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창궐 직전인 2019년, 태국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정확히는 한 달 살기보단 한 달 배낭여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내내 혼자는 아니었고, 여행 초반 일주일은 남편과 지인 2인이 함께 했다. 방콕에서 화려한 3일을 보내고 치앙마이에서 또 4일을 함께 한 뒤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3주 정도 태국 북부를 혼자 여행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음주가무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내가 이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혼자 마음껏 술을 마시기 어려웠다는 것, 그리고 대화를 좋아하는 내가 몇 주째 짧은 영어로 낯선 이와 스몰토크만 나눴다는 것.
여행지에서의 외로움을 즐기지 않는 당신이라면, 다른 어느 낯선 여행지보다 제주에서의 한 달을 추천한다.
제주에 있는 37일 동안 나는 혼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의 지인들이 매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제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제주에서의 일정은 승마, 요가, 관광, 지인과의 만남까지 정말 쉴 틈 없었다. 홀로 여행 온 지인들은 내 오피스텔에서 자고 가기도 했고, 혹은 며칠의 여행 일정 중 하루 식사 한 끼를 나와 하기도 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의 섬 제주에서 내가 사랑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새롭고 완벽한 경험을 선사했다. 이것은 해외가 아닌 제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이번 경험을 통해 누구와 함께 하는지에 따라 여행 스타일이 얼마나 달라지는 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여행의 유형은 사람마다 명확히 나눠졌다
- 제주 내 집의 첫 손님 A양, 관광유랑형.
뚜벅이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여행지에서 대중교통을 즐겨 탄다. A양도 마찬가지였다. 오피스텔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대중적인 관광지를 미리 찾아뒀고 버스를 타고 30분, 또 내려서 관광지까지 15분가량을 걸어서 쇠소깍에 도착했다. 렌터카를 이용하면 몇 배는 편하게 갈 수 있지만 버스여행만의 묘미가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제주 버스시간이 일정치 않아서 뚜벅이 여행이 힘들었지만 최근에는 버스 노선도 많아지고 정류장에서 버스시간도 거의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쇠소깍에서 역시나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숙소에서 멀지 않은 식당에서 제주의 별미인 고등어회와 술 한 잔을 즐겼다. 혼자 제주로 여행 온 A양은 마지막 날 다른 지역에서 혼자만의 여행을 만끽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 가족 같은 B양 C군, 고인물음주형.
이 둘은 이미 각자 제주 여행했던 날짜를 합치면 한 달이 훌쩍 넘는 그야말로 제주 여행의 고인물들이다. 나와도 두 번이나 함께 제주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이번 여행 날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계획이 조금씩 틀어지기는 했으나 고인물들의 평소 여행 일정은 일사불란하다. 제주 도착과 동시에 예약해 둔 렌터카를 찾고 미리 찾아둔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이미 몇 번이나 가봤던 관광지 대신 클라이밍 같은 자신들만의 액티비티를 즐긴다. 그리고 술을 마신다. 시간과 흥이 허락하는 한 매일 맛집을 찾아가 새벽까지 술을 마신다. 그리고 다음날 놀랍게도 또 계획한 일을 해낸다. 한마디로 간파괴 유형.
이미 ㅇ김밥, ㅁ식당 등 제주의 웬만한 맛집은 몇 번씩이나 가봤기 때문에 이들과는 제주의 색다른 맛집을 가 볼 수 있다. 제주에서만 즐길 수 있는 흑돼지고기오마카세나 분위기 좋은 이자까야 같은 곳을 미리 예약해뒀고, 다채로운 술을 즐겼다.
음주형인 이들과 며칠씩 제주에서 붙어있다 보면 체력이 점차 바닥나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이들이 여행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날에 나는 다시 제주 앞바다를 보며 도서관에서 책이나 보며 쉬면 되는 것이다!
힘겹게 클라이밍을 시도하는 C군
- 여자들만의 여행 표본 D양, 감성유흥형.
D양과의 제주 여행도 이번이 두 번째. 파워 J라 불리는 그녀는 여행지에서도 새벽 수영을 하고 조식을 일찌감치 해치운 후 관광지 세 군데 정도를 돌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 웨이트를 하는 비범한 인물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여유로운 일정을 보내자며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지만 우리는 이번에도 우리 스스로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첫날엔 다른 지인들과 함께 늦게까지 술을 마신 후, 다음날 숙취 가득한 몸을 이끌고 자양강장제를 만 원어치 씩 들이킨 뒤 오전 일찍 미리 예약해 둔 스킨스쿠버를 하러 바다로 향했다. 점심이 돼서야 쌀국수로 해장을 하고 오후에는 전신마사지를 받은 후 잠시 쉬다가 제주의 밤을 즐기러 바다가 보이는 라운지바로 향했다. 아, 이런 바쁜 일정 틈틈이 시장에 들러 회사에 보낼 천혜향을 구입하고, 감성카페에서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하튼, 저녁 느지막이 라운지바에 도착해 깔끔하게 딱 한 잔 씩만 하고 10시에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으나, 그렇다면 유흥형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았을 것. 대략 새벽 두 시까지 제주의 밤을 즐긴 후, 다음날 오전 일찍 그녀는 다른 여행지로 향했다. 돌이켜봐도 믿기지 않는 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제주에서의 하루하루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것을 차곡차곡 해치우며 채워졌다. 제주에 있을 당시에도 참 많은 행복을 느꼈지만, 제주에서 돌아와 일상을 보내고 있는 지금은 더욱더 그 순간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