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순간 사이에 (11/11 & Ep)

by Rudolf

제11장 | 시간을 지나서, 그리고 영원으로


1


어센션 섬. 의미상으로는 무인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인도인 이 작은 섬은 바다거북이 알을 낳거나 바닷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곤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1701년 영국 선원들이 발견한 뒤 나폴레옹을 남대서양 저 남쪽 멀리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했을 때 영국 해군이 이 섬에 주둔하며 나폴레옹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했고, 1982년 4월에 발생한 아르헨티나 앞바다에 있는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벌인 포클랜드 전쟁 때는 영국 공군의 경유지로 이용되는 등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현재는 이곳의 공군기지에 근무하는 영국군과 미군 및 행정관들 그리고 그 가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화산폭발 후에 거친 환경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황무지와 다름없는 섬이어서 거의 무인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서양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보니 전략적인 이점이 상당해서 영국과 미국이 이 섬에 공군기지를 건설해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섬의 이름이 어센션(Ascension)이 된 것은 이 섬이 발견된 날이 5월 26일, 즉 예수 승천일(Ascension Day)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섬에 갑자기 세계 여러 나라의 원수들을 비롯해서 그들의 수행원과 경호원, 각국의 신문사와 방송국이나 통신사 기자들, 또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바람에 UN 총회에 버금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 장례식 현장은 전 세계로 실시간 중계되고 있었다.

이명학 대통령은 어센션 섬에 온 세계 여러 나라의 정상들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었다. 모두들 약혼자의 죽음에 대해 애도했고, 그녀의 생전의 성품이나 행적에 대해 칭찬해 주었으며, 그 범인은 조만간 꼭 붙잡혀 정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명학은 별 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먼 섬의 장례식에 와주어서 고맙다고만 할 뿐이었다.

약혼자의 시신은 이곳에서 예배가 끝난 뒤 조지타운 동쪽의 작은 마을인 크로스 힐(Cross Hill)에 미리 준비해 놓은 아담한 묘소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장례예배가 시작될 차례가 되었다. 약혼자의 시신을 담은 화려한 관이 제단에 놓이고, 사제들이 입당하면서 조문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장엄한 입당송(入堂頌)인 레퀴엠(Requiem Mass, 진혼곡)이 시작되며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주여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가 막 울려퍼지려는 순간 기묘한 일이 생겼다. 갑자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우선, 생중계되는 TV를 보고 있던 시청자들의 시각.

TV 화면에서 갑자기 각국의 정상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남고, 오직 정상들만. 교회 앞마당에서 진행되던 장례예배에서 어느 순간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한꺼번에 쓰러지거나, 어디로 뛰어 달아나거나, 하늘로 치솟은 것이 아니다. 그냥 화면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장례예배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시각.

장송곡이 막 흘러나오는 순간 사람들의 눈앞에서 갑자기 일부 사람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도 각국의 정상들만. 어디로 뛰어서 달아나거나 넘어지거나 하늘로 솟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사라진 것이다. 마치 지우개로 순식간에 지운 듯. 그것도 각국의 원수나 대표들 한 사람씩만. 수십 명에 달하는 그 사람들이 갑자기 증발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냥 없어진 것이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그러자 혹 섬의 이름이 예수 승천일이라서 사람들이 갑자기 승천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말이 남아 있는 군중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그 바람에 땅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성호를 그린 다음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2


작은 섬 꼭대기의 풀밭에서 갑자기 만나게 된 강진규와 추설희 그리고 계지선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서로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그리고 특히 설희는 5년 만에 만난 진규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진규 역시 설희를 대학병원에서 본 뒤 그녀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온갖 곳을 뒤지고 다니다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렇게 한바탕 눈물 폭풍이 지나간 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의논했다. 하지만 현재 자신들이 있는 곳도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이곳에 오게 된 것처럼 어떤 시기에 또 순간적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마음이 어수선하고 안정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예요? 그리고 저곳, 저 건너편 섬도…….”

“나도 도무지 모르겠어.”

“하지만 너무 이상해요. 저 섬 광경이. 항공모함이랑 헬리콥터나 전투기랑……. 혹 전쟁이 난 건 아니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리고 대통령 그 자식하고 나머지 똘마니들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그런데 저 앞에 있는 저 제단 같은 건 또 뭐예요?”

“글쎄……. 여기에서 무슨 의식 같은 걸 치르려나 본데…….”

“아…….” 갑자기 지선이 진규를 쳐다보며 궁금한 얼굴을 했다. “저, 혹시…….” 이렇게 말을 하며 지선은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장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지갑을 펼치더니 사진 한 장을 꺼내든다. “국정원에 있었다고 하니 제가 물어볼 게 하나 있어요. 이 사진 좀 보실래요.” 지선은 늘 의문으로 여기고 있던 사진을 꺼내들었다. 자신의 친아버지와 그 옆에 한 남자, 그리고 그 뒤쪽 멀찌감치 서 있는 또 한 남자, 즉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찍혀 있는 사진. “저는 이 사진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떻게 대통령 그 인간이 제 아버지 사진에 찍혀 있는 건지. 그리고 아버지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또 누구인지.”

진규는 사진을 받아들고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양미간이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데……. 지선 씨 아버지 옆에 있는 이 남자는 오래전에 행방불명된 사람이에요. 북한 공작원이었다가 남한으로 전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좀 황당한 이상향을 꿈꾸는 단체에 들어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탈북한 사람들을 모아서 북한의 임시정부 같은 것을 만들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리고 정부에서도 비밀리에 그 사람들을 지원해 주어 대북활동에 이용했고요. 그런데 그 단체가 나중에는 이상하게 변질되었어요. 즉 남북 중간지대, 그러니까 한반도 한가운데에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닌 제3의 국가를 세우겠다고 한 거지요. 그런 다음 그 지역을 중립국화해서 독립한 다음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가고, 나중에는 남북한 모두를 흡수해서 통일시키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 이론은 꽤 설득력 있게 들려요. 현재 남북한이 철천지원수처럼 대치하고 있잖아요. 여기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 계획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을 모으려는 거예요. 동양인, 백인, 흑인, 아랍인, 인도인, 동남아인 등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여서 양평이나 가평, 춘천 근처의 땅을 집중적으로 매입한 다음 국제사회에 선포하겠다는 겁니다. 독립국으로. 또한 영세중립국으로. 그런 다음 남북한 정부와 협상을 해서 장기적으로 보면 남북한 공동정부, 더 나아가 한반도 전체를 통일해서 영세중립국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어요? 우선 돈입니다. 그리고 동조자들을 모아야죠.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남북한 정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어떤 것, 즉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것은 단지 총이나 탱크 같은 무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돈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금방 상상이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한마디로 신세계, 즉 판토피아(phantopia)를 건설하는 거지요. 이를 위해서 그 사람들은 독특한 기술을 개발해 나갔습니다. 이는 가상공간이나 가상현실 같은 것인데, 그 사람들은 그것을 진상현실이라고 부를 겁니다. 거기에 ‘울트라’라는 말을 덧붙여서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이란 것을 개발해냈지요. 이에 대한 것은 철저히 비밀로 진행을 해서 우리 국정원에서도 극히 일부만 파악하고 있을 뿐 자세한 것은 아직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가 그놈들에게 붙잡혀서 합명당인지 뭔지 하는 건물 지하에 갇힌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대통령하고 국정원 고위층 일부가 작당을 해서 그 일을 추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까 설희 씨가 한 말을 생각해 보니 지금 그 기술을 이용해서 우리를 테스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현재까지 있었던 일을 종합해 보면 거의 완성단계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저놈들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몽땅 장악하려고 할 수도 있어요. 사실 저 악당 놈들이 나를 자신들의 비밀연구소 같은 곳에 데리고 가서 이것저것 보여준 것은 자신감에 가득차서 과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보면 지금 저 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을 것 같아요.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진규가 쉬지 않고 이렇게 긴 이야기를 마치자 지선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사진이랑 저희 부모님과 그 방송국 PD가 교통사고로 숨진 것, 그리고 그 젊은 직원이 살해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 그 사건……. 우선, 이 사진 속 세 사람, 대통령이 그 사진 속에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들 모임에 갔다가 찍은 것일 테지요. 그리고……, 안됐지만 지선 씨 부모님은 그놈들한테 살해당했을 거예요. 아마 처음에는 그놈들 정체를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생각에 동조해서 거기에 합세했다가 나중에 놈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빠져나오려 했겠지요. 그렇게 되면 저놈들이 가만 놔두겠어요? 감쪽같이 없애려 하겠지요. 자세한 방법까지는 알 수 없어도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게다가 그 PD라는 여자가 지선 씨를 라디오 프로에 나오게 한 것은, 아마도 놈들의 꾐에 빠져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일단 지선 씨를 그 프로에 나오게 해서 일단은 망신을 준 뒤 지선 씨가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하고 나서 제거를 하든 포섭을 하든 하려 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PD가 어찌어찌해서 놈들의 속셈을 알아차리자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제거한 것이고, 나중에 그 젊은 그 방송국 직원도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생각해서 살해했을 테지요. 또한 지선 씨를 납치한 것은 또 다른 속셈, 즉 지선 씨가 남북 모두에게 이용당한 것을 역이용해서 오히려 자신들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이런 수법은 그런 놈들 세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특히 시커먼 음모를 꾸밀 때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요. 그러다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었거나, 아니면 자신들 의도에 잘 따르지 않거나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 없이 제거하려 들겠지요. 그런 인간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입니다. 특히 첩보의 세계에서는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상으로 일어나요.”

진규는 여기까지 이야기한 뒤 잠깐 말을 멈추고서 주머니에서 비닐에 싸인 조그만 물건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아시죠? USB잖아요. 내가 이 섬 해안에서 깨어난 뒤, 한상일 차장이 이걸 나한테 슬쩍 건네주었어요. 무슨 속셈인지, 또 여기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놈들의 비밀이 여기에 들어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이 직접 폭로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고 나한테 주었을 텐데, 컴퓨터가 없으니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네요. 아마도 그동안 있었던 해괴한 일들과 저놈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겁니다.”

USB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면서 진규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나하고 함께 이 섬을 좀 둘러보죠. 그러다 보면 뭔가 알아낼 수도 있겠지요.”

이 말에 따라 모두들 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그리스 제단 맞은편 끝자락, 즉 진규가 올라왔던 쪽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 순간…….



정말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그 풀밭 위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렇다. 나타난 것이다. 그냥 나타난 것. 아무런 징조나 예고도 없이 수십 명의 신사숙녀들이 툭 나타난 것이다. 짠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든 중후한 모습의 신사숙녀들이 정장을 입은 채 마치 영화 화면이 갑자기 바뀌듯 그 풀밭을 점령하고 말았다.

얕은 산 꼭대기의 풀밭 가장자리에 가까이까지 갔던 세 사람은 그 장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뿐만 아니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나타난 그 사람들도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거나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세 사람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 순간 진규가 소리 질렀다.

“저 사람들 세계 각국의 대통령들이이야!”

두 여자는 입에 손을 가져가며 신음소리를 냈다.

“어머! 어머머…….”

정말로 그 사람들 속에서 늘 TV에서 보던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 일본의 총리, 중국의 국가주석, 영국의 총리, 각종 스캔들로 늘 무성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각국의 정상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모두들 새카만 정장을 하고 있어서 마치 장례식에 온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놀란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하지만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는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좀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그리스식 제단 위에 구릿빛 얼굴의 한 여인이 곱게 단장한 채 누워 있는 것이었다. 마치 시신처럼.

“아……, 저분, 저 여자분 우리나라 대통령의 약혼자 아니에요?”

지선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정말……? 저 여자분이…….”

지선도 놀란 얼굴로 말을 했다.

“그런데 모습이 좀 이상해.”

진규가 외치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 대통령을 찾았다. 지금 그 사람 약혼자가 마치 시신처럼 제단 위에 누워 있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대통령은 어디에 있는 거야?

진규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며 대통령을 찾았다. 그러나 사람들도 엄청 놀란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서로 묻기도 하는 등 세계 온갖 언어가 뒤섞여 튀어나오고 있었다.

진규는 대충 둘러보았지만 한국 대통령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자 진규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한 신사에게 다가간 뒤 영어로 간단하게 실례한다고만 말하고서 그 사람 핸드폰을 빼앗다시피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아는 긴급 호출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서 번호를 눌렀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벌쭘하게 바라보는 그 신사에게 핸드폰을 다시 돌려준 다음 다른 사람의 것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서 번호를 눌렀으나 역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도 몇몇 사람의 핸드폰을 빼앗아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똑같았다.

혹시 그놈이 이 짓을 벌인 것은 아니겠지……? 추설희가 말해 준 울트라 뭔가 하는 기술로 말이야. 그리고 저 약혼녀가 왜 죽은 거지? 게다가 왜 여기에 온 거야? 한국을 놔두고…….

진규가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헤치고 다니는 사이에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몰려가면서 탄성을 질렀다. 바로 바다 저 건너편 놓여 있는 큰 섬 쪽으로. 그러면서 각종 언어로 말을 쏟아놓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항공모함을 포함해서 진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몇몇 있었다. 진규는 영어와 일본어,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고, 불어도 약간은 알아듣고 있었다. 게다가 정장 차람의 사람들 사이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어떻든 모두들 너무 놀라서 서로에게 답은 없는 질문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한국 대통령 이명학은 없었다.

세계 모든 정상이 모인 곳에 한국 대통령만 없다……. 무슨 뜻인가? 혹 암살당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진규는 몇 시간 전만 해도 이 섬의 저 아래 해변에서 생생하게 살아 자신 앞에 서 있었던 이명학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사람들 속에 한국 대통령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 사람만 빠질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저 앞의 시신은 이명학의 약혼자가 아니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죄다 진규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어떻든 지금 이 상황이 설명 불가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 시신만은 저렇게 놔둘 수는 없다. 서양식으로 곱게 단장한 채 대리석 바닥에 뉘어 있는 여성.

진규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사람들을 헤치면서. 다른 사람들은 저 바다 건너편 섬의 광경을 바라보며 서로들 소리치기만 하고 있었지 아무도 제단의 시신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자 뒤쪽에 남아 혼란스러워하던 두 여자도 진규의 뒤를 좇아 사람들 사이로 뛰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시신 앞에까지 가서 진규는 다시 한번 그 얼굴과 모습을 살펴보았다. 틀림없다. 대통령의 약혼자. 그 순간 진규는 그녀의 고향이 어센션 섬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적도 아래 남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섬. 그녀의 부모가 그곳 공군기지에 파견되어 나가서 근무하던 중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죽은 채 이름 모를 섬에 누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이 어센션 섬일 리는 없다. 그 섬이라기에는 너무 작으니까.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 약혼자의 고향이 어센션 섬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 그곳에 대한 정보는 유치원생도 알 정도로 온 국민의 상식이 되어버렸다. 그 섬의 위치는 물론이고 역사, 지형, 공군기지와 그곳에 주둔한 군인들의 생활 등등 그 모든 것이 한때는 거의 매일 방송에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그곳을 찾는 한국 여행객도 엄청나게 많아져 한때는 베스트 관광지에 오르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섬에 대한 무수히 많은 사진이 돌아다녀 직접 가보지 않아도 그곳이 보일 정도였다. 아, 맞다. 저 섬의 실루엣.

수많은 관광사진에 실려 있었던 원거리 섬 사진. 그래, 확실하다. 저 섬이 바로 어센션 섬이야. 100퍼센트 확실하다.

그럼, 지금 어센션 섬이 건너다보이는 이 작은 섬에 우리가 어떻게 온 거지? 하지만 그것도 추설희가 말해 준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인가 뭔가 하는, 말도 안 되는 그 공상적인 기술로 설명이 될 것 같았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그것은 그렇다 쳐도 이 약혼녀는 왜 죽은 거지? 어떻게 된 거야? 진규는 자신이 저 나쁜 놈들에게 붙잡혀 있었던 며칠 사이에 세상이 돌아버렸나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복잡한 생각에 몰두해 있는 사이에 설희와 지선이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제단에 놓은 시신을 보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어멋! 이분은 그 약혼자잖아!”

“왜 여기 누워 있는 거야? 죽은 거야……?”

“대통령 그놈은 어디 갔어? 자기 약혼녀가 죽어서 누워 있는데 여기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잖아.”

“어떡해……?”

사방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섬 저쪽을 바라보던 사람들 중 일부가 시신이 놓여 있는 곳 가까이로 다가왔다. 몇몇 사람은 관도 없이 차가운 대리석 위에 놓인 시신이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가슴에 성호를 긋기도 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와아!”

세 사람이 돌아다보자 헬기 한 대가 이 섬 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조그만 섬 꼭대기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본 모양이다.

“여기요, 여기!”

“살려줘!”

여기저기에서 세계 각국의 언어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주변 환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바닥은 풀밭 그대로인데 풍경이 다른 것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놀람과 절망과 감탄이 마구 뒤섞인 비명 같은 탄성, 탄성 같은 비명.

그리고 그들의 뒤쪽에는 둥근 달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커다란 달 모형. 사람 키의 대여섯 배도 넘을 듯한 분홍색의 커다란 달. 그리고 앞쪽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고, 또 그 너머에 웬 건물이 하나 떡하니 서 있었는데, 이곳에 모여 있는 신사숙녀들에게는 낯설겠지만 한국인 세 사람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건축물, 즉 한옥, 그중에서도 요즘은 고궁이나 공원 같은 데에서나 볼 수 있는 높다란 이층 크기의 조선시대 연회루(宴會樓)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 건물의 기와지붕 아래에 걸린 현판에는 한자로 세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바로 광한루(廣寒樓)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앞의 연못 위 한가운데에는 방금 전 작은 섬 꼭대기 잔디밭에서 본 여인의 시신이 허공에 누운 채로 떠 있었다.



주변의 조명을 받아 짙은 연두색으로 비쳐 있는 연못과 그 뒤로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이층 높이의 누각. 아래층은 두툼한 사각 석조 기둥이 받치고 있었고, 그 위로 단청색으로 치장한 난간과 누각, 그리고 누각 정면 위에 한자로 광한루라는 흰색 글자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 위로는 조선시대 정통 기와지붕이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돌 축대로 둘러싸여 있는 자그마한 연못 위쪽에 바로 그 시신이 허공에 뜬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신의 옷가지가 아래로 축 처진 것이 아니라, 방금 전 대리석 제단에 누워 있었던 것과 똑같이 단정한 그 모습 그대로. 그러나 단 한 가지 다른 점은 이곳은 밤이었다. 그에 따라 주변에 켜져 있는 여러 등과 조명의 불빛으로 인해 몽환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광경이었다. 게다가 연못 위에 떠 있는 시신 위로는 하늘 어디에선가 조명이 내리비치는 듯 마치 오페라 무대와도 같은 느낌도 주는 것이었다.

광한루.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신사숙녀 여러분 중 이곳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만, 한국인이라면 그 유명한 이몽룡과 성춘향 이야기를 모를 이가 없을 것이다. 바로 그 두 사람이 만난 광한루원(廣寒樓園), 즉 광한루 정원의 연못 위에 한 여자가 반듯하게 누운 모습으로 떠올라 있었고, 그 분위기에 알맞은지는 모르겠지만 그 광한루 앞쪽, 그러니까 연못 바로 뒤에 한 사나이가 고독한 모습으로 우뚝 홀로 서 있었다. 밤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지 별 하나 보이지 않았고, 어찌된 일인지 마치 정전이라도 된 듯 전등 빛 하나 보이지 않았으며, 그 주변 어디에도 이들 말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 광경은 마치 지상의 것이 아니라 저 우주 먼먼 곳에 펼쳐진 몽환적인 오페라 무대와 같은 모습이었다. 동방의 대륙 끝자락에 위치한 대한민국 남원 땅의 한 서생인 이 도령과 지방 기생의 딸이 만났던 운명적인 사랑의 장소. 그 두 사람은 이곳에서 만나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해피엔딩을 이루지만, 지금 이곳의 광경은 그러한 로맨스와는 사뭇 다르다. 연못 위로 둥실 떠올라 있는 한 여인의 시신, 그리고 연못가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서글픈 얼굴의 한 남자. 마치 거대한 야외 오페라 무대와 같은 그 장면에 주인공처럼 우뚝 서서 슬픈 듯한 눈매로 공중에 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 남자의 이름은 이명학, 즉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이었다. 이 환상과도 같은 야외무대에서 마치 비극 속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저 혼자 폼 잡고 있는 악당.

“저 새끼…….” 진규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장면이 안 어울려…….”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더니 차츰 소리가 커졌다. 놀람과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복잡한 탄성들.

대한민국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광한루. 본래 이름은 광통루(廣通樓)였다. 세종 1년인 1419년에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지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 세종 연간인 1434년 중건을 한 뒤 정인지가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고 이름을 바꾸고 나서부터 일반적으로 광한루(廣寒樓)라 불리게 되었다. 참고로 광한청허부는 옥황상제가 사는 달나라의 궁전을 말한다. 이에 따라 현재 광한루가 있는 공원에는 달의 대형 모형이 광한루 앞의 연못 건너편 잔디밭에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세종대왕의 생몰연도는 1397~1450년으로, 22세에 왕위에 올라 53세에 타계했으며 재위기간은 32년.

이명학 대통령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여러분, 이곳 사랑의 성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대통령은 한국어로 말을 했지만, 각국의 정상들 귀에는 자신들의 언어로 들려왔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자락의 영국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듯, 유라시아 거대한 대륙 동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에서는 이몽룡과 성춘향이라는 두 젊은이가 사랑을 꽃 피웠습니다. 그러나 못된 변 사또라는 인간이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죠. 하지만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사랑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 사랑이 시작된 곳이 바로 여기 이 장소입니다. 이와 같이 저와 제 약혼녀가 만난 곳도 바로 이 공원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달콤한 꿈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방해꾼이 나타났죠. 우리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러분과 제가 이 연못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것처럼 그렇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죽음의 강 이편과 저편으로.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듯이 제 약혼녀는 지금 저 위에 떠 있습니다. 차마 그 강을 마저 건널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마음은 당장이라도 제 약혼녀 곁으로 날아가서 데려오고 싶습니다. 하지만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제 약혼자를 살해한 범인을 줄곧 좇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알아냈지요. 그 자는 지금 이곳에 와 있습니다. 제 약혼자에 이어 저까지 살해하기 위해서죠. 그 이유라든지 또 그 자가 어떻게 제 약혼자를 살해했고 또 어떤 방법으로 이곳까지 왔는지에 대해서는 그 과정이 너무 길어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알려드려야 할 텐데, 여러분은 지금까지 놀라운 현상을 보았을 겁니다. 그것은 한국 정부에서 오랫동안 비밀리에 개발한 혁신 프로그램으로서, 앞으로 우리 인류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반역자가 우리 프로그램에 침입하여 그 기술을 탈취해서 한국 정부를 협박하는 일이 있었죠. 하지만 우리가 그에 응해 주지 않자 보복하기 위해 제 약혼자를 살해한 뒤 계속해서 우리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밀하게 그 범인을 추적해 왔습니다. 여기에는 글자 그대로 피 말리는 엄청난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범인을 밝혀내어 오늘 이 자리에서 공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자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제 약혼자에 이어 저까지 살해하고, 제가 이룩한 기술을 탈취해서 전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엄청난 야욕에 불타서 말이지요. 그 범인은 여러분 가운데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핵심기술이 담긴 USB를 탈취하여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 자를 여러분이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뒤 제 약혼자의 시신 앞에서 그 자를 공개적으로 심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바로 지금!”



3


강진규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연못 가장자리로 끌려나왔다. 그 뒤로 추설희와 계지선도 함께 따라나왔다.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또한 연못 너머에 서서 하늘 어디에선가 내리비치는 조명을 받아 독무대에 선 듯한 대통령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한 신사, 즉 어느 나라의 정상급 인물이 되겠지만 덩치가 산만 한 멀끔한 신사가 한 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는데, 그 손에는 자그마한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USB가 들려 있었다.

이렇게 해서 졸지에 한국 대통령의 약혼자를 살해한 범인이 되어버린 강진규.

하지만 진규는 악을 쓰면서 부인했다.

“나, 나는 절대 대통령 약혼자의 살해범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USB는 바로 저놈의 부하가 내게 준 겁니다. 내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기 위해 조작한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명을 한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이 통할 리 없었다. 물증까지 나타났으니까.

“여러분도 다 들었을 겁니다. 저 자의 비열한 변명을. 그러나 진실은 묻어둘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옆에 한국인은 저 세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실 저들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오직 전 세계 정상들만 모인 이곳에 말입니다. 어쩌면 저들은 이곳에 숨어 들어와 또 다른 범죄를 일으키려 했을지도 모르지요.”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각국의 언어로 세 사람의 자객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제 저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저 위의 떠 있는 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복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 여러분의 손에 저들을 맡기겠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각국의 신사숙녀들이 세 사람 가까이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두 손을 불끈 움켜쥔 채.

한 발, 두 발 모두 거친 숨소리와 함께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가는 군중들.

세 사람은 그들을 돌아다보며 멈칫멈칫하면서도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연못 쪽으로. 그렇게 물러나다가 결국 연못 가장자리까지 가고 말았다. 한 발자국만 더 물러나면 연못 돌 축대 바로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물론 연못이야 깊지 않겠지만 그렇다 해도 군중들은 그 속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바로 그때였다.

연못 위에 떠 있던 시신이 뒤집혔다. 얼굴 쪽이 아래를 향한 것이다.

그 바람에 모두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이명학 대통령이었다.

“어, 어, 어……. 이거 왜 이렇게 된 거야……!”

그 순간 약혼자의 시신은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얼굴이 이명학 쪽으로.

그리고 눈을 떴다! 시신이…….

흑인들은 눈자위가 유난이 희게 보인다. 피부가 검기 때문이다. 약혼자의 그 흰자위도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며 또한 눈을 부릅뜬 탓에 더 크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천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말이다.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면서 마치 검은 휘장이 찢겨나가듯 찌이익 하는 소리가 밤하늘 한가득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하늘 꼭대기 한복판에 구멍이 뚫리면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빛. 캄캄한 밤하늘에 검은 빛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정말로 밤보다 더 짙은 검은 빛이 내리비치는 것이었다. 이명학 머리 위로.

그 순간 갑자기 주위 광경이 바뀌었다. 그리고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오페라 극장 중간층 귀빈석에 모두 들어와 서 있는 것이다. 그곳의 공간이 아주 좁아 빽빽하게 선 채로. 그리고 무대에서는 마침 한 여인이 죽어가면서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Fra le tue braccia, amore, l’ultima volta(내 사랑하는 그대여, 마지막으로 그대 품속에 안기고 싶소)…….”

프랑스의 아베 프레보(Abbé Prévost, 본명 Antoine François Prévost(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 1697~1763)의 대하소설 《어느 귀족의 회고록(Les Mémoires d'un homme de qualité)》(1728~32년 집필)의 마지막 제7권에 해당하는 한 비극을 지아코모 푸치니가 각색해서 만든 오페라 《마농 레스코(Manon Lescault)》의 피날레 장면, 즉 미국 동부 해안 뉴올리언스 부근 황무지에서 마농이 데 그리외(Chevalier Des Grieux)의 품에 안겨서 죽어가는 순간이었다.

황량한 대지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무대에서는 마농이 사랑하는 남자 그리외 품에 안겨 죽어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신사숙녀 여러분은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벌린 채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려퍼졌다.

단 한 발.

그리고 한 여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죽은 이는 이층 귀빈석에서 관람하던 메어리 퀸 데스본(Mary Queen Deathborne), 즉 이명학 대통령의 흑인 약혼녀였다. 그로 인해 오페라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한 총알로 인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데스본은 그 이름처럼 퀸(Queen)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성(姓, Deathborne)과 같이 죽을 운명에 처했었던 모양이다. 이 사건으로 한국과 영국은 물론 전 세계가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었다. 게다가 그 뒤 엄청난 인력을 동원한 수사에서도 끝내 범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 메어리에 대한 추모 열기가 대단했으며, 그와 동시에 약혼식을 앞두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한국 대통령 이명학은 큰 슬픔에 빠졌다. 이뿐만 아니다. 아름다운 동화와도 같은 두 사람의 결혼 발표에 전 세계가 환호했던 것 이상으로 그 약혼자의 죽음은 지구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동양과 서양, 흑인과 백인(동양인), 한 국가의 대통령과 대서양 외딴섬 출신의 여인이 결혼한다는 환상 같은 로맨스가 산산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오페라 극장에서 총성이 울리고 난 직후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앞쪽의 무대장치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극장 안이 대혼란에 휩싸여 버렸다. 그런 중에도 극장 뒤쪽에서 내뿜는 강력한 조명 하나가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듯 비추다가 마침 무너진 무대 배경 위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무대 정면 뒤쪽에 설치된 복잡한 기계장치 한 곳을 비추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는 한 사내가 복면을 한 채 숨어서 방금 발사한, 소음기가 달린 저격용 라이플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바로 그때 암살자는 강렬한 빛에 깜짝 놀라 얼굴을 들어올렸는데, 그 순간 눈과 입술 왼편의 흉터가 있는 얼굴 전체가 환히 드러나고 말았다. 암살자는 곧바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그 극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는 국가의 중대한 일 때문에 부득이 그 오페라를 관람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참석하지 못했던 바로 그 이명학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풍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어센션 섬의 장례식장으로. 모든 사람이 일어나서 메어리의 시신이 담긴 관이 나가는 장면을 바라보던 그 장면으로.

그러나 단 한 사람만 그 장면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이명학이었다.




에필로그


이명학 대통령은 오페라 극장 무대 뒤 기계장치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가 떨어진 곳은 바로 광한루 앞 연못 가장자리였다. 게다가 땅에 옆으로 쓰러진 것이 아니라 꼿꼿하게 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머리는 아래, 발은 위쪽. 즉 거꾸로 떨어져서 땅에 깊숙이 박혀 버리고 말았다. 머리가 땅에 박힌 것이다. 몸통과 다리는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선 모습으로. 이렇게 해서 이명학은 오페라 무대 뒤에 숨어서 자신의 약혼자에게 라이플을 쏜 뒤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얼굴을 세계 모든 국가원수들에게 들키자 그만 깜짝 놀라서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명학이 며칠 전 과거에 몰래 오페라 무대 뒤로 들어가 라이플을 쏘았는데, 그로부터 며칠 지난 오늘 그 장면을 들키고 또한 광한루 연못 옆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 며칠 동안 이명학은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거짓 눈물도 흘리고, 자기 수하들을 데리고 다니며 강진규를 괴롭히기도 하고, 또한 그에게 약혼자 암살의 누명을 씌우려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런데도 바로 오늘 이명학이 오페라 극장 무대 뒤에서 아래로 떨어져 광한루 앞의 땅에 거꾸로 처박히고 만 것이다. 게다가 이명학이 죽는 순간 서울 근교 음침한 숲 속의 합명당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지하까지도.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 뒤 어느 날 합명당의 잔해를 치우던 인부 한 사람이 이상한 물건을 하나 주웠는데, 그것은 사람 주먹 크기만 한 정사각형 크리스털이었다. 하지만 그 속 한가운데에 조그만 점 같은 것이 있었으며, 그것의 모양이 수시로 변하며 이상한 빛을 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신비로운 듯했으나, 한 편으로는 어딘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야릇한 빛.

그것을 주운 인부는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 들어 숲 속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 인부는 그날 밤부터 며칠 동안 심한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까지 해대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 뒤 의사들이 여러 모로 진단을 해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어서 그대로 퇴원하게 되었다.

한편 이 엄청난 사건을 겪은 뒤 온 세계는 어느 날부턴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상으로 되돌아가 인간사 다 그렇듯 지지고 볶고 하며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 그럭저럭 살아가게 되었다.

단 한 사람, 병원에서 퇴원한 그 인부만 빼놓고. 그 인부는 집에 돌아간 뒤 갑자기 최고급 컴퓨터를 사서 집 안에 들여놓고 나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모니터만 여러 날 노려보다가 드디어 전원을 켰다. 그리고 아무도 몰래 그 무너져 내린 합명당 근처에 가서 몇 날 며칠 동안 뒤진 끝에 자기가 버렸던 그 크리스털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컴퓨터 앞에 놓고서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크리스털만 노려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서 컴퓨터에 무엇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초보 중의 초보에 지나지 않던 사람이. 그런 뒤 저 남쪽 어딘가로 떠났다고 하는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사족 하나. 이명학의 수족 노릇을 하던 몇몇 사람은 어센션 섬 남쪽의 몇 백 km 떨어진 아주 작은 바위섬으로 순간 이동하여 그곳에서 몇날 며칠 동안은 살아 있었으나, 그 뒤에는 그들의 생사에 대해서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사족 둘. 몇 천 년이 지난 뒤 밝혀진 사실 하나. 계지선이 갇혀 있었던 합명당 지하의 집 현관문에 CD를 끼워놓거나 그곳 숲에서 풀에 매듭을 세 번 묶은 사람은 엉뚱하게도 이명학 대통령이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냥 심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매듭을 다시 풀 때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에 심각한 오류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는 하지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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