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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10. 2020

조각정원 (1)


주원은 우울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 그곳에서는 엄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바이올린은 혼자서 스스로를 닦는 도와 같다. 악보를 마주보고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오선지 위에 그려진 몇 종류 안 되는 음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정신도 마음도 눈도 호흡도, 때로는 생명까지도. 

    만일 소설을 쓴다면 한글의 경우 24자, 영어로는 26자, 한문이라면 수도 없이 많은 글자들을 조합하겠지. 그러나 음악에서는 도레미파솔라시 7개, 그것밖에 없다. 너무나 단순하다. 그런데 그 세계가 어떻게 그렇게 깊고 넓고 높을 수 있는 것인지. 

    주원은 7개 음계에 갇혀 있는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도피할 수도 없고.

    그때 편가한테서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받지 않고 저절로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주원은 바이올린을 꺼냈다. 주원이 주로 사용하는 바이올린은 미국에 있다. 그 바이올린은 한국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의 것이 질이 낮은 것은 아니다. 물론 값으로 치자면 미국 것에 한참 못 미치지만, 그래도 웬만한 공연쯤은 너끈히 소화할 수 있는 정도다. 한국에 올 때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정이 많이 가는 악기다.   

    다시 전화가 왔다. 

    편가라고 생각해서 보지도 않았다. 벨이 울리다 저절로 끊어진다.

    몇 초 뒤 다시 전화.

    뭐야?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선우 여사.

    “엄마.”

    “왜 전화 안 받는 거야?”

    “응. 뭐 좀 하고 있었어.”

    “너 내일 약속 없지?”

    주원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

    “얘, 주원아, 듣고 있는 거야?”

    “왜 그러는데?”

    “아무 말 말고 내 말대로 해. 내일 오후에 어디 가지 말아라. 나머지는 이따가 내가 집에 가서 얘기해 줄게. 나 지금 누구 만나고 있으니까 낮에 들어갈 거야. 밥이나 잘 챙겨먹어. 아줌마 힘들게 하지 말고.”

    남궁 여사는 몇 마디 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주원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곳에 와서 쉰다고는 하지만 별로 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늘 남궁 여사하고 신경전이나 하고, 어디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기껏해야 편가 근처나 기웃거리는 처지. 

    답답.

    전화가 울렸다. 안 받았다. 끊임없이 일 꾸미는 남궁 여사. 또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대꾸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주원은 소파에 가서 길게 누웠다.

    또 전화. 

    아, 몰라 몰라.

    주원은 소파 쿠션을 집어들어 얼굴에 올려놓았다.

    계속 울리는 전화.

    주원은 팔을 길게 뻗어 탁자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눈을 감은 채 한 손으로 대강 터치하며 전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알았다니까! 좀 그만해!”

    “주원 씨?”

    으응?

    주원은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원 씨?”

    “듣고 있으니까 말해요.” 주원의 목소리가 다소 날카로웠다.

    “무슨 일 있어요?”

    “…….”

    “주원 씨? …… 주원 씨?”

    “말하라니까.”

    “하 참. 알았어요. 내일 시간 돼요?”

    주원의 이마에 주름이 간다. 왜 죄다 내일이야? 

    “무슨 일이에요?”

    “신나는 일이 있는데, 내가 약속 정해 놨어요. 꼭 같이 가야 해요.”

    아니, 도대체 주어가 없어, 주어가. 무슨 약속인지, 어디인지 뭐 그런 것부터 얘기해야 하는 거 아냐? 아 참,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인가? 헷갈리네. 그러니까 주어하고 목적어는……. 

    아, 됐고. 그런 거 아무려면 어때…….

    “뭔 말이에요? 말을 똑바로…….”

    “아, 죄송. 내가 일 하나 맡았는데, 내일 가서 해야 하거든요. 주원 씨 그거 안 보면 후회할 거예요.”

    주절주절……. (덤벙대기는…….)

    편가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여간 말솜씨는 꽝이다. 떠벌이는 데는 선수인데.) 

    편가가 최근에 공을 들인 끝에 일을 하나 맡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맡은 일은 아닌데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란다.) 어느 조각가가 보름 뒤에 ‘BB&EL’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여는데 그 오프닝 행사를 맡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이름이 그렇게 복잡해.) 게다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번에 전시되는 것들은 모두 미공개된 작품이어서 미리 보는 것만으로도 돈 버는 것이란다. 나중에는 보고 싶어도 못 본다고 한다. (그런 거 안 보며 그만이지.) 그래서 내일 오전에 미리 한번 가서 사전조사를 해야 하는데, 그곳에 같이 가자는 것이다. 공짜로 구경도 하면서. 

    치, 뭐 대단한 것도 아니구만. 호들갑을 떨어요.

    어떻든……. 그래, 차라리 그런 데 가보는 게 더 낫겠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들을 전시하기에 오프닝 행사에 전문업체까지 동원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궁 여사가 내일 오후에 약속하지 말라고 했는데…….

    됐네. 편가의 약속은 오전, 남궁 여사는 오후. 뭐 오후 약속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시간 잘 맞추면 두 가지 다 해결될 수도 있겠네. 이따가 남궁 여사 들어오면 무슨 일인지 알려주겠지. 대강 짐작이 가기는 하지만…….

    에이, 그렇게 하자. 집에 있어 봤자 답답하기만 하고…….

    아무튼 대충 그런 생각에 편가의 말에 알았노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신이 나서 얼른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다. 아침 11시 반, 일산 어디어디.

    일산? 거기는 너무 먼 거 아냐? 오후 약속도 있는데.

    “그럼 그리로 직접 가야 해요?”

    “아뇨. 제 사무실 알죠? 도장 말고. 홍은동……. 그리로 와서 저하고 같이 가요. 제가 차 가지고 갈게요.”

    웬일이래? 차도 다 가져올 생각을 하고.

    주원은 포기할까 하다가 어떻게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덜컥 약속을 하고 말았다.   

  


남궁 여사가 얼굴이 환해서 이층으로 올라왔다. 약간 들떠 있는 느낌.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한 손을 들어 주원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한다. 그리고는 소파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주원은 침대에 누워서 CD를 듣고 있다가 일어나면서 리모컨으로 볼륨을 줄이며 소파로 갔다. 

    남궁 여사가 자기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면서 앉으라는 신호를 한다. 

    주원은 남궁 여사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허리쿠션을 조절하면서.

    남궁 여사가 얼굴을 내밀어 주원을 빤히 들여다본다.

    왜……? 뭔 일인데 그래?

    주원은 몸을 약간 뒤로 뺐다. 

    “내가 딸은 잘 낳았지.”

    “…….”

    “인물도 좋고……. 성품도 좋고……. 실력도 좋고…….”

    왜 이러는 거야……?

    “너 복 터졌다, 얘.”

    말을 해. 뜸 들이지 말고.

    “내가 오늘 누구를 만났는지 아니?”

    남궁 여사가 허리를 주욱 펴며 윗몸을 세운다.

    “너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네 아빠한테는 이따가 내가 말할게. 넌 그냥 입 꾹 다물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엄마…….”

    “아아, 가만있어. 잠깐만……. 숨 좀 쉬자.”

    남궁 여사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주원이 고개를 돌리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남궁 여사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뻗어서 주원의 팔을 붙잡는다.

    “왜 이래? 가만있어 봐. 내가 자세히 얘기해 줄게.”

    남궁 여사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잇는다.

    “너 미국에만 있어서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윤대석이란 사람 알아?” 

    음……. 이름은 들어봤다. 누구지……? 알 것도 같은데…….

    “지난번 국무총리.”

    아, 맞다, 그 사람. 

    “그 집에서 연락이 왔다. 글쎄, 너를 안다는 거야. 그 집 셋째 아들이 런던의 정경대 MBA에다 미국 변호사란다. 지금 MIT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보스턴에서 네 연주회에 한번 와봤대. 그것도 그 집 사모님하고 같이. 그런데 우연히 네가 한국에 지금 와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거야, 세상에……. 우리 귀국연주회에 온 네 아빠 친구 정 변호사한테서 말이야. 게다가 그 사모님이 보스턴 네 연주회에 갔을 때 네 모습이 너무도 곱고 천사 같아서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더라. 그런데 어머머 글쎄, 그때 받은 연주회 팸플릿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나 봐. 방에 들어가 그 팜플릿을 가지고 나와서 성 국장에게 보여주며 이 아가씨가 맞냐고 하더라는 거야, 세상에……. 그러면서 성 국장에게 이렇게 연결된 것도 인연인 모양이라며 다리를 놔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더란다. 그래서 성 국장을 통해서 나를 한번 만나보자고 오늘 아침에 급하게 연락이 왔지 뭐니, 세상에……. 그 집 아들이 며칠 있다가 잠깐 한국에 들어오는데, 그 전에 너를 먼저 한번 보고 싶다는 거야. 그리고 말야, 어머머, 아니 글쎄 그 전화 끝나고 조금 있으니까 그 사모님이 직접 나한테 전화를 걸어온 거 있지. 세상에……. 그분 정말 아주 정중하게 말하더라. TV에서 몇 번 잠깐 봤을 때하고는 전혀 달라. 얼마나 품위 있던지. 그리고……, 윤대석 그 사람, 차차기 유력한 대권 후보야.”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네 번.

    어머머……, 어머머……. 두 번.

    콧대 높기로 유명한 남궁 여사가 완전히 감격한 증거다.

    하지만 주원은 갑자기 골치가 아파졌다. 

    “내일 저녁 6시에 만나서 저녁을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잘 준비해 둬. 아빠도 같이 나갈 거야.”

    남궁 여사는 주원을 한번 노려보더니 천천히 일어나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내가 내일 오전 뷰티샵에 예약해 놓을게.”

    그리고는 들어올 때와는 달리 서리 내린 표정으로 주원을 흘끗 돌아다보고는 밖으로 나간다. 두 손을 가슴에 갖다대고서. 숨 쉬기가 힘든 것 같았다. 아마 계단 내려갈 때 다리가 후둘거릴 것 같았다. 넘어지면 안 되는데…….

    문이 닫히자 주원은 다리를 들어서 쭉 뻗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정 회장은 밤 늦게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양복을 입은 채 이층으로 올라왔다. 

    주원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평소에는 살며시 노크했었는데. 

    정 회장은 아차 싶었는지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전처럼 살며시 노크한다.

    똑 똑 똑.

    주원이 문으로 가서 열었다. 

    정 회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주원은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정 회장이 방 안을 휘이 둘러보며 천천히 들어온다.

    “얘기 들었다.”

    정 회장이 소파로 가서 앉지는 않고 소파 등을 손으로 쓰윽 쓰다듬는다.

    “쫄 것 없어.”

    정 회장은 벽 쪽을 쳐다보며 무엇인가 찾는 듯했다.

    “되면 되는 거고,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키며 주원을 돌아다본다.

    사진을 찾는 모양이다.

    “치웠어요.” 

    주원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난 그 사진 보러왔는데.”

    정 회장이 씨익 웃는다.

    주원은 대답 없이 정 회장을 마주보고 미소지었다.

    “네 엄마 오늘밤 잠 못 잘 거다.”

    정 회장이 다시 한번 웃는다.

    주원도 따라 웃었다. 

    정 회장은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좋은 꿈 꿔라.”

    정 회장은 한 손을 들고 윙크하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문 닫기 직전에 지나가듯이 묻는다.

    “그 사진 누가 찍은 거니? 아주 좋더라.”

    주원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인사만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주원은 꿈에 시달렸다. 평소 거의 꿈을 꾸지 않았는데다, 이렇게 어지러운 꿈을 꾸는 것은 또 아주 드문 일이었다. 무엇엔가 계속 쫓기다가 잠이 깼는데, 잠시 뒤척이다 곧바로 잠이 들었으나 또다시 앞선 꿈이 계속 이어지는 듯 출구 없는 곳으로 몰리며 힘들어하는 그런 꿈이 연속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원은 한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도 좀 어지러웠다. 

    왜 이러지……?

    혹 열이 있나 이마를 만져보았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꿈이 뒤숭숭했으나 그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꿈을 꾸었다는 것밖에는. 

    주원은 화장실에 다녀와서 화장대 스툴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기미 같은 것은 끼지 않았다. 눈꺼풀이 늘어나 있지도 않았고.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는 주원 자신. 틀림없었다. 

    그런데 마음은 왜 이렇게 뒤숭숭하지……?

    똑 똑 똑.

    아버지.

    주원은 스툴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손잡이에 손을 대려는데 문이 살그머니 열린다. 아주 살짝. 그리고 그 틈새로 정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주원이 문으로 가서 활짝 열었다. 

    정 회장은 벌써 몸이 반은 계단 쪽으로 돌려진 상태였다. 그 자세에서 정 회장은 얼굴을 돌려서 주원을 바라보며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린다. 

    “저녁에 보자.”

    정 회장은 그 말만 남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잘 다녀오세요.

    주원은 소리는 내지 않고 속으로만 말했다.

    정 회장은 계단 중간쯤에서 다시 한번 뒤돌아보고 미소를 보낸다. 

    침대로 돌아온 주원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두 손을 약간 뒤로 짚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아침 10시가 되었다. 뷰티샵에는 10시 반에 예약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3시에 한번 더 가야 한단다. 하지만 편가의 약속을 지키려면 지금 나가야 한다. 

    주원은 외출준비를 갖추었으나 마음의 결정은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시 1분. 

    10시 10분에는 결정을 내리자. 그러지 않으면 그대로 뷰티샵으로 가야 한다. 10시 15분에. 뷰티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갑자기 주원 방의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남궁 여사. 옷을 다 차려입고 있었다.

    주원을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내려간다. 

    그리고 정확히 1분 뒤에 주원은 방을 나섰다.

    일층 거실 소파를 지나는데 식당에서 남궁 여사가 나온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내며.

    주원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대문으로 갔다. 살며시 연다. 

    가슴이 떨려왔다.

    문 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대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길로 나아갔다. 

    따각따각. 

    급한 걸음으로 걸으면서 택시를 부르려고 핸드폰을 찾았다. 

    없었다.

    ……?

    주원은 우뚝 멈춰섰다. 

    화장대 위. 

    주원은 돌아섰다. 

    발자국을 떼었다. 그러나 곧 멈추었다.

    망설임. 

    하늘 한번 쳐다보고.

    다시 돌아섰다.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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