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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Nov 11. 2024

결혼하다.

결혼하다.


사정이 만만하지 않았다. 시누이 셋, 도련님 하나, 부모님 두 분, 그리고 우리 둘. 나중에 우리 아이 둘까지. 시댁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은 별다른 기대 없이 서울 사람이 되어보자 는 마음이었던 듯하다. 신랑에 대한 탐색전 없이 같이 있으면 미더운 것으로, 이모님이 주선한 자리라서 한 자락 깔고 가는 식이었다. 과연 신혼 초에도,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온화하고 배려가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내 딸은 대단한 존재요. 사위는 내 딸이 다 해놓은 후 곁다리로 알았던지 결혼식 전 함을 가져오던 날, 결혼을 물르자고 막무가내였다. 나는 하마터면 팔자에 없는 유학을 할 뻔했다. 유학을 보내야겠으니 그리 알라는 것이었다. 물론 상견례에 신랑이 동석하지 않아서 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경우 없는 일이었고 그 사실을 시댁에 전했더라면 여지없이 결혼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리라.


엄마와 아버지 언니까지 심지어 시골의 삼촌들까지 내가 언제까지 결혼하지 않고 할머니를 모시고 당신들의 뒤를 봐주기를 바라셨다. 내가 아들이 아닌 것을 참으로 애석해하셨다. 그래서인지 나오는 혼처마다 반대하고 나섰다.


훗날, 신랑에게 함에 관해 물으니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수모를 혼자서 당하고 묻은 것이다. 그러면서 말한다. ‘나는 누가 뭐래도 괜찮다. 처가의 경우 없음도 상관없다. 나는 너만 있으면 된다.’ 똑같았다. 이렇게 시작됐다.


훗날, 아버지께도 그 일에 관해 물으니 기억에 없다고 하셨다.


큰아이를 가졌을 때 집과 관련하여 변화가 생겼다. 나 어릴 적 보았던 것처럼 결혼하면 분가를 시키는 게 당연한데도 시아버지의 욕심이 화를 불렀다. 손주들이 태어나고, 당신의 막둥이가 제대한다 해도 모두가 한집에서 살고자 했다.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도 큰아들이 그 밑에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주길 바라신 건지,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당신의 아들과 상의 한마디 없이 어느 날 퇴근해 보니 모든 살림은 그대로인 채 지붕이 사라지고 없었다. 2층 증축을 염두에 두신 듯했으나 단 하나 준비된 것은 당장 소일거리가 없던 당신의 나이 든 매제였다. 그분은 얼마 가지 않아 손을 떼셨다.


당장 어머니가 동네 철물점에서 모든 부속품을 사 나르는 와중에 놀랍게도 그 이튿날부터 비가 오는 것이었다. 지붕에 비닐을 치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빗물을 다시 밖으로 내보내는 작업을 하면서 가재도구들을 챙겨야 하는 그날부터 열흘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렸고 놀랍게도 거의 두 달 동안 비가 개지 않는 것이었다. 누가 보면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 생긴 우환이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혼수로 가져온 열두 자짜리 장롱은 꼭 다시 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새 며느리를 배려하는 그 말씀만으로도 감사했다. 온 집안 식구들이 성격은 무난해서인지 누구도 내색하지 않고 2층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다만 시누 한 명이 ‘올케는 퇴근길에 시장을 봐 와서 저녁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황당했다. 결혼 초기 임산부가, 열 명이 넘는 식구의 저녁 한 끼를 마련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딸을 낳았다. 시어머니는 ‘이게 바로 미스코리아감’이라고 하셔서 덩달아 너무나 예뻐했고 그에 걸맞게 까탈스러워 발바닥이 바닥에 닿지 않고 커갔다. 연년생인 동생이 뱃속에 든 지 한참 동안 그 사실을 신랑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편지로 알렸다. 그래도 건강하게 태어나 아빠의 목마를 타고 남산을 한 바퀴씩 돌아오는 호사를 오랫동안 누렸다. 내게 버겁게 느껴졌던 대가족의 구성을 우리 아이들은 행복하게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며느리는 며느리, 딸이 되지 못한다. 신혼 초, 시누이 시동생을 비롯해 열두 식구가 함께 생활하던 시절의 어느 날 저녁. 거실에서 긴 상 두 개를 펼쳐놓고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순간, 시누 남편이 들어오시자 시어머니 말씀. ‘얘야 일어나 식사 챙겨라’ 하시며 내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셨다. 내가 한 가족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결과였다는 걸 깨닫고 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다짐했던 생각이 난다.


그때 기억이 지금도 강하게 남아있는데, 그러기 전엔 내게 한없이 잘해주시던 어머니라서 더 충격이 컸던 듯하다. 주 6일 근무 때 주말마다 거실에서 잔치 잔치를 벌였다. 허기진 토요일 퇴근길, 한술 뜨고 그 많은 뒷설거지를 해야 했다. 신랑은 ‘지금 같았으면 도왔겠지?’ 한다.


그 후 난 우리 집에서 거의 모든 의사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가족 모임 날짜를 정할 때도, 여행 계획을 세울 때도, 작은 가전을 들일 때도, 이사를 하거나 집을 사들일 때도 나름의 원칙과 논리로 나의 주장을 펼치고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아이들이 공부방이 필요해서 동네 골목 어머니 지인의 집 2층으로 분가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오래 시댁에서 살았다. 때마다 모시고 선산에 벌초하러 다니고 어머니의 모든 자녀가 참가하는 피서에 다니고 아이들 학교행사에 같이 참석하면서 어머니는 나를 예뻐하셨다. 단 한 번도 친척들에게 내 뒷담화를 하지 않았다는 걸 돌아가시고 나서 알았다. 어머니는 결혼 초 여자도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직장에 나갈 수 있게 뒤를 봐주시고 나를 주도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결국 할 말은 하는 당찬 며느리가 되게 하셨다. 분가 후에도 계속해서 우리를 돌보시다가 돌아가실 때까지 내 결혼생활의 8할 이상의 역할을 감당해 주셨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어머니의 직계자손 들은 모두 모여 저녁 한 끼를 한다. 어머니와 때마다 여행을 같이하고, 방학이면 온전히 어머니 손에 맡겨져 돌봄의 대상이던 당신의 손주들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자라서 큰 몫을 해내는 중이다. 사람은 보듬는 손길에서 사랑을 느끼고 긍정의 힘을 받아 간직하는 것이리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여러 해 동안 주말을 이용해 주기적으로 어머니의 언니, 즉 시이모님의 요양병원에 다니며 어머니께 못다 한 효도를 대신 하고자 했다. 또렷한 기억력일 때 이모님은 당신과 어머니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그리고 외가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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