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dolf Oct 10. 2020

조각정원 (3)


초겨울 일산 북부의 겨울나무 무성한 조그만 언덕은 난데없는 광기의 서스펜스가 흐르고 있었다. 

    극조심을 하며 한발 한발 내딛는, 초라하면서도 겁에 질리고 공포에 몰려 사고가 마비되어 가는 추레한 몰골의 추적자 여자. 그는 언덕 위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에 머리가 다치지 않게 몸을 낮추고 총구를 비스듬히 아래로 향한 채 여기저기로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면서 앞을 살피며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의 비탈진 곳 나무둥치 뒤에서는 공포에 잠긴 채 머리를 파묻고 있는 건장한 도피자 두 사람. 

    갑자기 우주의 시간이 정지되었다. 심장의 박동도 멈추고, 호흡도 정지되고, 모든 사고도 그 순간 마비되었다. 

    자박자박. 

    온 우주에서 오직 그 소리만이 생명체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신호였다. 태초와 종말을 이어주는 단 하나의 인공적 유산. 그러나 그 소리에는 삶과 죽음이 들어 있다. 아니, 지금 이 현재의 순간에서는 둘 중 하나만이 존재해야 한다. 삶이 있으면 죽음은 존재할 수 없고, 죽음이 나타나면 삶은 실종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누구인가?

    운명? 실수? 인내?

    아니면 절대자?

    잔인한 운명, 찰나의 실수, 무한한 인내, 이들 중 어느 것이 승자를 결정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절대자의 의지가 이 순간을 지배하는 것일까? 

    이것이 아니라면 고도의 집중력 유무가 생사를 좌우할 유일무이한 요소인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 순간을 지배하지 못했다. 

    잘못된 판단, 오직 그것 하나가 흑백을 결정짓고 말았다.  

    여자가 저쪽으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극히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도망자 두 사람을 코앞에 두고 여자는 문득 언덕 너머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라 동작이 빠를 테니 당연히 이 시각쯤에는 언덕을 넘어 비탈로 내려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판. 誤判. Misjudgment. 误判, ごはん.     



주원과 편가는 영원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 거의 동시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 고개‘들’을 들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 그 순간은 그들이 지금껏 살아온 중에서 선택한 가장 큰 도박이었을 것이다. 생사의 도박.

    그들이 고개‘들’을 드는 순간 총구가 눈앞에서 겨눠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두 사람에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쓸 만한 진정한 용기가 있었던가?

    아니면 만용만이 그들이 이 찰나에 거머쥘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들은 신의 은총을 받은 선택된 인간이었던가?

    각설하고, 겨울바람이 잔가지에 남아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시든 나뭇잎들 스치는 소리 외에는 버러지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산등성이에서 억겁 같은 시간을 보낸 주원과 편가는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고개‘들’을 든 찰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덕 위에서 다가오던 추적자는 소리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편가가 먼저 몸을 살짝 일으켰다. 고된 운동과 생존의 법칙으로 단련된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위험이 물러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하더라도 철저한 경계는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편가는 매처럼 눈을 날카롭게 뜨고서 나뭇가지 사이는 물론 바람결 너머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적이 퇴각했다고.

    편가는 살금살금 언덕 위로 올라갔다. 주위를 살폈다. 저택 쪽을 훑어보았다. 언덕 너머 아래는 물론 신천지처럼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아파트촌까지 둘러보았다. 

    안전하다고 편가는 판단했다. 편가는 주원이 아직도 쭈그리고 앉아 있는 곳으로 살며시 다가가서 소리는 나지 않게 입 모양과 손으로 일어나라고 신호를 보냈다. 

    주원은 굳어서 펴지지 않을 것 같은 다리에 조금씩 힘을 주어가며 나무둥치를 붙잡고 일어섰다. 완전히 일어서서 허리를 펴기까지 또다시 하세월을 보낸 느낌이다. 

    편가가 다가와서 주원에게 손을 내민다.

    주원은 그 손을 붙잡고 몸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런 다음 갑자기 깨달은 듯 편가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줄 알아?

    괜히 부아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질 때가 아니다. 마음속으로 분한 마음 꾹 눌러놓고 주원은 비탈 위로 발을 조심스레 옮겼다. 

    두 사람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도 나무가 무성하긴 마찬가지다. 나뭇가지들이. 편가가 했듯이 주원도 언덕 위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을 두루 바라보며 위험의 기미가 없는지 살폈다. 하지만 그런 방면에는 주원보다 편가가 더 예민할 것이라 생각하고 편가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편가는 왼쪽 저택과 오른쪽 비탈 사이의 산등성이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걸어가자 맨 바위들이 나타났다. 키 낮은 관목 몇이 바위틈에서 빈 가지만 내밀고 있을 뿐 탁 트인 공간이었다. 

    편가는 주원에게 멈춰서라는 표시를 한 뒤 바위 가까이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섣불리 바위 위에 올라섰다가는 적의 눈에 완벽한 표적일 될 수 있는 것이다. 

    또다시 숨죽이는 시간.  

    편가가 자신의 잠자는 본능을 깨워서 정찰하고 평가하고 결론 내린 뒤 몸을 웅크리며 바위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좌우를 한번 더 살폈다. 

    안전하다. 

    편가는 주원 쪽으로 손짓을 했다. 주원 역시 몸을 낮추고 조심조심 바위로 다가간다. 편가가 손을 내밀었다. 주원은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별수없었다.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저택 뒷산이지만 동네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 손을 많이 타지 않아서 그런지 숲길은 자연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바위를 조심스레 타고 넘어가서 다시 산등성이로 들어섰다. 그러나 나무들이 별로 없어 은폐하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그러해도 나무숲으로 들어가 헤매는 것보다는 낫다고 두 사람은 무언중에 합의를 보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조금 나아가자 비탈이 나왔다. 그곳부터는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두 사람은 계속 걸어 내려가면서도 간간이 뒤를 돌아보거나 주위를 살피느라 종종 멈춰서곤 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위험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주원은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에 편가는 서둘러서 내려가려고 무언중에 주원을 재촉하고 있었다. 

    숲을 거의 빠져나온 것 같았다. 왼쪽 저만치에서 저택 일부가 보였다. 그리고 조금 앞에 철조망이 쳐진 것이 눈에 띄었다. 경고판이나 팻말 같은 것도 보였다. 뒷면이어서 글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산불조심이라든지 진입금지 같은 경고 내용이리라. 이 숲으로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았는지 빈 병이나 버려진 비닐봉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관리를 잘 했는지, 아니면 시민의식이 높아서 무단침입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이제 그러한 시민의식을 깨뜨린 두 사람이 조심조심 다소 경사가 급해진 숲길을 다른쪽으로 돌아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간 뒤 편가가 이리저리 길을 살피더니 한쪽 발을 내디뎌 본다. 비탈이 아주 가팔랐다. 편가가 주원을 돌아다본다. 편가 혼자라면 너끈히 내려가겠지만 주원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주원도 그 급한 비탈을 바라보며 걱정이 앞서서 머뭇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편가는 먼저 비탈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철조망이 처져 있지는 않았지만 높은 축대가 있어서 사람이 올라오거나 내려가기 힘들어 보였다. 그 축대는 편가로서도 뛰어내리기 힘든 높이였다.

    편가는 축대 꼭대기까지 조심조심 내려가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비탈 중간까지 올라왔다. 

    그리고는 주원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며 나직이 말을 한다.

    “이리로 내려오세요. 조심해서.”

    주원은 머뭇거렸다. 가파른 비탈도 무서운데, 그 밑의 축대 아래로 보이는 산길이 마치 천 길 낭떠러지같이 보였던 것이다. 

    편가가 다시 손짓한다.

    주원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나뭇가지들이 엉켜 있는 숲. 그 속은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 저 너머에서 여자가 총을 쑥 내밀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주원은 갑자기 소름이 쫘악 끼쳤다. 목과 등으로 한기가 내리뻗는 듯했다.

    주원은 고개를 돌려 편가를 내려다보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편가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편가가 비탈 중간에서 손을 내밀고 기다린다.

    주원은 가방을 앞으로 돌려매고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뒤로 짚으며 엉덩이를 살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쪽으로. 낙엽들이 발에 쓸려내려가거나 엉덩이가 살짝 미끄러지기만 해도 주원은 정신이 혼비백산해졌다. 그때마다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입속에서 삼키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갑자기 엉덩이가 미끄러졌다. 순식간이었다. 몸이 벌렁 뒤로 넘어가며 몸이 주욱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엄마…….

    주원이 낮게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밑에서 편가가 두 손으로 받았다. 하지만 미끄러져 내려오는 힘에 밀려 편가도 함께 뒤로 밀렸다.      편가는 다리를 쫘악 벌렸다. 왼쪽 다리가 아래로 밀리는 중에 오른쪽 다리가 한 나무에 걸렸다. 그 바람에 몸이 왼쪽으로 밀리며 회전한다. 두 손으로는 주원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몸의 자세가 한쪽으로 쏠려 내려가는 바람에 한 손을 놓치고 말았다.

    아악―!

    주원이 낮게 비명을 지르며 편가 옆을 지나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 아래는 축대 꼭대기였는데, 그곳에서 아래로 퉁겨나가 떨어지면 거친 돌멩이가 나뒹구는 버려진 길이었다. 

    편가는 있는 힘을 다해 주원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주원의 몸이 아래로 쏠려 내려가는 속도를 못 이겨 손이 미끄러졌다. 편가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안 돼!

    편가의 미끄러지던 손이 주원의 왼쪽 발목에 가서 걸렸다. 

    편가는 그곳을 꽉 움켜쥐었다. 

    주원의 몸이 반 바퀴 회전하며 머리가 아래로 쏠리면서 엄청난 가속도가 붙었다. 

    편가는 자신이 죽기로 했다. 죽을 힘을 다해 그 발목을 붙잡고 놓지 않은 것이다. 

    출렁!

    그 순간 편가는 물론 주원의 몸이 한번 크게 흔들리더니 두 사람이 한 줄로 늘어진 채 멈춰졌다. 편가의 오른 다리 무릎은 겨울나무 밑동에 꺾인 채 걸려 있었고, 몸은 거의 뒤로 젖혀진 채 왼손으로는 주원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주원은 머리가 비탈 아래로 쏠린 채 두 팔은 양옆으로 벌어져 있고 왼 발목이 편가 손에 잡힌 채 구름낀 시커먼 하늘을 바라보고 낙엽 사이에 벌러덩 누워 있는 모습이 되었다. 

    “괜찮아요, 주원 씨?”

    편가가 숨을 크게 내쉬며 물었다.

    “나……, 나 어떻게 된 거예요……?”

    주원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 아래 뭐 붙잡을 거 없어요? 옆에 뭐가 있나 살펴보세요.”

    편가가 목을 돌려 아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주원은 상하가 뒤바뀐 풍경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잠깐만요……. 여기 나무가 있는데…….”

    주원이 손을 더듬어 가는 나무줄기 하나를 붙잡았다. 

    “됐어요. 잡았어요.”

    “조심해서 붙잡고 몸을 돌려봐요. 내가 발목을 놓을 테니까 아주 천천히……, 조심…….”

    주원은 상체를 조심스럽게 돌리면서 그 나무를 꼭 붙잡고 몸의 균형을 잡았다. 

    “아직 손 놓지 마세요. 내가 나무를 꽉 잡은 뒤……”

    주원은 상체를 들어올리고서 옆으로 비틀어 다른 팔을 뻗어 두 손으로 나무를 움켜잡았다. 

    “됐어요. 손 놔도 돼요.”

    편가는 조심스럽게 주원의 발목을 잡은 손을 놓았다. 아주 천천히.

    됐다. 

    주원은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았다. 

    주원은 나무를 붙잡은 채 몸을 완전히 돌려서 자세가 안정되었다. 

    편가도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고서 미끄러지듯이 주원 옆으로 내려왔다. 

    “다친 데 없어요?”

    편가가 물었다. 

    “몰라요. 옷이 찢어진 것 같아……. 등 쪽이. 겨드랑이도…….”

    편가가 옷을 살폈다. 

    “조금 찢어졌네. 두 군데. 그래도 괜찮아요. 몸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지금은.”

    “다행이에요. 자, 그럼 조심해서 발을 딛고 몸을 일으켜 봐요. 내 손 잡고.”

    두 사람은 조심조심 엉거주춤 일어나 앉아서 옷에 묻은 검불들을 털어냈다. 

    주원은 가방이 괜찮은지 살펴보고는 다시 고쳐맸다. 

    편가는 주원의 머리칼에 붙은 낙엽들을 떼어주려 손을 내밀었다. 

    주원은 고개를 피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머리를 더듬으며 나뭇잎이나 마른 풀들을 떼어냈다. 

    그러더니 주원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내 꼴이 이게 뭐야……?

    주원은 그러나 말은 하지 않고 편가를 외면한 채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가파른 비탈, 약간 떨어진 곳이 축대 끝,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거친 산길.

    주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편가가 몸을 낮추고 옆으로 서서 조심조심 축대 쪽으로 내려갔다. 편가 뒷모습을 보니 가관이었다. 윗도리와 바지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터진 데다가 검불도 마구 붙어 있었다. 

    편가는 축대 위로 가서 주저앉아 아래를 살펴본다. 그러더니 바로 아래가 아니라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을 유심히 살피는 것 같았다. 

    편가가 뒤돌아보며 주원에게 손짓을 하면서 말을 한다.

    “몸 낮춰서 살살 내려와 봐요. 미끄러지면 안 되니까. 손으로 땅을 짚고서 내려오세요. 조심조심.”

    편가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손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키면서 몸동작 흉내까지 내며 설명한다. 몸을 이렇게 저렇게……, 발은 요렇게 내밀고 조렇게 오므려서…….

    주원은 편가의 말을 들으면서 간신히 축대 위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바로 밑은 보지 않았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편가가 축대의 약간 왼쪽으로 떨어진 곳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다시 말을 했다.

    “저기, 저 중간쯤에 플라스틱 파이프 같은 것이 삐죽 나와 있는 거 보이죠? 그 옆에 벽돌 같은 거 톡 튀어나와 있는 것하고. 그리고 그 아래에 나무막대 여러 개가 축대 사이에서 나와 있죠? 저거 아마 공사하기 위해 박아놓았던 것들일 거예요. 그 나무들 사이에 쇠꼬챙이가 길쭉길쭉하게 박혀 있는 것도 보여요? 내가 그거 밟고 먼저 내려갈 테니까 주원 씨도 따라서 내려와요. 내가 아래에서 받쳐줄 테니까.”

    이렇게 말하고 편가는 주원을 돌아다본다. 

    주원은 아무런 대답 없이 갑자기 움찔하며 비탈 위 나무들 사이를 돌아다보았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편가도 주원의 눈길을 따라 위쪽을 올려다본다. 

    갑자기 주변이 적막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새소리들이 귓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채 위쪽을 노려보듯 살폈다. 나무들 사이를. 그리고 그 너머를. 이쪽에서는 비탈이 심해서 나무들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눈 닿는 곳 전부를 세밀히 살폈다.

    편가가 먼저 얼굴을 주원에게 돌리며 살짝 고개를 젖는다. 

    주원도 긴장했던 얼굴을 펴며 편가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곧 편가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축대 쪽을 바라보았다. 

    편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왼쪽으로 옮긴다. 대여섯 걸음을 옆으로 걷고 나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축대 위에 짚고 오른 다리를 내린다. 

    조심조심…….

    편가는 축대 속에서 삐져나온 배수 파이프에 발을 걸쳤다. 파이프가 플라스틱이라서 혹 부러지지 않을지 점검하듯 발로 슬쩍 눌러본다. 몇 번 톡톡 친다. 그러더니 결국 파이프에 발을 꽉 딛고서 다리를 내린다. 이번에는 몸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하는 모양이다. 괜찮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다른쪽 다리를 내려서 파이프 오른쪽에 삐죽 나와 있는 나무막대를 짚는다. 살살……. 괜찮은 모양이다. 편가는 다리를 다 내려서 막대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나서 잠시 안전한지 확인하는 듯 동작을 멈췄다. 그런 다음 다시 왼 다리를 내려 뻗는다. 그 밑의 다른 나무막대로. 

    그렇게 하나하나 확인해 가면서 편가는 조심조심 내려가더니 거의 다 내려갔다 싶었는지 펄쩍 뛰어내렸다. 성공.

    편가가 위를 올려다본다. 

    “가방 먼저 던지세요. 이리로.”

    주원이 쭈뼛거리자 편가가 재촉한다.

    “빨리.”

    주원은 가방을 어깨에서 벗어내리고 축대 위에 주저앉았다.

    “얼른.”

    주원이 팔을 들어서 가방을 내밀었다.

    “빨리 던지라니까.”

    주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입을 꼭 다물고 가방을 살짝 던졌다. 그러나 가방이 편가 머리 뒤로 날아간다. 편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서 등 뒤로 떨어지려는 가방을 펄쩍 뛰며 받았다. 주원이 생각보다 멀리 던졌던 모양이다. 

    “주원 씨, 내려오다 떨어지면 내가 아래에서 받아줄 테니까 얼른 내려와요. 내가 내려오는 거 봤죠? 우선 한 발을 제일 위에 있는 파이프에 올려놔요. 한번 해봐요.”

    주원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그 다음 왼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래 바로 거기에요. 조금만 더, 조금 더 발을 내려요. 조금 더…….”

    주원이 간신히 발로 파이프를 딛긴 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래에서 편가가 소리쳐서 말해 주는 대로 한발 한발 교대로 내려딛었다. 

    주원은 온몸이 긴장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파이프와 나무막대와 쇠꼬챙이들을 하나하나 딛고 붙잡고 하며 내려갈 뿐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하나만 내려딛으면 된다. 편가가 다가와서 손을 올려 주원의 허리를 붙들어 주려 했다. 주원은 몸동작으로 뿌리쳤다. 그런 다음 혼자서 펄쩍 뛰어내렸다. 

    그런데 아뿔싸!

    쇠꼬챙이에 옷이 걸린 것이다. 

    주원의 윗도리 앞섶이 좌악 찢겨나갔다. 

    주원은 뛰어내리는 반동으로 땅에 발을 디디면서 뒤로 조금 물러나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편가는 주원이 넘어지지 않게 뒤에서 등을 받쳐주었다. 아마 그때는 옷이 찢긴 줄도 몰랐을 것이다.  

    주원이 안도하는 숨을 내쉬며 일어나는데 찢긴 앞섶이 펄럭인다. 주원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울상이 되었다. 

    주원은 한 손으로 앞섶을 잡으며 편가를 돌아다보았다. 

    편가가 당황해 하며 다가와서 앞섶 쪽으로 손을 내민다. 

    주원은 그 손을 피했다. 그리고는 편가가 들고 있는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주원은 눈을 들어 자신이 내려온 숲 옆, 저택 쪽으로 주욱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쳐다보았다. 

    숨이 탁 막혔다.

    그곳 숲 옆 위쪽으로 보이는 저 멀리 바위 위에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이쪽을 쳐다보면서. 손에는 총을 든 채. 

    조각가 여자.

    편가도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여자는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서부영화 주인공처럼. 

    주원은 입을 꼭 다물었다. 

    살인자…….

    편가가 오른손 손가락 둘을 자기 입술에 갖다댔다가 떼며 여자 쪽으로 주욱 내밀었다. 여자 쪽으로. 그리고 후 불었다.

    이별이 키스.

    그리고 한 번 더. 

    그러더니 오른팔을 내려서 허리 근방에서 왼쪽으로 내리며 허리를 살짝 굽힌다.

    이젠 끝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을 번쩍 들어 흔든다.

    바이바이. 

    여자는 여전히 동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주원과 편가는 뛰다시피 하며 길을 내려갔다. 가끔 뒤돌아보니 여자는 그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이 한참 더 내려가서 뒤돌아보니 숲에 가려져 더는 그 꼭대기 바위가 보이지 않았다. 

    둘은 계속 서둘러서 내려갔다. 

    포장도로가 나왔다. 차들이 지나간다.

    두 사람은 길을 건너 아래쪽으로 계속 걸었다. 동네가 보였다. 그 뒤로는 아파트숲이다.

    젊은 남자가 지나간다. 

    편가가 뛰다시피 따라갔다. 주원도 급히 쫓아갔다.

    편가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 죄송합니다만, 핸드폰을 빌릴 수 있을까요?”

    남자가 인상을 쓰고 쳐다본다.

    “경찰에 신고해야 할 게 있어서…….”

    남자는 여전히 쳐다보기만 한다.

    “살인사건 신고를 하려고요.”

    남자는 얼굴을 돌리고 그대로 가버린다. 편가는 그 뒤를 쫓아가며 몇 마디 더 했다. 그러더니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서 주원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더 내려가 동네로 들어갔다. 아직 개발이 덜 된 지역 같았다. 

    마음은 급한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이 든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편가가 쫓아가서 말을 붙였다. 그러나 관심 없는 듯 그대로 가버린다.

    편가와 주원은 다시 조금 더 걸었다. 

    초겨울 하늘이 흐리긴 날이 그리 춥지도 않고 찬바람도 불지 않는데 왜 동네가 이렇게 썰렁한 거야. 

    편가가 이렇게 투덜거리는데 조그만 잡화점이 눈에 띄었다. 한 사람이 그곳에서 유리문을 열고 막 나오고 있었다. 편가는 그쪽으로 뛰어갔다. 편가는 남자 앞에서 한번 멈칫하더니 그대로 상점으로 가서 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원도 거의 달리듯이 그곳으로 갔다. 

    주원이 가게 앞으로 가서 열린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편가가 핸드폰을 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가게 주인에게서 전화를 빌린 모양이다. 

    편가는 저택의 위치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편가가 가게에서 나왔다. 맥이 탁 풀린 모습이다. 

    주원은 편가를 불렀다.

    “나 좀 봐요.”

    편가가 다소 풀어진 눈으로 주원을 바라본다.

    “이 사건에서 내 이름 대지 마세요. 내 이름 나오지 않게 하란 말예요. 알겠어요? 절대로, 절대로! 내 이름이 나오면 나 그쪽 안 볼 거예요.”

    편가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지 입을 벌린다.

    그것을 무시하고 주원은 다시 내뱉듯이 말을 잇는다.

    “내 말 알아들었어요? 나 이런 일에 휘말리는 거 싫어요. 오늘 지금까지 겪었던 일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내 이름까지 나오면 나 미국으로 그냥 가버릴 거예요. 오늘 나는 여기에 온 적도 없고, 그 여자 만난 적도 없어요. 원래부터 나는 여기 오기로 되어 있지도 않았잖아요. 알겠어요?”

    “아니, 그래도 목격자인데…….”

    “목격자고 뭐고 필요 없어요. 제발 내 말대로 해줘요. 알았죠?”

    편가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대꾸를 하려 한다.

    “나 집에 갈 거니까 택시나 잡아줘요.”

    편가는 항복한다는 듯이 양팔을 벌리는 제스처를 했다.

    “저 아파트 쪽에 가면 택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편가는 주원을 이끌고 아파트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갔다.     


*     


주원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평일 낮인데도 길이 많이 막혔다. 집에 도착하니 3시 가까이 되었다.

    주원이 대문 스피커폰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린다. 

    주원은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버럭 열리며 남궁 여사가 뛰어나온다.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다음 화로 계속]

작가의 이전글 조각정원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