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 필연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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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규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국제공항에서 내려 청사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예약해 놓은 작은 숙소로 향했다. 뮌헨 남서쪽 슈타른베르거 호반의 작은 도시인 투칭 근처에 있는 민박. 그곳은 국정원에서 자주 이용하는 안전가옥 근처에 있었으며, 가명으로 예약해 둔 곳이다.
진규는 숙소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노트북을 꺼내어 인터넷을 연결했다. 이미 핸드폰으로 조사해 놓은 나미비아의 다이아몬드 시장을 다시 한번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미비아에는 독일 농민들이 1892년에 정착해서 대규모 노예농업을 시작한 이후 독일과 영국, 그리고 2차대전 이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990년에 독립했다. 인구는 260만이 조금 넘는 정도고, 주로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희귀금속의 수출에 경제가 의존한다. 그리고 남북한 모두 수교국이기도 하다. 위치는 남회귀선이 지나는 곳이어서 날씨가 대체로 온화한 편이다.
진규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을 하나 받았는데, 그 내용은 나미비아의 오카한자(Okahandja)라는 도시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폰 바흐 댐 리조트 서북쪽에 있으며, 그 댐은 스와코프(Swakop) 호수에 건설되어 있다.
진규는 혼란스러웠으나 자신이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게다가 그 일이 추설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무도 그에 대해서 언급하거나 알려주지 않았지만. 게다가 여기에는 남북한의 복잡한 문제도 얽혀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이 역시 아무런 단서가 없기는 하지만. 그리고 어쩌면 나미비아 다이아몬드가 이 일의 핵심을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아니면 나미비아 우라늄 광산?
그러나 진규는 그 모든 것보다도 더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설희. 추설희. 한국의 대학병원에 나타났던 그 추설희와 죽은 추설희. 진규가 지금 비록 몸은 국정원에 담고 있으면서도 국정원의 의지와는 다른, 그러면서도 그 끝을 모를 어느 일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진규의 모든 신경은 추설희 하나에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가보자. 그 끝에 무엇인가가 있겠지. 추설희도.
진규는 한국으로 전화했다. 일부러 베를린 외곽지역의 한 우체국에 가서 국제전화로 건 것이다. 죽은 또는 죽었다고 알려진 추설희의 옛 한국 핸드폰 번호. 물론 아무도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없는 번호라고 나오겠지.
발신 신호가 세 번 울렸다. 그런데…….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
? ? ?
설희……? 아니면……?
게다가 외국에서 온 전화라는 것을 알 텐데도 별 망설임 없이 받은 것이다.
“Hello……?”
그 목소리……. 그러나 어딘지 설희 목소리는 아닌 듯했다.
진규는 대뜸 한국어로 물었다.
“추설희 씨 바꿔주시겠습니까?”
“…….”
“추설희 씨 전화 아닙니까?”
“…….”
“전화 잘못 하셨어요.”
뒤이어 전화 끊어지는 소리.
그 번호, 일단 없어졌다가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진규는 그 번호를 다시 누를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혹 그 번호나 설희에 대한 비밀이 존재한다면 지금 즉시 저쪽에서는 어떤 행동에 들어갔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들의 어떤 비밀에 자그마한 틈이 생겼다고 여길 테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진규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닌가……?
진규는 나미비아에 도착하여 오카한자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이번에도 역시 알 수 없는 인물로부터 받은 메시지에 따라 스와코프 호수 서쪽에 있는 국립해양수족관에 들어갔다. 물론 관광이나 하라고 그런 것은 아닐 테다.
진규가 동양에서 온 평범한 관광객처럼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던 도중 초대형 노랑가오리와 상어가 헤엄치는 거대한 수조 앞으로 갔을 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많은 사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유럽인, 동양인, 아랍계, 인도계 등 수많은 인종이 뒤섞인 채 시끌벅적거리며 우르르 들어오는 것이었다. 마침 오후 3시였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매일 그 시간에 다이버가 수조에 들어가서 가오리와 상어에게 손으로 먹이를 주는 행사를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진규는 그들 중에 혹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하고 약간 어지럽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람들은 진규를 스쳐 지나가며 거대한 수조 앞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진규는 계단을 타고 중이층으로 이동해서 거대한 수조를 약간 내려다보며 빽빽이 몰려 있는 사람들 틈에서 혹 이상한 점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펑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었다.
진규가 무슨 일인가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거대한 불꽃과 함께 수조의 유리 파편과 물 폭풍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갈가리 찢겨나간 상어와 가오리의 살점 파편들도 함께 튕겨 나오면서. 그중에는 거대한 입을 벌린 채 날아오는 찢겨진 상어의 머리도 있었다. 물론 사람들의 비명도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고.
진규는 유리 파편과 물 폭풍에 얻어맞아 그 자리에서 나뒹굴었다. 그 옆으로 상어와 가오리의 찢겨나간 살점들이 날아와 흩어졌다. 다행히 수조에서 다소 멀리, 그리고 비스듬하게 위쪽으로 떨어져 있었던 덕에 몸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폭발음에 귓속이 먹먹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사고력도 마비가 된 것 같았다.
진규는 어떻게 수족관 밖으로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정신없이 수족관에서 빠져나와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피해 건물 뒤 숲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물에 다 젖었으나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멀리에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구급차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곧 각종 미디어에서 기자들은 물론 경찰까지 몰려올 것이다. 그리고 이 주변의 온갖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북새통이 벌어지겠지. 하지만 진규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된다. 아마도 이곳 뉴스는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갈 텐데, 이곳에 한국인이 와서 피해를 입었다고 하면 곧바로 한국에까지 알려질 것이다. 진규의 실명과 얼굴까지 TV를 통해서 대한민국 5천만 명에게 죄다 까발려지겠지. 그렇게 되면 진규의 행적이 다 밝혀진다. 그와 동시에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만다.
수족관 외부의 숲은 의외로 깊었다. 남아프리카 서부지역의 휴양지답게 잘 가꾸어진 숲속으로 한참 들어가 옷을 하나하나 벗어서 마른 나뭇가지에 걸쳐놓았다. 마침 해가 좋아 몇 시간 지나면 웬만큼 말릴 수는 있겠지만 그때까지 홀랑 옷을 벗고 있을 생각을 하니 한심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지갑은 그다지 젖지 않아 여러 카드와 지폐 등은 조금만 말리면 될 것 같았다.
반나절 뒤 아직 덜 말라 다소 축축한 옷을 그대로 입고 호텔로 돌아온 진규는 TV를 켜놓고 수족관 폭파사건 뉴스를 계속 들으면서 노트북을 통해 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모으고 시작했다. 인터넷에서는 사고 원인에 대해 다양한 추측을 제시하고 있지만 대부분 테러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누가 무슨 목적으로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단서를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민족갈등이나 나미비아 내의 분리독립세력 등에 의한 정치적 테러 쪽으로 해석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규의 본능은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규는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매우 긴급한 경우에만 걸 수 있는 번호였다. 신호가 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만일 계속 전화벨이 이어진다면 일곱 번째에 상대방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 번째 벨에서 끊어진 것은 긴급상황이라는 뜻이다. 빨리 도피해야 한다. 진규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위험이 곧 닥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진규는 급히 호텔을 나와 일본인으로 된 위조여권을 사용해서 나미비아를 떠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와 이집트의 카이로를 거쳐 런던으로 향했다.
진규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으로서는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는 설희. 죽은 것으로 확신한 설희가 나타난 것. 물론 그 설희가 과거의 설희와 동일인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석윤 팀장의 방에 혼자 남아 있었던 여인. 어딘지 설희와 연결되는 느낌. 세 번째는 이석윤 팀장과 한상일 차장이 동시에 진규에게 슬쩍 넘긴 USB. 하지만 둘 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서 아직 열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열어볼 수도 없는 USB를 두 사람은 왜 진규에게 넘긴 것일까? 그 둘은 다른 내용일까, 같은 내용일까? 그리고 하필 거의 동시에 진규에게 건넨 이유는?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모르게.
진규는 긴급상황 발생 매뉴얼에 따라 급히 유럽으로 날아갔다. 피신하다시피. 그런데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비상 연락수단을 통해. 게다가 수족관 폭파사건까지 겹쳤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곧바로 영국으로 가라는 것.
누구일까? 보이지 않는 그 지시자.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따르고 있는 진규.
진규는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왜 자신이 그 지시에 따르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문스러운 것, 즉 그 지시자는 왜 진규를 택했으며, 또 어떻게 진규가 그 지시에 순순히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래, 맞다. 진규가 지금 하는 행동. 이것은 크게 보면 국가에 반역하는 짓이다. 대한민국의 녹을 받으면서 실제로는 국가가 숨기려 하는 일을 캐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국가의 비밀자금을 써가면서. 또한 지금 이 모든 일에 대해 상부에는 허위로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 모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완벽하게 커버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누군지, 무슨 이유인지, 어떤 지위에 있는지, 진규의 적인지 친구인지도 모르는 채.
진규는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내린 뒤 시내로 들어가서 지시받은 대로 공중전화를 걸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그리고 익명으로 신고를 했다. 목소리 변조기를 사용해서. 영국의 대표적인 수족관인 런던 아쿠아리움(Sea Life London Aquarium) 폭파 음모에 대해.
그리고 실제로 그다음 날 정오 런던 아쿠아리움의 대형 수조가 폭발했다.
그 뒤 진규는 런던의 안전가옥에서 일주일간 나오지 않고 방에서만 지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진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인가? 진규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두 개의 USB를 받았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국정원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두 사람이 각각 몰래 진규의 손에 쥐여준 USB. 하지만 그 두 USB에는 모두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서 그 내용을 볼 수 없었다. 진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내용을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하지만 혹시 나중에 그 비밀번호를 알려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아주 중대한 내용이 들어 있어서 일단 진규한테라도 몰래 건네주는 것이 급하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그것은 그렇다 쳐도 나미비아와 런던의 수족관 폭파는 어찌 된 일인가? 진규가 가는 곳마다 수족관이 폭파된다. 게다가 진규 자신은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쫓기고 있는 듯했다. 공중전화 메시지 역시 그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진규는 쫓기는 이유도, 그러한 메시지를 받는 이유도, 또한 런던 수족관 폭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이유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동인형처럼 그 모든 지시에 따랐다. 왜? 이유는?
사실 진규는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진행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딱히 어떤 그림이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죽은 설희를 목격한 뒤 진규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저쪽에서는 진규가 설희를 목격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을 것이고, 또한 그것을 이용해서 천천히 진규를 자신들이 의도하는 대로 이끌어가고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진규를 나미비아로 보내어 수족관이 폭발하는 사건도 보여주고 또한 런던 사건에 대해서도 미리 흘려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진규가 그 두 수족관 사건에 연관된 것처럼 만들려 할지도 모른다. 진규는 저쪽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 지금껏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 왔다. 언론에서는 수족관 폭파사건의 배경에 대해서 여러 형태로 보도하지만 그 역시 정보당국이 흘리는 정보에 의존한 것일 뿐 아직 정확한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중에 저쪽, 보이지 않는 저들은 진규를 앞세우고 있다. 무슨 뜻일까? 왜 하필 진규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 진규는 언제부터 이 사건에 엮이게 된 것일까? 추설희를 목격한 순간부터? 아니면 정보부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부터? 그런데 하필 왜 진규일까? 이석윤 팀장과 한상일 차장 모두 왜 진규를 택했을까? 그것도 동일한 시간에. 얼마 뒤 벌어질,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족관 폭파사건에 왜 진규를 끌어들인 것일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왜 수족관을 폭파하려 한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나미비아지? 그리고 런던은 또 왜?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그 폭파사건에 이석윤 팀장과 한상일 차장은 어디까지 연관되었을까?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진규, 추설희, 이석윤, 한상일, 수족관, 나미비아, 런던……, 그리고 진규에게 지시를 내리는 저들의 정체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금한 사항, 즉 수족관을 폭파한 이유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추설희. 그녀는 정말 죽은 것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것인가?
머리가 복잡해진다. 무엇 하나 명쾌한 것이 없다. 하긴 국정원에 들어온 이후에는 모든 것이 흐리멍덩하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국가인가, 아니면 정부인가……? 하긴 이 부분은 좀 애매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의 대상도 목표도 달라진다. 어떤 때는 적(?)과 은밀히 소통해야 하고, 다른 정권 때는 원수 보듯 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추구해야 할 목표와 목적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실 무척 심각한 일이다. 한 정권에서 구축해 놓은 해외정보 라인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일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정권에 따라 애국자도 되고 매국노도 되는 것이다. 즉 정권에 따라 빨갱이도 되고 파랭이도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러한 시류를 잘 이용하는 인간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할 경우 심하면 반역자가 되어 처참한 처지가 되고 만다. 이석윤 팀장과 한상일 차장의 경우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그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연륜이나 경륜, 그리고 주변의 호응도에 있어서 한상일 차장은 이석윤 팀장에게 한참 못 미친다. 그러나 현 정권의 입맛에 한상일 차장은 너무도 잘 맞는 사람이다. 반면에 이석윤 팀장은 글자 그대로 눈 밖에 나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아주 심각한 문제가. 심각하다 못해 치명적인 문제가. 한번 생각해 보라. 누군가가 국가에서 버림받았다고 느꼈다면 그 다음에 그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참을까……? 정권이 바뀔 때까지 기다린다고? 못 기다리겠다면? 더군다나 자기 후배 밑으로 들어가 굴종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면? 그런 탓에 분노가, 복수심이 끓어넘쳐 참을 수가 없게 된다면?
아, 그렇다면 이석윤 팀장……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인가? 그 사람이 이 모든 일의 중심?
진규는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아니다. 확실하다.
그리고 또 하나, 진규에게 지시하는 사람, 진규가 무조건 순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 그는 누구인가? 진규 자신은 왜 그 사람을 무조건 따르는가? 게다가 그 사람은 진규가 순순히 따르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런데 진규는 정말로 그 사람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일까?
런던에서 발이 묶인 진규. 더 이상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하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사실 지금까지 그들(?)의 지시에 따른 것은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동안 진규가 행한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그저 여행만 다닌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 가지만 뺀다면. 즉 런던의 한국대사관에 익명으로 전화해서 런던 수족관 폭파 사실을 알렸던 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규로서도 확신하지 못한 채 그저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지시받은 일이기도 하지만 경고의 의미도 지니고서. 게다가 진규는 그 폭파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나미비아 수족관 사건 때문에 각국의 수족관에서 모두 자체적으로 철저히 점검하고 조사하고 대비했을 테니까.
어떻든 진규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특히 추설희에 대해서 확인해 봐야 한다. 정말로 죽은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인지. 그렇지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공개적으로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진규는 지금 어떤 조직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어떤 조직, 알 수 없는 조직. 그렇지만 짐작은 가는 조직.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그들 지시에 따르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저놈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단서는 하나 있다. 비상연락처. 위험신호를 보내는 전화번호 말이다. 그리고 그 번호를 준 사람은 바로 차장이다. 한상일 차장.
진규는 한국을 급히 떠난 뒤로는 이석윤 팀장이나 한상일 차장에 대한 소식은 모른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진규의 행방이나 소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국정원에서는 극비로 진규의 뒤를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그 다음 또 하나의 의문점.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진규에게 USB를 준 것. 이석윤 팀장이나 한상일 차장이 서로 모르게. 그것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왜 진규에게 주었을까? 그 시점에? 너무 긴급한 사항이라 일단 누구에라도 전해 주어야 했던 것일까? 그것도 성향이 다른 이석윤 팀장이나 한상일 차장 두 사람이 모두 진규를 자기편이라고 믿고서? 게다가 그 순간이 아니라면 그 USB를 누구에겐가 전해 줄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그만큼 상황이 긴급했었나?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적으로 여겼던 걸까? 그것도 아주아주 위험한 적. 국가나 국정원 조직에 엄청난 해악을 끼칠 적. 그리고 그 순간이 아니면 그 내용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을 정도로 긴급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당시 그 두 사람은 어디로 가는 중이었을까?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을까? 이석윤 팀장 사무실에 정체 모를 검은 여인을 남겨둔 채.
진규는 USB에 들어 있는 내용을 보기 위해 여러 가지로 시도했다.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도 비밀번호가 풀리지 않았다. 여러 날 비밀번호와 씨름하다가 문득 하나가 생각났다. 이 USB는 어쩌면 처음부터 진규에게 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데다가 운 좋게 진규가 직접 그들에게 찾아왔다면? 그러면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다소 엉뚱하지만 어쩐지 그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두 사람이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평소 별로 가깝지도 않았던 진규에게 그 USB를 건네줄 리가 없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왜 진규를 골랐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이론이 맞는다면 언젠가는 모두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그것은 비밀번호가 진규 자신과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좋다. 일단 이 생각대로 밀고 나가자.
진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쉬운 정보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남들이 진규를 위해 비밀번호를 만들어준다면 어떤 것을 선택할까? 가장 쉬운 것.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진규는 머리를 들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여덟 자리 숫자를 쳐보았다. 그저 시험하는 셈 치고.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정말로 그 숫자가 맞은 것이다. 진규의 생년월일 여덟 자리!
하!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이 현실…….
하지만 지금 그 이유나 의도에 대해서 따져 볼 시간이 없다. 그것은 나중에라도 만나서 물어보면 된다. 현재로서는 그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진규는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내용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별 내용이 없었다. 아주 짧은 소설 한 편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장편 하나. 손바닥 장(掌)의 장편소설에 해당하는 글. 원고지로 10장도 안 될 만할 아주 짧은 소설. 그런 글을 콩트 또는 엽편(葉片)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지. 그렇지 않으면 소설응모에 보내기 위해 축약해 놓은 소개 글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게다가 그 내용 역시 별것 아니었다. 마치 아이들이 쓴 동화와도 같은 밋밋한 글. 하지만 실제로는 그 글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특히 그 글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내용은 유치하지만, 등장인물들은 그와는 정반대다. 정부 최고위직에서부터 국정원 내 최고위 인물들의 실명. 게다가 그들은 소설 속에서 엉뚱한 일을 벌인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현실에서 그 소설의 내용대로 사건이 벌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 글에 등장하는 사건의 순서대로. 그 소설과 현실의 차이라면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글에서는 단지 어항이라고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동그랗고 조그만 어항. 첫 번째는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사온 어항, 두 번째는 유럽 런던에서 사온 어항. 그리고 세 번째는 아시아의 서울, 네 번째는 미주 대륙의 캘리포니아 주 몬테레이에서 사온 어항이며, 그 뒤로도 대륙별로 계속 이어진다. 게다가 그 어항들은 차례로 깨져 나간다. 또한 놀랍게도 어항이 깨지는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게다가, 게다가……, 그 날짜들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족관 폭파 날짜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서울에서 어항이 깨지는 날짜는……. 앞으로 이틀 남았다.
하지만 진규에게는 수족관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또 하나 있다.
추설희.
게다가 병원 약국에서 추설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본 바로 그날부터 진규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일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마치 그러한 일들이 서로 연관이라도 된 듯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규의 입장을 어렵게 만든 것은 본의 아니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수족관 폭파범으로 몰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 앞으로 전 세계에 진규에 대한 지명수배가 뜰지도 모른다.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약국에서 추설희의 이름을 듣거나, 이석윤 팀장과 한상일 차장을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그렇게 짜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잘 만들어진 각본처럼.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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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규는 서울 여의도에 있는 수족관인 아쿠아플라넷63이 폭파 대상이라고 확신했다. 서울의 여러 수족관 중에서 그곳의 상징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진규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즉 그날 아침 한국의 대통령을 비롯해서 여러 국가의 수장들이 함께 그 수족관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현재 G7 국가와 조만간 G7에 가입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의 수장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G7 국가인 독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프랑스의 수장을 비롯해서 앞으로 G7에 가입할 가능성이 많은 국가인 한국과 브라질, 인도, 호주의 정상 등 11명. 이 행사는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발표하지 않고 잠깐 쉬는 의미로 이미 합의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주 고위층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행사였다. 하지만 마침 나미비아와 런던에서 수족관이 폭파된 사건이 있었던지라 한국 정부에서는 그야말로 아쿠아플라넷63 안팎과 63빌딩 자체 및 그 주변을 이 잡듯이 철저히 점검하고,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인물 이외에는 절대로 그 건물에 접근할 수 없도록 조처해 놓았다. 게다가 일반인에게 수족관이 개방되기 전인 아침 6시 30분에 관람한 뒤 그곳에 임시로 마련된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정부 일각에서는 앞서 두 건의 수족관 폭파사건으로 인해 그 행사를 취소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의 수장들에게 문의한 결과 정해진 일정대로 하자는 의견이 모아져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수족관에 대한 점검과 경비는 사상 최대라 할 만큼 면밀하고 대대적이었다.
사실 이 아쿠아플라넷63 조식 모임은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날짜와 장소 모두 처음부터 예정에 없었던 일이다. 그 행사 하루 전 저녁에 결정된 것이니까. 일본과 캐나다 총리가 농담처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말이 확대되어 만들어진 행사였다.
이날 새벽 4시 30분, 진규는 런던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런던에서 인천으로 직접 가지 못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위조여권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분세탁을 위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수법이었다.
진규는 가명과 위조신분, 그리고 위조여권을 받기는 했으나 사실 굉장히 불안한 마음이었다. 자신의 위조신분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독일을 거쳐 나미비아로, 또다시 런던으로 갈 때까지는 위조신분에 대해서 자신했으나, 더 이상은 위험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천공항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자 한편으로는 안도했으나, 사실 그 자체가 어딘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인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가짜 신분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통과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이렇듯 어딘지 어색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에서도 진규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인천의 송도로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다른 택시를 타고 부평역으로 간 다음 이번에도 택시를 갈아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그리고 여의도 북단 여의나루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가 배낭에 미리 준비해서 넣고 간 운동복과 러닝화로 갈아신은 뒤 느릿하게 63빌딩 쪽으로 뛰어갔다. 시간은 아침 6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9월 중순, 추석을 얼마 앞둔 날씨. 공기도 맑고 기온도 적당하며 날씨도 온화했다. 거리에는 아직 차가 많지 않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을 뿐 한산했다. 그러나 여의도고등학교 가까이 다가가자 어딘지 공기 속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원효대교 입구 쪽에 비상등을 켜고 있는 경찰차가 보이는 것이었다.
진규는 조깅을 멈추고 천천히 걸어갔다. 앞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여의도중학교 쪽에서 원효대교로 넘어가는 차들은 그대로 통과시키고, 그 반대로 원효대교에서 여의도로 들어오는 차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한강 너머 이촌동 쪽에서부터 차량 진입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원효대교 입구 비스듬히 남쪽으로는 63빌딩이 맑은 아침 공기 위로 불쑥 솟아올라 있어 마치 고대 이집트 평원의 피라미드 뒤로 치솟은 우주인의 도시처럼 신비한 느낌을 준다. 또한 여의도 북단에서 흐르는 한강에서는 맑고 상쾌한 아침 공기가 잔잔하게 흘러들고 있어서 오직 평온만이 이 새벽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상쾌한 새벽의 광경 속에서 그러나 진규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럴 리가 없다. 폭파 정보가 새어나갔을 리도 만무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이렇게 아침 새벽부터 차량을 제한한다는 것은 너무 이른 느낌이다. 나미비아와 런던에서는 관람객이 가장 많은 오후 시간에 폭파가 일어나서 인명피해가 극심했으며, 또한 바로 그러한 효과를 노리기 위해 수족관을 택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다음 목표가 아쿠아플라넷63이라면 그 역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오후 시간대가 될 것이다. 물론 앞의 두 폭파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다소 수족관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 반대로 수족관에서 보안을 더욱 철저히 해서 오히려 더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떻든 진규는 평범한 시민처럼 여의도중학교를 지나 계속 천천히 걸어갔다. 새벽바람 쐬며 운동하러 나온 사람처럼.
진규가 원효대교 출구 램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젊은 경찰이 다가온다. 그러면서 원효대교 램프 너머로는 갈 수 없고, 시범아파트 옆으로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진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여의도초등학교 쪽으로 방향을 틀자 그 젊은 경찰의 뒤쪽에 있던 다소 나이 든 경찰이 다가온다. 진규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른 척하고 계속 걸어갔다. 그러자 경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평범한 억양이다.
진규는 못 들은 척하고 계속 걸었다.
“잠깐만요.”
진규는 멈칫했다. 약간 신경이 쓰인다.
진규가 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나이가 든 경찰이 표정을 굳힌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할까……?
진규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경찰이 진규 앞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어디에 사십니까?”
“…….”
“집이 어디신가요?”
진규는 멈춰서서 경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여기 사시나요?”
진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댁이 어디인가요?”
목소리가 다소 엄격해진 느낌.
진규는 말은 없이 시범아파트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 사시나요?”
진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증 있으세요?”
진규는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신분증 보여주시겠습니까?”
“왜 그러시죠?”
“그냥 확인 좀 하는 겁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별일 아닙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
“핸드폰 있으세요.”
“…….”
“무슨 이유로……?”
“여기 주민이세요?”
“그렇습니다.”
“어디 사시죠?”
“저기…….”
진규는 눈으로 시범아파트를 가리켰다.
“댁까지 같이 가주실 수 있습니까?”
진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오늘 이쪽에 보안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요.”
“무슨 보안……?”
“댁까지 제가 안전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진규는 경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경찰도 맞받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본다. 그러나 눈빛은 어딘지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이.
진규는 몸을 돌려서 무심한 듯한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경찰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뒤따라온다. 진규는 화랑아파트 앞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슬쩍 뒤돌아보니 경찰이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진규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걸었다. 거리에는 기묘하게도 아무도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마치 멈춰선 도시처럼.
진규가 파리바게뜨 앞쪽의 횡단보도를 건너가 홈마트 쪽으로 갈 때도 경찰은 아무 말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진규는 일부러 자유어린이공원 쪽으로 돌아서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19단지 입구로 가서 걸음을 멈췄다. 그런 다음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니 역시 경찰은 서너 걸음 뒤쪽에 멈춰서서 바라본다. 무엇인가 호기심 어린 표정. 진규는 몸을 돌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뒤쪽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진규가 한 현관문 앞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경찰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규는 천천히 손을 빼서 전자열쇠 다발을 꺼내어 경찰에게 보란 듯이 한번 흔들고는 그중 하나를 도어락 패널에 갖다댔다. 그러자 찰칵 소리가 나며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난다. 진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제스처를 하면서 고개를 돌려 경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경찰은 오른손을 들고 반쯤 경례하듯 모자챙 가까이 올린다.
진규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24평 시범아파트.
진규 혼자 살기엔 너무 크지만, 이곳이 바로 진규의 아지트이다. 서울 거처인 것이다. 영등포 시내에서 조그만 서점을 운영하는 소시민. 이름은 문정기. 물론 가명이다. 그러나 완벽히 새로운 인물. 보름 만에 아지트로 돌아왔다. 그 정도는 늘 있는 일이다. 해외로 파견되면 보름은 잠깐이니까.
진규가 거실 쪽으로 걸어가서 블라인드를 막 올리려는 순간 창문을 통해 번쩍이는 섬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울렸다. 그리고 유리창은 물론 집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3
진규는 이석윤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중전화로 이 팀장의 비선 번호를 누른 것이다. 개인 휴대폰이지만 극히 몇몇 안 되는 사람들만 그 번호를 안다. 거의 비상전화라 할 수 있다. 진규는 이 번호로 5년 전에 단 한 번 연락한 적이 있다. 추설희가 죽었을 때. 당시에 이 팀장은 진규와 함께 다른 부서에 배속되어 있었고 직위도 팀장이 아니라 쉽게 말하면 최고참 선임 정도였으며, 얼마 뒤에 방첩정보공유센터의 차장으로 발령이 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 팀장은 여러 면에서 유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지만 상사들과 마찰이 심한 편이어서 그것이 늘 걸림돌로 작용하여 그 소문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결국 그 소문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엉뚱하게 미국에서 연수받고 돌아온 한상일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한상일보다 한 단계 아래인 긴급지원팀 팀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거의 수평 이동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한상일에게 직접 보고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 팀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때 이 팀장과 늘 호흡을 맞춰왔었던 진규는 유럽에서 그 소식을 듣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인사는 최고 윗선에서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정치적인 것이 작용한다는 사실은 온 천하가 다 아는 일이었으니까.
신호가 몇 번 이어졌다. 보통은 세 번 이내에 받는다. 그 번호로 오는 전화는 긴급신호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 번호를 아는 사람도 극히 제한적이다. 진규는 한 달 전 이석윤과 한상일 차장을 동시에 만난 뒤로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
전화벨이 여섯 번 이어지다가 저절로 끊어진다. 접속 불가라는 뜻이다. 게다가 긴급상황.
진규는 핸드폰에서 칩을 꺼낸 뒤 근처에 있던 돌멩이로 내리쳤다. 그리고는 호수로 던져버렸다. 소양강 댐 호수 한복판으로.
아쿠아플라넷63이 폭파된 지 일주일 뒤 미국 캘리포니아주 중부의 몬테레이 수족관이 폭파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인명피해가 아주 적었다. 전 세계 모든 수족관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몬테레이 수족관 직원 일부만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이때는 몬테레이 수족관으로 폭파 예고편지가 배달되어 필수 인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직원이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이 편지가 오지 않았다 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수족관이란 수족관은 모두 닫은 상태였으니까. 그런 가운데에서도 몬테레이가 다음 대상이라는 편지 자체는 공포를 넘어 미국은 물론 몬테레이 시 전체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그 편지가 진짜 폭파예고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몬테레이 폭파사건 이후 전 세계 수족관은 물론 각종 박물관, 미술관, 공공건물과 언론사, 경찰서, 학교, 정부관청 등으로 진위를 알 수 없는 익명의 폭파예고 편지가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이로 인해 거의 모든 나라가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아쿠아플라넷63에서 열리기로 했던 조찬모임이 그날 새벽 갑자기 취소된 일이었다. 한국 정부에서 보안상 이유를 들어 그날 새벽 갑자기 그 모임 장소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뒤의 삼청각으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한국 정부가 그 폭파 정보를 미리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거나 적어도 범인들과 어떤 연계가 있지 않은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는 그에 대해 명쾌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단지 그 당일 새벽 2시경 갑자기 한국의 대통령이 갑자기 잠에서 깨어 수족관 조찬모임은 아무래도 장소를 변경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각국 정상에게 알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각종 이론과 음모론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 조찬모임의 일방적인 취소를 특히 일본의 총리가 강하게 반발하는 것을 넘어서 캐나다와 일본이 자신들의 국가 및 국민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표현했던 일이 있어서 한국 정부로서는 진땀을 빼야 했었다.
그야 어떻든 11개국 정상들이 한꺼번에 큰 변을 당할 뻔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나게 되자 음모론보다는 한국 대통령의 신기에 가까운 결단에 감사하는 여론이 강했다. 물론 한국을 제외한 그 10개국에서는 모두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개국 정상이 조찬모임을 갖기로 한 장소에 폭발물이 설치된 것을 탐지하지 못한 보안팀은 큰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그 보안팀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특히 미국의 전문가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어서 미국 내에서도 큰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 큰 폭발을 일으킨 폭탄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그 정도 폭발이라면 어마어마한 폭탄이 필요했을 텐데.
이로 인해 국제사회는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개별 국가 책임론, 즉 국수주의가 강화되고 심지어 자유로운 교역까지 통제하려는 시도가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고 미래에,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진규는 늦은 밤 서점의 문을 닫고 나서면서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서점 앞에 세워놓은 입간판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약간 비스듬하게. 구청에서는 툭하면 직원이 나와서 입간판을 안으로 들여놓으라고 하고 가지만, 진규는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 그냥 놔두었다. 밤이고 낮이고 항상 그 위치 그대로. 그런데 이날은 서점 밖에서 바라볼 때 입간판의 앞면이 왼쪽으로 15도가량 비스듬히 놓인 것이다. 진규는 비뚜로 놓인 입간판을 발로 두 번 툭툭 친 뒤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상가 뒤쪽의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골목으로 돌아 들어갔다. 주차장이라야 사실 몇 대 대지 못하는 좁은 공간이다. 그 주차장 바로 옆으로는 철조망이 쳐 있고 또 그 너머는 이웃 건물의 조그만 주차장이면서 소형 트럭 들어와서 물건 내리는 하치장이었다. 그리고 또 그 옆으로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좁은 비탈길.
진규는 자신의 차인 고물 다마스 쪽으로 다가가면서 오른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묵직한 쇠뭉치에 손가락을 걸면서 꽉 붙잡았다. 물론 그것을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긴장을 풀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랄까, 약간의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어딘지 너무 앞서나가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정도. 그러면서도 버릇처럼 몸이 밴, 돌발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 같은 것.
바지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에서 띵 하는 소리가 살짝 울린다. 광고겠지. 광고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진규는 왼쪽 바지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어 조심스레 화면을 켰다. 주변 건물에서 나오는 빛과 보안등 때문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환한 것은 아니어서 주위의 상황이 모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닌 탓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곁눈질로 주변을 확인하면서 핸드폰 화면으로 눈길을 보냈다.
배송안내 문자.
주문한 물건이 도착했다는 내용.
진규는 갑자기 긴장이 풀리며 오른쪽 바지주머니에서 쇠뭉치를 꽉 붙잡고 있던 손가락의 힘이 스르르 풀었다. 그 순간 커다란 몽둥이가 진규의 뒤통수를 강하게 친 바람에 진규는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정신을 잃으면서.
4
사흘 전, 방첩정보공유센터의 특수임무과 한상일 차장은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한 가지 메시지를 받았다. 내용은 간단하다. 강진규를 찾아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강진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간 기록은 없다. 그렇다고 한국 내에서 활동한 흔적도 없다. 여러 형태로 연락해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 출근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판교의 오피스텔이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출입한 흔적이 없다. 여러 사람에게 문의해 보았어도 모두 모른다고 한다. 정부 내에 있는 모든 기록을 통해서 추적해 보았어도 역시 아무런 단서가 없다. 은행, 통신, 신용카드, 핸드폰, 이메일 등 모든 매체에서도 최근에 사용한 흔적이 없다. 죽은 것일까?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외국으로 나간 것일까? 물론 가능성은 있지만, 모든 출입국 기록을 살펴보아도 단서가 없다. 가명? 가능성 있다. 하지만 강진규의 가명과 여권 등은 모두 국정원에서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다 해도 혹 어떤 형태로든 현재 외국에 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점에 대해 국정원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서 추적해 보았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명으로 외국 어딘가에 살아서 돌아다닐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죽은 것은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친구가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이 국정원에는 큰 이득이니까. 그렇다고 대한민국 정부에게도 이득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정치의 영역이니까. 정치, 즉 선악도 구분할 수 없고, 피아도 구분이 안 되는 곳. 여당이든 야당이든 자기편에게 유리하면 애국이고, 자신들에게 불리하면 망국인 곳. 한 정권이 들어서면 득세했다가도 정권을 빼앗기면 감옥에 가야 하는 곳. 그러나 한 정권에서 줄타기 잘 한 뒤 다음 정권에서 적당히 거래하면 최소한 자기 신분은 유지할 수 있는 곳.
아무튼 강진규의 행방은 글자 그대로 묘연했다.
그런데 왜 강진규를 찾아오라는 것일까? 주로 유럽에서 대공 정보수집을 하다가 추설희 사망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한국으로 들어온 뒤 별 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지낸 무능력한 인간을. 아 참, 그런데 그렇게 무기력한 녀석을 왜 지금껏 내쫓지 않고 놔둔 것이여? 그렇지, 응? 그게 좀 이상하지? 게다가 이제 와서는 붙잡아 오라고?
사실 국정원 내부에서는 강진규에 대해서 늘 의문부호를 붙여두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뒤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겠지.”
그렇다. ‘모르는 부분.’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