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니아 Nov 04. 2024

할머니, 우리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어릴 적 할머니의 회갑연이 생각납니다. 유독 할머니의 회갑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요. 


저는 40년이라는 모든 기억을 멈추고  때로는 아스라이, 손에 잡힐 듯 또렷이 기억나는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기억나시나요? 등교를 거부하는 나를 교실에 들여보내고 할머니는 소사 아저씨네서 반나절을 지내셨지요. 홍역을 앓던 2학년 때 거의 열흘을 학교에 보내지 못할  때, 오일장의 붕어빵을  잊지 못합니다. 그때  일제고사를 봐야 하니 공부 잘하는 내가 학교에 나와야 한다고, 멋쟁이 새내기 여선생이 우리 집에 왔었죠. 우리 교실에 액자를 몇 개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때 선선히 허락하셨다면 제가 더 모양이 났을 터인데 아쉬웠답니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친화력도 뛰어나신 여장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더 없이 잘하시며 배우자에게 잘하는 법을 직접 실천으로 가르치셨지요. 오일장이면 낙지며 문어 등을 따로 마련해 오셔서 제일 먼저 할아버지 상에 올리시며 말씀하셨죠. ‘내 신랑은 내가 위해야 한다….’ 할머니는 속이 안 좋으신 할아버지를 위해 솥을 두 개 걸고 찰밥을 따로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할머니께 어떤 존재였나요? 한없이 믿음이 가는 든든한 손녀였나요? 엄마 아빠가 서울로 가시고 오 일마다 다가오는 장날에 텃밭의 제철 채소를 내다 팔아야 가용을 쓸 수가 있을 때였습니다. 10리길을 이고 갈 수는 없었으므로 손수레에 가득 실어 저의 등굣길 마당 가에 세워두셨죠. 이를 끌고 혼자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비포장 자갈길을 가기엔 녹록지 않다는 걸 짐짓 외면하셨죠. 그때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런 행동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지금에서야 서운한것은 왜 일까요?  더 어려운 건 친구들의 시선이었지만 장이 파하고 하교 후 다시 만난 손녀에게 번데기 한 줌을 사주시는 것으로 마음을 다 하셨지요. 손녀는 마른 오징어가 먹고 싶었답니다. 


집안에 어려운 일을 결정해야 하는 때 할머니가 가시던 강암촌 할머니 댁에 저도 가끔 데리고 가셨는데 그분은 할머니와 오랜 인연으로 우리 집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어려운 일의 상담 때는 나름 혜안의 답을 주시곤 했었죠. 할머니는 그분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자식들에게 조언할 때도 그분의 말씀에 기반을 둔 적이 많았지요. 지나놓고 보니 그분이 훗날 나의 결혼도 한 몫 거들었고 앞날에 낙관적인 전망을 해 주셨답니다. 


명절과 기제사를 챙기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서 할머니는 1년에 열 번이 넘는 행사를 묵묵히 해내셨고 당신의 수고가 대단하셨죠. 한 해에 제사 여덟번에 설과 추석, 거기에 할머니는 초하룻날을 쇠셨습니다. 때마다 시루떡이 빠지지 않는 메뉴인데 문제는 방앗간이 면 소재지에 나가야 했고 버스도 없었지요. 돌절구에 빻아 체에 거르고 또 빻아 거르고 그 쌀이 모두 부서져 가루가 될 때까지 다해야 했는데 손녀 하나가 그 일을 오래 해냈었죠. 그건 온전히 할머니를 위하는 마음이었지만 이것 또한 그렇게까지 감당해야했나를 생각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저만 그일을 해야 했을까요? 오늘은 한 없이 투정어린 감정이군요. 그 뒤 우리 마을에 방앗간이 생겼지만 그땐 이미 할머니가 연로하셔서 떡이 필요 없어진 뒤였습니다. 


할머니의 친정 조카이신 진외가의 아저씨를 대면한 것은 서울역 근처 언론연구원으로 아버지랑 찾아뵈었을 때였습니다. 시험에 합격한 후 발령이 지체되어 아버지는 그분께 총무처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봐 달라는 청을 넣으신 건데요. 얼마 후 우수한 성적이더라며 교육직을 권하셨는데 나는 그분의 말씀대로 교육부 산하 직원이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좋아하셨죠.

서울 작은 아저씨의 글에서 발견한 ‘밤 한 톨 주서다가 시렁 위에 놓았더니 머리 까만 새앙쥐가 들랑날랑 다 까먹고 보누만 남겼으니 보누는 네가 먹고….’를 읊조리시던 자상함의 노래를 우리 자식들에게 구성지게 들려주었죠. 다만 한 가지 아쉬운것은 시댁살이였던지라 서울에 오신 할머니를 하룻밤 주무시게 하지 못한 것이랍니다.


손녀는 결혼생활도 잘 해냈습니다. 그리고 어린 손녀는 착실하게 살아서 오래도록 공직에 있었습니다. 툭 툭 일러주시던 말씀마다 새삼스레 교훈으로 남아 현명하게 살아갈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답니다.


결혼해 살아보니 代 물림이라는 걸 실감합니다. 우리 아이들 입장에선 5대조쯤 되는 진외가의 어른이지만 우린 엊그제 추억담으로 논할 정도이고 그 기개가 대를 이어 전해지는 걸 느낀답니다. 할머니의 선 굵은 기개와 엄마의 섬세하고 고운 맘씨가 어우러진 우리는 자녀들에게 우성의 유전자를 물려주었다고 자부 합니다.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룰 11월 첫주 쯤, 진외가의 언니들과 이모할머니 딸, 그리고 언니와 나. 다섯이서 진외가에 가기로 했습니다. 집이 리모델링이 되어 하룻밤 자고 올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할머니 어릴 적 고향. 제사 때마다 우리를 대동하시고 큰아저씨께 온갖 환대를 받으시던  친정 나들이의 기억으로 오늘날까지 이렇게 후대의 자손들이 유대를 가지며 할머니를 추억하게 하신  혜안을 자랑합니다.


오늘, 고향 선산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때가 그립습니다.



이전 11화 본부장님! 자신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