현실의 탐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⑦ 논의나 그의 문학세계는 절실한 <자기의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그리고 끝내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⑧ 논의는 앞서 인용한 논의와 같은 차원의 다른 해석이다.
즉 리얼리즘적 당위론의 관점에서 전자는 긍정적인 반면 후자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부정적인 평가의 요지는 손창섭의 소설이 전후현실에 대한 사회역사적 견지를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설이 개인적 차원의 자족적 생산물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소설의 사회적 역할은 문학 본래의 예술적 역할과 관련하여 볼 때 의무사항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권고사항이라 할 수 있으며 손창섭에 대한 논의를 개진하면서 전후현실을 소설해석의 절대적 가치기준으로 반드시 염두에 두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전후현실이 암울하고 척박하며 따라서 육체적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해도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일상을 꾸려나간다는 보편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대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관점은 자칫하면 삶의 조건으로써 시대적 상황과 거기에 뿌리를 둔 정신적 환경을 도외시하거나 혹은 구체성을 상실한 관념과 독설의 나열로 빠질 수 있다.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작품과 전후현실을 동시에 바라보는 균등한 시야를 가져야 하며 비로소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해석을 위해 자료화하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융(C. G. Jung)이 수립한 분석심리학은 두 가지 기본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하나는 경험론적이며 동시에 현상학적인 입장이다. 여기에서 비롯하는 정의(definition)가 분석심리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심리학설이라는 것이다.⑨
체험이 비판적 성찰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경험이 된다고 할 때 경험론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융의 학설이 머릿속에서 꾸며낸 논리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것은 절대적 진리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응용심리학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와 이어진다. 현상학적인 견지도 경험론적 태도와 맞물리데 분석심리학은 일어난 일들, 경험한 일들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뜻이다.
가령 단군신화에 곰이 여자가 되어 신과 결혼한다던가 기독교 도그마(dogma)의 성모 마리아가 처녀로서 잉태하여 아기 예수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심리학에서 거론된다면 심리학의 입장에서 살펴야 할 것은 그러한 관념이 인간 심리 속에 존재하는가 않는가 하는 사실이며 이런 관념이 거짓이냐 진실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게 융의 입장이다. 다른 하나의 기본태도는 심리적인 것을 심리 자체로서 보고자 하는 것으로 인간 정신을 뇌 기능이나 그 밖의 신체적 기능에 예속시키려는 어떠한 접근 방법도 배격하고 있는 점이다.⑩
연구자는 손창섭을 사회역사적 관점보다는 분석심리학적인 입장에서 논의하면서 얻어진 특징들을 전후현실과 연관 짓지 않고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따라서 전후현실을 필요에 따라 소설 내적 기능의 배경으로써만 언급하고자 한다.⑪ 소설이 전문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당대의 사회역사적 연장선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점은 자명한 이치이긴 하지만 작품과 현실이 다른 하나를 위해 자료화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연구자는 50년대의 특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을 시대를 초월하는 손창섭 문학의 고유한 특질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대립에서 화해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충격은 완화되고 감소되어야 하지만 손창섭의 문학은 일천한 현대문학사에서 제 위치를 차지해야 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의 총체적인 의미는 그 작가와 동시대인들에 대해 작품이 가지는 의미로만 오로지 정의할 수 없으며 (…) 우리들은 예술작품을 작품이 나온 시대와 그 후 모든 시대의 가치에 귀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⑫ 믿는 관점에서.
2. 자멸의식
국가적 변란이 있을 때 마지노선(Maginotline)이 되는 것은 가족 또는 혈연이다. 다시 말해 혈연적 응집력은 국가적 차원의 변란이 있을 때마다 더욱 공고해졌고 이민족의 숱한 침략을 받을 때마다 유감없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었다. 개인적·혈연적 손괴를 당했을 경우 국가가 구체적인 보상이나 원상복귀를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전례에서 더욱 피할 수 없는 현상인 듯하다. 따라서 혈연적 응집력은 유교적 전통이나 혹은 특정한 문화적 습속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인간 보편적인 본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전쟁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박경리의 “불신시대”가 남편과 아들의 죽음 이후 혈연적 응집력조차도 가질 수 없는 미망인의 전후현실 읽기라면 정한숙의 “고추잠자리”는 이념의 맹목성과 혈연적 응집력을 대조시킨 작품이다. 이범선의 “사망보류”는 혈연적 응집력에서 비롯하는 가장의 절박한 의식을 보여주며 강신재의 “해방촌 가는 길” 역시 누이로서 남동생에 대한 강한 혈연적 응집력을 결말로 삼고 있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생존조건들로 가득 찬 전후현실을 혈연에서 비롯하는 본능적 친밀성이나 유대감으로 저항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손창섭은 혈연적 응집력이나 혈연의식을 거부한다. “공휴일”의 도일은 약혼 말이 오갔던 아미의 청첩장을 부고장으로 만드는데 보다 좋은 조건의 남자와 결혼하려는 ‘아미에게 미련을 가질 수 없는 데서 오는 삭막한 기분’ 때문이다.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도일은 자신과 금순의 결혼은 ‘미꾸라지와 붕어새끼의 결혼’이라는 비유를 하고 파혼을 선언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도일의 파혼선언은 아미의 결혼이나 결심이 서지 않은 금순과의 약혼 때문이 아니라 혈연의식을 거부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어머니가 정말 저를 낳으셨수?」
이 어린애 같은 질문에 어머니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어라고도 대답 못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인 까닭인지 이이가 어째 내 어머니일까? 그렇게 도일에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혈연관계의 인연이 그에게는 어인 까닭인지 도무지 애정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직장에서 자기 위의 과장이나 부장이 갈려 새 사람이 오듯이 부모나 형제라는 것도 그렇게 쉬 바꾸어질 수 있을 것처럼 도일에게는 생각되는 것이었다. <공휴일>
도일은 어머니에게서조차 혈연적 유대감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혈연의식의 거부를 상징적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이 파혼선언이 된다. 왜냐하면 결혼은 혈연의 확대·재생산을 주된 축으로 하며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개념적으로 혈연과 결혼을 통해 맺어진 특수한 관계에 토대를 둔 인간생활 공동체의 기본단위이며⑬ 정체성(identity)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도일의 혈연의식의 거부는 소설 안에서 인과성에 토대를 둔 합리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소설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손창섭의 천명을 염두에 둔다면 도일은 작가의 문학적 분신으로 상정할 수 있다. 실지로 다른 작품에서도 혈연의식의 거부를 곧잘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작품 밑바탕을 관류하는 분명한 경향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혈연의식의 거부라는 인물의 인식적 특성과 맞물려 고려할 수 있는 것이 시대적 또는 사회적 환경이다. “공휴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대적 환경으로서 한국전쟁은 사건의 계기가 되거나 갈등의 뿌리가 되지 못하고 고작 어머니의 주름만 늘어나게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평면적 인물로서 인물과 환경의 괴리가 나타난다. 인물과 사건으로서의 환경 사이에 내밀한 영향관계를 애당초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단서를 시사한다.
작품을 사회역사적 의미망의 연장선에서 읽으면 오독에 빠질 수 있다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역사적 견지를 결여하고 있다는 논의가 있으나 사회적 자아보다 개인적 자아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선택의 몫이지 필수의 몫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온당한 관점이라 할 수 없다.
“사연기”의 동식은 혈연의식의 거부라는 측면에서 “공휴일”의 도일과 닮은꼴이다. 윗방에 사는 정숙과 성규는 부부인데 아들 명호와 딸 명옥이가 있다. 정숙은 처녀시절 동식을 좋아해 냇가 모래톱에서 어둡도록 함께 앉아 있다가 ‘둘만의 비밀을’ 가지게 되나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동식을 ‘시베리아로 유형 당하게 할 것’이라는 성규의 협박에 어쩔 수없이 결혼한 터였다.
이러한 과거를 가진 세 사람이 피난지에서 아랫방 윗방을 차지하고 있다. 폐결핵 말기인 성규는 죽기 전에 정숙을 부탁하지만 정숙은 음독자살한다. 정숙의 시체 앞에서 동식은 명호의 귀가 자신의 귀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둘만의 비밀’의 결과가 명호인 것이다.
시체를 앞에 놓고 구태여 자기의 귀와 명호의 귀를 비교해 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명호의 귀가 분명히 자기의 귀를 닮았다는 이 새로운 사실이, 그에게는 놀랍고 저주스러웠다. <사연기>
혈연의 발견이 놀랍고 저주스럽다는 동식은 도일을 염두에 둘 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두 인물은 혈연의식의 거부를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다. 혈연의식의 거부라는 모티프는 대단히 낯설고 정서적인 저항감마저 느끼게 하는데 “비오는 날”의 원구, “피해자”의 병준, “설중행”의 고선생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원구는 동옥과의 결혼을 피하며 병준은 핏줄의 재생산이 없는 결혼생활에서 경제적 착취를 당하는 피해자로 형상화되며 고선생 역시 결혼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결혼을 통한 혈연적 재생산을 하지 못하거나 결혼 자체를 회피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와 같은 혈연의식의 거부를 소설 내적인 긴밀한 구조나 인과성이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개성적 성향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작가연보와⑭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신의 희작"에서 작가의 개성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 와서 비로소 혈연의식의 거부가 S의 성장기적 환경에 연유한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새낀 필요 없어. 당장 가서 떼버리고 와.」
(……)
이 거추장스러운 짐을 꺼리는 그의 심리는, 늘 간편하게 혼자 떠돌아다닌 타성과 시국에 대한 불안감의 탓도 있었지만, 일방 어떤 막연한 자멸의식에서 오는 심리 현상이기도 하였다. <신의 희작>
혈연의식의 거부가 결국 막연한 자멸의식에⑮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고백이다. 자멸의식은 한국전쟁이나 전후현실과 밀접한 연관성을 획득하기보다는 부정적 모성 콤플렉스(mother complex)를 가질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차원의 성장기적 환경과 맞닿아 있다.
융에 의하면 모성 콤플렉스는 현실적인 어머니가 그 자식을 지나치게 본능적으로 보호할 때도 부정적인 경향을 띠게 되지만 어머니가 따뜻한 정을 자식에게 줄 수 없는 경우, 즉 그녀의 아니무스가 제대로 분화되지 못하여 부정적 아니무스(negative animus)를 지니고 있어, 건전한 모성본능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어머니가 없어서 그런 정을 받지 못했을 때도 생겨난다.⑯ S는 모성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유소년기를 보낸다.
「엄마, 문 열어.」
볼 멘 소리로 외치고 사잇문을 덜컹덜컹 흔들었다.
낯선 사내가 황급히 옷을 주위 입고 도망치듯 달아나 버린 뒤, 모친은 S의 머리를 세차게 쥐어박았다.
「칵, 뒈져라, 뒈져, 요 망종아.」 <신의 희작>
유곽 거리에 사는 S는 어머니가 낯선 남자와 동침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급기야 자살소동까지 벌이는데 이는 모성에 대한 맹종과 불신을 동시에 행동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가적(ambivalent) 감정은 한국의 대표적 민담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⑰ 두 가지의 의미 층위를 갖는다.
하나는 모성이 지니고 있는 그림자(shatten) 소거 행위요, 다른 하나는 정신의 발달로 부성의 자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치러야 할 의식인 모성의 자장 부수기의 상징적 표출이다.⑱ S의 자살소동은 낯선 사내와 동침하는 어머니의 성행위를 목격하고 자아의 어두운 부분인 그림자의 내용으로서 어머니를 죽이고 싶다는 무의식, 즉 극단적인 모성의 자장 부수기를 실행하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자신 속의 어머니도 죽게 된다는 논리를 암묵적으로 체득한 결과인데 왜냐하면 S는 자살 직전에 어머니에 대해 ‘기묘한 승리감’에 도취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부부재(fatherless)의 상황 속에서 모성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정상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로 정상적인 세계인식의 결여를 가져와 정신적 기형성을 낳는다. “낙서족”의 도현이나 “신의 희작”의 S에서 엿볼 수 있는, 비록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이 있더라도 다분히 돈키호테적인 대타적 공격성이라든가 “생활적”의 동주, “미해결의 장”의 지상에게서 보이는 무위(idleness) 역시 정신적 기형성 즉 혈연의식의 거부를 동반하는 자멸의식의 토대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자멸의식이 비교하위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사와 연관하여 자멸의식은 유소년기의 치환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경험의 결과이며 작품의 분위기(atmosphere)를 형성하는 중요한 세계관으로서 자리한다.
그의 인물들은 경제적 무능력자·불구자·정신적 아노미(anomie)를 가지고 있는 자 등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는데 이들은 하나 같이 작품 내적 인과관계로 설명되어지지 않은 외상(trauma)을 가지고 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작가의 자멸의식의 투영이다. 왜냐하면 그의 인물들이 예외 없이 평면적 인물이기 때문이며 일반적으로 평면적 인물은 전형적 인물이기 쉬운데 그의 인물들은 이러한 등식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문장구사의 측면에서 허구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냉소적 측면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것이다>는 작가 자신이 그의 주인공을 냉소적으로 묘사할 때는 예외 없이 등장하는 종결어미라는⑲ 지적처럼 자신의 자멸의식이 투영된 세계를 다시금 냉소적으로 관찰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냉소적인 관찰 태도로 말미암아 그의 세계를, 즉 <것이다>의 서술형을 통해 반영되는 현실 그것은 실제 현실이 아니라 무화된, 부재의 현실이라는⑳ 지적도 있다.
아무튼 이 같은 자멸의식은 부부재(fatherless)의 징후를 가장 예민하게 제시하는 “포말의 의지”의 종배에게서 읽을 수 있는 작가의 운명론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㉑ 손창섭 소설의 네 가지 형식적 특징 중 하나인 소설 속의 모든 사태는 아무런 해결도 결말도 없는 삶의 쳇바퀴 돌리기라는㉒ 점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논리적인 인간관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운명론의 특징과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존스(Edward, H. Jones)가 분류한 열린 플롯과 닫힌 플롯에서 열린 플롯이 아니다. 열린 플롯은 독자의 유추 가능한 결말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사건의 해소를 암시하지만 손창섭의 결말은 사태의 지속을 뜻하기 때문에 ‘삶의 쳇바퀴 돌리기’이다. 살아가면서 해소되고 해결될 그 무엇도 없다는 인식은 인간은 ‘우연히 태어나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밀리어’ 종국엔 ‘흔적 없이 꺼져버릴’ 존재라는 운명론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 물론 당연히 운명론적 사고의 기저에 손창섭 특유의 자멸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3. 이원적 성의식
작가의 세계관(weltanschauung)은 의도하든 하지 않든 작품에 투영된다. 성의식도㉓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경우 오랜 유교적 습속의 영향과 육체적 생존조차 절실한 전후 시기에 인간의 성을 다루고 있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손창섭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적 요소들은 인물들의 삶의 행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거나 혹은 존재양태를 밝히는데 매우 유용한 단서이다. 따라서 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인물을 통하여 손창섭의 성의식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것이 소설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밝힐 수 있다.
“낙서족”은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귀국하기까지 10년의 체험을 토대로 쓴 첫 장편소설이며 성장소설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성장소설은 한 사회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존재가치를 획득하는 과정, 즉 소년기를 거쳐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인물의 내면적 갈등과 정신적 성장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각성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성에 대한 호기심 또는 성적 호기심은 정서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항목인데 이 무렵에 성적 가치관이 확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길” 역시 같은 차원에 놓인다. “길”은 68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신문소설인데 주인공 최성칠이 16세의 소년이란 점에서, 주인공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인 서울이란 공간 등등이 “낙서족”과 유사하다. “낙서족”의 박도현이 19세라는 점과 밀항을 통한 새로운 세계인 동경이란 공간이 그렇다.
주지하다시피 미성숙한 인물이 낯선 공간에서 펼칠 수 있는 행동은 예외 없이 좌충우돌의 모험적 사건이며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성욕중심설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어린 나이에 갖는 성적 오해와 편견은 심리적 행동을 유발하는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의 성은 윤리나 도덕의 통제를 받기도 하지만 종족번식의 수단이라는 고유한 기능을 뛰어넘어 정상적인 삶의 필수적인 조건이란 측면도 있다. 특히 청소년기에 정신적 덕목으로서의 사랑과 육체적 욕구로서 성의 불일치로 말미암은 갈등이나 성적 오해와 편견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낙서족”과 “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가령 "길"에서 청파동 아저씨와 진옥여관 여주인이 목욕을 함께 하는 소리를 엿듣고 성칠이가 고민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존경 할만 하느냐’이다. 평소에 성칠이 청파동 아저씨를 성공한, 존경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그와 같은 고민은 성은 부도덕하다는 편견 아래 가능한 것이다. 또한 “낙서족”에서 도현은 노리꼬가 임신을 하자 ‘일본 년에게 복수한 것’이라고 한다.
복수의 감정 속에 사랑이 움틀 수 없음은 당연한데 육체적 욕망만이 있을 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밝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도현이 정작 사랑하며 존경하는 인물은 상희인데 다분히 정신적이며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사랑, 즉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이다. 다시 말하면 “낙서족”에서 박도현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을 각각 분리하는 이원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육체적 사랑은 성욕으로서 복수의 수단은 되지만 정신적인 사랑과 동행해서는 안 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박도현의 성향은 “길”의 최성칠에게서도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다.
「난, 네 맘 다 안단 말야.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두 손목 한 번 못 잡아 보구, 결혼하게 돼두 키스 한 번두 못할 걸 뭐. 바보같이.」
「뭐? 내가 바보란 말야?」
「그럼 바보지 뭐야. 바보, 바보.」
「요게, 누굴 깔보는 거야?」
말과 함께 성칠은 벌떡 일어서며, 봉순의 따귀를 갈겨 버렸다. 봉순은 눈물이 글썽하여 성칠을 쏘아보다가, 홱 돌아서서 내실 쪽으로 뛰어가 버리었다. <길>
인용문처럼 봉순은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각각 분리하는, 상호 대립적이며 이율배반적인 성칠의 이원적 인식을 질타한다.
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이원적 인식은 “미해결의 장”의 문선생과 “사제한”의 홍선생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문선생은 경제적으로 무능력해서 여동생 광순에게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맡기고 있으면서도 광순에게 상반되는 이중적인 자세를 보이는데 그것은 광순의 직업인 매춘에 대한 이원적 태도이기도 하다.
홍선생은 과거의 삶으로 미루어 보아 "설중행"의 고선생과 동일인물로 볼 수 있는데 정신적 사랑을 동반해야 하는 결혼을 회피하면서도 육체적인 성욕 때문에 사창가에 갔다가 옷을 도둑맞는 봉변을 당한다. “혈서”의 준석은 창애를 임신시키고서도 결혼은 규홍이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준석의 이원적 성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이원적 성의식에서 육체적 성은 정신적 성과 비교해서 경시되어야 하며 인간으로서 감히 할 수 없는 행위로 나타난다. 급기야 종족번식의 필수조건인 결혼마저도 하게 된다면 정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복수심에서 유발된 성폭력의 형태로 시작되어 어쩔 수 없는 동거의 형태를 띤 결혼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도 육체적 성과 정신적 성의 편차와 구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손창섭 소설에서 줄곧 나타나는 이원적 성의식의 원인을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고 평가되는 “신의 희작”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㉔ 이미 많은 평자에 의해 논의되었던 모친과의 동침 체험과 모친의 성행위를 목격하는 경험을 거론할 수 있다.㉕ 융에 의하면 개인적 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은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겪은 체험의 내용 가운데서 현실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현실에 어울리지 않아 억압된 여러 가지 내용으로서 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감정∙지각의 내용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개인적 무의식은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의식에 끊임없이 작용하거나 의식을 자극한다.
창작의 과정이 체험과 허구를 있을 법한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임을 염두에 두면 그 작업 속에서 무의식은 한층 왕성하게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을 반복한다. 따라서 생애 최초의 동침사건과 성행위의 목격은 의식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수면 위로 떠올라 문자화(lettering)되었음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특히 두 사건으로 인해 파생된 비정상적인 지각의 내용들이 여러 작품에 골고루 편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작품 안에서 일정한 목표를 위해 설정하는 작의(author’s intention)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발로라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모친의 성행위에서 S는 정신적 사랑을 발견할 수 없다.
‘칵, 뒈져라, 뒈져’라는 모친의 증오도 그 이유의 하나이긴 하지만 유곽 거리라는 성장환경과 ‘모친이 웬 남자와 동참한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S는 아직도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즉 정신적 사랑보다 육체적 환락으로써의 성을 일방적으로 목도하며 육체적 성의 이면에 있는 정신적 성을 체험할 기회가 철저하게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 구체적인 예가 모친과의 동침사건이다. 여기엔 남녀가 있을 뿐 모자는 없다.
밤중에 어렴풋이 잠이 깼을 때였다. 사타구니에 별안간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었다. 어머니의 손은 단정하게 그것을 주물러 주었다. 그러자 그의 조그만 부분은 어이없게도 맹렬한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어머니는 놀라선 지 주무르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나 놓지는 않고 한참이나 꼭 쥔 채로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손의 감촉을 향락하듯이 고간(股間)에 힘을 주어 꼭 끼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손을 뺐다. 그러더니 그를 탁 밀어붙이듯 하고 돌아누워 버리었다. <신의 희작>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모자로서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존재 확인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육체적 욕구에서 비롯하는 성적 도발만 있을 뿐이다. 신경득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소아성욕론으로 살펴보면서 S의 야뇨증도 거세콤플렉스의 징후이며 그 원인으로 모친과의 동침사건을 꼽고 있다.㉖
그러나 인간 심리를 성욕 중심으로 살피는 프로이트의 관점이 생물적 존재로서 인간을 설명하는데 적절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오로지 생물적 존재로 정의할 수 없다는 점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한계가 있다. 인용문을 융의 분석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모친의 성행위 목격과 더불어 개인 무의식에 침전되는 핵심적인 외상(trauma)으로서 비정상적인 지각 내용을 갖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당연히 이원적 성의식도 앞의 외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덧붙여 이와 같은 이원적 성의식의 특징적인 또 다른 측면은 성을 생계수단으로 이용하는 일군의 여성들을 통해 전후의 황폐한 도덕이나 윤리로서 성을 문제 삼기보다는 육체적 생존 그 자체를 강조하는 효과를 가진 작품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유실몽”의 누이, “미해결의 장”의 광순, “사제한”의 여자들, “포말의 의지”의 강영실, “소년”의 창훈모, “층계의 위치”의 이층 여자 등등 여기에 속한다.㉗
이들을 성적 타락의 인물로 쉽게 분류하는데㉘ 이러한 분류가 온당하려면 성의식의 일치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손창섭의 경우는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이 분리되어 있어 육체적인 성은 정신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 얼마든지 도구화․수단화될 수 있다.
4. 내향적 지각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지각과 감각은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데 물리적 자극이 인식을 매개하는 심리기능을 가리킨다. 지각은 사고나 감정처럼 이성의 법칙을 통한 판단이 아니며 따라서 비합리적인 기능이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각 기능에도 외향적 지각과 내향적 지각이 있는데 객체와 외부 자극에 의해서 지각 작용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내향적 입장에서는 이 과정이 현저히 변한다.
지각되는 객체 이외에 지각하는 주체가 있으며 이 주체는 객관적 자극에 주관적 소질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주관적 지각은 주관적인 요소의 현실, 즉 원초적 상들을 지각하는 것이며 이 상들은 총체적으로 하나의 정신적인 영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따라서 내향적 지각에서 객체는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객체에서 오는 자극은 객체의 현실에는 이미 연관되지 않는 주관적인 반응을 통해 즉시 대치됨으로써 그 가치가 감소된다. 무의식적인 내용이 강화되면 주관적인 지각 부분이 그만큼 활기를 띠어서 객체적 작용을 완전히 덮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객체의 작용이 주체에 영향을 거의 주지 않는다.㉙
손창섭의 소설에서 인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곧잘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객체의 작용이 주체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내향적 지각 작용 때문이다. 가령 "미해결의 장"에서 지상은 광순에게 돈을 얻어 식당에 가는데 ‘젠자이’를 주문해놓고 만둣국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행동이나 “피해자”의 병준이 월급을 받지 못해 결국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우는 행동, “혈서”의 달수가 준석이 손가락을 자를 때까지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것이나 “생활적”의 동주가 봉수와 춘자가 눈이 맞아 산 아랫동네로 가도 망연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나 “신의 희작”에서 S가 미요꼬에게 청혼하는 행동 등등은 서사적 흐름 속에서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행동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내향적 지각 작용은 융의 지적처럼 객체적 현실에서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낳는데 이 점과 관련하여 손창섭의 작품이 1950년대 현실의 황폐상 등 객관적인 현실의 탐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논의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보다 내향적 지각은 인물 형성의 주된 특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주지하다시피 인물은 소설 속에서 갈등과 사건을 엮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서 최소한의 전형성을 획득하거나 행위 또는 가치관에 인과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손창섭의 소설에서 플롯과 연관되는 그와 같은 서사적 인과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즉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내향적 지각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손창섭의 작품세계가 ‘인간모멸의 미학’이라든가㉚ ‘무의미의 미학’이라는㉛ 수사로 정의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물의 내향적 지각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영어 시간이었다.
부독본을 가지고 선생이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S는 갑자기 손을 들고 일어서며,
「선생님, 이 책에 틀린 데가 있습니다.」
하고, 외쳤다.
「어디가?」
「여기, Life work라구 되어 있는데, 이건 Work life가 잘못 인쇄되었나 봅니다.」 <신의 희작>
인용문과 같은 주장을 들어, S의 편집증(paranoia)을 거론하는데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망상이라기보다는 내향적 지각 작용으로 볼 수 있다. ‘내겐 워어크 라이프가 절대로 옳으니까요’라든가 ‘영어의 노예가 된 인간을 경멸하는’ 것이라는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어 선생과의 대립에서 ‘반항심과 복수심’이 선생의 딸을 겁탈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데 그 이면에는 ‘부모도 형제도 집도 돈도 아무것도’ 없다는 자포자기의 아집이 있다. 객체의 작용이 주체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와 같은 상황은 “신의 희작”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곧잘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작가의 내향적 지각을 유추하는 근거가 된다.
내향적 지각 태도가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객체적 현실에서 점점 멀어지고 주관적 지각과 다른 객관적 현실은 모두 희극이요 환영이 된다.㉝ 당연히 S에게 객관적 현실은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할 조롱의 대상이나 거부의 대상이 될 뿐이다.
S는 자기의 정확한 생일조차 모른다. (…) 물론 그는 명절이란 것도 아예 묵살해 버리고 만다. (…) S는 결혼식이나 장례식뿐만 아니라, 졸업식이니, 무슨 축하회니, 수상식이니, 기념회니 하는 식전이나 집회도 딱 질색이다. 야생인간인 그의 생리는 인습적이요, 형식적이요, 공식적인 것들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무슨 식이란 것이 그의 원시적이요, 색맹적인 눈에는 거추장스런 형식으로밖에 반영되지 않는다. <신의 희작>
객관적 현실을 사는 이들은 ‘규격품 인간’이며 주관적 지각의 주체인 자신은 ‘야생인간’으로 규정하는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객관적 현실을 사는 규범들을 철저히 거부하고 주관적 현실 속에 칩거하는 전형적인 내향적 지각형을 확인할 수 있다.
S의 내향적 지각 성향은 원초적 체험이랄 수 있는 모친과의 동침과 모친의 성행위를 목격한 외상(trauma)에서 비롯되었다. 외상은 ‘칵 뒈져라, 뒈져’라는 모친의 증오가 ‘엄마, 내가 칵 죽어 버릴께’라는 자학적 선언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며 급기야 ‘나는 부모도 형제도 집도 돈도 고향도 조국도 아무 것도 없는 놈이다’라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선전포고로 나타난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신의 희작”의 S나 “낙서족”의 도현의 폭력적 성향을 이해할 수 있다.
5. 결론
1950년대는 한국전쟁과 그 영향을 거론하지 않고서 언급하기 힘든 시대이며 그런 인식은 문학사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한국전쟁을 분기점으로 내세운 신세대론이나㉞ 전쟁체험의 유무로 분류하는㉟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은 50년대 작가들과 한국전쟁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암묵적 전제에서 비롯하는데 실제로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오류 없이 적용된다. 특히 전쟁 이후에 등단한 소위 신세대 작가들은 한국전쟁이나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작품의 중심적인 위치에 올려놓으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손창섭은 다분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가 자생적 실존 작가로도 평가되고 있듯이 외상을 입은 개인적 자아의 삶에 초점을 둔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그러한 삶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꿈꾸거나 존재 이유와 존재 의미를 화두로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삶 자체를 역겹게 인식하며 보편적 가치를 거부한다. 초기작에 속하는 “공휴일”이나 “사연기” 혹은 “비오는 날”과 “생활적” 등등에서 한국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나 작품의 핵심적인 모티브나 사건의 원동력으로서 작용하기보다는 에피소드의 배경이나 단편적인 기억으로서 자리하고 있어 동시대의 작가들과 다른 관심의 밀도를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도 이미 살펴보았듯이 손창섭의 인식구조 속에, 즉 자멸의식·이원적 성의식·내향적 지각 속에 민족과 이데올로기의 단위인 한국전쟁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은 소설문학에서 사회적 자아보다는 개인적 자아를 앞세우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그가 보여주는 병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들이나 사회에 대한 황폐한 인식, 인간관계의 비인간성 등은 전후 사회의 수용으로 볼 수도 있으나 오히려 손창섭 개인의 독특한 세계관에서 비롯된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손창섭과 50년대의 상관관계는 재고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손창섭을 50년대에 묶어 놓고 논의하게 된다면 소설이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리얼리즘적인 당위론의 범주 안에 갇히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러한 방향의 논의는 손창섭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① Roland Barthes, 김희영 옮김,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1999. 88쪽.
② 손창섭, 아마추어 작가의 변, 「한국현대문학전집26」, 삼성출판사, 1981, 436쪽.
③ E. M. Forster, Aspects of the novel, Pelican Books, 1966. 52쪽.
“Since the novelist is himself a human being, there is an affinity between him and his subject-matter which is absent in many other forms of art.”
④ 박덕은, 한국현대소설의 이론과 적용, 새문사, 1989. 23쪽.
⑤ 손창섭, 추천소감, 「문예」, 문예사, 1953. 7. 219쪽.
“돌·나무·염소·개·제비·두더지·노루 이런 것들의 어느 하나로 태어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허구 많은 물건 가운데서 어쩌자고 하필 인간으로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일찍이 나는 인간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조금도 자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 진정 나는 염소이고 싶다. 노루이고 싶다. 두더지이고 싶다. 그나마 분에 넘치는 원이 있다면 차라리 목석이노라. 나의 문학은 목석의 노래다. 목석의 울음이다. 목석의 절규다.”
⑥ 김병익 외, 현실의 도형과 검증, 현대한국문학의 이론, 민음사, 1982, 340쪽.
⑦ 김윤식·정호웅, 한국소설사, 예하, 1994. 331쪽.
⑧ 천이두, 한국현대소설론, 형설출판사, 1974. 221∼222쪽.
⑨ 이부영, 분석심리학, 일조각, 1998. 25쪽 참고.
⑩ 이부영, 앞의 책, 26∼28쪽.
⑪ 하정일, 전쟁 세대의 자화상, 「작가연구」, 1996 창간호, 38쪽 참고.
하정일의 논의처럼 배경은 환경과 다른 의미이다. 환경은 인물의 삶과 구체적인 연관성을 획득할 수 있을 때 사용되는 것이라면 배경은 단순한 공간적 위치이다.
⑫ René Wellek & Austin Warren, Theory of Literature, Peregrine Books, Reprinted 1966, 41쪽.
“The total meaning of a work of art cannot be defined merely in terms of its meaning for the author and his contemporaries. It is rather the result of a process of accretion, i. e. the history of its criticism by its many readers in many ages. (…) We must be able to refer a work of art to the values of its own time and of all the periods subsequent to its own.”
⑬ 이효재, 분단시대의 사회학, 한길사, 1985. 193쪽
⑭ 손창섭 연보, 「작가연구」, 1996. 창간호, 새미, 159쪽.
⑮ 渡日 후의 손창섭에 대하여, 「작가연구」, 앞의 책, 160∼164쪽 참고.
도일 이후에 한국인을 만나기를 극도로 꺼려한다던가 자신의 작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만나지 않는 등으로 확인할 수 있는,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멸의식이 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⑯ 이부영, 앞의 책, 216∼217쪽 참고.
⑰ 주종연, 한독민담비교연구, 집문당, 1999. 209∼222쪽 참고.
⑱ 주종연, 앞의 책, 210쪽.
⑲ 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2. 250쪽.
⑳ 정호웅, 50년대 소설론, 「1950년대 문학연구」, 예하, 1991. 50쪽.
㉑ 손창섭, 포말의 의지, 현대문학 59, 1959.11, 참고.
“그처럼 위대한 무모의 흐름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위의 온갖 질서와 무질서를 휩쓸어 삼키며 변함없이 흘러왔고, 흐르고 있고, 또 흘러갈 것이다. 그 위에 거품처럼 떠서 흐르는 불안한 자신을 종배는 의식하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인간의 이 거대한 흐름의 어느 역사적 지점에서 우연히 태어나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밀리어 어느 지점까지 휩쓸려 흐르다가 흔적 없이 꺼져 버릴 한 방울의 거품.”
㉒ 정호웅, 앞의 책, 48쪽.
㉓ 성은 인간의 욕망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문학의 소재로 주목받아왔는데 로렌스(D. H. Lawrence)를 필두로 에로티시즘(eroticism)을 지향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작가의 개성에 따라 에로티시즘은 각기 다른 코드(code)로 변용되어 나타나는데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Lady Chatterley's Lover)”의 경우, 정신적 사랑은 육체적 사랑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Die unerträglihe Leichtigkeit des Seins)”은 삶의 가벼움을 담아내고 있다.
㉔ 사실 손창섭은 “신의 희작” 이후 이렇다 할 문제작을 발표하지 못했는데 물론 50년대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식으로, 손창섭의 창작열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평가도 없지 않지만 초점을 달리해서 살펴보면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소설이 결국 작가 자신의 얘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에 주목할 수 있는데 손창섭은 "신의 희작"으로 자신의 얘기를 다해버린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소설로써 할 말을 모두 해버린 작가에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망의 부재니 <자기의 것>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투의 평가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㉕ 모친의 불륜으로 보기도 하지만 모친의 성행위로 간주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도덕관이 개입하는데 “소년”의 창훈으로 미루어 보아도 S가 불륜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낙서족”에서 모친과 부친의 정사장면을 목격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신의 희작”과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는다. 비록 ‘놀라움’이나 ‘싸움’으로 표현의 강도는 약하지만 최초의 목격이라는 점에서 충격과 동궤에 있다. 물론 성적 요소들이 나타나는 “유실몽”·“사제한”·“층계의 위치”· “미해결의 장” 등에서도 불륜에 관한 의식은 엿보이지 않으며 “광야”의 승두가 의붓아버지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의무로서 복수의 차원이지 불륜의식에서 비롯된 적개심이라고 할 수 없다.
㉖ 신경득, 한국전후소설연구, 일지사, 1983. 200∼204쪽 참고.
㉗ 뿐만 아니라 “설중행”에서 ‘전 선생님의 신세를, 키스로 갚아도 좋아요.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까요’라며 기숙(寄宿)의 대가로 고선생에게 키스를 해주는 귀남이라든가 “미해결의 장”에서 지상은 선옥을 염두에 두고 ‘내가 선옥이었다면 정말 남의 첩이 되어서든, 양갈보 질을 해서든, 이종형의 마약 값을 당하고, 그 집 살림을 도와주었을 걸하고 후회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선옥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내가 여자였더라면 하는 생각에 취해 보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처럼 육체적인 순결을 정신적인 순결과 연결시키는 경우는 없다.
㉘ 김진기, 손창섭의 무의미 미학, 박이정, 1999. 197∼202쪽 참고.
㉙ 이부영, 앞의 책, 162∼168쪽 참고.
㉚ 유종호, 인간모멸의 미학, 「한국단편문학대계8」, 삼성출판사, 1975. 431쪽.
㉛ 김진기, 앞의 책.
㉜ 김진기, 앞의 책, 210쪽.
㉝ 이부영, 앞의 책, 169쪽.
㉞ 김상선, 신세대작가론, 일신사, 1964.
㉟ 김병익, 분단의식의 문학적 전개, 「문학과 지성」, 1972.2.
정호웅, 분단문학의 새로운 넘어섬을 위하여, 「분단문학비평」, 청하, 1987.
* 참고문헌
김병익 외, 현대한국문학의 이론, 민음사, 1982.
김병익, 분단의식의 문학적 전개, 「문학과 지성」, 1972. 2.
김상선, 신세대작가론, 일신사, 1964.
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2.
김윤식·정호웅, 한국소설사, 예하, 1994.
김진기, 손창섭의 무의미 미학, 박이정, 1999.
손창섭, 한국현대문학전집26, 삼성출판사. 1981.
신경득, 한국전후소설연구, 일지사, 1983.
유종호, 비순수 선언, 신구문화사, 1962.
이부영, 분석심리학, 일조각, 1998.
이효재, 분단시대의 사회학, 한길사, 1985.
정호웅, 1950년대 문학연구, 예하, 1991.
정호웅, 분단문학의 새로운 넘어섬을 위하여, 「분단문학비평」, 청하, 1987.
주종연, 한독민담비교연구, 집문당, 1999.
천이두, 한국현대소설론, 형설출판사, 1974.
하정일, 전쟁세대의 자화상, 「작가연구」, 1996.
E. M. Forster, Aspect of the novel, Pelican Books, 1966.
René Wellek & Austin Warren, Theory of Literature, Peregrine Books, Reprinted 1966.
Roland Barthes, 김희영 옮김,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