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공부하느라 운동장이 텅 빈 고등학교가 보이고 그 옆으로 공터가 하나 있다. 주말농장이던 곳인데 아파트 주민들이 시끄럽다고 구청에 민원을 넣어 그리된 곳이다. 구청장님도 애석하셨는지 생각이 있으셨던지 그 자리에 직영 물놀이장이 생겼다. 언니 오빠들은 학교에 가고 그곳은 꼬맹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는 넌지시 내려다보면서 말한다. ‘손주가 있어야 수영복을 입지.’나 또한 한마디 한다.
“손주가 물놀이 오면 맛있는 것 해 줄 텐데.”
이때 우리 집 단체 카톡에 글이 뜬다. “얘들아, 준비된 할배 대기 중이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진심이었다. 직장이 멀고 종일 출장이 많던 근무처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면 고대고대 아빠를 기다리던 큰아이를 목말 태우고 남산을 한 바퀴 돌아왔다. 고샅 언덕길을 올라 어깨동무 계단 길과 백범 김구 동상 공원 남산식물원을 거쳐 힐튼호텔 앞 놀이터에서 지천으로 노란 은행길을 밟고 내려온다. 큰아이를 내려놓고는 작은아이를 안고서 다시 나간다. 아이들은 해 질 녘 아빠와의 남산길을 오래 기억한다.
아이들은 남산 아래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공립학교는 점심때 엄마가 급식당번을 갈 수 없으니 차선책을 선택한 것인데 ‘수영을 배운다.’ ‘스키와 스케이트를 배운다.’ ‘바이올린을 배운다,’ ‘스카우트 활동을 한다.’ 살아가면서 익혀야 하는 것들을 그때 배웠다. 한강 변 축구장에서 그룹 활동도 했는데 근무 중에 당번이 걸리면 애를 먹었다.
운동회나 현장학습 때 사무실에 부득이하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할머니가 대신 가셨다. 한번은 학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가 있던 날, 감사원 교육 중이었다. 점심시간에 아주 잠깐 다녀온다는 게 지체되어 본부에서 알게 되었다. 그때는 개인폰이 없던 시절이라서 근무하는 학교로 연락이 갔고 그 잠깐 사이에 돌고 돌아 내게 연락이 온 것이다. 경위서를 한 장 썼으나 기분은 좋았다.
우리 딸은 재바르고 눈치가 있어서 입학 때부터 계주선수였다. 1학년 운동회 날, 게임이 엄마랑 한 발을 묶고 빨리 달리기였는데 나 혼자 뛰는 것보다 더 빨리 뛸 수가 있었다. 이듬해도 이번에는 아들의 경기가 엄마랑 한 발을 묶고 달리기였다. 역시나 1등이었다. 그러고 보니 필시 이것은 엄마가 잘한 것이리라.
0000년 0월 8일. 우리 딸이 내게 왔다. 충무로 제일병원 입원실 유리창엔 종일토록 함박눈이 소복이 내려쌓이고 2.8k의 뽀얀 갓난아이는 내내 새근새근 잠을 잤다. 태몽의 선물이 내게 온 것인데 한없이 넓은 운동장에서 보석이 가득 들어있는 보물상자를 발견하고서 ‘나중에 주인 찾아 줄 거야’ 하면서 장롱 안에 고이 간직했던 태몽의 주인공이다.
소중한 보물을 알아보는 소박 하고 여유로운 짝이 나타났으면. 엄마 아빠가 이렇게 좋은 이유도 서로를 알아본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길.
한 가지 미안한 것은 두 녀석이 초등학교 중학년일 때 나에게 건강 이상이 왔다. 이사를 두 번 했다. 분가한 시댁 옆으로, 그다음엔 친정 옆으로. 엄마의 역할 부재에 사춘기가 겹쳐서 아이들은 어려움을 겪었고 민감한 딸은 더 큰 내상을 입었다. 특히 딸은 나와의 관계가 힘들었다. 시간이 흘러 같이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만들어 먹이고, 용돈도 넉넉히 주며 여러모로 신경을 쓰는 한편, 아빠가 중간에서 중재하면서 무리하지 않고 우리는 그대로 기다려 주었다. 대학 졸업 후에야 점차 풀려갔다.
아들 또한 태몽부터 엄마를 든든하게 했다. '엄마 시골 기와집 곡식 창고를 채우고 지키기 위해 보낸다'는 계시를 받고서 아들임을 직감했다. 그때부터 아들은 엄마·아빠의 자랑이었다. 그 아빠에 그 아들. 우리 아들 덕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존재만으로도 우리는 미덥다.
아직 말해주지 않은 기억 하나. 아들이 대학 졸업반이던 그해 11월 1일과 2일. 11월 2일이 시험일이어서 성당에 생 미사를 넣었는데 지향을 다른 날로 옮기라는 연락이 왔다. 기왕이면 앞 날짜로 11월 1일로 옮겼다. 일주일 후, 시험 발표가 났는데 떨어졌고 어렵게 준비한 시험이라서 실망했다. 일주일 후 반전이 있었다. 아들이 입사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엄마 아빠 걱정한다고 얘기도 없이 11월 1일에 최종면접을 치르고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이다. 감사하고 신기하고 너무나 창피했다. 엄마는 있는 대로 수험생 흉내 내면서 주변에 스트레스 주고 정작 시험에 떨어졌는데 아들은 일생일대의 거사를 혼자서 치러내다니. 더 놀라운 일은, 지향 덕분일까? 이듬해에 엄마도 합격시켜 주셨다. 아들딸이 다음에 종교 생활을 하게 되면 성당에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빠는 시장을 볼 때마다 이중으로 장을 본다. 먼저 사과, 배, 복숭아, 감. 그리고 약간의 채소를 한 봉지로 담고, 우리 딸의 봉지도 따로 마련한다. 딸의 봉지에는 잘게 소분된 생등심과 아보카도와 망고스틴 등 열대과일, 파스타 재료 일체와 샌드위치 재료와 디종 겨자, 크림치즈, 모차렐라 치즈 등이 들어있다. 집에 들어오기 전 딸의 냉장고에 넣어두고 오는지라 알 길이 없다. 퇴근 후 전화가 온다. 무뚝뚝한 딸의 성격답게 통화도 짧다. ‘아빠 감사!’ 그 한 마디로도 그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사랑이 고여난다. 나는 우리 딸을 질투한다. 아빠를 최상으로 만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노처녀가 되어서도 한결같이 사랑은 계속되니 말이다.
시절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나도 이해가 안 가긴 한다. 이런 얘기를 하게 된 것이 불과 얼마 전부터이다. 그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잘난 내 아들, 내 딸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늦어간다는 것을 안다. 엄마의 기우일까. 내 아이들만을 챙기는, 점점 매력 없는 엄마가 되어간다.
결혼하고 아이 기르기 좋은 살기 좋은 사회가 됐으면. 그리고 젊은이들이 앞날에 대해 너무 겁내지 않았으면. 나의 삶이 혼자가 아니라서, 둘이 함께라서 더 행복하다는 걸 널리 알리기 위해 강연장에라도 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