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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솜 Jul 21. 2024

내가 나를 살리기로 했다.

진창 속의 나와 함께 걸으며

  나는 진창에 빠져있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10년? 20년? 아니, 어쩌면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처음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언젠가부터 그곳에 갇혀 한 발짝도 딛지 못한 채 누군가가 와서 구해주길 기다렸다. 극도로 외로웠다. 그런데 겉으론 몸에 흙 한 톨도 묻지 않은 것처럼 굴어야 했다. 사람들이 이따금 내게 다가올 때면 그들이 요구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깨끗한 체하려 할 때마다 몸에 힘이 뻣뻣하게 들어갔다. 나는 점점 더 깊은 진흙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 진창과 한 존재가 되어 그 자리에 갇힌 채 걷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진흙 속에 빠진 나를 오며 가며 보곤 했다. 나 좀 구해줘. 외쳐봤지만 관심이 없다. 쓱 보고 지나간다. 혹은 다가와선 다정하게 말을 걸다 사라진다. 어떨 땐 같이 걷자고 다가왔다가 나를 두고선 저 앞에 혼자 가버린다. 쫓아가려 애써봐도 굳어있는 두 다리는 움직이질 않는다. 여전히 나는 혼자고, 도저히 힘을 낼 수가 없다. 누군가 오고 간 찰나의 온기가 사라진 곳을 공허히 바라본다.


  어느 날 처음 보는 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친구는 내 옆에서 아무 말 않고 오랜 시간 있어주었다. "처음으로 날 있는 그대로 봐주었던 사람."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게 뭔갈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서 가만히 따뜻하게 온기를 채워줄 뿐. 신기하다. 왜 나를 가만히 두는 거지? 모두가 날 이상하게 보며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만을 바랐는데.


  한참을 그의 곁에 있다 보니 어느 순간 이 사람과 함께라면 걸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움직일 힘이 생길 때까지 묵묵히 옆에 있어 주었다. 어느 날 그의 손을 잡았다. 걷는 법이 기억나지 않아 함께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다. 오랜 시간 나를 잡아끌던 질척하게 무거운 진흙이 나의 모든 걸음에 엉겨 붙는다. 몸이 내려앉듯 무겁다. 그래도, 힘을 내 본다. 그 사람이 나를 잡아주고 있으니까. 그는 내가 휘청일 때면 넘어지지 않게 팔을 꽉 잡아준다. 나를 부축해 줄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다. 언제든 내게 손을 뻗는다. 나, 이 사람과 함께라면 천천히 다시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끝이 보이지 않던 진창 속에서 행복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엉망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건 그저 그 마음에 시선을 두고 발걸음을 나란히 맞추는 일이다. 그렇게 과거와 함께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연 현재의 나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장담하지 못하겠다. 다만 혹여 무너지더라도 또 다른 미래의 내가 다가와 언젠가 한껏 끌어안아주리라는 희망은 있다. 그러므로 그저 이 자리에서 진창 속의 나와 함께 존재해보려 한다. 긴 시간 외로웠던 마음에 이렇게나마 나의 온기가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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