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작
처음 사귀게 된 날, 마음을 고백하며 "함께 흔들리며 날아가자"던 너의 말을 기억한다.
우리는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근처 학교 축제에 놀러 가자는 친구의 말에 평소 그런 쪽엔 관심도 없다 문득 호기심에 딱 한번 가본 그곳에서 너를 만났다. 너는 아직도 처음 나를 마주했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친구들과 함께 네가 있던 동아리 방향으로 걸어가던 중 그중 가장 자그마했던 내가 왜인지 이유 모르게 시야에 확 들어왔단다. 장난기 많았던 너는 나에게 "어, 쵸딩이다!"라는 말로 다가와 네 동아리를 구경하고 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어떤 것들을 보았는진 시간이 오래 지나 생각이 잘 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열심히 준비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가려던 길목에 방명록을 쓰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다른 동아리에는 한 번도 남기지 않았었는데 왜인지 너를 만났던 곳에서는 "즐겁게 잘 보고 간다"는 말을 짧게나마 적고 가고 싶었던 것 같다. 공간을 구성하느라 조명이며 소품 하나하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 준비했을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나, 왜인지 이유 모르게 마음이 갔다.
얼마 뒤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방명록에 연락처를 쓰는 란이 있어 적을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어차피 형식상인 듯해서 별생각 없이 적어 두었었는데, 그걸 보고 내게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연락이었어서 처음엔 그저 축제를 다녀간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건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방명록을 관리하는 친구에게 혹시라도 내가 적고 가게 되면 그 부분에 꼭 표시를 남겨 달라고 부탁해뒀었다고 한다.
너는 내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어떤 건지 나를 보고 알게 되었다며. 그러나 슬프게도 그때의 나는 중학생 때 내게 벌어졌던 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남성이라는 존재를 극도로 두려워할 때였다. 심지어 가족인 아빠와 오빠조차도 경계할 때였으니, 그런 내가 당시에 남자와 교제를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던 사춘기 시절에 남성을 좋아하는 마음과 언젠가 또다시 내 생존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대상이야말로 남성이라는 두려움 사이에서 너를 대했다. 나조차 혼란스러운 채 때론 호감을 보였다가도 막상 네가 다가오면 쏙 숨어들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너는 1학년. 몇 개월간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나는 고3이 되어버렸다. 입시 준비로 사귈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네 고백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연락은 유지했다. 사실 나도 너를 좋아하긴 했었으니까. 여전히 생생하다. 힘겨웠던 고3시절, 홀로 야자실에서 지친 채 공부를 하다 네게 전화가 오면 기쁜 마음에 휴대폰을 손에 쥐곤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가 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잘거리며 나눴던 일. 등굣길 너에게 연락이 와 있으면 함뿍 미소 지으며 답장했던 일. 너를 만나게 되는 날엔 며칠 전부터 떨려하며 무얼 입을까 고민했던 일.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나는 너를 참 많이 좋아했으면서도, 슬프게도 남성이라는 존재를 아직 내 삶에 허용할 수 없던 상태였던 것 같다.
생일날 너를 만났었다. 수업 후 야자가 끝난 어느 날 밤,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놀이터 앞에서 케이크를 들고 초에 불을 붙인 채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줬던 네 모습을 기억한다. 영화처럼 기억에 남아 있는 찰나의 빛나던 순간. 참 고마웠던 날. 네 덕분에 나의 고교 시절이 조금 더 따뜻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만날 수가 없었다. 너를 향한 마음보다 트라우마에서 발현된 두려움이 압도적으로 컸었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너라는 사람 외의 남자를 접할 일이 거의 없다가, 대학생이 되니 일상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남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신뢰가 아주 조금씩 생겨 나가던 중 당시 다니던 대학교에서 지속적으로 내게 호감을 표하던 한 사람에게 마음이 생겨 연애를 해 보게 됐다. 물론, 그 사람조차 오랜 시간 연락을 유지하며 그가 위험한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지켜보다 만난 거긴 했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가 만약 같은 학교를 다녔었더라면, 그 사람처럼 너와 매일같이 만나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네가 안전한 사람이라는 걸 조금만 더 일찍 알게 됐었다면 그 남자가 아닌 너와 첫 연애를 해볼 수도 있었을까. 그랬었다면 어쩌면 너로 인해 이 세상이 아주 조금쯤은 덜 두려워졌을 수도 있었으려나.
다른 이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너와는 연락이 끊겼다. 연인이 생긴 상황에서 아직 내게 마음이 있는 너와 연락을 유지하는 건 도저히 너에게도 남자친구에게도 예의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나름대로 꽤 오래 고심해서 첫 연애를 시작했던 것 치고는 그와의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작 몇 개월을 만나다 고3이었던 네 수능이 끝날 즈음 헤어졌던 것 같다. 코끝이 시려오던 그해 겨울, 너는 나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해 왔다. 그렇게 두어 번 만났을까. 어느 날 느닷없이 내게 다시 마음을 전해왔다. 신촌역 근처 카페에 마주 앉아, 오늘 아침 나를 만나기 위해 머리를 만지다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아 세 번이나 감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다 너는, 마치 너의 온 세상이 오직 나뿐인 양 온몸의 모든 감각을 내게 향한 채 떨리는 손으로 애꿎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눈에 한가득 나를 담고선 여전히 좋아한다는 말을 꺼냈다. 그것이 실은 이젠 그만 마음 정리를 하기 위해 용기 낸 너의 마지막 고백이었다는 걸,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됐었지만.
하나의 거짓 없이 투명하게 반짝이던 너의 진심 앞에서 나는 이번에도 무거운 마음으로 거절의 의사를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네게 분명 호감은 있지만, 실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은 우리 둘의 마음 크기가 서로 많이 다를 거라고. 아직은 내가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미안함을 전했다. 이제 막 다시 생기기 시작한 호감 정도로 가벼이 너를 만나겠다 결정하기엔 네 마음이 나에 비해 너무 컸다. 이미 긴 시간 힘겨웠을 네가 사귀는 동안 부디 또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만약 우리가 조금 더 오래 연락을 하고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지면서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 갔었다면 우리는 아마 그때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시기의 너와 나는 늘 어긋나는 타이밍을 가진 관계였다.
이후 네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도 하지 못했다. 네 고백을 거절해 놓고서 먼저 연락하기란 왜인지 죄스러웠기에. 오히려 네가 가벼운 마음으로 나를 대했었다면 나 또한 가끔 안부를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너는 내게 미안하고 소중한 존재로 오래도록 기억됐다. 세상으로부터 숨어들었던 미숙한 나를 전심으로 사랑해 줬던, 그러나 얄궂은 타이밍으로 인해 결국 함께할 수 없었던.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연락이 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침대에 누워 친구와 통화 중이었다. 스피커폰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네 이름과 함께 메시지가 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손으로 비볐다를 반복하며 세 번은 족히 다시 읽어봤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가 나에게 다시 연락할 일은 한평생 없을 줄 알았는데.
서로의 안부를 묻다 약속을 잡고선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 그간의 근황을 나눴다. 너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날 너와의 대화가 유독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었다. 다행히, 너 또한 그렇게 느꼈었고.
한여름 이른 저녁에 만났던 우리는 원래 밥만 먹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바로 인사하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러기엔 아직 날이 너무 밝았다. 아쉬움에 이곳저곳을 함께 거닐다 식당에 들어가 뒤늦은 2차를 하며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눴다. 즐거웠던 만남에 그날밤 나는 먼저 연락을 보냈고, 중국어를 좀 할 줄 알던 장난기 가득한 너는 이런 답을 해왔다.
바람이 좋다고 했지만, 실은 너와 만난 그날이 행복하다는 뜻이었다.
다음날엔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나의 말을 기억해 뒀었는지 작은 선물과 함께 네게서 연락이 왔고, 그다음 날엔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그렇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어느새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게 당연한 사이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전과는 달리, 이번엔 마음의 크기가 서로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끊임없이 어긋나던 톱니바퀴가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아 서서히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려는 걸까. 그렇게 우리는 물 흐르듯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