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시간으로 한평생
내게 있어 방송대의 의미는 다의적이다. 장장 16년의 세월 동안 나는 왜 방송대를 다녔는가. 허세. 보여주기식.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 아이들 기준으로 책을 많이 읽을 환경도 아니고 엄마·아빠의 지원을 받아 폭넓은 견문을 느낀 경우도 아니다. 하지만 공부 욕심은 많았다. 시험일이 발표되면 그 어린 시절에도 전략을 짜곤 했다. 평소엔 두루 보다가 한 주일 전이면 시험시간표대로 하루 두 과목씩 외우기 시작한다. 먼저 보는 시간의 과목은 남겨두고 나중 시간 과목부터 해치운 뒤 이때 시험 당일에 다시 볼 것과 시작종이 울리기 전에 봐야 할 것을 구분하는 식이다. 그런데 여러 형제여서 공부방도 없고 집안일로 따로 공부할 시간도 나지 않아 그 메모지를 쪽지로 적어 논밭에 오가면서 그리고 불을 때면서 외웠다. 아궁이에 불을 때야 할 때가 가장 좋았다. 그야말로 노트와 책에서 ‘그림이 몇 쪽에 있다’ 정도까지 모조리 외우는 방식이었다. 비록‘삼국사기는 김부식, 삼국유사는 일연,’이런 식이었지만. 선생님이 수업 중에 언급하신 모든 사항을 노트와 책의 여백에 적어두고 시험과목의 범위가 결정되면 외워나갔다. 어릴 적부터 외우는 건 신기하게도 탁월해서 그리 어렵지 않은 과정이었다.
시험을 치르고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당연히 일등일 것이지만 그 순간의 기분은 좋았다. 바로 그다음 시험 준비를 했다. 초등학교 때 터득한 이 방법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유효했다. 성적이 좋았다.
첫 직장을 다니게 되었을 때 이제는 학생 신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어렵게 했다. 그때 우연히 방송대를 알게 되었고 주저 없이 등록했다. 직장인이라는 데서 오는 실망감이 컸던바 차선으로 발견한 방송대는 또 다른 위안이었다. 지금은 의미가 많이 퇴색됐지만, 당시에는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근무와 동시에 공부를 시작했다. 휴일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나를 학생으로 대접해 주는 것이 좋았다. 과연 한자가 섞인 교과서의 날개에 내용을 요약할 정도로 열심이었으나 고등학교 졸업자는 이러한 과정을 계속해야 하는 기간이 5년 과정이라서 만만하지 않았다. 부여되는 과제와 단 며칠 동안 주어지는 출석 수업을 즐기며 5년 만에 졸업하게 된다.
연가를 내고 공릉동 산업대에서 거행된 졸업식에 참석했다. 이날 가족이 모두 식장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그때는 상계동이 개발되던 시기여서 버스길 주변이 가도 가도 크레인 공사장이었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소문나게 공부를 잘했던 작은집 삼촌이 저녁으로 삼겹살을 사 주시며 학사모를 쓰게 된 것을 축하해 주셨다.
그 후 지금까지, 가능한 시간은 모두 방송대와 함께했고 5개의 과정을 이수했다. 총 16년의 세월이었다. 그중에서도 글쓰기 공부를 위해 국문학과에 재학할 때가 가장 좋았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까지 과제시험으로 대체되던 코로나19 시절, 프라임 칼리지도 병행하면서 글쓰기 과정을 이수했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근무 시절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정식 공문과 별도로 e-메일이나 손편지로 일을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고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생각건대 모든 과정이 입문 과정이었고 그다음은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반면에 학부 과정은 과목마다 여유를 만끽하면서 이수할 수 있었다. 나는 학창 시절 한두 문제에 희비를 가르며 애달게 했었다. 한 문제가 한 등을 가르기 때문이었다. 시험을 치르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가 가장 행복했다. 그러던 것이 방송대에서는 점수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조금은 여유롭게 교과서에 빠져들었고 객관식 기말고사는 공부가 부족해도 그대로 치렀다. 말 그대로 행복한 학교생활이었다. 따지고 보면 순전히 공부가 좋아서 하는 과정으로 하나의 자격증조차 딸 생각도 하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물론 대학원을 알아보지도 않았다. 방송대에 특화된 인생이었다. 모든 학사일정을 나에게 맞추고 리포트를 적어내고 출석 수업을 받으며 사지선다형의 시험을 준비했다. 다만 욕심은 없다. 무심히 교과서를 보고 강의를 들으며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성적표를 받아보는 재미로 한세월을 함께 한 듯하다.
다만, 평생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일관했고 단 한 순간도 딴생각하지 않은, 정도의 길을 걸어왔다, 누군가는 재미없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 과정을 주축으로 다른 모든 것을 얻어내고자 했던 나의 중심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