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르기만 하세요, 당신의 미술 취향
요즘, 아름다운 그림들을 수놓은 책을 참 많이 만날 수 있다. 이제껏 관심이 없어 미처 좋은 책들 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코로나 이후 일상 회복이 이루어질 즈음부터 그림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책들이 내 눈에 많이 띄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인 <하루 한 장, 인생 그림>은 내 머리맡에 두고 찬찬히 살펴보고 있는, 애정하는 책이다.
처음 책을 보면 깔끔한 디자인에서 오는 산뜻함과 전공책 크기인 두께에서 오는 두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언제 다 읽지? 버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쯤, 책 제목은 하루 한 장!이라 며 오늘 딱 한 장의 그림만 보라며 부담을 덜어준다. 한 그림당 그리 길지 않은 설명과 찬찬히 그 림을 음미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선명한 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하루 한 장의 그림을 넘기다 보면 다음 장의 새로운 화가에게 눈길이 가고 조금씩 읽다가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는 그런 책이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과 내가 전혀 몰랐던 화가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는 빈센 트 반 고흐부터 처음 보는 화풍의 그림으로 사로잡는 화가들까지 폭넓게 다뤄진다. 그리고 유명한 화가여도 그에 대한 진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대표작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작품과 함께 하는 이야기도 있어 남들은 모를 만한 점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취향따라 만나는 책워낙 두꺼운 크기의 책이다 보니 다양한 화가를 만날 수 있다. 59명의 화가를 나도 아직 다 만나 보진 못했지만, 페이지를 넘기면서 인상깊은 그림에 잠시 멈춰 화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그림들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된다. 사실 미술은 참 일상에 가까이 있지만 먼 존재로 느껴진다. 주변 여기저기서 전시회로 그림이 걸려있고, 지나다니는 길에도 벽화로 미술품이 있다.
하지만 떠오르는 미술품은 몇 천, 수 억까지 값이 매겨지는 다소 알 수 없는 대상 투성이다. 미술 을 가까이 해보려고 해도 화가를 잘 몰라서, 어느 작품이 내 취향에 맞는 건지를 몰라서 어렵게만 다가온다. 작품을 어디서 찾아봐야하는지도 어려운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15년차 아트 컬렉터가 '혹시 몰라서 다 모아놨어. 여기서 너의 색깔, 너의 화가를 찾아봐: 라며 선물한 모음 책 이다.
이 책 안에서 나의 취향을 어느 정도 찾아가고 있다. 나는 화사한 꽃 그림이 좋다. 꽃무늬 원피스 를 좋아하기도 하는데, 아름다운 화관을 쓴 여인들과 용환적인 분위기를 창조해내는 로렌스 알마 타데마 화가의 작품들을 자연스럽게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대리석으로 된 높은 건축물에서 아 래를 바라보는 듯한 장면인 <관찰하기 좋은 지점>은 마치 여신들이 열심히 하루를 살아내는 현 실 세계의 사람들을 위에서 여유롭게 웃으면서 바라보는 것처럼 다가온다.
몽환적인 하늘 구름과 세련된 대리석, 조형물에 풍성하게 풀어지는 옷을 입은 풍요로운 주인공들 이 부럽기도 하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유명한 말 한마디처럼 나 도 여유롭게 그들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거시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바 라볼수록 그들 옆에 서서 함께 세상의 주인공인 것 같은 자신감으로 얻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희미하게 그러진 할머니와 같은 복장을 한 숙녀가 그러져 있는 걸 보면, 한눈에 이 할머니가 이릴 적 이렇게 아리 따운 숙녀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떠난 할머니의 영혼이 할아버지를 지켜주는 것 같다는 작가의 해설에 나도 눈물 홀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저렇게 혼자 남겨진 집에서 온전히 쓸 쓸함을 맞고 있을까 싶다.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배우자와의 이은 생각보다 견디기 이러워 보인다.
<위령의 날에 부재자>를 곤히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 할머니도 할아버지에게 저런 존재가 되어 든든히 서로를 지켜줄 것이라 믿게 된다. 긴 글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고 그냥 멈취진 한 장 의 얇은 그림일 뿐인데 순식간에 온갖 감정을 일궈내게 만든다.
그런 화가가 정말이지 강력하면서 도 유연한 힘을 표현해낸 장인임을 느끼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맑은 눈이 사람들을 놀리거나 우회해 욕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실속 챙기고 이기적인 MZ세대의 맑은 눈이라며 칭찬의 대상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다. 원래 맑은 눈은 아이들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의 표시를 의미했는데 말이다.
마리 텐 케이트의 <눈에서 노는 아이들>은 맑은 눈의 남자아이들 셋이 눈 쌓인 날, 함께 썰매를 끌며 노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셋 중 중간, 확연히 눈에 띄는 맑은 눈의 남자아이를 보자마자 '악 귀여워' 말이 나왔다. 동화에 나올법한 나무와 담장 배경에 아빠가 직접 만들어준 것 같은 썰매를 끄는 아이들 의 모습이라니, 조그만 강아지까지 완벽한 힐링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아이의 순수한 모습 으로 그림 속 계절은 추운 겨울이지만 오히려 따뜻함이 더 많이 느껴졌다. 이런 그림을 아기자기 하게 담은 액자를 벽에 나란히 걸어놓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이 책의 화가들을 만나보면서 나에 대해서 알아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나는 아직 보는눈이 부족해서 의미를 엄청나게 숨겨둔 작품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딱 보면 감정이 일어 나거나 내가 좋아하는 대상들로 구성된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 다는 속담처럼, 내게 다가오는 처음 시각적 이미지가 꽂힌다면 더 파고들어 작품을 만든 화가의 의도와 인생을 더 재미있게 찾아보게 된다.
내 미술 취향이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적어도 오늘내일 하룻밤을 마무리하면서 이 책을 더 느리 게 음미해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을 만날 것이다. 그런 굿나잇 루틴이 라면 누구든 아주 만족스럽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