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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10. 2020

조각정원 (2)

주원은 택시에서 내렸다. 주원은 자신이 단단히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홍은동 편가의 바디페인팅 사무실 건물 앞. 약속한 시간보다 근 20분이나 늦었다. 사실 길도 좀 막혔다.

    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태권도 도장 밴을 가지고 나와서. 편가가 주원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길이 많이 막혔나 봐요? 전화 여러 번 했는데…….”

    주원은 대답하지 않고 밴 쪽으로 걸어갔다. 편가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따라온다.

    “무슨 일 있어요?”

    “가요.”

    “왜……?”

    “가자니까!” 

    편가가 눈치를 보며 밴의 문을 열어준다. 주원은 아무 말 않고 올라탔다.

    “오늘 일찍 집에 돌아가야 해요. 늦어도 2시 반까지는.”

    “…….”

    편가는 멀뚱한 얼굴로 차문을 닫아주고는 차 앞으로 빙 돌아서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차 뒷좌석에는 잡동사니가 가득 찬 플라스틱 바구니와 커다란 종이상자가 여러 개 실려 있었다. 주원은 고개를 돌려 쓰윽 한번 훑어본 다음 눈을 앞쪽으로 돌렸다.  

    두 사람이 탄 차는 통일로를 통해 일산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향했다. 

    그동안 편가가 몇 마디 건넸으나 주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도중 편가는 그 조각가에게 전화를 해서 조금 늦을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일산 시내를 지나서 인적이 드문 도로로 접어든 뒤 조금 더 가니 야트막한 산이 나온다. 겨울이라 나무들이 잎을 많이 떨어뜨렸을 텐데도 숲이 제법 깊어 보였다. 

    비탈길로 올라가 잠시 달린 뒤 오른쪽으로 꺾어지자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그곳으로 들어가니 좁은 길이 위쪽으로 주욱 이어지고 있었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많던 일산의 높은 아파트들이 보이지 않았다.  

    편가가 핸드폰 지도를 들어다보더니 거의 다 왔다고 말한다. 

    주원은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해 보니 주변이 컴컴했다.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시들어가는 초겨울 숲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숲속에 들어왔다고 해도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비틀어서 한 뼘 정도만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먼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웬일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창했는데 언제 구름이 몰려온 거야. 눈이 오려나……. 

    12시가 다 되어 별장 앞에 도착했다. 올라오는 길과는 달리 별장 앞은 공터같이 약간 넓게 틔어 있었다. 

    편가가 별장이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으나 막상 와보니 대저택이었다. 깊은 숲으로 둘러싸인 3층짜리 대저택. 주원의 집보다 두 배 이상 커 보였다. 

    건물 전체가 흰색.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널찍한 나무대문 앞의 왼쪽에는 흰색 대리석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Black Blue & Eternal Life’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BB&EL가 저런 뜻이구나. 영원한 삶. 그런데 ‘Black Blue’는? 그냥 검푸른색?

    글쎄…….

    뭐 신경쓸 것 없음.

    편가가 전화를 걸어 도착했다고 말하자 커다란 나무문이 옆으로 스르르 밀려들어간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편가의 설명을 통해 그 저택에 대해서 대강 들었다. 유명한 조각가의 저택 겸 전시회장이라고 했다. 5년 만에 열리는 발표회라고 한다. 주원은 조각가라고 해서 남자인 줄 알았더니 여자란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좀 특이한 모양이다. 일부러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편가 말의 뉘앙스는 그러했다.  

    밴이 정원으로 들어가자 대문이 다시 닫혔다. 

    저택 전체가 어딘지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초겨울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져서 그런가? 하지만 공기는 맑고 상쾌한 느낌이었다. 저택 둘레의 나무들이 대부분 잎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고 주원은 생각했다. 

    주원과 편가가 차에서 내리는데 저택 현관문이 열렸다. 

    50대로 보이는 키가 자그마한 여자가 나왔다. 아래위 모두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바지도, 스웨터도. 목도리도. 눈은 작으면서도 날카로워 보였다. 어쩐지 조각가라기보다는 학교 교사 같은 느낌이 들었다.

    편가가 현관 쪽으로 다가가는데 여자의 눈은 주원을 향해 있었다. 

    주원이 그 눈길을 받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편가가 여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주원을 돌아다본다.

    “저하고 함께 일하는 분입니다.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죠. 전공은 실내디자인입니다만…….”

    편가는 밝은 표정으로 주원 쪽을 돌아다본다.

    “정 실장님, 와서 인사드리세요.”

    주원이 눈가에 핏발을 세우면서도 편가는 외면한 채 그 자리에서 여자를 향해 가능한 한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여자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여전히 주원을 똑바로 바라본다. 

    주원은 약간 무안한 느낌이 들어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편가가 주원을 돌아다본다. 주원은 그 눈길을 무시하고 한마디 더 했다.

    “저택이 참 이쁘네요.”

    편가가 끼어든다. 

    “명함 좀 드리세요.”

    주원은 편가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면서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뒤지는 척.

    “어머, 안 가져왔네.” 주원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죄송합…….”

    “다음에 오면 드리세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뵈면 그때 드릴게요.”

    주원은 다시 머리를 숙였다. 

    여자는 말없이 주원을 계속 바라본다. 탐색이라도 하듯이. 그러더니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편가가 얼른 쫓아가서 현관문을 붙들고 주원을 돌아다본다.

    주원은 편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여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편가를 스치는 순간 발이 근질근질했다. 그대로 차버리고 싶은 충동.

    주원은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집 안으로 들어서다가 멈칫하고 우뚝 멈춰섰다. 

    휑한 실내.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너른 방.

    그리고 높은 천장. 

    거실이 아니라 널따란 홀.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벽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방도 없었고, 칸막이도 없었다. 단지 한쪽 구석에 주방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널찍한 흰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이 있고, 그 뒤에 유리 칸막이 선반장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 옆으로 복도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집 밖에서 본 것보다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거실이 엄청 넓어 보였다. 웬만한 전시회 하나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서양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파티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주방 옆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이 있었는데 그 폭이 웬만한 가정집의 층계보다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 계단은 중간에서 꺾여 이층으로 올라가며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주원이 보기에는 개인저택이라기보다는 소형 전시회장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특이한 점은 조명이었다. 이렇게 넓고 높은 홀에는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달려 있으면 제격이겠지만, 특이하게도 천장에서 길게 와이어를 늘어뜨려 금속 반사경 같은 것들을 설치해서 간접조명으로 밝혀놓았던 것이다. 전시공간에 어울리는 조명을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이층에는 아직 올라가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편가가 들었다는 말에 의하면 리셉션 룸으로 사용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생활은 3층에서 하는 모양이다. 

    편가는 조각가 여자에게 작품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표정이나 말은 없이 얼굴을 주방 옆쪽으로 향한다. 

    편가가 그쪽으로 발을 내딛으려 하자 여자가 입을 연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다. 손을 내밀면서.

    “핸드폰 주세요. 얘기 들었을 텐데.”

    편가는 ‘아…….’ 하며 멈칫한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여자에게 주면서 주원을 돌아다보았다.

    여자도 동시에 주원을 쳐다본다.

    “저…….” 

    주원은 편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 하나는 왜 핸드폰을 내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또 하나는 사실 지금 주원에게는 핸드폰이 없다. 자기 방 화장대에 올려놓고 깜빡 잊은 채 놔두고 온 것이다.  

    주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편가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진다. 그러면서 편가를 돌아다본다. 힐난하는 듯한 모습. 그러나 말은 없다.

    주원은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주원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편가가 주원에게 다가온다.

    “좀 미안하게 됐는데……, 지하실에 내려가면 선생님 작품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사진 찍을까 봐 그러시는 겁니다. 발표회 전에 기자들에게 공개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미리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답니다.”

    주원의 눈치를 보면서 쭈뼛거리며 변명하듯이 말하는 편가.

    주원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분한 느낌이 들어 편가를 쏘아보았다.

    “미안해요……. 미리 얘기했어야 하는데…….” 

    편가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한다.

    주원은 입을 꼭 다물었다가 여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제가 깜빡 잊고 핸드폰을 집에다 놔두고 왔어요…….”

    죄송합니다……. 이 말이 입에서 나오려 했으나 침을 꼴깍 삼키듯 말을 목구멍 속으로 넘겼다.

    여자가 주원을 쳐다본다. 

    그러나 그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주원은 입을 다시 꼭 다물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편가.

    주원은 계속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주 바라본다. 

    몇 초가 흐른 듯, 그러나 마치 영화의 스틸 컷처럼 멈춰선 순간이 지나고 나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여는 듯했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보이지 않을 듯 끄덕인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이층 계단 쪽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원은 여자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편가는 여자와 주원을 번갈아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여자가 폭이 넓은 계단을 올라 중간에서 왼쪽으로 구부러져 사라지자 편가가 쭈뼛거리며 주원에게 얼굴을 돌린다.

    주원은 편가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편가가 얼른 주원 앞으로 나서서 걷는다. 

    주방 옆으로 가자 제법 널찍한 복도가 나왔다. 그 왼쪽에는 뒷마당으로 나가는 이중문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화장실이 있었는데, 일반 가정집과는 달리 남녀 화장실 문이 따로 나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지나 오른쪽 벽에 엘리베이터 문이 보였다. 버튼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마도 지하실만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같았다. 그리고 그 위에 감시카메라.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대문 옆에도 카메라가 있었던 것 같았다. 현관문에도. 

    들어올 때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보았으나 엘리베이터 카메라를 보니 새삼 그런 것들이 생각났다. 

    편가가 엘리베이터로 다가가서 버튼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계가 작동하는 웅 하는 소리도 없었다.

    편가가 여러 번 계속 눌렀으나 역시 엘리베이터는 열리지 않았다.

    편가는 주원을 돌아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널찍한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두 쪽으로 된 문.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감시카메라. 아마도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리라. 

    하지만 지하실 문이라고 하기에는 꽤 넓었다. 더군다나 큼직한 잠금장치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마치 은행 지하금고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주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얼마나 대단한 작품들이 있다고…….

    편가는 감시카메라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지 문으로 다가가서 잠금장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손을 갖다대고 슬쩍 밀었다. 그러자 문이 스르르 안쪽으로 젖혀진다. 자동문처럼 양쪽으로. 그와 동시에 안쪽 복도의 천장에서 불이 켜졌다.

    그 안쪽으로 짧은 복도가 나타났다. 그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복도는 문처럼 널찍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폭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편가와 주원은 말없이 복도 끝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중간에 계단참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인다. 지하가 꽤 깊어 보였다. 계단 천장에는 중간중간에 전등이 있어서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미는 것이 아니라 통으로 된 하나의 문.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감시카메라. 

    이번에는 편가도 좀 난감한 듯 주저하며 문을 위아래로 살핀다. 그러자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었다. 옆으로. 그러면서 어디선가 약하게 윙하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아마도 환기장치가 작동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지하실 천장 한복판에서 LED(발광 다이오드)의 약한 불빛이 저 깊숙이까지 일렬로 주욱 몇 개가 켜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잠깐 멈칫했지만 곧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은 긴장한 채. 마치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비밀과 음모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장면 같았다. 사실 주원은 어딘지 호기심도 일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무엇인가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켜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천장의 희미한 빛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 동물들의 윤곽들. 마치 중국 고대 병마용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편가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그 순간 드러난 거대한 무덤.



벽과 바닥과 천장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불투명 무광의 암흑과 같은 검은색. 휘황한 조명이 천장에서 쏟아져 내렸으나 지하실 암흑의 사면으로 빨려들어간 듯 빛은 보이지 않고 오직 태고의 우주공간처럼 무지무념무색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무한대의 죽음 한복판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무덤 속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무덤 속에서 영원한 잠을 자듯 온갖 동물이 투명한 푸른색을 뒤집어쓰고 고요히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거대한 푸른색 사파이어 보석을 수백만 년 동안 갈고 닦아서 동물상들을 만들어놓은 듯했다.   

    그 광경에 압도되어 주원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동물 조각상들의 매끈거리는 표면이 조명을 받아 마치 레이저 반사광을 내뿜듯 신비로운 빛을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태곳적 우주의 신비한 빛들이 암흑의 우주 공간으로 현란하게 방사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모든 조각상 아래에는 두툼한 받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조각상과 일체로 붙어 있었다.  

    주원은 온몸이 전율로 떨려오는 듯했다. 

    처음에는 암흑의 무덤 같았던 공포감, 그러나 곧 우주의 태초에 빠진 듯한 황홀감에 사로잡혀 주원은 동물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환상과 죽음의 세계. 그래, 맞아, 이 말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어느 영화나 연극에서도, 또한 어떠한 공연이나 책에서도, 그리고 인간의 어떤 상상에서도 이러한 세계는 창조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온갖 동물들의 맑고 밝고 투명한 푸른색 표면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눈부신 빛들이 불투명 암흑의 세계로 빨려들어가 영원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황소, 사냥개, 리트리버, 말, 돼지, 고양이, 삵, 멧돼지, 여우, 코끼리, 사슴, 양, 염소, 송아지, 어린 낙타, 어린 기린, 이밖에 주원이 알 듯 말 듯한 여러 동물들……. 

    게다가 이러한 모든 동물들에게서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활력감이 느껴졌다. 주원과 편가가 빛을 쏟아주는 동시에 억겁의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모습들.

    아…….

    주원은 벅찬 마음으로 동물들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황홀과 생명감을 맛보며.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느껴졌다. 

    이들 푸른색 조각 동물들의 안구는 모두 검은색이었던 것이다. 몸체는 투명한 푸른색이었는데, 눈만은 불투명한 검은색이었다. 어딘지 부조화 같은 느낌. 그 검은색은 사방의 벽을 칠한 바로 그 불투명이었다. 불투명의 검은 사면과 투명의 푸른 조각상들이 죽음과 영원 같은 조화로 연결된 반면, 투명의 푸른 동물과 불투명의 검은 눈은 불협화음이었다. 

    주원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바이올린 활이 삐익하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 순간 주원의 맥박이 빨라졌다. 

    지하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어딘지 불길한 촉감이 만져지는 듯했다.

    그러나 주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마 너무도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광경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주원은 심호흡을 한 뒤 동물조각 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푸른색 환상들 사이로 우주를 유영하듯 미끄러져 다니던 주원은 한 조각상에서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사람. 

    다른 조각상들은 모두 동물인데, 오직 이것 하나만 사람이었다. 

    “…….”

    생동감 넘치는 모습. 마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 같았다.

    게다가 소녀.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치마가 찰랑찰랑 흔들리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 윗도리는 목에 물결모양의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인데, 어깨 아래 위팔에서 약간 부풀려진 채 끝이 나 있다. 블라우스 레이스 아래 목 부분에는 가느다란 리본 모양의 매듭. 그 아래로 허리까지 단추가 여러 개 나 있다. 팔과 다리는 가늘고 맨살. 발에는 목이 짧은 양말과 옛 유럽풍의 끈 매는 두툼한 구두가 신겨 있고. 

    그리고 소녀는 가는 팔을 들어올려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긴 고수머리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인 채. 그러나 동양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다.

    르네상스풍의 조각상 같은 모습.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점. 눈이 흰색이었다. 동물 조각상의 눈과 같은 불투명이 아니라 투명의 흰색. 동물 조각상과는 정반대다.

    여기에서 또 하나 색다른 점. 

    소녀의 조각상 아래에 붙은 두툼한 받침대에는 보면대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는 종이 악보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바이올린과 활이 놓여 있었는데, 악보를 포함해서 이들은 모두 조각이 아니라 실제의 것이었다. 

    주원은 그 조각상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도 생동감 있게 표현된 조각상이었기 때문이다. 받침대에 놓인 바이올린을 조각상 소녀의 손에 쥐어주면 당장에라도 활을 당겨 고운 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주원이 지하실에 들어와 지금껏 우주적 환상과 영원한 죽음을 경험했다면, 이 소녀상은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현실적 생명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다른 동물상들이 마치 고대의 거대한 지하무덤에서 나온 테라코타와 같은 정적인 형태였다면, 이 소녀는 누군가가 손을 대주면 곧바로 살아나서 움직일 것만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다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른 모든 동물 조각상의 받침대에는 ‘BB&EL-20’이라는 글자 뒤에 각각 ‘-01, -02, -03’과 같은 식으로 숫자가 붙어 있었으나, 소녀의 받침대에는 숫자 대신 ‘-Revival’라고 되어 있었다. 

    Revival. 부활. 사실 작품 제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주관적으로 붙이는 것이어서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런데도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의 조각상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어딘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부활이라면 죽음에서 다시 일어섰다는 것인데, 무엇으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일까? 

    EL, Eternal Life. 영원한 생명.

    동물 조각상들은 고대 무덤 속의 테라코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두자. 그렇다면 무덤 속에서 영원히 잠자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고대 무덤들에서는 주로 왕이나 귀족이었다. 

    혹, 이 지하실에 있는 모든 동물상은 이 소녀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시립한 존재들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 소녀는 이 무덤 속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뜻이고?

    주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 소녀밖에는 인간상이 없다.

    조각가는 이 무덤에서 소녀가 부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원히 잠자기를 바라는 것일까? 

    주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

    슈베르트의 가곡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

    이 지하실 장면에 어울리는 곡이다. 슈베르트가 쓴 15곡의 현악4중주 중 하나이며, 그 중에서 가장 걸작으로 손꼽힌다. 정식 제목은 현악4중주 14번 d단조. 슈베르트가 27살에 2년에 걸쳐서 완성했다. 죽음에 저항하는 소녀와 그 소녀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 유혹하는 죽음의 사자 사이의 대화. 죽음이 주는 안락함. 그곳으로 이끌어 가려는 유혹. 그에 대해 소녀는 저항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 이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녹아 흐른다. 슈베르트는 시인 마티아스 크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 1740~1815)의 시 ‘죽음과 소녀’로 이 가곡을 만들었다. 한편, 이 시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제자인 에곤 실레(Egon Shielie)나 한스 발둥(Hans Baldung) 등의 화가들이 ‘죽음과 소녀’라는 그림을 그려서 남긴 바 있다.     


    [Das Mädchen]

    Vorüber! ach, vorüber!

    Geh, wilder Knochenmann!

    Ich bin noch jung, geh, Lieber!

    Und ruhre mich nicht an.

    [소녀]

    저리 가세요! 저리 가!

    저리가라니까, 무서운 죽음아!

    나는 아직 어리답니다, 제발!

    나에게 손대지 마세요.     


    [Der Tod]

    Gib deine Hand, du schön und zart Gebild,

    Bin Freund und komme nicht zu strafen.

    Sei gutes Muts! Ich bin nicht wild,

    Sollst sanft in meinen Armen schlafen. 

    [죽음]

    내게 손을 주렴, 아름답고 순진한 아가씨.

    나는 친구야. 네게 벌을 주러 온 것이 아니란다.

    힘을 내! 나는 무섭지 않아.     

    내 품에서 편히 잠들게 해줄게.     



지금까지 느꼈던 생명력은 사라지고 어딘지 갑자기 음산스러워졌다. 

    주원은 혼란스러웠다. 

    조각가는 이들 조각상을 통해 죽음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꿈꾼 것인가?

    둘 다……?

    그러나 어딘지 모순되는 느낌이었다.

    주원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주원은 허리를 굽혀 조각상의 받침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른 동물상의 받침대보다는 다소 두툼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어떤 선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주원은 주저앉다시피 해서 선들을 세밀히 살폈다. 그 선들이 받침대 주변 전체로 돌고 있었다. 그리고 선들을 좇아 조각상을 돌다보니 한 가지 사실이 문득 떠오르는 것이었다. 

    관. 

    그렇다. 조각가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스스로만 알 수 있게 아주 가는 선 몇 개를 받침대 주변에 두름으로써 관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리라.  

    문득 어느 구절이 떠올랐다. 

    아무리 머리 좋은 범죄자라도 완전범죄를 꾸밀 때 한 가지 단서는 남겨놓는다고 한 말. 소설에서 읽었는지 영화에서 보았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말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 순간 주원의 머리에서 그 말이 저절로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영악한 범죄자일수록 자신이 똑똑하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주원은 벌떡 일어났다. 그때 편가가 나타났다. 

    “거기에서 뭐해요? 대강 살펴보고 올라가야 해요. 우리는 작품들 개수와 크기 정도만 파악하면 되니까 여기 오래 있을 필요 없어요.”

    “이리 좀 와보세요.”

    주원은 편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여기 와서 이것 좀 봐요.”

    편가가 의아한 얼굴로 주원을 바라본다.

    “여기 이 선들…….”

    편가가 허리를 굽히고 선들을 보았다. 그러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 선들을 주욱 따라가 보세요.”

    편가는 주원의 말대로 소녀의 받침대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어 주원을 바라본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편가는 허리를 펴면서 대답한다.

    “바이올린 말하는 거예요?”

    “정말 모르겠어요?”

    편가는 맹한 얼굴로 주원을 바라본다. 편가 역시 이 무덤 속을 돌며 정신이 빠진 상태인 것 같았다.  

    “뭐 별로…….”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이 지하실 자체가 정상이 아닌데…….”

    주원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천장 한가운데에서 반원형의 CCTV 카메라가 보였다. 그것 하나 외에 다른 것은 없는 듯했다.

    주원은 카메라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편가에게 고갯짓으로 카메라를 가리켰다. 

    편가가 천장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끝이다.

    ‘이 집 안 여기저기 있는 건데, 뭐……’ 하는 눈치다.

    “이거 관이에요.”

    주원이 받침대를 내려다보며 말을 했다.

    “…….”

    여전히 맹한 편가의 표정.

    “여기 아무래도 이상해요. 이 동물상 받침대들도 어쩐지 느낌이 안 좋고……. 이 소녀상 받침대는 더더욱 수상해요. 이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이젠 올라가죠. 올라가서 얘기해요. 여기 오래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편가가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주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주원은 짧게 대답했다.

    두 사람이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주원은 몇 번 소녀 조각상을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이 문 앞에 섰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편가가 문 옆에 길게 붙어 있는 버튼을 눌렀다. 열리지 않았다.

    편가가 손으로 문을 몇 번 두드렸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편가는 뒤로 돌아서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돌아서며 주먹으로 문을 쾅 쳤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편가는 문에서 뒤로 좀 물러난 뒤 발바닥으로 힘껏 찼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편가가 이번에는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그리고는 뛰다시피 다가가서 몸으로 부딪쳤다. 꽝 하는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주원은 겁이 났다. 

    편가가 주원을 돌아다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원에게 좀 물러서라는 몸짓을 한다.

    주원은 문 옆에서 조금 떨어져서 편가를 바라보며 섰다.

    편가가 아주 멀찌감치로 물러선다. 10미터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편가는 그곳에서 문으로 달려가더니 몸 옆으로 아주 강하게 부딪쳤다. 

    콰앙!

    문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편가는 돌아섰다. 그리고 지하실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찾는 모양이다. 그러더니 지하실 끝 쪽에 가서 두툼한 나무 몽둥이를 하나 주워왔다. 지하실 안에는 여러 잡다한 것들이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편가는 그 몽둥이를 들고 카메라 아래로 갔다. 그리고는 야구방망이처럼 몇 번 휘두른다. 카메라에게 보라는 듯이. 그 다음 주먹을 쥐고 카메라 쪽으로 내밀었다. 

    그런 뒤에 다시 문으로 갔다. 열리지 않았다. 버튼을 눌렀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편가는 몽둥이로 문을 가볍게 몇 번 쳤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적인다.

    볼펜과 메모장을 꺼냈다. 메모를 하기 위해 가지고 온 것 같았다.

    편가는 메모지에 볼펜으로 무엇인가를 썼다. 그런 뒤 주원에게 보여준다.

    ‘문 열어! 안 열면 조각 작품들을 다 부숴버린다!’

    편가는 메모지를 가지고 카메라 아래로 갔다. 팔을 쭉 뻗어 메모지를 카메라 쪽으로 갖다댔다. 그러더니 몇 번 흔든다. 그리고는 또다시 팔을 멈추고 가만히 종이를 갖다댄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다가 편가는 팔을 내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편가는 화가 나서 몽둥이를 들고 카메라 아래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당장에라도 조각상을 내리칠 듯이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주원이 그때 편가에게 다가갔다.

    “잠깐 기다려 봐요.”

    주원은 달래듯이 말하고는 소녀상으로 갔다. 그리고는 바이올린과 활을 집어들었다. 

    “뭐하는 거예요?”

    편가가 묻는다. 

    그러나 주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원은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그런 다음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편가가 뜨악한 표정으로 주원을 바라보고 다시 카메라를 쳐다보고 한다. 

    주원은 어쩌면 이 지하실에 마이크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철저히 감시하기 위해서.

    주원은 바이올린을 턱에 갖다댔다. 그리고 활을 현 위에 올려놓았다. 

    주원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나서 현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시작부터 강하게 터져나오는 힘찬 선율.

    주원은 ‘죽음과 소녀’의 네 악장 중 가장 짧은 제4악장 프레스토(presto, 빠르게)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 시간은 3분 조금 더 걸린다. 

    4악장은 고전파 론도 소나타(Rondo Sonata) 형식의 타란텔라로서 8분의 6박자의 빠른 춤곡이다. 죽음의 무도와 같은 현란한 음률이 주를 이루고 있다. 타란텔라는 원래 이탈리아 나폴리 지방의 빠른 춤곡을 말한다. 타란텔라 독거미에 물려 미친 듯이 돌아가는 춤.

    또한 현악4중주는 네 악기로 이루어져 있다.

    제1바이올린은 전체 주제를 이끌어가며 시종일관 중심을 잡아나간다.

    제2바이올린은 곡 전체를 조화시켜 주는 다정한 친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비올라는 분위기를 밝게 해주는 발랄한 소녀와 같다.

    첼로는 이들 모두를 아우르고 화합케 해주는 조정자.   

    주원은 제1바이올린의 음을 청과 흑으로 구분된 생명과 죽음의 공간에 발산하고 있었다. 강하면서도 격렬하고 어지럽게 흔들리는 선율.

    잠시 약해지는 듯하다가도 프레스토로 도는 무희가 원심력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막으려고 또다시 더 강한 프레스토로 돌아오는 음률. 

    현악4중주는 현악 연주 중 가장 어렵다고 한다. 이것을 주원은 제1바이올린 하나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며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어린 영혼.

    두 손을 내저으며 죽음을 막는다. 거부한다. 그때 갑자기 폭발하듯이 커지는 포르테.

    마음이 산란해진다. 압박.

    그러나 소녀는 계속 춤을 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다가와 포옹하며 입맞춤한다. 

    끊임없이, 호흡이 다할 때까지 돌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의 공포가 두렵지 않다. 오히려 즐겨야 한다. 그리하여 4악장은 오히려 생기발랄하고 경쾌하며 심지어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이렇듯 화려한 무도회도 이제 막바지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춤은 끝나면 안 된다.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 영속적으로……. 그래서 조각가는 소녀상 앞에 ‘죽음과 소녀’의 악보를 펴놓았던 것이다. 

    죽음의 달콤한 유혹.

    소녀의 완강한 거부.

    죽음이 끊임없이 다가오며 압박을 가한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주원은 지금 죽음을 보고 있다. 주원 앞에서 버티고 서 있는 검은 망토. 죽음이 손을 내민다. 주원은 활을 강하게 당겼다. 더 강하게, 더 빨리!

    죽음이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동작.

    죽음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망토 두건 속에 숨겨진 죽음의 얼굴. 그것은 오직 암흑의 색일 뿐이다.

    주원은 죽음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팔을 더 빨리 놀려 죽음을 물리치려 했다.

    주원이 활을 느슨하게 당기면 곧바로 다가오는 죽음.

    몸을 앞으로 내밀며 활을 힘차게 당기면 죽음은 화들짝 놀란 듯 펄쩍 뒤로 물러난다. 

    이렇게 죽음과 소녀는 밀고 당기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끝이 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소녀야, 힘을 내! 

    주원은 활로 소리를 질렀다. 

    힘!

    활을 저 끝에서부터 이쪽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소녀가 일어선다. 팔을 휘젖는다. 몸을 돌이키려 한다. 죽음이 손을 뻗어 소녀의 어깨를 잡으려 한다.

    그러나 이제 이들 둘 사이의 전투를 종식시켜야 한다. 이 지하의 무덤에서. 

    주원은 또다시 활을 잡아당겼다. 힘차게! 강하게!

    소녀야……!

    주원은 활을 떼고 팔을 내려뜨렸다. 이마에서 땀이 솟았다. 에어컨이 나오는 지하실에서.

    편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서는 아무런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정신 외에는.

    주원은 바이올린을 어깨에서 내리고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

    주원은 잠시 그러고 있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의 턱받침을 소녀의 턱에 끼우고 바이올린의 목을 왼손 위에 올려놓았다. 꼭 맞았다. 그럴 줄 알았다. 그 다음 활대 끝을 오른손에 집어넣었다. 정확하게 들어갔다. 활털이 현 위로 가도록 조절하자 이것도 그대로 맞았다. 

    주원은 소녀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쳐다보았다. 완벽한 모습이었다. 

    방금 끝난 연주는 소녀가 한 것이다. 조각상 소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소녀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죽음과 한바탕 전투를 치른 소녀. 

    소녀가 이겼다.

    주원은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편가를 바라본 뒤 내려놓았던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문이 스르르 열린다. 그와 동시에 계단 천장의 불이 켜졌다.

   주원과 편가는 뛰어서 문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갔다. 왼쪽으로 꺾어진 계단 위편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두 사람이 계단을 다 올라가자 복도가 환했다. 천장에서 전등이 켜진 덕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입구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얼른 문을 나서서 거실로 나갔다. 현관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실 중간쯤 갔을 때 여자가 막 계단 중간을 꺾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손에는 라이플이 쥐어져 있었다. 망원조준경이 장착된 산탄 사냥총.

    레밍턴 모델 870. 2009년까지 생산. 무게 3.2~3.6kg, 길이 최대 128cm. 펌프액션 타입. 즉, 한 발씩 노리쇠를 당기는 것이 아니라 총신덮개를 뒤로 당겨서 탄피를 빼내고 다시 민 뒤 탄환을 장전하는 방식이다. 산탄총에서 많이 사용된다. 레밍턴 모델 870은 지금까지 1천만 정이 생산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라이플. 모스버그 500과 함께 펌프액션 산탄총 중에서 투 탑에 해당한다. 산탄총은 샷건이라고도 불리는데, 편가는 한때 사냥총 동호회를 따라다닌 적이 있어서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총알이 사람을 관통하지는 않지만 위력이 대단해서 근거리에서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유효사거리는 120m가량 된다. 총을 한번도 쏴보지 못한 초보자들이 사용하기 쉬워서, 미국에서는 홈 디펜스용으로 권총이나 다른 총기를 구입하지 말고 이 레밍턴 모델을 준비해 놓으라고 할 정도다.  

    편가는 얼른 주원의 손을 잡아끌고서 주방 뒤쪽을 도망갔다. 지하실 입구 앞쪽에 뒷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뒷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아까 지하실에 갈 때 얼핏 보아서 알고 있었다. 

    편가가 안쪽 문을 잡아당겼다. 열렸다.

    두 번째 문에는 미국식으로 긴 도어락(door-lock) 가로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편가가 가로대를 밀어 열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면서 편가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실 쪽에서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편가는 주원의 손을 잡고서 뒷문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으로 뛰었다. 그곳에는 겨울 숲이 우거져 있었다. 비록 일부는 가지를 앙상하게 드러내 놓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막 숲 입구에 도착하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편가가 돌아다보니 여자가 총을 들고 겨누려 하고 있었다. 

    편가는 황급히 주원을 숲으로 밀면서 그 위로 엎드렸다. 

    그 순간 타앙!

    산탄총에서는 수십 개의 구슬이 튀어나오는 탓에 가까운 거리에서는 군용총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편가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니 총에 맞지 않은 것 같았다. 주원도 괜찮은 것 같았다.

    편가는 주원을 일으켜서 함께 앞으로 뛰었다. 바닥에 잎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빨리 달릴 수 없었다. 그래도 나무들 사이로 돌면서 정신없이 달려갔다. 

    또다시 타앙!

    편가와 주원이 급히 주저앉았다. 편가가 뒤돌아보니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여자가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일부 보였다.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켰으나 최대한도로 허리를 숙인 채 앞으로 달려갔다. 나무가 많아 뛰어가는 데 방해가 되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추격자의 시야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편가는 주원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나무들 사이로 왔다갔다하며 꼭대기 쪽으로 달려올라갔다. 뒤에서는 뒤쫓아오는 듯한, 낙엽들을 어지럽게 밟는 급박한 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면서 편가는 자주 뒤를 확인했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렸지만 아직 적지 않은 잎이 남아 있고 또 일부는 상록수여서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뒤에서 쫓아오는 여자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땅에 떨어진 낙엽들이 걷는 데 소리를 많이 내서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편가가 갑자기 주원의 팔을 붙잡았다. 주원은 본능적으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느라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서 한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비탈로 뒹굴게 되었다. 다행히 곧 나무에 걸려서 멈추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주원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편가는 미끄러지듯이 주원 옆으로 갔다. 그리고 얼른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총소리가 탕! 하며 울렸다.

    주원은 얼굴이 새파래지며 손을 입으로 갖다댔다. 

    옆에 있던 편가가 얼굴을 찡그리며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팔 위쪽을 붙잡는다. 

    아―!

    편가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쓰러졌다. 

    주원은 놀라서 편가 몸을 붙잡았다.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편가는 오른쪽 팔을 잡은 채 땅에 웅크리고 앉았다. 낮은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다. 

    안 돼!

    주원의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팔을 뻗어 손으로 편가를 붙잡았다. 

    그러자 편가가 고개를 흔든다.

    “나뭇가지에 찔렸어요.”

    편가가 속삭이듯이 말한다. 

    주원은 맥이 탁 풀려 도로 주저앉았다.

    “어디 봐요. 많이 다쳤어요?”

    음―! 하며 편가가 얼굴을 찡그리며 잠시 신음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심호흡을 한다.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그러나 편가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여전히 많이 아픈 모양이다.

    “어디에요? 어디……?”

    편가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살며시 일어난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일어나요. 빨리 올라가야 돼요.”

    편가가 채근한다. 

    두 사람은 다시 몸을 일으켜서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기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낙엽 쌓인 땅을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잠시 올라가자 나뭇가지 사이로 산 꼭대기가 보이는 듯했다. 그곳에도 나무가 많이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너무 위로 올라가면 밑에서 올려다보일지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위쪽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자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총의 개머리판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서 총구를 비스듬히 아래로 향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태도로 보아 두 사람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작은 체구의 여자가 그 순간만큼은 킹콩과 같이 거대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숨을 곳이 없었다. 자칫 움직였다가 소리라도 내면 그대로 발각된다.

    편가는 주원의 어깨를 눌렀다. 주원도 여자를 보았는지 순순히 주저앉는다. 최대한도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편가도 옆에서 살며시 주저앉으면서 여자 쪽을 살폈다.

    여자는 여전히 눈치채지는 못한 채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욱 몸을 낮췄다. 거의 땅에 주저앉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부스럭 소리라도 낼까 봐.

    편가가 주원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주원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머리를 숙였다. 깊숙이. 앞에 있는 나무 밑동에 닿을 정도로. 편가도 주원 옆으로 상체를 내밀며 머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살그락살그락. 여자가 조심조심 다가오는 소리. 여자도 최대한도로 조심하며 발을 내딛는 것 같았다. 

    주원은 숨까지 멈추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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