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진심을 알려면, 그 사람이 하는 말보다, 행동을 보면 되고, 행동보다 더 정확한 것은 그 사람의 아우라이다. 그 아우라는 내가 그에게 다가가서 무얼 물어보거나 부탁을 할 때,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상상해보면서, 그때 내 감정을 살펴보면 감을 잡을 수 있다.
"어이, 친구, 어서 오게나, 그동안 잘 지냈나? 신수가 훤해졌구먼"
멕시코 거리에서 중년 남자가 이렇게 말하고 다가온다. 말만 보면 나에게 상당히 호의적이고 나를 위해서 무언가 해줄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돌아서면 그 말은 그저 빈 깡통이 되고 만다.
TV토론에서 대담자들이 나와서 말을 하는데, 그 말의 합리성을 따지기 전에 그들이 바로 내 옆에 있고, 내가 다가가서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면 나를 어떻게 대할까? 자, 진중권, 유시민, 이 두 사람 중에서 내가 그나마 편한 기분을 가지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까칠하고 약간 불만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다가가기 싫어진다. 대신에 약간 누그러져 있고, 부드럽게 대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편하게 다가갈 수 있다. 끌리는 사람에게 몸은 방향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눈동자는 더욱 자주 끌리는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말을 할 때 나를 자주 바라보고 눈을 돌리지 않는 사람, 몸이 나를 향하고 있는 사람은 온기를 보내온다. 내 말이 재미없는 사람, 와 닿지 않는 사람들은 시선을 다른 대로 돌리고, 손으로 컵을 만지작 거리면서 다른 분위기를 찾는다.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제스처와 그로부터 전달되어오는 기운을 음미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신경 쓰는 사람에 대하여서만 관심이 많다. 여러 종류의 만남을 통해서 내가 발견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 무관심하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의 눈치를 안 보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게 된다. 머리를 손질하지 않고 대중교통에 올라타도, 남들은 저 사람은 원래 저런 머리 모양으로 있는 줄 알지,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여러 명 중의 한 명이다. 지인들을 만나면 그들은 나에게 신경을 조금 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부분만이다. 회사나 가족은 잘 있는지 정도가 궁금할 뿐이다. 기분이 어떤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등은 눈치채지 않는다.
나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남이 나에게 10%의 관심만 가지고 있을 때, 나도 나를 10%만 신경 쓰면, 무덤덤한 사람이 된다. 반대로 나를 90% 생각하고 남들도 나를 90% 신경 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다툼이 생긴다. 나이 먹을수록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나 이상으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익숙해진다. 단, 나는 나 혼자 있을 때 내 생각을 더 한다.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무엇을 나에게 해주어야 할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