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기록

by 무정인

‘다시 내려갈 때‘를 쓰고 20일 만에 글을 쓴다.

우울할 때 한 줄이라도 글을 쓰며 매일을 기록하고 싶은데.. 우울할 때 글을 쓰는 건 정말 정말 어렵다.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다른 부정적인 생각들에 치여서 글 쓸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이번에는 아주 무기력한 기간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오전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지만 출근을 못한 날은 없었고 점심을 거르지 않고 사람들과 먹었고 산책을 한 날도 반 이상이었다. 주로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인스타 릴스를 하루에 8시간 이상 하는 날도 있었지만(!!!) 꼭 해야 하는 일들을 다 해냈고 수련수첩 정리도 야금야금 해왔다. 10년 전 수퍼비전 기록을 16개나 작성을 끝냈다. 일주일에 수퍼비전 보고서 3개를 완성한 주도 있었고(생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부족했던 1급 수련 횟수를 모두 채웠다.


아니. 뭐야! 쓰고 보니 엄청 많은 일들을 했네? 기분이 우울해서 그렇지 바쁜 20일이었네. 포퍼먼스가 좋았군..(괜히 뿌듯하네).


내가 이렇다. 기록을 하며 객관적으로 보면 내 생각과는 다른 현실을 살아가면서 내 생각에 갇혀있으면 현실을 보지 못한다. 내가 만든 생각 지옥에 빠져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정말 대단히 열심히 살아낸 20일이었다.


이렇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하루를 보기 위해 기록이 필요한 거다. 기억하자. 내 생각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볼 수 있도록 기록으로 닻을 내리고 지옥에 휩쓸리지 말자.


생각지옥에 빠져서 또 나를 많이 미워하고 자책하는 시간을 보냈다. 7월 초까지 수련수첩을 모두 완성해야 하는데 못할 것 같아서 불안해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나의 10년 동안의 수련과 상담을 정리하는 일이라 그 어마어마한 양에 막막했다. 하지만 수퍼바이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급히 해야 할 것들을 거의 끝냈다. 결국에는 해내는 나를 좀 믿어주자. 아무리 미루더라도 마지막에는 해내고야 마는 나다. 내가 걱정을 막 하면 남편은 ’자기는 결국은 다 하잖아. 너무 걱정 마. 이번에도 할 거야.’라고 말해주지만 나만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서 괴롭지.


예지작가님이 이번 11월에 10년을 정리하는 전시를 기획하는 게 참 멋지고 또 많이 부러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도 수련수첩으로 나의 10년을 정리하고 있었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박수받을 수 있는 정리는 아니지만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노력과 켜켜이 쌓아온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정리가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수련수첩 정리가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엄청 의미 있고 값진 일로 느껴진다. 나의 발자취이니까.

늘 나의 전문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나인데, 이번 정리를 통해서 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나를 좀 인정하고 믿어주고 싶다. 그런 시간이 될 것 같다. 기대된다.


역시 기록이 좋다. 최고다! 기록의 봄을 신청해 두고 3개월간 19개의 글 밖에 쓰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오늘 기록의 여름도 신청했다. 매일 하지 못하더라도 끊지 않고 이어나가기. 이어나가는 노력을 하다 보면 끊어지는 기간이 조금 더 짧아질 수 있겠지.


앞으로가 기대되고 설렌다. 오랜만의 감정이다.

이런 기대가 생긴 게 너무 좋지만 또 아무런 기대가 되지 않는 하루하루가 찾아오는 것이 두렵다. 두렵지만 그 시간조차 내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아무런 기대 없이 절망만이 함께 하더라도 나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6년의 시간 동안 말이다. 그 시간과 나를 믿자.


오늘 밤 푹 잘 수 있기를. 그리고 모두들 평안하기를.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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