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번엔 떠나는 거야.”
우리 네 식구. 추석 연휴에 동해안 어드메 호텔에 묵었다, 딸이 주선하여 처음으로 명절 면제를 받았는데 관례인지 과일과 직접 빚은 술은 지참하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우리는 남한강 휴게소만큼인데 동탄에서 출발한 아들은 횡성휴게소란다. 반가운 마음에 거기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려는데 우리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출발하라고 아빠가 얘기한다. 서로 의식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운전이 더 힘든 법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듯하여 얼굴은 숙소에서 보기로 하고 각자의 속도대로 진행하라고 전한다.
도로를 메운 차 안에 가득 들어찬 며느리들은 콘도로 명절 여행을 가나 보다. 며느리 친정 보내고 자신은 오랜 의무에서 비켜앉아 정리의 수순을 밟는 시어머니도 이번 여행길에 나서나 보다. ‘얘들아, 회포는 무시 날 조상님 안 계실 때 우리끼리 풀자꾸나.’
산적을 안 부쳐도 좋고 생선 손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삼색 아니 오색 나물이 생략되어도 좋다. 닭과 돼지고기를 삶지 않아도 되고 생밤을 안 깎아도 된다. 제기를 닦을 필요도 없고 다니러 온 친척의 끼니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
그런저런 생각 중일 때는 여행지로의 찻길은 쏜살같다.
아주 어릴 적 명절날,
그때는 할머니의 일곱 자손과 작은할아버지댁 고모 당숙도 그 후 사촌 동생들도 그 전날부터 모두 우리 집에 왔었다. 그때도 헤아리고 지금도 헤아려보지만, 도무지 몇 명인지가 헤아려지지 않는 숫자의 자손들이 먹고 자고 차례를 지냈었다. 아침을 먹은 후 친정으로 각자의 집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남겨짐‘을 실감했다. 그 숫자가 많았던 만큼 남겨짐의 허전함도 비례했다. 음식이 올려진 채 치우지 못한 제기를 정리하고 떡가루가 남은 시루를 씻고 머리 고기를 눌렀던 암반을 정리하고 씻어 엎어놓은 빈 그릇을 정리하면서 나도 결혼하면 아무리 먼 곳에서라도 차를 타고 떠나올 것을 다짐하곤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는 아침을 먹은 후 서둘러 떠난 엄마와 아빠는 내가 시집을 가 시어머니의 음식을 가지고 친정에 가면 그날 저녁 도착하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하고서도 누구네로 차례를 지내러 가지는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준비해주시면 나는 연가를 내고 앉아 전을 부쳐냈다. 아침을 먹은 후 시작한 전 바구니는 오후 두 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는다. “냉동해두고 먹을 때 부쳐 먹어요” ‘아니다. 챙겨 보내야 한다.’ 죽을 맛이다. 나물을 모두 삶아 큰 볼에 돌려 담고 모든 양념을 나물 위에 적당히 재워주시면 조물조물해서 적당한 그릇에 담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내가 전을 부치는 동안 다른 소소한 준비를 마치시면 적당히 물이 빠진 소쿠리를 들고 동네 방앗간으로 따라나선다. 쌀가루를 빻아와서 시루떡을 쪄내면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찰 가루 사이에 호박 꼬지를 얹은 우리 집 시루떡은 명물이었다.
지금은 그이가 다 도와준다. 설거지감이 많을수록 좋아한다. 그래야 우리 색시 숨은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단다. 하지만 그때는 맏며느리의 숙명으로 알고 전력을 다해 소임을 다 해내는 것으로 집안에 분란의 소지는 없었다.
이제는 더는 명절과 기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빠르게 줄고 있는 게 사실이고 현재 제사를 담당하고 있는 시어머니 세대의 여성들도 자기 대에서 마무리해야 하는 행사로 인식하고 있다.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 내가 행복해지면 지는거다. 새댁 때부터 감당했던 행사. 하지만 이리 좋은 걸 어이하랴. 의외로 흔쾌한 주변의 반응을 보고 허탈했다. 이만큼 왔구나. 당사자인 나만 의무감에서 벗어나면 되겠구나.
해변 창가 ‘피아노’에 앉아 이탈리아식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찻집 ‘현상소’에서 차를 마시는 동안 해변 공연장 데크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 가수가 세 시간째 노래 중이다. 사랑 안녕 이별의 노래를 연이어 부른다.
부디 내가 몰라봐서 무명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