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포기 후 막막했던 20대,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남들이 꿈꾸는 삶"을 위해 내 시간을 팔았지만, 과연 정답이었을까요?

by 이성민 인생선배


가수를 꿈꾸던 소년, 현실의 벽에 부딪히다



누구나 어린 시절 막연한 꿈을 꾸지만, 그 꿈이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가수가 그런 꿈이었죠. 초등학교 시절, 저는 활발한 아이였는데요. 한 번은 아파트 노래자랑행사에서 춤과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상품으로 프라이팬을 타와서 엄마에게 선물이라고 드리곤 했습니다. 노래도 제법 잘해서 학교 교실 앞에 나가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자주 하였고 아이들의 칭찬을 들으면 으쓱해하는 평범한 소년이었죠.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서 변성기가 찾아왔습니다. 변성기가 찾아오니 예전만큼 목소리가 부드럽지도 않고 고음도 나오지 않았죠. 그런 상황이 정말 답답하더군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자주 아이들과 오락실 노래방을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제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은 음역대가 높아서 부르지 못했었죠.


그러던 중 마침 서태지 님의 솔로 앨범이 나와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서태지와 아이들의 곡들은 락과 댄스의 요소가 결합이 되어 있었는데, 서태지 님의 솔로 앨범은 락적인 음악으로 변화가 되었더라고요.

[울트라맨] 음악을 듣자마자 제 마음속에서는 "와 멋있다"라고 생각이 들었고, 고음이 안되던 저는 그때부터 허스키한 록 음악에 쉼 취해서 소리 지르며 노래방을 드나들었습니다. 그게 화근이었는지 목소리가 자주 쉴 때가 많았고 고음이 나오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노래를 잘하지 못하는구나" 생각하게 되면서 가수의 꿈은 접게 되었습니다.


꿈을 잃은 자리에 기타가 들어왔어요


중학교 때 교회 형들에게 처음 통기타를 배웠는데 그게 제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죠. 처음 쉬운 코드 한두 개를 배우게 되었는데 노래를 좋아하던 제가 기타를 배우게 되니 뭔가 멋져 보이기도 하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연습을 하였습니다.


C 코드, D 코드, Em 코드 이런 코드들을 처음 배우고 연습하였고, 손가락 끝에 힘을 많이 주어 기타 줄을 누르다 보니 아프고 물집도 잡히곤 했지만 그래도 참으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어요. 그렇게 기타를 배우다 보니 음악에 대한 막연한 흥미가 생겼고, 부모님 몰래 실용음악과 진학을 결심했습니다.


저희 집안은 아버지께서 열심히 장사(오락실운영, 노래방운영)를 하셨었지만 주식투자를 잘 못 하셔서 굉장히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기에 학원도 갈 수 없었지만, 감사하게도 교회 선생님의 도움으로 학원비를 지원받아 고등학교 2학년 때 실용음악 학원에서 음악을 배울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남들보다 늦게 음악을 배웠기 때문에 청음이나, 화성학 등 전문지식을 배우는데 힘이 들더군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라며 한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저는 서울이나 수도권에 있는 실용음악과에 지원을 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했고 실용음악과가 있는 학교를 찾아보다가 충남 금산에 있는 지방 대학교의 실용음악과에 지원하게 되어 실기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실기 시험은 언제나 떨리고 긴장되는 순간이죠. 실기시험 차례를 기다리며 열심히 기타를 치면서 연습을 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저의 기타 줄이 "딱"하고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제 기타가 일반적인 기타와는 다르게 기타 줄을 교체하려면 더욱 오래 걸리고 교체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당황하고 있었을 그때, 저의 실기 시험 차례가 되어서 직원분께서 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성민 님 들어오세요."


저는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어떡하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그때, 옆에 같이 실기 시험을 보러 대기하던 분께서 이렇게 말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괜찮으시면 제 기타를 빌려 드릴게요 이걸로 연주하세요"


순간 그분께 너무 감사했고 빌린 기타를 연주하여 실기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기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잘 연주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PS. 원래 프로는 악기 탓을 하지 않죠!) 우여곡절 끝에 지방에 있는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로 나중에 기타를 빌려준 형님과 같은 학번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실용음악과에 합격을 했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죠. 부모님께 합격 소식을 전했지만, 아버지께서는 "음악을 하는 것보다 가까운 전문대 전기과를 가보는 게 어떻겠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버지의 권유로 근처 전문대 전기과에 지원을 하여 합격도 했지만, 저의 마음은 음악과에 있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울면서 "지방에 있는 실용음악과에 보내주세요"라고 이야기하였고, 그 모습을 본 아버지도 저의 마음을 꺾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셨는지 입학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실용음악과 일렉기타 전공으로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2학년까지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고 해병대 군악대로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해병대 군악대에서 튜바를 배우고 전역하여 천안에 있는 학교로 편입해 졸업하기까지, 음악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하지만 졸업 후, 냉혹한 현실과 마주했습니다.




음악 외에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막상 졸업을 하고 보니 기타 레슨, 학원 출강 외에는 돈을 벌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었습니다. 학원과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을 가서 개인 레슨을 하기도 하였죠.


그렇게 악착같이 레슨을 하고 돈을 모아 1년 만에 1,000만 원을 만들었어요. 그 돈을 들고 무작정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습니다.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했지만, 막연하게 '세상은 넓다'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막상 영어를 못하는 저에게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시련이 시작되었어요. 어디로 가야 되는지 어떻게 가야 되는지 정말 막막하였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죠. 호주에서의 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의 1년은 제 인생의 최대의 전환점이 되었어요 3개월간 학원에서 영어를 배우며 외국인 친구들을 만났고,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3개월간의 학원 생활을 마치고 현지 일을 구해야 했는데, 외국인 신분으로 일을 구한다는 게 정말 쉽지 않았죠. 이력서를 들고 상점에 들어가서 일을 찾아볼 만큼 열심히 일을 찾아다녔고 그 덕분에 호텔 하우스키핑 청소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호텔 룸을 청소한다는 게 정말 쉽지는 않더군요. 손님이 사용한 객실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야 되는 일이다 보니 굉장히 힘이 들었어요. 그 덕에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8KG이나 감량이 되어서 다이어트 효과는 최고였습니다.


또한 주말에 할 수 있는 일을 호주 구직 사이트에서 찾아보던 중 크루즈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는 걸 보고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더군요. 어렵게 구글지도를 보며 면접 장소로 갔습니다. 찾아간 곳에는 필리핀 직원분이 계셨는데 저에게 야채 썰기, 음식 플레이팅 등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저는 음식에 조금 관심이 있었던 터라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를 좋게 봐주셨는지 같이 일하자는 연락이 왔고 주말에는 크루즈 안에서 음식을 나르고 접시 닦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골드 코스트 바다를 항해하면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을 서비스하는 업무였죠 힘든 노동이었지만, 내가 외국에서도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간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여정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을 찾아보았습니다.


열심히 일을 알아보던 중, 파주 경기영어마을에서 외국인 뮤지컬 배우 관리자 계약직에 지원을 하게 되었고, 운이 좋게 합격을 하여 일을 하게 되었어요. 한국에서의 일도 만만치 않더군요. 호주에서 1년 동안 살긴 했지만 영어 실력이 유창하진 않았기 때문에 관리자의 역할을 하면서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저는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죠.


차를 타고 동탄을 지나갈 일이 많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크고 멋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건물은 화성시 문화재단 건물이었는데 그 건물을 지날 때마다 저는 저곳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죠. 그날 이후로 열심히 공고문을 찾아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화사업팀 직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어 지원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열심히 문을 두드린 결과 이후 화성시 문화재단 문화사업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러한 경험에서 제가 느낀 점은 내가 가고 싶은 회사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곳을 자주 가고 계속 관심을 가지고 두드리다 보면 길이 열린다 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직장에서 찾아가는 공연장 사업을 하면서 아내를 만나 결혼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죠.

(결혼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하지만 문화재단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또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라는 말은 월급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계약직으로 일하는 저는 기본 월급 가지고는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고, 계약기간이 5개월 정도 남은 상황에서 결혼도 하였기 때문에 더욱 막막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가장 저의 마음을 짓눌렀던 것은 열심히 일을 해도 뚜렷한 보상이 없다고 느낀 것이었죠. 이후에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 시험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계약직 기간이 끝났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에 저는 실직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