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이야기
유년의 이야기
1
아홉 살 반 송우는 학교가 끝나고도 학원에 가지 않고 운동장 끝 나무벤치에 앉아 있었다. 축구 골대 뒤였다. 학원이 싫고 공부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성적은 늘 최상위권이다. 그렇다고 운동이나 예능에서 뒤처지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골고루 잘하고 있다. 그런데도 얼마 전부터 학원에 가기 싫어졌다. 학원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해서 송우가 학원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 바람에 집에서 무지 혼났다. 영어학원, 수학학원, 글짓기학원, 과학교실, 바이올린 선생님, 수영교실, 태권도 도장에서 모두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다. 단 한 군데, 키츠레슬링클럽에서만 연락하지 않았다. 학원 이름이 모두 영어라서 사고방식이 서양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은 가끔 빼먹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다. 이번에는 벌써 세 주째 빠졌는데도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나오거나 말거나. 사실은 그것이 약간 서운하기도 했다. 야단맞을 거리가 하나라도 줄어들어 좋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한 가지로 야단맞거나 열 가지로 야단맞거나 야단맞는 시간이나 강도는 똑같다. 그래서 그럴 바에야 학원을 몽땅 빠지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근 한 달째 모든 학원을 다 빼먹었더니 부모님은 아예 다음 달부터는 학원이란 학원은 몽땅 그만두라고 한 것이다. 그거야 송우가 바라던 것인데, 그래도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왠지 서운하기도 하고. 그래서 싸움은 말리지 말아야 제풀에 죽는다고 하는 말이 맞는가 보다. 뭐 그 반대로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 이 모든 것이 처음에는 조금 야속한 마음이었지만,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는 죄다 그렇고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이제는 송우가 아무 학원에 가지 않아도 더 이상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처음에는 학원에서는 물론 담임까지 나서서 상담하자느니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느니 하면서 법석대더니 이제는 모두들 지쳤는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지 아예 무관심해졌다. 친구들이나 반 아이들까지도 송우의 이마를 만져보며 어디 아프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러더니 이제는 다들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말도 안 붙이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관심 자체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다 소문이 난 탓에 다른 선생님들도 지나가면서 그냥 한번 슬쩍 쳐다보고 마는 정도다. 그나마 교감선생님은 가끔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지만. 교감선생님은 일주일 전에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도 그랬어.”
그 말뿐이었다. ‘나도 그랬어.’ 그러나 그 뒤 어떻게 되었다는 말은 없었다. 좋아졌다든지 나빠졌다든지, 얼마 지나면 괜찮아진다든지 아니면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 거라느니, 하다못해 기운 내라느니, 아무리 상황이 어떻든 밥은 잘 먹고 다니라든지 하는 말 하나 없었던 것이다. 아마 학교 성적이 조금도 나빠지지 않아서 다들 공부는 잘하는구만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부분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어떻든 점수는 안 떨어졌으니까. 아, 한번은 보건선생님이 ‘너 사춘가 빨리 왔구나’ 하고 지나가면서 놀리듯이 말한 적이 있었는데, 송우는 속으로 피 하고 삐쭉거렸다. 사춘기는 벌써 여덟 살에 지나갔다고요. 오춘기라면 모를까. 아냐, 그것은 아홉 살 때 이미 넘겼다. 그렇다면 지금 육춘기? 하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송우는 지금 자신이 영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인생 쓴맛 단맛 다 본 노장. 왜냐하면 세계명작소설, 동화 말고 소설, 유명하다는 그 소설들을 거의 다 읽고 났더니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었다. 솔직히 철학책은 좀 버거워 치워놓긴 했지만. 동화책이야 1학년 지나가기도 전에 다 끝났고. 그렇다면 송우가 천재냐? 그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 걸음마도 느리고, 말하는 것도 지독하게 느렸고, 대소변도 아주아주 느리게 가렸다고 한다. 게다가 거의 울지도 않고, 잘하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벙긋벙긋 웃는 것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진아인지 모른다고 무척 애를 태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더니 늦게 깨우친 애가 진도도 빨리 나간다고 좋아하더니, 이제는 나이 만 열 살도 안 되어 아예 60대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생무상.
송우가 축구 골대 뒤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어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이것도 벌써 한 달째나 되어가니까.
송우가 저 멀리 초록색 노란색 분홍색이 한 뭉텅이씩 교대로 칠해진 굵은 철사 메시 펜스(mesh fence)의 학교 울타리 너머로 멍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한 남자아이가 정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다. 정문 양쪽의 펜스 뒤에서는 지나가는 아이들이 없었는데. 수업이 끝날 시간 즈음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던 각종 학원버스는 이미 다 떠나가고 없었고, 축구부 아이들은 오늘 시합이 있다며 벌써 가버렸고, 선생님들 한두 분이 얼마 전에 교문 밖으로 나간 것 말고는, 펜스 너머 찻길에서 제한속도 30km를 무시하고 달리는 자동차들과 길거리에 어른들만 몇몇 지나다녔을 뿐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는데 저 아이는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게다가 그 아이는 어딘지 모르게 송우를 바라보면서 똑바로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았다.
누구? 학교나 학원, 동네 아이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저 아이는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걸음걸이가 어딘지 당돌하다. 게다가 학교 운동장을 곧장 가로질러 온다.
송우는 그 장면을 흥미 있게 바라다보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오랜만에 송우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 아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옷이 어딘지 이상했다. 평범한 것 같기도 하고, 철 지난, 아니 유행 지난 옷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긴 요즘 세상에 옷 유행이라는 건 없지. 특히 애들 입는 옷에는. 그런데도 어딘지 어색한 느낌.
그 아이가 가까이까지 왔다. 둘의 눈의 마주쳤는데, 아이가 미소를 짓는다. 마치 잘 아는 사이처럼. 송우는 덤덤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는 친한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송우 옆에 나란히 앉는다. 아무런 말 없이. 잘 아는 친구를 만난 듯이.
송우는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아이는 오히려 왜 그러느냐는 듯이 쳐다본다.
송우가 자리를 옆으로 조금 옮겨 아이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쳐다보기만 한다.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그러더니 입을 연다.
“나 소년이야.”
뭔 소리? I am a boy?
“반갑다.”
글쎄, 뭐 누군지는 모르지만 혼자 있는데 찾아와 주었으니 타박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안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꼭 반갑다고도 할 수 없고……. 그런데 소년이라니? 소년인 거 누가 몰라? 딱 봐도 소년인데.
아니, 혹시 소녀? 남장을 한 것인가? 얼굴이 곱상하고 피부도 맑은 것을 보니 혹 여자애가 남자 옷을 입고 온겨?
송우는 엉덩이를 조금 더 옆으로 옮기고 소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소년, 혹시 소녀가 미소를 더 크게 지으며 말을 한다.
“나 저기에서 왔어.”
소년, 혹시 소녀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젠 알겠다. 어떤 애인지. 어쩐지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 싶었다.
“이름이 뭐니?”
“소년.”
그것은 안다고. 이름. 이름 말이야!
“소년이 내 이름이야.”
뭐야, 내 마음을 읽었어?
“나 소녀 아니야. 그냥 소년이야. 이름도 소년.”
얼레?
“사실은 이름이 없어. 내가 온 곳에서는 아무도 이름이 없어. 우리는 그냥 서로서로 잘 알아. 이름이 없어도.”
“어디에서 왔는데?”
이제는 아주 노골적으로 소년이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장난하지 말고.”
소년이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 처음으로 다른 표정을 짓는다. 어깨는 으쓱하지 않았는데, 마치 그런 듯한 느낌이 들면서 표정에서도 약간 장난기가 보이는 듯했다.
“정말이라니까.”
이번에는 약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좋아. 그렇다고 해주자. 손해날 거 없으니까.
그건 그렇다고 하고…….
“내 이름은…….”
“송우. 제갈송우.”
흠, 누구한테 듣고 왔구나. 그런데 왜?
“너한테 알려줄 게 있어서.”
송우는 눈썹이 찌그러졌다. 아니, 한가운데로 모아졌다. 좋아, 그건 그렇고 난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
“그래도 알아야 할 게 있어.”
뭐라고? 너 내 마음을 읽는 거야?
“물론이지. 나는 하늘에서 왔다니까.”
송우는 엉덩이를 한 번 더 움직여 소년에게서 더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장난하나?
“장난 아냐. 진심이야. 어떻게 하면 알아줄까?”
공중부양이라도 해봐. 그럼 인정해 줄게.
“좋아. 잘 봐.”
소년의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조금 떠올랐다. 정말로!!!
송우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며 벤치와 소년의 엉덩이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몸이 떠 있었다. 엉덩이 너머로 벤치 끝과 그 뒤의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무슨 속임수 쓴 거야?
“속임수 아니라니까. 다른 거 보여줄까?”
그만. 송우는 눈을 찔끔 감았다.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하늘에서 왔다거나, 몸이 떠오른다거나 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나 소설이 아닌 이상. 설령 그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제 겨우 나이 열 살도 안 됐지만 그 정도는 안다. 나는 지금 환각이나 환상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너무 고집스럽게 현실 밖에서만 지내온 탓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송우의 의식에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좋아. 일단 그것은 그렇다고 하자. 뭐 그럴 수도 있지.
송우는 미소를 지었다.
“잘 하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이지. 너도 할 수 있어. 한번 해봐.”
놀리는 거야?
“천만에. 정말 해봐. 몸을 움직여 봐.”
정말 너무하네. 내가 바보인 줄 아나.
송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을 움찔해 보았다. 엉덩이를 슬쩍 들어올려 본 것이다.
그러자…….
어, 어, 어…….
정말 몸이 떴다. 말도 안 돼!
송우는 두 팔을 휘저었다. 몸이 옆으로 쓰러지려 한다. 몸의 균형을 잡으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몸이 완전히 쓰러지지 않고 벤치 위에 떠 있는 것이었다.
송우는 당황해서 팔다리를 휘저으며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뿐. 몸은 그대로 떠 있는 것이다.
나 내려줘!
“알았어. 조심해. 천천히 내려놓을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송우의 몸은 살며시 벤치 위로 내려앉았다. 마치 깃털처럼. 사뿐히. 얌전하게.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