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내 편인 그대
그는 한 번도 화내지 않는다.
화를 내서 해결되는 건 없다는 걸 안다.
내가 아무리 억지 주장을 해도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럴 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안다는 뜻이다.
멋있진 않지만 참으로 멋진 이이고 주변에 아늑함을 안기는 형이다.
그에게서 나는 믿음을 본다.
성실한 남편과 착한 아이들 덕분에 나의 인생은 풍요롭다. 마음이 감사로 넘치고 매사 걱정이 없다. 또한 마음껏 나눌 수 있는 여건이기도 하다. 모두 남편의 덕이다. 그를 닮아 아들과 딸, 두 녀석도 너그럽고 여유롭다. 이른 저녁을 먹고 한없이 한가한 시간. 지금이 우리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그해 서울로의 전입이 이루어지다. 서울 학교로 발령이 나서 엄마네로 옮기게 된다. 이별과 전입. 서울집에 합류했으나 여전한 가난이 싫고 버겁다. 하지만 이때는 동생들이 모두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한 뒤여서 시골에서의 내 임무는 완수한 상태였다. 시골에 남은 할머니 걱정.
신랑을 만나다. 음력설 두 번 지나고 다시 만나다. 그이를 만나면 마음이 차분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이태 전에 서울에 다니러 왔을 적에 이모님의 주선으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첫 만남. 카키색 외투에 잘 차려입은 서울 아저씨의 전형으로 친절하고 배려가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에 가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하고 집에 가겠다고 해서 우리의 만남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그 후 서울로의 전입 기회가 온 것이다. ‘그 처자 아직이래’ ‘그 총각도 아직이야’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근처 다방에 나타난 그 사람은 키가 작고 못생겼으나 첫 대면에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다'라고 하여 그렇게 되었다.
그때는 인상도 좋았고 서울 부잣집 아들이라고 한 층 소개를 받은 터였다. 여수에 잠깐 직장이 있었는데 서울집에 다니러 올 때 비행기를 타고 왕복한다는 허풍을 그대로 믿었던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한 그의 배려가 좋았던지, 매사 재빠르게 정확히 주선하는 게 믿음이 갔던 건지 이유 없이 호감이 갔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작고 못생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 또한 나중에 나의 첫인상을 물어보니 ‘촌스러워서 좋았노라’라고 답하는 것으로 보아 둘이 비슷비슷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울 신랑으로 인해 안락한 행복이 시작되었고 최고로 잘해주는 그가 내게 주어져서 행운이고 좋았다. 삼시세끼 색다른 음식. 휴일에도 논밭 일을 안 하고 TV 시청이 가능해졌으며 거기에 무엇이든지 내 말을 들어주는 신랑과 대식구가 되어 한집에 살게 되었다. 딸과 아들을 낳았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어서 좋았고 둘째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라서 좋았다. 대식구 중에 먹을 것은 물론이고 육아까지 어머니가 전담하셔서 어려움이 없었다. 어머니가 진정으로 좋아하시는 줄로 알았으나 훗날 생각해 보니 참으로 숭고한 수고로움이었으리라. 나는 직장 맘, 어머니가 그 모든 무게를 감당하셨는데 단 한 번도 내게 힘든 내색을 하거나 시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으셨다. 친정이 나주 양반 가문이라고 했다.
명절이면 어머니는 제사 지낸 생선이며 과일을 챙겨주시며 아침 설거지가 끝나면 친정으로 재촉하셨다. 엄마는 종갓집 며느리라서 평생 단 한 번 그래본 적이 없어 처음엔 낯설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당신의 딸도 잠시 후면 친정에 올 터인데 보고 가라고 하실 만도 했었는데….
그이는 그걸 가지고 처가에 갔다. 골목길 치킨집에서 통닭을 두어 마리 사서 곧바로 조카들을 모두 데리고 북서울꿈의숲 눈썰매장으로 갔다. 여름에는 그린파크였다. 그리고 돌아와 저녁때 어른들끼리의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는 우리가 피서를 떠나면 우리 방 대청소에 아이들 장난감을 모두 소독해 햇볕에 널어놓으시고 계절이 바뀌면 장롱의 아이들 옷을 모두 꺼내서 작아진 것을 골라내고 새것으로 채워놓으셨다.
나 또한 성심을 다해 어른들 의견에 따르고 아이들의 문제도 주도권을 고집하지 않았다. 처음엔 남편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내가 잘하면 그 누구도 괜찮을 거라는 지론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역시 예의 바른 서울 남자였고 진정으로 화를 내지 않는 가슴앓이가 없는 이였다.
‘우리는 할머니가 키워주셨으니 우리 애들은 엄마가 키워주오.’
우리 아이들은 때마다 주장한다. ‘백번 그러자….’
아들은 대학을 가고 군대에 다녀오고 취직을 했다. 내색하지 않고 이겨낸 속 깊은 사나이였다. 절대 먼저 얘기하지 않는 언행일치의 면모를 보이는 아빠와 판박이다. 배려가 많고 화를 내지 않는다. 생각이 진중하고 앞서가지 않는다. 누구보다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하면서 ‘역시 그 아빠에 그 아들일세’하는 말을 듣는다.
지금은 모두 직장 따라 집을 떠나고 우리 둘만 남았다.
우리 딸 역시 따로 손이 가지 않는다. 엄마가 저녁을 같이하지 못할 때 가장 먼저 아빠를 챙긴다. 가전이 말을 듣지 않을 때 홈쇼핑에서 까다로운 사양의 제품을 살 때 물빛 수영장의 등록 마감일이 다가올 때 예외 없이 딸이 나타난다. 한 손엔 커피 세트가 들려있다. 엄마는 카페라테 아빠는 밀크티 우리 딸은 세련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이다.
남편의 옛일에 대해서는 많이 알기가 쉽지 않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차근차근 하나하나 묻기로 하지만 별다른 굴곡 없이 무난하게 안락하게 살아온 인생이기에 별다른 글감은 없다. 하지만 사연 없는 인생 없기에 그의 이복형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이 작업이 가능한 것은 이 문제에서 마음고생을 하지 않고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 어머니의 몫이다.&라는 논조이기 때문이다. 암튼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 가장 성격이 좋은 사람.
내가 누군가와 마음으로 언쟁하고 주저리주저리 하소연하면 잠자코 듣고 있다가 한참 후 ‘많이 속상했겠네’ 한다. 나는 그것으로 모두 해소다. 그는 늘 그렇다. 그에게 털어놓으면 시의적절한 한 마디로 내 마음을 위로한다. 평생 그렇다.
나는 핸드폰에 ‘그이’라고 저장한다. 그러는 데는 나만의 추억이 있다. 서울 작은엄마는 명문 여고 출신에 세련되고 명쾌한 친정엄마와 세상 멋쟁이인 올케가 있었다. 그들은 작은엄마가 우리 집에 (시댁) 다니러 오는 길이면 먼저 친정에 들러 그들도 늘 우리 집에 동행하셨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딸과 오래 같이하고 싶은 마음에서일 거다. 작은엄마는 평소에는 머리방이라서 비워두는 윗방을 차지하고 광방을 거쳐 다른 문으로 안방 출입을 해야 함에도 문지방을 넘어 무사통과였고 엄마 혼자인 부엌의 식사 준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밥상이 들어오면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은 보기 드물게 달필이셨는데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편지를 하곤 했다. 그다음에는 어김없이 ‘그이’로 시작하는 하소연이 뒤를 이었다. 그 편지의 효과는 대단했다. 편지가 도착하면 어김없이 나락 가리의 벼는 찧어져 소포로 올려지고 어떨 때는 아들의 정신교육을 위해 직접 다니러 가시기도 했다. 눈치가 빤 한 어린 나는 이 모든 것의 유공자는 편지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이’에게 주목했다. 시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는 며느리의 처지를 대변하고 그 입장을 과하지 않게 은근히 내비치는 ‘그이’라는 호칭은 안성맞춤이었다. 거기에 성당에 다니는 믿음과 함께 모든 것이 선망이었다. 이다음에 나도 결혼을 하면 ‘그이’라고 하리라. 그리고 성당에 나가리라.
두 가지 바람은 모두 이루어졌다. 작은어머니는 강건하시다. 쉼 없는 에너지로 매사를 자랑하신다. 그리고 시댁의 거의 모든 일이 당신의 업적이라고 공치사하신다.
맞다. 내가 우리 신랑을 ‘그이’라고 부르게 한 공로자이니까. 내 폰에는 무시로 ‘그이’가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