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님! 잘 해낼 자신있습니다.
사무관 임용을 위한 기본시험에 통과한 후 몇 년이 지나는 동안 학습관에서 이어지는 승진 대비반 수업에 꾸준히 참여하였다. 순위를 받아 사력을 다하는 직원들도 있었으나 나는 어디까지나 유유자적이었다. 시험과목에는 6급 기간중 추진한 업무를 적어내는 실적평가서와 서류함기법, 보고서작성 발표와 역할수행, 그리고 다면평가였다.나는 다만 그런 부류의 공부 과정에 참가한다는 데 의미를 두는 입장이었고 보고서를 쓰는 요령쯤이었다.
그 해 8월 어느 날 인사팀에서 연락이 와서 이번에 대상자로서 시험을 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미 8월인데 10월 첫 주에 시험이라니. 나를 아꼈던 교장님께 SOS. 우선 실적서를 초안해 주셨다. 우리 동네 이디야에서 일대일 수업이 시작되었다. 거의 두 달 가까이 혼 나 가면서 보고서 작성과 발표 연습을 사사하였다. 공부 과정은 재미있었으나 시험 통과는 역부족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끈기를 가지고 카페 구석 자리를 지켰으나 참여하는 것으로 한 번의 기회를 사용했다.
이듬해는 스터디였다. 강의 잘하기로 유명한 사무관님의 반에 들어 두어 달은 열심히 하면서 윤곽을 잡아가던 중, 재직자의 출강은 문제가 있다는 이의제기가 있어 5월경 모든 수업이 전격 중지되었다. 그 후로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잘 따라 하던 과정이 사라지니 혼자서는 어찌하지 못하였다. 시간은 쏜살같았고 실적서 등에 공을 들였으나 스터디도 경쟁의 연속이었다. 시험 보기 며칠 전 급한 마음에 무리했더니 시험 당일에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컨디션이 난조였다. 설상가상 두 분의 감독관 중 한 명에게 ‘그게 아니고요’로 시작하는 답변을 하고 만다. 그것 말고는 아쉬운 대로 보고서 작성도 발표도 인터뷰도 잘했으나 어제 본 예비시험이랑 문제가 심히 유사해서 다른 사람들은 월등히 더 잘 본 상황이었다. 나는 돌아와 쓰러지는 과정일 때 승패는 갈린 것이다. 그렇게 두 번의 기회는 갔다.
마지막 삼 년 차엔 전 해 합격한 동료에게 매달렸다. 그 친구가 나의 러닝메이트가 되어 주었다. 참으로 감사한 동행이었고 협력의 파트너였다. 많은 걸 전수한다는 의미보다는 내가 공부할 때 그도 함께 공부한다는 믿음으로 시험 보는 전날까지 최선을 다해주었다.
합격. 압권은 다면평가가 1등이었다. 나를 알고 있는 후배 동료 상사 30명이 나에 관한 10문항을 체크해서 120명 모든 수험생과 서열을 매기는 엄청난 작업에서 당당히 1등이었다.
나는 이 일로 나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자신의 색깔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의의를 두는 삶을 살아왔노라 생각했으나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그리 평가해 준 것이다. 그때 내가 후배들에게 ‘꽈배기 실장님’으로 불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달인의 꽈배기를 몇 상자씩 준비해 가서 나눴던 것인데 이게 인상 깊었다는 것이다. 실적서도 우수했다. 특히 사유지가 포함된 운동장을 헐어내어 반환하는 것으로 결정된 것을 어렵게 지켜내어 그 학교로서는 백년지대계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나, 불이 난 축구단의 임시숙소를 갖은 노력으로 자금을 확보하여 개축해 낸 기록이 있어서 실적서는 우수했다.
서류함과 일대일 발표도 선방이었으나 발표는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두 명의 질문자 중 한 분이, 첫 질문에서 이해를 못 하니 같은 단어로 몇 번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두 번째 질문자가 그대로 다시 물어 주어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순간 판단했다. 인터뷰 도중 정신을 가다듬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서류를 챙겨 나오기 직전, 그 질문자를 바라보며 문제지의 호칭대로 불렀다. ‘본부장님! 질문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제가 맡는다면 저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고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성공적으로 완수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러한 효과가 발생할 것이고 우리는 장기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해낼 자신 있습니다.’ 주효했다. 성공이었다.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고 준비하는 3년 동안 도움을 받은 많은 분과 함께 새로운 지인이 생겨났다.
시험공부를 같이 하던 때부터 시험에 합격하고 난 그 후로도 그때 은혜를 입은 친구들에게 연락하며 산다. 감사의 표시다.
좋았던 건 대구 중앙교육연수원에서 한 달 동안의 합숙 교육 때였다. 연수원장님이 한껏 자긍심을 넣어주는 행보이기도 했고 나 또한 사무관의 관문을 통과한 행복감이 있었다. 그리고 동기들과의 행보도 좋았는데 같은 방을 사용한 동기는 우연히 집안 얘기를 하던 중에 나의 고향 동네 ‘태양 약방’ 안주인이 친고모라고 하였다. 신기했다. 서울 한가운데 하고많은 사람 중에 동기의 첫째 고모가 우리 동네 의인이었다니. 그분은 산부인과가 없던 그 시절 마을을 돌아다니며 산파 역할도 하면서 두루 신임이 두터운 실력자였다. 지금도 고향에서 건재하시다는 얘기를 듣고 단박에 친해졌고 나와 그 친구는 지금까지도 가장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사무관이 되다. 우선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아서 구성원이 탄탄해졌다. 계장이 일머리를 총괄하는 체계로 실무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대략의 얼개만 챙겨주면 되는 형식은 한 편으로는 내가 다 하던 체계에서 오던 습관으로 답답함을 느낄때도 있었다. 내가 없어도 일은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은 관리자의 역할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딜레마인 듯했다.
참으로 장하고 인내가 필요했으며 충실하게 인생을 채웠던 자랑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막상 별다른 감흥은 없고 후련하고 시원섭섭했으며 심지어 단지 다가올 시간만이 기대되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공로패를 마련하여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를 외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