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위로
오랜 시간 의문이었다. 왜 문득 차라리 죽고 싶어지는 걸까. 지난 글을 기고한 뒤 끝없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https://brunch.co.kr/@leesomstory/24
자연을 바라보듯 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깨달음 뒤엔 '무력감 앞에서 느끼는 무력함'이 곧장 찾아왔다. 인간이 감히 어떻게 자연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떤 방향으로든 벗어나려 애를 쓰다간 외려 언젠가 역풍을 맞는다. 이 진실 앞에서 무엇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올라오는 폭풍을 멀뚱히 바라볼 뿐. 그러고 있자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이따금 여전했다.
예상치 못하게 계속 일이 치고 들어와 정신이 하나도 없던 날. 문득, 잠시 멈춰 숨을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 생기는 건 일상이었다. 삶에서 어려움과 좌절이 찾아올 때면 여지없이 원인은 '통제를 벗어난 일이 그림자처럼 계속 내게 달라붙어서'였다. 상담을 받으며 내가 이 부분에 유독 취약하다는 걸 인지하게 된 후론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무언가가 예고 없이 휘몰아치는 날엔 잠시나마 멈춰서 순간을 벗어나는 연습을 했다. 이날도 여지없이 그렇게 심호흡을 하는데, 평소와 하나 달라진 양상이 있었다. 숨을 천천히 들이고 내쉬는 순간 머릿속에 한 장면이 확 스쳐 갔다.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하던 날, 몸이 얼어붙은 채 머릿속이 새하얗게 공포로 질려선 그 남자 아래 깔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의 모습.
트라우마의 가장 큰 본질적 감정 중 하나는 "무력감"이다. 그리고, 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취하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의 "증상"이다. 그렇게 전력을 다해 애쓰다 어느 시점에서는 여전히 수렁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를 끊임없이 끔찍하게 마주한다. 그것이야말로 '트라우마'니까. 애초에 굳은 다짐이나 특정한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의 문제였다면 그건 트라우마가 아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혀 살게 되어버린 것. 슬프게도 그게 트라우마의 본질이었다. 좌절과 허무, 무력감, 공허함으로 숨 막히게 점철되어 있는.
내가 걸어온 길도 그랬다. 해볼 수 있는 모든 건 다 시도해 보았다. 다양한 심리 서적을 읽고 강연을 듣고 사회에 목소리도 내 보고. 상담도 어느덧 십여 년을 받았다. 괜찮아질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여도 보고, 나아질 거라 위로하면서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수렁 속에서 수만 번을 다시 일어서 봤다. 한때는 화살을 밖으로 돌리며 나를 도와주지 못한 세상에 분노하기도 했다. 성적인 피해를 자유롭게 꺼내놓을 수 없던 시대. 나에게 그 일이 벌어졌던 시기는 그랬다. 수치심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토하듯 튀어나오는 아픔을 꾸역꾸역 역겹게 다시 삼켜 내다 차마 나를 도와주지 못했던 세상에 화가 치밀어 올랐고,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간절함에 용기를 내 주변에 목소리를 내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 커다란 세상 앞에서 무력함을 확인한 뒤 실패했다 느꼈다. 아직 변할 수 없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나는 그저 한 톨의 먼지에 불과했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슬픔, 증오로는 나를 살려낼 수 없겠다고 여겼다. 나를 정서적 사지로 몰아넣은 그를, 세상을 역으로 용서하고 싶어졌다. 용서하면 편해진다는 말이 파괴되어 가던 영혼을 실낱같은 빛처럼 붙들었다. 종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년간의 신앙생활은 '그 무엇도 용서할 수 없는 아픈 나의 상태'를 외려 자각하게 만들었다. 더는 분노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채로 회복되지 못한 상처는 온 시간을 부유했다.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해소되지 않은 채 갈 곳 없이 떠도는 아픔이 일상의 크고 작은 부분에서 어떻게든 기어이 꾸역꾸역 비집고 틀어 나왔기 때문이다. 살아야 했다. 생존해 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꾸만 예고 없이 터져버리는 이 감정의 에너지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밖에선 해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으니 내 안을 파헤치기로 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않기 위해 할 수 있던 일은 뭐였을까.' '앞으로 막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 나를 보호하기 위해 던지기 시작했던 질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향한 칼날이 되어 다가왔다. '네가 애초에 그날 그 사람에게 좀 더 명확하게 선을 그었어야지. 십수 번 거절해서도 어려웠으면 수십 번 밀어냈어야지.' '앞으론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를 좀 더 잘 지키도록 해.' 문제의 이유와 해결 방식을 모두 나로부터 찾으며, 자기 보호를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의 레이더는 최대로 활성되어 늘 각성 상태였다. 혹여나 생길 그 어떤 위험의 요소도 미리 감지하려 애썼다. 계획적이고 방어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생존에 에너지를 쏟아부으니 별 걸 하지 않아도 삶을 영위할 체력은 바닥이었으며, 일상적으로 긴장되어 작은 소리나 행동에도 위협감을 느끼며 자주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렇게 온 위험을 경계하고 대비하며 살아가도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면 왜인지 자꾸만 죽고 싶어 졌다. 살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예전에도 나를 지키지 못해서 이토록 고통받았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있는 듯했다.
어느 날엔 이렇게 스스로를 혹독히 대하는 내 모습이 사뭇 애틋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간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오랜 시간 발버둥 쳐온 과거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건 내게 또 다른 혈흔을 내는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자신조차 온연히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실패감, 좌절감, 수치심이 검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모든 일상에 따라다녔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시도했던 모든 방법의 끝에는 그렇게 여지없이 또, 다시, 해방에 실패해 버린 내가 굳건히 존재했다. 나는 거미줄이 만들어낸 무한한 세계에 갇혀 있었다. 벗어나려 움직일수록 끝없는 실타래가 하염없이 뒤엉키며 몸을 겁박해 왔다. 살고자 하던 가여운 내 생의 온갖 몸부림들을 포기하게 된 건 이내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였다. 완벽한 실패자가 된 기분이었다. 무력감 앞에서 무력을 느끼며 꽤 자주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궁금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자꾸만 죽고 싶어지는 걸까. 가슴에 질문을 품은 채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마음은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답을 보여 줬다. 삶에서 벌어지는 뜻하지 않는 일이란 내게 그 사람 아래 깔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한 내 모습이 떠오르는 거였다. 매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장면이 무한히 재생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를 죽여버리고 싶은 동시에 스스로를 없애고 싶었다. 그 순간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무력한 나'는 곧 내게 실존적 공포이자 죽음이었기에.
가만히 그 옆에 다가가 손을 잡고 누워 본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무서웠을까. 놀랐을까. 참담했을까. 그 어떤 행동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공포감에 질식되어 영영 멈춰버린 몸과 마음. 그건 마치 어느 날 운전을 하다 불현듯 밀고 들어오는 차에 무방비 상태로 교통사고를 당해 버린 느낌이었다. 실제로 통증은 뇌에서 인지하기에 정서적 아픔과 신체적 고통이 독립된 별개로 인식되진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채로, 그러나 충격이 너무 커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로 이만하면 괜찮다 여겨 가며 오랜 세월을 보냈다. 차라리 몸이 불구가 되었다면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을 텐데. 감정은 외면하면 보이질 않으니 잘려나간 곳들은 긴 시간 회복되지 못한 채 남모를 피를 외로이 흘렸다.
더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도망갈 곳도 없다. 최근 상담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전에는 우울해질 때면 항상 마음을 돌아보면서 나아갈 방법을 찾았거든요. 그러면 길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엔 길이 없어요. 어딘가를 향해 가보려고 해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돼요. 원점으로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더 이상 앞으로 못 가겠어요.'라고. 그때엔 그저 막막한 마음으로 문득 이런 말을 내뱉었는데. 톺아보니 실은 숱한 방황을 거쳐 진정으로 와야 할 종착지가 여기였기에, 더는 향할 곳이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이제는 그 사람 아래 놓여있는 나를 혼자 두고 싶지 않다. 참담하더라도, 아프더라도, 무력하더라도, 나를 지키지 못하는 순간조차도 함께 할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생기기를, 그리하여 조금은 덜 외롭고 막막하기를. 긴 세월이 지나 잡게 된 이 손을 좀 더 소중하게 포근히 쥘 수 있기를. 이따금 버거워 그 손을 놓고 도망치며 멀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어느 날 문득 다시 옆으로 다가와 가만히 누워 주기를. 그렇게 곁에 남아, 영영 깊은 바닷속에 잠겨 혼자일 것 같았던 너에게 부디 한 방울의 위로가 되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