눕고자 하는 욕망과 싸워야 하는 재택근무
무한도전 키즈로서 나는 여태껏 본 무한도전에서의 최고 명언 중 하나는 300회-쉼표 특집에서 대나무숲 폭로전(?)을 하는데 출연진들의 스탭 중 한 분이 “준하 오빠는 자잘한 장점이 많은데, 그것을 뒤덮는 커-다란 단점이 있어요”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을 들은 정준하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거의 숨넘어갈듯 웃고 있었고, 당사자는 어쩔 줄 몰라한다.
이걸 내 이야기로 치환하자면 자잘한 단점들이 많은데, 그것을 상쇄하는 커다란 장점이 있는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반기는 진짜 이게 사는 것인가 싶게 바쁜 숨을 몰아쉬고 일을 쳐내면 또 다른 일감이 들어오고,(1월의 부가세, 2월의 연말정산, 3월의 법인세, 4월은 아주 잠깐 숨을 고르게 해주고 5월은 종합소득세 신고의 달이다. 이때 나는 정수리에 흰머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상반기에는 고속노화의 산 증인이 된다.) 다양한 거래처의 사장님들은 희한한 이슈를 말씀주시고, 4대보험공단과 세무서 직원들과의 지속적인 통화는 때론 영혼의 여백까지 빨려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나는 집에서 주로 진행한다. 이것이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커다란 매력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날 때 공인회계사에 합격한 아버지는 현재까지도 회계사로서의 일을 하고 계신다. 그 덕에 내 별명은 복덩이였다, 이것은 오로지 아버지만 사랑했던 내 친할머니만이 내가 태어나고 얼마간 나를 부른 호칭이었다. 그 뒤 내가 어떻게 그녀에게서 불렸는지는 언젠가는 풀어낼 예정이다.
하여튼간 복덩이인 나는 어릴때부터 아버지가 가져온 동전들을 10원부터 500원까지 한 줄에 10개씩 쌓는 놀이를 하면서 자랐고, 대학에 입학하고서는 자신의 딸이 천재라고 착각한 아버지의 ‘왼쪽은 차변이고 오른쪽은 대변이다’라는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입식 교육을 시작으로 정신차려보니 아버지의 회계사무소에서 세무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50%의 세무대리인, 50%의 사내 비서와 경영지원을 담당하는 아마 영원한 막내사원이 될 예정이다.
가족회사니깐 가족인 일원에게는 좋은 일만 있을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마 대부분은 장단점이 공존할 것이다. 내 경우는 평소엔 괜찮은 편이나 가끔 아늑한 집의 나만의 방에 누워 있는데 밤 10시에 대표님이 들어와서 “이것 좀 해줘야겠다”라고 말하는 공포를 겪기도 한다.(그리고 이것은 추후 내가 독립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이기도 하다. 어느정도 머리가 큰 성인이며, 나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스타일은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이 서로 애틋하고 정이 더 싹틀 것이다. 적어도 난 그러했다.) 그리고 가족이기에 타인이었으면 뇌에 힘을 더 주고 하지 않을 막말과 무례함도 가족끼리는 하게 될 때도 있다. 또한 쉬는 날, 업무 외 시간의 연락을 받는 횟수가 다른 임직원들에 비해 많기 마련이며, 가족이란 단어에 주어지는 무게감이 짓누를때도 많다. 물론 나는 건방진 MZ세대의 회사원이기에, 아버지뿐만 아니라 나도 무례한 짓을 한다. 주거니받거니 우당탕탕 신경전이 오고가고, 가히 한 편의 블랙코미디가 완성된다. 이제는 내 남동생도 하반기에 우리 회사에 다니게 되었고, 아마 3명이 다 독립적인 일을 하지 않는 이상 드라마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단점을 버티지 못하고 퇴사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짧은 방황을 하면서 월 60만원의 수입으로는 나의 반려고양이 소금이를 온전히 책임지지 못할 거라는 부담감과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짓눌려올때쯤 아버지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고, 여러가지 궁리를 한 결과 나는 다시 돌아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 시즌2의 회계사무소 생활은 당연히 순탄치만은 않았으나, 나와 아버지의 시즌 1과 대비하여 서로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태도를 취하며 훨씬 나아졌고, 이리저리 부딪히며 여전히 얼렁뚱땅 회사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내 회사생활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감히 엄지를 치켜올리고 말하는 재택근무는 내가 다시 돌아가게끔 한 결정적 원인이기도 했다. 최소 아침 7시 반-만약 먼 곳이라면 서울 출퇴근 인구밀집도를 저주하며 6시에 일어나야하는 생활에서 빗겨나서 오전 10시까지는 위하고에 접속하고 어제 퇴근 전 작성했던 To do list를 점검하며 가장 빠르고 급한 일부터 처리한다. 집이니깐 전화도 스피커폰으로 귀 따갑지 않게 할때도 많고(혹여나 고객센터 등이고 말이 울린다 싶으면 당연히 얼른 일반통화모드로 전환한다), 팩스도 스캔도 내 책상 밑에 자리잡은 복합기로 바로 발송하고 저장한다. 마치 겨울잠을 대비하여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내가 상반기에 모아온 어마어마한 이면지를 넣은 복합기가 인쇄한 자료들을 보며 월초에는 원천세 신고를 하고 필요에 따라 4대보험 업무를 처리할 때도 있다. 그리고 중간중간 거래처의 기장 및 결산작업을 하며, 거래처가 전화오면 발생하는 이슈들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범위는 스스로, 만약 논의가 필요하다면 카카오톡의 단체방에 올려서 대표님이나 다른 상사의 회신을 기다리고, 법령을 점검하고 담당 기관에 전화로 문의하며 확인하고 처리한다. 월 중간부터는 급여자료를 작성하고 거래처에 보내고, 장부기록을 하면서 거래처와 확인할 점이 있다면 메일 혹은 유선으로 확인하며 수정 혹은 추가하고 삭제한다. 그리고 우리 회사의 행정적인 사안을 처리할 때는, 대부분의 일들이 이젠 거의 자리를 잡아서 일상처럼 처리한다. 이렇게 쳇바퀴가 집에서 굴러가고 있다.
중간중간 허리가 아프거나 게으름을 부리고 싶으면 고양이를 안고 침대에 가서 엉덩이를 두드리고 얼굴을 만지며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이걸 대표님이 안 보셨으면 좋겠다) 점심은 상반기에 기운이 없으면 쿠팡이츠의 우수고객이 될 정도로 배달을 자주 시키지만, 요즘같이 여유로운 하반기엔 주말 혹은 퇴근 후 저녁에 정리해둔 재료로 요리를 해서 먹곤 한다. 이번엔 추석맞이로 이마트 트레이더스를 다녀오고 대표님의 사모님이자 우리 엄마의 냉장고를 털고 가져온 고기를 굽고, 우렁쌈장을 만들어서 양배추찜에 싸 먹으니 그야말로 극락이었다. 이렇게 눈 깜짝할 새 점심시간을 보내고 오후 1시에 “아휴, 진짜 하기싫다”를 말하며 자리에 앉아 오후업무를 처리한다. 그리고 대게 별 일이 없으면 6시에 위하고와 그룹웨어 로그아웃을 하고 노트북 전원을 끄고 덮은 뒤 서재로 가서 책을 읽고 유튜브 숏츠와 영상을 보며 낄낄댄다. 물론 이때 어미가 퇴근한 것을 눈치챈 나의 아기 고양이가 기지개를 펴며 야옹거리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낚시대를 흔들고 놀아준다. 여기에는 서울 출퇴근으로 인한 인류애 상실의 기회는 없다. 이렇게 인류는 지켰구나 헛소리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외에도 자잘한 장점들도 많다. 출근한 날에는 회사 카드로 사먹는 점심식사(상반기 최대 바쁜 성수기에는 저녁식사도 회사 카드로 결제하곤 한다. 근데 이게 과연 진짜 복지인지는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연차일정(반복적이지만, 이건 거의 하반기 기준이다. 상반기에 나는 주변인들에게 나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달라고 당부한다.) 상반기는 착즙되듯이 쥐어짜여도 하반기에는 비교적 여유로워서 몸과 마음이 이완되는 업무강도가 이 업계의 장점이다.
그러나 재택근무를 포기하면 다른 복지를 추가로 부여하겠다고 하면 난 기어이 재택근무만은 몸살라 수호하고 나머지를 포기할 것이다. 주거비가 아깝다는 핑계로 얼마나 방바닥과 집에 열심히 누워있는데 어딜 재택근무를 포기해..? 코로나때도 사람들이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해 우울하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최대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코로나시기 자가격리하는 것이나 나의 일상은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얼마나 할 게 많은데 사방이 콘크리트로 둘러쳐진 나의 안식처에서 근무도 할 수 있는 권리이자 특혜를 포기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재택근무의 루틴은 방심하면 와장창 깨지기 마련이다. 일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정신이 산만해지면 부엌 벽에 튄 기름때가 어찌나 노랗게 보이는지, 그날따라 화장실에서 무단점거중인 때가 이렇게나 신경쓰이던지, 왠일인지 평소 오전-오후 6시까진 식탁 밑 의자에서 잠을 자는 고양이가 내 옆에서 아기 고양이인척 기만을 부리면서 벌러덩 누워서 배를 보이는지, 모니터 밖 집안 세상은 매우 위험한 유혹요소로 흔들리지만 이건 실전 경험으로 성공과 실패를 통해 구축된 루틴을 만들어 스스로가 적응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꼬질한 잠옷을 벗어 던지고 최소 세수라도 하고 깨끗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기, 애착 머리띠로 머리를 싹 넘기며 다이소에서 산 어성초 세럼과 수분크림을 바르고 모니터와 노트북 전원을 켜기, 크레마가 진하게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 애착컵에 담기-뭔 놈의 애착템이 왜 이리 많나-, 어떻게든 최소 10시 전에는 위하고와 그룹웨어에 접속하기, 무조건 책상 앞 의자에 앉고 보기, 그리고 To do List를 다 훑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눕지않기-이런 원칙을 고수하며 업무를 시작한다. 물론 상반기엔 이런 여유따위 없지만(진짜 바쁠땐 야근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노트북을 다시 열고, 좀비처럼 타닥타닥 타자를 치며 모호한 출퇴근 경계를 이어가며 업무를 할 때도 있다. 3월은 슬픈 계절이다..), 보통 이게 나의 재택근무 루틴이다.
다른 거래처와 연락을 할 때 가끔 회사에 아무도 안 계시나고 물어볼 때가 있다. 주로 대표전화가 내 핸드폰으로 착신전환되어 나 외의 다른 회사 사람을 찾을 때 나오는 말들인데, 이럴 때 나는 수줍게 웃으면서 “네, 저희가 재택근무를 주로 해서 대표전화를 저한테 연결해놨습니다. ***님 연락처 말씀드릴까요?“ 라고 얘기한다. 재택근무 중이라 다행이라 여겨진 것은 이때 나의 실룩대는 입가 근육과 건조한 잇몸미소를 상대방이 바로 앞에서 못 보기 때문이다. 이 회사를 계속 다녀서 다행이다라고 느끼는 건 업무시간을 여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자유를 재택근무를 통해서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되도록 이 즐거움을 오래 만끽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