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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10. 2020

하늘정원 (1)

주원은 저택 사건에 대해 편가를 통해 나중에 자세히 들었다.

    우선 가장 궁금한 것, 바로 그 여자.

    그러나 경찰이 저택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도주한 것으로 판단하고 경찰은 수배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날 오후 전문가를 동원해서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자는 천장에 설치된 철제 구조물에 줄을 매달고 목을 매어 죽어 있었다. 소녀상 옆에서.

    경찰이 동물상 아래 받침대를 깨뜨려 보자 그 안에는 조각상 동물의 뼈들이 들어 있었다. 머리뼈부터 꼬리뼈까지 모두.

    그리고 더욱 끔찍한 것, 즉 소녀상 아래의 두툼한 받침대. 그것을 깨뜨려 열어보자 미라가 나왔다. 작은 소녀의 미라. 그러나 서양 아이는 아니었다. 동양인. 아마도 한국인이겠지만. 그리고 사망한 지 7~8년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소녀의 신원은 훨씬 나중에 밝혀졌는데, 강원도 양구에서 실종신고된 9살 소녀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 소녀가 어떻게 조각가와 연결되었는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이 사건은 일주일 동안 신문과 TV를 포함한 모든 언론의 주요기사로 장식되었으며, 이 사건을 경찰에 알린 편지수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주원에 대해서는 어느 언론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주원은 그 사건 당일 집에 와서 곧장 이층으로 올라갔다.

    남궁 여사는 딸의 옷이 여기저기 찢기고 뜯어진 데다가 안색도 어두운 것을 보고 기겁을 해서 이층으로 따라 올라갔다.

    “얘, 어떻게 된 거야? 옷은 왜 그래?”

    남궁 여사는 주원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나 놔둬.”

    “아니, 얘, 말 좀 해봐? 무슨 일 있는 거야? 어디에서 다쳤어? 병원 안 가봐도 돼?”

    주원은 대답 없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얘! 주원아!”

    남궁 여사는 화장실 문을 탕탕 두드렸다.

    그러나 주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 변기 뚜껑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허리를 구부린 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왜 그런지는 주원 자신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서러울 것도 없었고, 슬플 이유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너무 엄청난 일을 겪고 나서 긴장이 풀린 탓 같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가? 그것도 주원 자신에게.

    그 지하실의 기괴한 장면들…….

    자신이 추측한 것이 맞다고 한다면 그 받침대에는 시체가 들어 있을 텐데, 주원은 자신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그냥 생각이 난 것이다. 그럴 것이라고. 그리고 그 생각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거나 망설여지지 않았다. 경찰이 가서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주원은 자신의 추측이 올바를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몸서리가 쳐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자기 자신에게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총이라니!

    그게 말이 돼?

    영화 찍은 거야, 오늘? 말도 안 된다.

    하! 지금 생각해도 너무너무 아슬아슬했다.

    혹 그때 총에 맞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주원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하실에 갇혀 있었는 . 자칫  속에서 그대로 굶어죽거나 질식해서 죽었을 수도 있었다.

    주원은 이런 생각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졌다.

    안 돼, 안 돼, 안 돼…….

    주원은 자신도 모르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죽음과 소녀’.

    ……그래, 내가 그 소녀였어. 내가 죽을 뻔한 거잖아. 그 악한 여자는 죽음이었어. 죽음. 악마.

    주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탕탕탕!

    아까부터 남궁 여사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부르고 있었으나 주원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주원은 눈물을 닦은 뒤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남궁 여사가 새파랗게 질린 채 주원의 팔을 붙잡는다.

    “얘……, 너 무슨 일 있었던 거지……?”

    남궁 여사는 울음을 터뜨렸다.     

    주원은 열이 펄펄 났다.

    남궁 여사가 병원에 연락해서 앰뷸런스를 보내달라고 했다.

    주원이 입원한 뒤 정 회장이 달려왔다.

    그러나 남궁 여사는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 일하는 아주머니에게도 절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놓았다.

    주원은 해열제와 진정제를 먹고서 얼마 뒤 잠들었다.

    주원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저녁 8시가 넘어 있었다. 정신없이 잔 것이다.

    주원이 눈을 뜨니 남궁 여사와 정 회장이 옆에 있었다. 근심 어린 얼굴을 한 채.

    남궁 여사가 얼른 다가와서 주원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정 회장도 의자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와 주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말은 없이. 주원이 정 회장을 마주 바라보자 정 회장은 머리를 끄덕인다.

    “배고프지? 목 안 말라? 물부터 줄까?”

    주원 여사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주원을 바라보며 묻는다.

    주원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주원은 그날 있었던 일을 부모님에게 모두 말해 주었다.

    남궁 여사는 사색이 되어 주원을 끌어안았다.

    “아이구, 하나님!”

    정 회장은 앞으로 흘러내린 주원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말을 했다.

    “큰 다행이다. 다치지 않은 게.”     



TV, 신문, 인터넷 모두 난리였다. 엽기적인 사건, 희대의 미스터리, 여류 조각가 지하실의 비밀, 소녀 조각상 위에서 자살, 검은 지하실의 공포…….

    그러나 주원은 그런 기사나 뉴스는 읽지도 보지도 않았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뉴스가 나올 때마다 편가도 함께 등장했다. 그러나 평소 편가의 성격과는 달리 말을 많이 아끼고 가능한 한 피하려 하는 듯한 느낌을 주원은 받았다. 편가가 주원을 의식해서 그렇게 하는 모양이라고 주원은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 사건도 점차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주원은 이틀 동안 병원에서 지낸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 동안 주원은 한국 핸드폰을 꺼놓았다.

    주원은 몇 번 망설이다 핸드폰을 켰다.

    편가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졌다. 카톡을 열어서 읽었다. 대부분 주원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언론에 시달려 힘들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제 더는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여기저기 이름이 나는 것이 부담도 되고 싫다고 했다. 평소 편가의 성격을 보아서는 즐거운 비명처럼 여기지기도 했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어딘지 편가의 말이 진심 같은 느낌도 들었다.

    사실 주원 못지않게 그 사건은 편가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마터면 그 지하실에서 나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될 수도 있었고, 조각가 여자의 총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잖은가. 편가가 아무리 남자에다 담대하더라도 그런 사건에서 초연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주원은 카톡에다 고개를 끄덕끄덕해 주었다.

    거기까지였다.      


주원은 응답해 주지 않았지만 편가에게서 종종 메시지가 왔다.

    어떻게 지내느냐, 몸은 괜찮느냐…….

    그리고 간간이 자기 소식도 전했다. 개인적인 것, 도장에 대한 것, 여러 행사가 쫓아다닌 것 등등.

    며칠 뒤 편가는 또다시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태권도 도장에서 연말 페스티벌 쇼를 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와달라는 말은 없었다.     

 


주원은 편가의 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태권도 페스티벌 쇼가 있는 날이다. 태권도 뒤에 페스티벌 쇼라는 말을 붙이니 어색하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느껴졌다. 다른 도장에서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원은 자신이 방해될지 몰라 일부러 조금 늦게 도장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학부형과 아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도장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도장 가장자리 쪽으로 빙 둘러놓여 있는 의자들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그 뒤로도 더 많은 이들이 서 있었다.

    바깥의 날씨는 갑자기 엄청나게 추워져서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울 뿐만 아니라, 기상관측 이래 가장 아래로 수은주가 내려갈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도장 안으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훈훈했다. 도장 안 여기저기에서 가스히터와 전기히터, 석유히터 등이 불빛과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난방기구들이 평소보다 서너 배는 많은 것 같았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와 있어서 사람들 열기도 도장 안을 따뜻하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되는 듯했다. 그리고 도장 양쪽에는 행사용으로 준비해 둔 것 같은 각종 패널과 종이 장식들이 쌓여 있었으며, 현악기와 관악기, 그리고 악기 케이스들도 꽤 많이 보였다. 다른 한쪽에는 드럼세트와 여러 개의 기타도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요란한 만국기 장식과 성탄장식이 섞여 있었고, 단의 앞쪽 양옆에는 커다란 성탄 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또한 벽마다, 그리고 창문에 드리운 두꺼운 커튼마다 성탄장식으로 요란했다. 도장 앞쪽에서는 성탄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각종 화분과 화환도 앞쪽의 무대 뒤는 물론 도장 옆으로 주욱 늘어서 있었고, 정장 차람의 사람들이 무대 옆 의자, 아마도 귀빈석 같은 곳에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게다가 무대 한쪽에는 각종 상패와 상장, 트로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마디로 축제였다.

    주원이 입구 쪽 사람들 사이에서 반은 숨듯이 서 있었는데 저 앞쪽에서 부산하게 왔다갔다하던 편가가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성큼성큼 다가온다. 아까 낮에 오늘 저녁에 꼭 와달라고 카톡을 보내왔지만 답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편가가 평소보다 더 반갑다는 듯이 호들갑스런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주원은 좀 쑥스러운 느낌이 들어 사람들 틈으로 슬그머니 숨어들었다.

    편가가 굳이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와서 주원 앞으로 왔다. 사람들이 얼굴을 돌려 쳐다본다. 주원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편가가 요란한 말과 동작으로 주원을 이끌고 사람들 틈에서 나와 앞쪽으로 간다. 주원은 마지못한 모습으로 엉거주춤 뒤따라갔다. 귀빈석 같은 곳으로 가서 주원에게 빈 의자에 앉으라고 한다. 주원은 편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얼굴은 다소 붉어진 느낌이다. 편가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주원을 이끌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여러 물품이 쌓여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했다. 사람들도 들락날락하며.

    주원은 한 태권도 사범이 물건을 잔뜩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틈을 타서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어 편가에게 주었다. 수표 몇 장이 들어 있는 봉투.

    편가가 깜짝 놀라며 안 된다는 제스처를 한다. 그때 누군가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서 주원은 편가의 까만 도복 윗도리 가슴께로 얼른 밀어넣었다.  

    편가는 고맙다고 하며 주원에게 도장 사무실에서 나가 무대 근처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주원도 나갔다. 그러나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사무실 문 입구에서 어정쩡하니 서 있었다.     


행사는 매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태권도 시범이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 아이들 수십 명이 가장 먼저 나와서 도장을 꽉 채우고 우렁차게 구호를 지르며 여러 형태의 품새를 선보였다. 그리고는 유치원생인 듯한 꼬마들 십여 명이 나와서 깜찍한 모습으로 발을 올려차고 정권을 내밀며 소리 지르는 장면에선 도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휘파람 소리가 진동했다.

    그리고 나서 시범 경기가 펼쳐지고 유단자 고수들이 나와 나무판자와 벽돌 격파를 비롯해서 마치 실전과 같은 여러 대련 시범을 선보였다. 뒤이어 승급 및 승단자들에게 증서와 트로피를 수여했다. 또한 각 도장의 사범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마치 묘기 시범처럼 칼과 창을 들고서 각종 형태의 무술을 보여주었는데, 이 순서에서는 편가도 나와서 멋지게 솜씨를 과시했다.

    주원은 그런 광경을 처음 보여주는 편가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편가는 주원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았으나 어쩐지 편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원에게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 느낌이 들었다. 시범을 마치고 주원이 서 있는 곳 맞은편의 무대 옆으로 편가가 들어갈 때는 어깨를 주욱 펴고서 고개를 돌려 주원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주원은 보라는 듯이 손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박수를 보냈다. 씨익 미소 짓는 편가. 주원도 따라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나니 갑자기 도장의 시범 보이는 장소가 텅 비고 말았다.

    잠시의 정적.

    모든 사람이 궁금한 표정으로 숨 죽이고 있는 중에 여러 도장의 사범들이 철제 접이의자를 들고 나온다. 양손에 하나씩. 그리고는 도장 현관문 쪽을 향해 마치 극장 좌석처럼 둥그렇게 몇 줄로 늘어놓는다. 마지막에는 그 앞에 작은 지휘단을 갖다놓았다.

    그 다음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도복을 입은 채 악기를 가지고 나오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클라리넷, 호른, 트롬본, 실로폰, 큰북, 작은북, 드럼, 심벌즈, 트라이앵글, 기타 등등.

    순식간에 30개가 넘는 의자에 아이들이 모두 가서 앉았다.   

    부모들이 박수를 요란하게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자기 부모 쪽을 쳐다보며 손을 흔든다.

    그 박수 속에서 한 사람이 검은 도복을 입은 채 아이들 의자 뒤쪽, 즉 무대 쪽으로 걸어나왔다. 오늘의 주인공이 될 편가가.

    편가가 크게 절을 하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편가 자신은 글로벌 태권어린이 마술오케스트라단을 꿈꾸고 있다. 주로 한국과 미국의 태권 소년소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단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공연에 앞서서, 또한 공연 도중에 편가는 끊임없이 각종 마술을 펼쳐보이며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다. 공연 뒤에는 어린이 단원들의 간단한 태권도 시범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연도 하고 태권도도 전파하면서 대한민국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첫 단추를 꿰는 의미에서 오늘 그 선을 보이고자 한다. 아직 정식으로 오케스트라단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임시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아이들을 모아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이지만 열심히 연습을 했다. 편가 자신은 마술 전문가여서 마술시범도 보이는 한편, 실력은 없지만 자신의 지휘로 어린이 오케스트라단이 간단한 곡 몇 가지를 선물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우리 태권도오케스트라단이 잠실종합운동장에서 태권도 시범과 함께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는 겁니다. 그곳에서 제가 마술공연도 하면 더 좋고요. 이것이 꿈만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마치고 편가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열렬한 박수.

    편가가 두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뒤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돌아앉으라고 말을 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앉아서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려놓고 악기들을 손에 들고 잡은 채 편가를 바라본다.

    편가는 몸을 돌려 단상으로 향했다. 단상이라 해봐야 도장 마루보다 계단 한 단 높이 정도로 나무판을 대서 만든 것이다. 편가는 그곳에 올라가서 바닥에 놓여 있는 모자를 들어올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편가, 그 모자에게 쏠린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자세히 보기 위해서인지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뒤에서 앞쪽으로 뛰다시피 나왔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앞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 바람에 단상 옆 사무실 문 앞에 있었던 주원은 사람들에게 밀려 문 쪽으로 바짝 붙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주원이 서 있는 벽 아래 전기 콘센트 쪽에서 지지지 하는 소리가 나며 작은 불꽃이 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돌아다보았다.

    불.

    시뻘건 불이 확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도장의 모든 전등이 꺼졌다.

    주원이 서 있었던 벽에는 천장 가까이에 작고 옆으로 긴 창문이 몇 개 나 있었고, 맞은편은 모두 창문이지만 겨울이라서 두꺼운 커튼을 쳐놓아 밖에서는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대 쪽은 벽으로 막혀 있고 그 너머에는 창고와 사무실이 있다. 사무실 쪽에는 조그만 창이 하나 있었으나, 창고에는 창이 전혀 없었다. 무대 반대쪽, 즉 입구 쪽에는 창문은 없이 유리로 된 현관문이 하나 있고 그리로 나가면 화장실과 계단이 나온다.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불을 피한다. 그 바람에 사람들 발에 치어서 전기 콘센트 바로 옆에 있었던 석유난로가 쓰러졌다. 그곳에서도 퍽 소리와 함께 불길이 확 치솟았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진한 석윳내를 풍기며. 그리고 순식간에 바닥에 놓여 있었던 옷가지와 벽에 세워져 있었던 각종 패널에 불이 옮겨붙었다. 갑자기 도장 안이 비명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룽거리는 시뻘건 불길로 인한 빛 외에는 도장 안은 거의 캄캄했다.  

    주원은 뒤로 물러나며 사무실 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그쪽으로 시커먼 연기가 확 몰려왔다.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주원 쪽으로 피하다가 발에 무엇인가가 걸려 쓰러졌다. 그 바람에 주원도 쓰러지며 사무실 문에 쾅 하고 세게 부딪혔다.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오는 비명. 주원 근처 사람들이 쿨럭거리며 엉금엉금 기거나 벌떡 일어서서 도망가는 모습이 시뻘건 연기불 속에서 어렴풋이 비쳐 보였다. 주원 쪽으로 매캐한 냄새가 확 풍겨오며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주원은 간신히 일어나 더듬어서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안에는 물건이 많이 쌓여 있어서 제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내부의 실루엣이 보여서 주원은 이리저리 부딪히면서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주원을 따라서 시커먼 연기와 탄내, 석윳내 등이 섞여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주원은 더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을 닫아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이켜 연기가 들어오는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그러나 냄새가 더 강하게 풍기며 불의 열기와 함께 연기가 더욱 짙게 몰려들어왔다. 주원은 다시 몸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 창고로 들어가는 문. 주원은 그것을 열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깜깜절벽. 그러나 주원을 따라서 연기 일부와 냄새가 쫓아들어왔다. 그래도 사무실에 있을 때처럼 강하게 역겹지는 않았다. 후유하고 숨을 돌리는데 문 밑으로 연기와 냄새가 스며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주원은 암흑 속에서 손으로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역한 냄새와 연기가 뒤쫓아왔다.

    그때 문득 주원은 핸드폰이 생각났다.

    그러나 주원의 가방은 언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없어져 버렸다. 주머니를 뒤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주원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편지수는 아이들을 안고 손에 잡고 하면서 현관문 쪽으로 달렸다.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이었다. 누군가가 ‘창문!’ 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를 집어들어 창문을 향해 던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커튼에 막혀 퍽 하는 소리만 난다. 어느 누가 커튼 일부를 잡아당겨 뜯어냈는지 우당탕 소리와 함께 창문이 나타났다. 곧이어 이것저것 집어던지자 창문이 깨져 나갔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불길과 연기가 벽과 천장을 타고, 또 바닥에 깔린 여러 물품에 번지면서 순식간에 도장 안 전체로 퍼져나갔다.

    멀리에서 아련히 소방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급박한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온다.

    현관문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부는 빠져나가고, 일부는 안쪽으로 들어와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이 검붉은 실루엣으로 보인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 사람 찾는 소리, 쿨럭거리는 소리, 넘어지며 울부짖는 소리…….

    천장에서 시커먼 연기 사이로 검붉은 불길이 여기저기에서 번뜩였다. 툭탁툭탁 소리. 그러더니 천장에서 무엇인가가 쏟아져 내린다. 사람들은 아직도 좁은 현관문 앞에 와르르 몰려 있었다. 그 뒤로 아우성치며 밀어대는 남녀노소.

    그런 중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현관문으로 나가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도장 안은 아우성소리와 시커먼 연기와 여기저기에서 번뜩이는 시뻘건 불길, 그리고 천장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 정신을 아득하게 할 정도로 코로 밀려들어오는 강하고 역겨운 냄새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창문 몇 개가 깨어져 나가서 다행이었지만 그것이 큰 도움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소방차들이 도착하는 듯했다. 건물 밖도 도장 안과 마찬가지로 아수라장이었다. 피신한 사람들, 놀라서 나온 동네사람들, 여기저기 마구 세운 자동차 사이로 비집고 들어서는 소방차들…….

    다행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 몇 사람이 검은 연기 퍼지고 있는 좁은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모습을 지수는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수는 문득 주원에게 생각이 미쳤다. 밖으로 나간 걸까? 그러나 주원이 사무실 문 쪽에 서 있었던 것이 떠올라 몸서리를 치며 도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없었다. 어디선가 떨어뜨린 모양이다.

    지수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 순간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현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장 안은 지옥이었다. 천장에서는 화염과 함께 무엇인가가 계속 떨어져 내렸고, 글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커먼 연기가 꽉 차 있었다. 지옥 속 같은 그 연기 속 여기저기에서 검붉은 불들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지수는 발에 무엇인가가 밟혀서 넘어질 뻔했다. 생수병 같았다. 발을 디뎌보니 물컹거리는 생수병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지수는 생수병을 집어들어서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그리고는 머리와 도복 위로 쏟았다. 그렇게 여러 개를 쏟아부었다. 마지막으로 생수병 두 개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물에 젖은 도복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지수는 시커먼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발바닥에 여러 물건뿐만 아니라 뜨거운 것들이 마구 밟혔다. 천장에서는 여러 잔해가 계속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의자들이 발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조금 전에 아이들이 앉았던 의자들이었다. 지수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커먼 지옥 속에서 사무실 방향으로 달렸다.

    무대 옆쯤에 이르렀을 때 무엇엔가 걸려 넘어질 뻔했다. 가슴이 철렁하여 손으로 더듬어 보았더니 사람은 아니었다. 지수는 다시 손으로 더듬어 사무실 문 쪽으로 갔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안에는 물건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다.

    숨이 막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약간 숨을 들이쉬었다가 뜨거운 열기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냄새에 다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조그만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기는 했겠지만, 짙은 연기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원 씨! 주원 씨! 여기 있어요?”

    지수가 불렀다.

    외쳤다.

    부르짖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혹 밖으로 나간 걸까?

    그러나 본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안 돼!

    “주원 씨!”

    지수는 넘어졌다. 무엇엔가 발이 걸린 것이다.

    지수는 손으로 여기저기 더듬었다.

    혹시 혹시 하는 생각을 하며 창고 쪽으로 다가갔다. 손으로 더듬어 가며.

    생수병 하나를 열어 얼굴에 쏟아부었다.

    숨을 쉬어 보았다.

    아주 약간 나아진 것 같았다.

    창고 문이 손에 닿았다.

    엉거주춤 일어나서 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그 안에서 또다시 밀려나오는 아주 독한 냄새.

    그러나 사무실처럼 냄새가 그렇게 짙지는 않았다. 연기도 가득했으나 그것도 아주 짙지는 않았다.

    지수는 벌떡 일어서서 손으로 선반들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컹.

    무엇인가가 밟혔다.

    사람이다.

    지수는 가슴이 철렁하며 주저앉아 더듬었다.

    틀림없는 주원이다!

    보이지 않았지만 지수는 확신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주원을 안아올렸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무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검붉은 불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때 입구 너머 저쪽에서 빛이 보였다. 소방관 헬멧의 헤드라이트 빛. 검은 연기 사이로. 그 뒤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물줄기도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소방관!

    지수는 참았던 숨을 뱉어내며 외쳤다.

    “여기요, 여기!”

    천장에서 불덩이가 쏟아졌다.

    지수는 뒤로 주춤거리고는 주원을 두 손으로 붙잡고서 밖으로 던졌다.

    그 순간 천장에서 불덩이가 쏟아져 내리며 지수를 덮치고 입구를 막고 말았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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