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 우연의 산물
저는 길고 긴 글만 씁니다. 주로 소설이죠. 장편소설 두 권 분량의 《인희》도 이곳에 올렸습니다. 브런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브런치와 첫 정이 있어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도 길고 긴 글입니다. 외면하지 마시고 관심을 가져주십사 부탁드리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푸치니 오페라 《마농 레스코 | Manon Lescaut》
제1막 | 데 그리외의 아리아
Donna non vidi mai |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인
제2막 | 마농의 아리아
In quelle trine morbide | 감미로운 레이스 속에서
제3막 | 간주곡(인테르메초)
Intermezzo: Il viaggio a Le Havre | 르 아브르로 가는 여행
제4막 | 마농의 아리아
Sola, perduta, abbandonata | 외로이 내버려져
고양이 수염
고양이 부드러운 그털에 마음담가
꿈꾸고 비벼대며 아늑히 졸리울제
콧수염 안테나되어 찰나처럼 쭈뼛다
두귀가 쫑긋하여 두리번 살펴보니
봄날에 운명처럼 실려온 햇볕이라
졸린눈 다시감고서 사르르르 잠들다
1
서울 남쪽의 한 대학병원 옆에 있는 대형 약국. 넓은 주차장 제일 끝에 있는 약국인데, 항상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홀이 나오며, 오른쪽 벽 쪽에 기다란 접수대가 있고 정면에는 이 역시 기다란 약 지급처와 그 뒤로는 별도 공간의 조제실, 그리고 왼쪽에는 건강기능개선제를 파는 곳, 그리고 약국 후방에 또 하나의 일반 약국이 있었다.
진규는 이 대형 약국 안에 들어가 접수를 하고서 번호표를 받은 뒤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뒤쪽의 일반 약국에 들어가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다. 진규의 차례가 되면 마이크로 환자의 이름을 부르고, 전면에 있는 세 개의 대형 모니터에도 이름이 뜬다. 진규는 이 약국에 두어 번 와 보았기에 사람이 많을 경우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느긋한 마음으로 약 판매대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설희 님, 2번 창구에 약이 나왔습니다. 추설희 님.”
영양제 한 통을 집어들고 설명서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진규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추설희? 죽었는데…….
동명이인……?
그렇겠지…….
진규는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어서 그 이름을 떨쳤다. 아니, 떨치려 했다. 그러다가 머리를 쳐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추설희…….
진규는 얼른 몸을 돌려 약국에서 벗어나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2번 창구.
그 앞으로 한 여인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뒷모습. 약간 길지만 보통 여자들의 헤어스타일. 머리칼이 목덜미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와 살짝 양쪽으로 웨이브져 있다. 대충 보기에 죽은 추설희와 비슷한 키와 몸매. 그리고 흰 마스크를 썼다. 얼굴을 반쯤 가리도록. 혹 심한 감기에라도 걸린 듯한 모습. 게다가 레이밴(Ray-Ban) 선글라스까지 썼다. 보통 일본식 발음을 본떠 라이방이라고 부르는 것. 엷은 갈색 렌즈. 비스듬한 뒷모습이지만 어딘지 옛 그 추설희와 얼추 닮은 듯.
진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 부근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 그리고는 마구 두 방망이질 치는 것이었다.
어쩌면……?
아니야, 추설희는 뮌헨에서 죽었어. 자살. 대사관에서도 추설희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한인신문인 뮌헨한독일보에도 부고기사가 나왔었다. 그리고 뮌헨 동쪽 이자르(Isar) 강변의 섀크갈레리에(Schackgalerie) 근방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가진 장례식에도 진규는 갔었다. 많지는 않지만 한국인과 독일인 비슷한 사람들이 꽤 와 있었다. 물론 그곳에 직접 들어가지는 않고, 교회 근처에 차를 세운 채 차창 너머로 그 장면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진규의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었기에 차도 렌트해서 갔었던 것이다. 벌써 5년이 지난 일이다.
그런데도 여자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죽은 추설희와 닮았다. 마치 자매나 쌍둥이처럼. 하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이름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쌍둥이라 해도 말이다.
진규는 여자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 순간 무엇인가가 진규를 뒤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본능인지 아닌지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들 속에 숨기듯 섞여 들어갔다. 많은 이들이 의자에 앉거나 서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 어색한 동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규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모습이 남들에게 튀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핸드폰을 꺼내어 검색하는 척하면서. 그러면서도 곁눈으로 여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여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진규와는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간다. 흰 마스크를 쓴 4분의 1 옆모습이 영락없는 추설희다.
진규는 사람들 틈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가능한 한 추설희 옆모습 4분의 1만 볼 수 있는 위치로 갈 수 있게 방향을 틀었다.
여자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진규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약국에서 볼일 다 본 것처럼.
진규가 뒤쫓아가자 여자는 건물 로비를 거쳐 현관문을 밀어서 열고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밖으로는 세 계단 정도의 돌층계가 있고 그 너머는 널찍한 주차장이다.
그때 막 약국 홀 안으로 울려퍼지는 이름 하나가 로비까지 흘러나온다.
“강진규 님, 5번 창구에…….”
진규는 멈칫했다.
또다시 흘러나오는 강진규의 이름.
그 이름이 진규의 발목을 잡는다.
진규는 현관문 가까이까지 갔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서고 말았다. 그리고 현관 유리문 너머로 여자의 모습을 좇았다.
그 순간 진규의 이름이 한 번 더 로비로 흘러나온다.
그러나 진규는 현관 유리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여자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차들 사이의 시멘트 길을 지나 진회색 SUV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뒤이어 천천히 차가 빠져나간다.
진규는 그제야 손에 쥐고 있었던 핸드폰 생각이 떠올랐다. 진규는 얼른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SUV 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에서 SUV가 출구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진규는 카메라 줌을 최대한 당겨서 사진을 찍었다. 번호판이 나오도록. 그러나 번호가 식별될 정도는 아니었다.
진규는 돌계단을 내려가서 천천히 달려가는 SUV 쪽으로 뛰어갔다. SUV는 왼쪽으로 회전해서 입구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진규는 뛰었다. 비스듬히 저쪽으로 SUV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진규는 더 힘을 내어서 뛰어갔다. SUV가 속도를 늦춘다. 요금정산소 가까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SUV가 속도를 줄인다. 진규는 다시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 순간 자동으로 계산이 되었는지 요금정산소 가로대가 올라갔다. SUV는 다시 천천히 속도를 내더니 이내 우회전하여 큰 길로 들어섰다.
진규가 숨을 헐떡이며 뒤쫓아가서 대로로 나갔더니 저 멀리에서 우회전하여 돌아가는 SUV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곧 진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규는 핸드폰 사진을 찾아서 보았다. 흐릿하게 찍혀 있는 번호. 그런데 너무 급히 찍어서 그랬는지 번호판이 흔들려 있고 게다가 반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그나마 찍혀 있는 번호도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이라도 다행이었다. 감식반에 의뢰하면 그 정도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으로도 안 된다면 CCTV를 모두 살펴보면 된다. 그것을 요청할 사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2
진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한독전통문화교류협회의 임시직원으로 몇 년간 근무한 뒤 얼마 전에 한국에 들어왔다. 이 협회는 이름만 들어 보면 정부기관 같지만 실은 전경련 소속의 단체로서 한국전통문화에 기반을 둔 상품들을 독일에 소개하고 홍보하는 민간의 비영리단체에 속한다. 그러나 정부에서 일정 부분을 지원해 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규, 즉 강진규는 국정원에서 이 기관으로 파견나간 직원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전경련에서 보낸 직원으로 되어 있다.
강진규의 주된 임무는 정보수집이다. 독일에서 러시아나 중국 등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사치품들의 유통경로를 파악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치품이나 유니세프 대북지원 의료물품 등으로 위장해서 북한으로 반입이 불허된 전략물자들을 수입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 거점이 독일의 옛 동베를린에 속하는 지역에 설립된 북한의 국제친선협회였다. 게다가 그 협회의 지부 격에 해당하는 작은 무역회사가 뮌헨에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반입불허 전략물자들을 관리하는 중심지였다. 한국의 국정원에서는 그 무역회사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강진규를 위장 파견했다. 그리고 추설희는 조선족 출신의 무역 브로커로 위장한 북한 간첩이지만, 실제로는 국정원과 내통하고 있는 이른바 이중간첩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추설희는 5년 전 뮌헨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실제로는 살해당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 범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진규에게는 말이다. 남한의 소행인지 북한의 소행인지, 그것도 아니면 제3국의 소행인지.
그런데 그런 추설희가 나타났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지만……. 아니, 동명이인이어야만 한다. 그 사건 당시 진규는 한국 첩보망을 통해 추설희가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게다가 당시 국정원장에게서 직접 그 사실을 통보받았다. 진규에게 내려진 첫 번째 임무가 바로 추설희에게 접근하라는 것이었고, 진규는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서 둘 사이는 깊은 관계로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진규는 고통스러웠었다. 절망하고 낙담했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방황하고 괴로워했었는지 모른다. 국정원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서 진규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한동안 휴식을 갖게 했다. 그 이후 진규는 국내 일에만 집중하며 5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진규는 설희를 잊을 수 없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녀와 함께했었던 몇 개월의 시간들이 마치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진규의 가슴과 뇌리에 파고들어 괴롭고 괴롭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규는 PC방에 가서 추설희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자신의 핸드폰이나 PC는 혹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설희라는 인물이 몇 명 떴다. 그러나 모두 나이나 직업이 그녀와는 차이가 많았다. 진규는 위험을 감수하고 국정원 PC로 추설희 이름과 SUV 번호를 검색해 보려다가 일단 보류했다. 만일 지금 그 추설희가 옛 추설희와 동일인물이라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진규는 동료에게 비밀리에 부탁해 보려는 생각도 했으나, 옛 추설희에 모종의 음모가 끼어들어 있다면 검색하는 순간 그 사실이 노출될 것이다.
어떻게 한다……?
3
진규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진갈색 나무 문 앞에 섰다. 얼마 전 새로 생긴 긴급지원팀의 이석윤 팀장의 방이다.
진규는 가볍게, 그러나 내심으로는 의미심장하게 두 번 노크한 뒤 문을 열었다. 마침 안쪽에서 팀장이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외출하려는 것 같았다.
“어, 자네? 웬일이야?”
팀장 뒤에서 따라나오던 방첩정보공유센터의 특수임무과 한상일 차장이 먼저 입을 연다. 서열로 보면 한 차장이 위이다. 그러나 나이나 경력은 이 팀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런 탓에 한 차장은 이 팀장을 항상 형님이라 부른다.
진규가 문을 연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사람을 바라보자 한 차장이 다시 입을 연다.
“형님 지금 급 바쁘시다. 나중에 와.”
급 바쁘다는 것은 비상사태와 같은 긴급한 일이 터졌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팀장의 얼굴은 아주 굳어 있었다. 원래부터도 포커페이스로 이름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과는 의미가 다른, 정말로 아주 곤란한 상황이 닥친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으로서도 처리하기 어려운 긴급상황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진규가 엉거주춤 서 있는 사이 이 팀장은 굳은 얼굴로 진규 옆을 지나쳐 가고, 그 뒤를 따라나온 한 차장이 문을 닫으면서 진규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다음에 오라는 뜻이다. 진규는 몸을 돌려 자신 옆을 스치고 지나간 두 사람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나오는 도중에 진규가 안쪽을 흘끗 보았을 때 한 사람이 등을 진 채 창가에서 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모습이 눈가에 잡혔었다. 4분의 1 옆모습. 머리가 긴 여자. 검은색 드레스.
누굴까……? 왜 저 여자를 방 안에 놔두고 두 사람이 나온 걸까? 저렇게 빈방에 혼자 놔둬도 괜찮은 것일까? 방 안에 여러 중요한 자료들이 잔뜩 있을 텐데.
진규가 긴 복도로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엉거주춤 서 있을 때 저만치에서 한 차장이 슬쩍 뒤돌아본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둘째손가락을 까딱하며 따라오라는 표시를 한다.
진규는 이 팀장의 방 문을 한번 돌아보고는 한 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이 팀장은 한 번도 돌아다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원래부터 말이 없는 양반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어딘지 그 느낌이 달랐다.
혹시 방 안에 있었던 여자와 관계된 일일까? 누구지? 방에 혼자 놔둔 것을 보면 위험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그 방에는 여러 중요한 물건과 서류와 정보들이 있어서 아무나 들이면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혹 이 팀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리고 또 하나……, 한 차장이 갑자기 진규에게 오라고 한 이유는……? 진규가 마침 이곳에 와서? 아니면 갑자기 지시할 사항이라도 생긴 걸까? 혹 평소에 친근하게 대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서 살갑게 한마디 해주려고?
진규는 저도 모르게 이 팀장의 방 쪽을 한번 뒤돌아보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앞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마침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의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한 차장이 한 번 더 진규 쪽을 돌아다본다. 무심한 표정. 그렇지만 그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정보부원으로서 갉고 닦아진 눈매. 한 차장은 국정원 내에서도 소문난 인재였다. 물론 인맥도 아주아주 좋았고. 그 덕에 승진도 빨라 이 팀장보다 나이가 어려도 직위는 한참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진규는 성큼성큼 걸어간 덕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 두 사람 바로 뒤까지 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침묵의 시간이 지나자 문이 닫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은은하게 옛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Non ho l’eta
non ho l’eta per amarti,
non ho l’eta per uscire sola con te.
E non avrei, non avrei
나는 아직 어리답니다
사랑을 알기엔 너무 어리거든요
당신과 단 둘이 외출할 나이가 아니랍니다
그러면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질리올라 칭케티(Giglioa Cinquetti)의 ‘노노레타(Non Ho L’Eta, 나이도 어린데)’. 아주아주 오래된 노래, 1964년 이탈리아 서북부 끝단에 있는 산레모에서 열린 가요제에서 우승한 칸초네(Canzone). 당시 16살 미모의 소녀가 불렀다. 민소매 검은 드레스에 머리 밴드로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묵은 청순한 모습으로 이 노래를 불러서 당시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누가 선곡하는지 모르지만 국정원 내부에서는 가끔 아주 오래된 명곡을 틀어주는데, 그것이 어딘지 동서냉전 시대의 유럽풍 비밀정보원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다소 어색한 침묵 속에서 흐르는 옛 칸초네. 어린 소녀의 멜로디가 감미롭게 엘리베이터 안을 채운다. 이 팀장은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오른쪽 뒤편 구석에, 한가운데는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은 채 한 차장이, 그리고 왼편 앞쪽에 진규가 자리 잡고 섰다. 잠시 뒤 2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진규는 한 차장이 먼저 나가도록 몸을 옆으로 돌리고 뒤로 한 발자국 정도 물러났다. 한 차장이 앞으로 나서며 두 손을 주머니에서 빼고 진규 앞을 지나 문으로 나간다.
그때 한 차장 왼손이 진규의 손에 닿았다.
?
진규는 얼떨결에 오른손에 들어온 것을 받았다. 한 차장이 무엇인가를 건넨 것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한 차장이 문 밖으로 나가자 뒤이어 이 팀장이 묵직한 동작으로 따라 나간다. 진규는 곧바로 이 팀장 뒤를 이어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제일 먼저 나간 한 차장이 뒤를 돌아보며 진규에게 말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네 일 봐.”
그 바람에 뒤따르던 이 팀장이 잠시 주춤했고, 진규는 이 팀장 바로 뒤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섰다.
바로 그때 이 팀장도 멈칫하면서 진규를 향해 얼굴을 반쯤 돌리다 말고 다시 한 차장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알겠습니다.”
진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바로 직전, 진규가 몸을 돌리는 순간 진규의 손이 이 팀장의 손과 스쳤다. 아니다. 이 팀장의 의도적으로 스치듯이 자신의 손을 진규의 손에 갖다댄 것이다.
진규는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완전히 돌아서서 2층 자료실 쪽으로 걸어갔다. 두 손을 모두 살짝 쥐고서. 그러나 진규의 왼손에는 한 차장이 준 물건, 그리고 오른손에는 이 팀장이 준 물건이 들려 있었다. 둘 다 작은 USB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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