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밤나들이
야아옹 야옹야옹 문밖의 새끼냥이
아이고 아가냥아 추운데 어서온나
어데를 쏘다녔기에 요로코롬 디럽냐
어젯밤 옆집냥이 마실겸 오라해서
사알짝 담넘어가 밤토록 놀았는데
아침밥 주지도않고 쫓아내지 뭐예요
(야아옹, 배고파)
1
남대서양 어센션 섬에 각국의 원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며칠 전 한국 이명학 대통령의 흑인 약혼녀가 서울의 한 오페라 홀에서 정체 모를 괴한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마치 신데렐라 동화와 같았던 이명학 대통령과 흑인 혼혈여성의 약혼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결혼이 연이은 아쿠아리움 폭파사건으로 인해 연기된 것으로 인해 세계인의 동정을 사기도 했었다. 이렇게 그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전 세계의 이목을 받으면서 여기저기에서 달콤새콤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며 무르익어가는 듯했다. 그러던 것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처럼 비운의 결말로 끝나고 만 것이다. 그러한 덕에 그 장례식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 이상으로 큰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를 증명이라고 하듯이 거의 모든 전 세계 국가의 정상들이 공식적으로 그 약혼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는 별도로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영연방 국가, 그리고 인도나 홍콩과 같이 한때 영연방에 속했던 국가나 도시에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민들이 조기를 게양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에서는 국장에 버금가는 규모로 장례식을 치른 뒤 곧바로 그녀의 시신이 대통령 전용기에 태워져 그녀의 고향인 어센션 섬으로 운구되어 그곳에서 다시 한번 장례식을 치르고 그 섬에 안치하기로 했으며, 바로 이 장례식에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참석하게 된 것이다.
어센션 섬은 남대서양 한복판 적도 바로 아래인 남위 7도 56분, 서경 14도 22분에 위치하며, 면적은 88제곱킬로미터 정도로서 서울 여의도(2.9제곱킬로미터)의 30배가 조금 넘고, 바둑을 통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컴퓨터를 이긴 이세돌 기사의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에 있는 비금도(45.25제곱킬로미터)의 두 배 조금 안 되는 화산섬이다. 산 중앙에서 조금 동쪽에 솟아 있는 그린(Green) 산은 높이가 859미터이며 600여 년 전에 화산 폭발이 있었던 탓에 섬 전체가 현무암과 화산 잔해물로 덮여 있어서 토양이 척박하다. 반면에 기후가 아열대라서 1년 내내 온화한 편이며, 섬 전체가 잔잔한 수목으로 덮여 있다. 그리고 서쪽 해안에 조지타운(George Town)이라는 도시가 있으며 이 섬의 주민 대다수가 이곳에 살고 있다. 인구는 1,100명 정도.
이렇게 조그만 섬에 세계 각국의 국가수반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섬 전체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인사들이 주민들 수보다 더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각국 언론과 방송국 사람들까지 더해진 탓에 조지타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또한 조지타운 남쪽에 있는 미국과 영국의 공동 항공기지에서는 쉴 새 없이 소형 수송기와 군용기, 헬리콥터 등이 뜨고 내리면서 세계 각국의 귀빈들을 운반했으며, 항구 바깥 먼바다에는 각국에서 온 각종 선박과 군함은 물론 미국의 대서양 주둔 함대전력사령부와 영국 및 프랑스에서 보낸 항공모함, 게다가 여러 척의 초대형 크루즈 선박까지 정박하고 있었다. 게다가 섬 전체는 항공모함에서 뜬 군용기들이 빙빙 돌며 감시하고 있었고, 수중에는 원자력 잠수함들이 잠항하여 근처 해역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대통령을 비롯한 정재계 및 사회문화계 등등 여러 분야의 수많은 조문객이 참석했다. 또한 이 장례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2
강진규가 눈을 떴을 때는 모래밭이었다.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햇살에 등이 따가워 깬 것이다. 진규가 어리어리한 정신으로 더듬더듬 몸을 일으켜 보니 물을 홀랑 뒤집어쓴 상태로 모래밭에 나뒹굴어 있었다. 진규는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발, 발들이 있었다. 구둣발. 그리고 그 위로 검은 양복바지. 하지만 그들 바지는 젖어 있지 않았다. 흐릿한 정신에서도 그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진규 자신은 흠뻑 젖어 있었는데.
아…….
그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진규 자신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물속에 갇혀 있었다. 천장까지 꽉 찬 물. 숨이 턱 밑까지 꽉 찼지만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고 가슴은 부풀대로 부풀어 올랐었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숨을, 그러니까 물을 들이켜는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바로 이곳, 모래밭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일어나라.”
차분한 목소리.
지금 이게 뭐지……?
진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나는 물에 빠져죽은 거잖아. 그런데 왜 안 죽었지? 나를 구조해 주었나? 그런데 여기는 모래밭이잖아. 자갈돌이 많이 섞여 있긴 했지만.
아, 자갈돌…….
자갈, 자갈돌……. 혹시 여기 해안가인가? 바다나 강가 같은 곳……. 내, 내가 해안가로 밀려왔다고……? 물이 가득 찬 방에서 해안가로……?
“일어나라니까!”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 그런데 어딘지 귀에 익다. 내가 아는 사람?
진규는 머리를 퍼뜩 들어올렸다. 그리고 보았다. 세 사람. 남자. 검은 양복.
촌스럽게 늘 검은 양복은…….
한상일 차장, 이석윤 팀장, 그리고 뾰족머리.
아주 세트로 다니는구나, 니네들 셋은.
그때 갑자기 뱃속에서 욱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푸우우우우…….
진규는 뱃속 가득한 물을 토해냈다. 입으로 코로 마구 쏟아져 나온다.
하, 하, 하…….
뱃속이 허할 정도로 물을 토해낸 뒤 진규는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코도 맵고. 그러는 중에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 것인지 문득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물속에 있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안가란 말이야. 그렇다면 나를 구조해서 해변으로 데려와서 눕혔단 말인가? 그 지하에서 이곳 해안까지? 그동안 나는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고? 그런데 왜 지금 물을 토한 거야?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 컴컴한 지하 물속에서 이곳까지 데려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온몸이 젖어 있는 것을 보면 시간상으로는 거의 잠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숲 속의 한옥 지하에서 그렇게 빨리 이 해변까지 데려올 수 있었을까?
그때 문득 시계가 생각났다. 손목시계. 야광.
진규는 물이 천장 가까이까지 찼을 때 머리가 물에 잠기면서 숨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으면서 숨이 터지기 직전에 얼핏 시계를 보았었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그러했겠지만. 그리고 지금 시계를 보니…….
말도 안 돼!
정신을 차리고 물을 토하고 했던 그 시간. 최대한으로 잡아도 1분.
그러나 실은 1분도 안 되었다. 초침을 보니 겨우 30~40초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날짜는 똑같았다.
이럴 수가……?
뭔가 잘못되었다. 크게 잘못되었어. 혹 이놈들이 내 시계를 뒤로 돌려놓은 건가?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왜 굳이 그런 장난을……?
그러나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던 것이다. 어지럽기까지 했고.
진규는 몸을 뒤집어 하늘을 향한 채 드러누웠다. 태양이 하늘 한복판에 떠 있어서 눈부시긴 했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기 머금은 눈썹 사이로 보이는 청명한 하늘. 저 멀리 하늘 꼭대기에 작은 구름조각이 하나 떠 있을 뿐, 시야는 온통 새파란 색 하나다.
진규는 입을 크게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갈비뼈가 오르내리는 느낌.
그때 갑자기 새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이건 또 무슨 징조? 그러나 진규는 그저 멍한 눈길을 하늘 한복판으로 보낼 뿐이었다.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는 텅 빈 머리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좀 괜찮아졌나?”
이번에도 똑같은 목소리. 한상일 차장……? 에이, 설마…….
“이 새끼야, 일어나!”
그때 불쑥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면서 진규의 옆구리를 툭툭 친다.
“좀 놔둬.”
참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이석윤 팀장. 평소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그답게 이놈들한테 붙들리고 나서는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았다.
흑!
갑자기 진규의 옆구리에 극심한 통증이 가해진다. 발로 찬 것이다. 아마도 뾰족머리일 것이다. 녀석의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규는 눈을 꼭 감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숨이 안 쉬어진다. 뾰족머리는 몸에 상처나 멍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도 폭행하는 법을 잘 아는 놈이다. 속으로 골병들고 내장이 망가지겠지만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만드는 것. 놈은 고수 중의 고수다. 아마 적지 않은 수의 사람을 이미 평생 속병신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숫자에 진규도 포함되겠지.
하지만 네 놈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맹세한다. 너 역시 평생 병신 아니면 이 세상 사람 아닌 것으로 만들어줄 테다.
진규는 심호흡을 하며 이를 악물고 통증을 버텼다. 아픈 내색을 하기는 싫었지만 얼굴 전체가 찌그러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저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개……새……끼…….”
그러자 한 번 더 발길질이 가해진다.
진규는 이번에는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거의 실신 수준에 이른 것이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가물거리는 정신 너머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그런 순간에도 진규는 이를 더욱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한 번 더 발길질이 가해지면 그대로 생명이 끝날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 인마…….”
꺼져갈 것 같은 정신 속에서도 이 말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 그래……. 정신……, 차리자……. 정……신……차려야……해…….
진규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정말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통증이 하도 극심해서 자신의 상태도 판단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야, 인마…….”
누군가가 진규의 뺨을 툭툭 친다. 그러더니 어깨를 잡고 일으키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진규는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흐릿하다. 왜 그렇지……? 눈물, 눈물 때문인가? 그럼 지금 나 울고 있는 거야……? 아니지, 우는 건 아니지. 그냥 눈물이 나왔을 뿐일 거야…….
진규는 자신의 상반신이 올려진 것을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뒤에서 진규의 어깨에 손을 집어넣고 일으킨 것이다.
“자식……, 이거 생각보단 약골이네.”
약골…….
이 단어가 진규의 머릿속을 파고든다. 안 돼……. 진규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고 통증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은 조금 뾰족해지는 듯했다.
진규는 두 다리를 뻗은 채 모래밭에 앉았다. 앉혀졌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두 팔은 축 늘어진 채 상반신만 일으켜진 것이다.
누군가가 진규의 뺨을 툭툭 치며 말한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인마.”
눈물이 어려서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한상일 차장이었다.
한 차장은 진규의 두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 한다. 그러다가 아예 진규의 팔을 어깨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훑으며 한 손으론 진규의 아래팔을, 나머지 손으로는 진규의 손을 붙잡는다. 그리고 억지로 잡아당기다가 그만 손을 놓고 말았다.
진규는 두 팔을 아래로 툭 늘어뜨린 채로 주저앉아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사물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 차장 이 새끼가 웬일인지……? 늘 진규를 차갑게만 대하던 놈이 오늘은 웬일인지 말씨가 부드럽다. 별일이군. 내 꼬라지가 이렇게 되니 갑자기 불쌍해졌나? 개새끼.
진규는 머리를 흔들며 눈에 힘을 주었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정신은 좀 나는 것 같았다.
푸후후후……. 정신을 차리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특히 지금 이 순간 정신을 똑바로!
진규는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상일 차장, 이석윤 팀장, 그리고 뾰족머리. 저 새끼는 이름도 없나? 뭐라고 부르지? 그래, 그냥 뾰족머리라고 하자. 병신새끼. 내가 일어나면 넌 이제 죽었다…….
진규는 다시 한번 머리를 천천히 흔든 다음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윗몸을 곧추세웠다. 극심했던 통증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진규는 다시 머리를 살짝 흔든 다음 두 팔을 뒤로 돌려서 바닥을 짚으며 힘을 주었다.
아주 느릿느릿 일어난 진규는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푸른색 체크무늬가 들어가 있는 손수건. 그러나 물에 잔뜩 젖어 있어서 잘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억지로 손을 깊숙이 밀어넣어 손수건을 빼냈다. 조심조심해 가며. 하지만 물에 젖은 손수건을 무엇에 쓰겠는가? 얼굴이나 손을 닦을 수도 없을 테고, 코를 풀 일도 없을 텐데. 하지만 진규는 그 젖은 손수건을 툭툭 턴 뒤 활짝 펴서는 자신의 왼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에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통증으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에 의도적으로 익살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쓰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젖은 손수건을 얹어놓은 채. 그러나 물기로 인해 손에 감기기도 하고 축 처지기도 했다. 그런 손수건을 진규는 심각한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앞에 있는 세 사람에게 손을 쑥 내밀었다. 잘 보라는 뜻 같았다. 마술사들이 능청맞은 표정으로 관객들 앞으로 손을 내밀 듯이. 그런 다음 진규는 왼손을 코끝으로 가져가서 기름을 바르는 시늉을 하더니 물기 묻은 둘째손가락을 들어서 다시 앞으로 내민다. 그러는 동안 진규는 통증과 익살이 섞인 표정으로 앞에 늘어선 세 관객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들은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자 진규는 왼손 검지를 손수건 위쪽을 가져가서 빙글빙글 돌리는 것이었다.
그때 뾰족머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앞으로 나선다. 마치 발로 걷어찰 듯한 기세로. 그러자 이 팀장이 손으로 가로막는다. 씩씩거리는 뾰족머리의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진규는 억지미소를 지으며 왼손 엄지와 셋째손가락을 탁 퉁기며 (그러나 손이 물에 젖어 있어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갑자기 손수건 한복판을 집어들고 확 들어올렸다.
그러자 진규의 손바닥에 나타난 조그만 조약돌 하나.
짜잔∼! 하듯이 진규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감돈다.
“이 새끼……!”
그때 뾰족머리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와서 한 발을 진규의 가슴을 향해 냅다 날렸다.
우욱!
또다시 쓰러지는 진규.
강진규는 어떤 통나무집에 갇혔다.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송송 들어오고 바닷바람 숭숭 들어오는, 막 지어진 집. 그러고 보니 이곳은 분명 해안가였다. 귀신 곡하게도.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다. 이 책의 작가도 알고, 주요 등장인물들도 알고 독자들도 다 아는 사실을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진규만 모른다는 사실. 그러나 작가 외에는 아무도 그 결말을 모른다는 사실에 조금 위안이 될는지 모르겠다. 이미 짐작하시는 분들만 빼놓고. 어차피 소설이나 영화나 그 피날레는 거의 다 비슷비슷하게 장식되니까. 아닐지도 모르지만. (^^) ㅋㅋㅋ)
햇볕이 뜨거운 것을 보니 적어도 북한을 비롯한 북쪽 지방은 아니었다. 오히려 해가 하늘 한복판을 지나가는 것을 보니 여름철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모순된 사실이다. 진규가 이놈들에게 잡힌 것은 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새 몇 달이 훌쩍 지나갔다는 것인데 시계랑 옷이 젖은 것이랑 모든 것이 맞지 않는다. 하긴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깟 시간이나 계절이 무슨 상관이냐.
진규는 그러나 의외로 마음이 편했다. 국정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언젠가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을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것도 운이 없으면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죽게 되겠지. 그러나 어쩌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데.
그런데 의아한 게 두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 왜 진규를 이곳에 데려왔을까? 게다가 이 판잣집은 힘껏 밀어붙이면 쓰러져 나갈 것처럼 엉성한 것이었다. 비록 밖에서 빗장을 지르거나 자물쇠로 잠가놓았겠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설렁설렁 지어진 집이었기 때문이다.
이 집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죄다 허술하다. 진규가 합명당 지하에 들어갔다가 전혀 낯선 숲 속에 갇혀 있을 때도 주변에는 감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집에도 잠금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진규는 그러한 것들이 찜찜하기는 했어도 감옥보다는 낫다고 안도했었다. 그리고 집 밖에 나가 여기저기 다녀보았으나 아무리 멀리 나가도 결국 자신이 갇혔던 집으로 다시 돌아오곤 한 것을 보고 무슨 수작을 벌였는지는 모르지만 저놈들이 보통이 아닌 것은 짐작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더 찜찜한 것은 진규를 아직도 살려두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일까? 진규는 이제 합명당이 어떤 곳인지, 대통령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진규를 살려두지는 않을 텐데, 도무지 놈들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단 말이다.
진규를 살려둔다?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된 적을? 그리고 일부러 허술한 판잣집에다 가둬둔단 말이지……?
그래서……,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얌전히 갇혀 있으라는 거야? 아니면 알아서 잘 탈출하라는 거야? 만일 그냥 얌전히 이곳에 주저앉아 있는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또한 반대로 이곳에서 탈출한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 이것이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USB. 그리고 쇼타임.
한 차장이 진규의 손을 잡고 일으킬 때, 그 손에는 어떤 물건이 있었다. 아주 작은 것. 그것을 슬쩍 건네준 것이다. 물에 잔뜩 젖은 진규의 손에. 그래서 진규는 그것을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넣으려고 은근한 수작을 부렸던 것이다. 젖은 손수건 꺼내는 척하면서 뒷주머니 속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 손수건으로 어설픈 마술을 부리면서 놈들의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아주 초급 마술이다. 바닥에서 일어나기 위해 손을 바닥에 댔을 때 미리 조약돌 하나를 집어두었으니까.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USB는 비닐에 꼭꼭 싸여 있어서 물에는 조금도 젖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의미는 또 무엇일까? 왜 그것을 준 것이지? 아니, 그보다는 한 차장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지금까지 저놈들하고 같이 붙어먹고는 인제 와서 배신하려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리고 그 USB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지금 컴퓨터가 없기에 아무리 많은, 그리고 아무리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어도 진규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 게다가 그런 짓을 들켰다간 목숨이 날아갈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진규에게 USB를 건넸다는 것은 그 속에 엄청난 정보가 담겨 있다는 뜻일 테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고도 긴급한 것. 그리고 그 순간이 아니면 그 USB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 즉 그 USB를 전달할 시간은 그 순간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그것은 한 차장이 다시는 진규를 만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게다가 어쩌면 진규가 그 USB를 어떤 식으로든 외부로 나가게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도 포함된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면 위험천만한 그런 짓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이 맞는 것이겠지……?
그런데 왜 한 차장이……? 그래, 이제는 저놈들한테 신물이 난 건가? 하긴 제 놈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자기 자신이 일이 부끄러워졌겠지. 무슨 사연이 있기에 녀석들한테 끌려다니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늘 그것을 후회하고 빠져나갈 방법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도 놈들이 꾸미는 짓을 막으려 할지도 모른다. 틀림없다.
그래, 좋아……. 어떻게 해서는 여기를 빠져나가 그 USB를 폭로해야 한다. 이것은 한두 사람의 목숨 이상으로 중대한 일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아쿠아리움 폭파사건을 비롯한 어마어마한 음모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이 맞을 거다.
진규의 머릿속이 뾰족해졌다. 송곳처럼 날카로워진 것이다. 그 송곳이 두개골을 뚫고 나갈 것만 같았다.
진규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발로 힘껏 나무문을 걷어찼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대로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아이쿠…….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면서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고 진규가 밖으로 나가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거짓말처럼 진규 혼자만 남은 것이다. 혹 미심쩍어 판잣집 주변을 샅샅이 훑었지만 역시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 놈들하고 이 판잣집으로 올 때 둘러보았던 주위 광경들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딘지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마치 열대지방에 온 듯한 느낌. 그러나 눈부시게 맑은 하늘 한복판에 떠 있는 강렬한 태양에 비하면 그리 덥지는 않았다. 기온은 무척 올라가 있는 것 같은데 습기는 많지 않아 마치 지중해성 기후 비슷했던 것이다. 진규는 해외활동을 많이 한 덕에 전 세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해 본 끝에 이곳이 한국은 절대 아니고, 혹 열대지방, 어쩌면 남반구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후가 온화한 것을 보면 태평양보다는 대서양 쪽이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주변의 나무나 식물 등을 포함하여 여러 환경을 세밀히 살펴보고 난 뒤 직감까지 더해서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진규는 자신의 결론을 부정했다. 이성적인 면에서 볼 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직감은 달랐다. 즉 자신은 지금, 저놈들이 어떤 조화를 부렸는지는 모르지만 100퍼센트 확실하게 남반구, 즉 적도 아래쪽에 와 있는 것이다.
진규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는 뜻으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또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여기에서 끝. 그 대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새파랗게 드높고, 공기는 맑디맑고, 기온은 좀 높은 것 같은데 땀 한 방울 안 나고, 청량감 느껴지는 공기 냄새에 머릿속까지 맑아지고, 짙푸른 수목에 둘러싸여 낙원과 같은 사방 환경. 이쯤 되면 이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요 파라다이스다. 그런데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작은 섬 같은 느낌) 사람 그림자는커녕 (그런 것이 있다면) 사람 냄새도 나지 않는 무인도 같은 예감.
진규는 사방을 돌아다녔다. 합명당 지하에 갇혔다가 전혀 새로운 숲 속 세계를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섬 역시 그와 비슷한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지난번 갇혔던 숲 속과는 달리 이곳에는 광활한 하늘과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야 어떻든 진규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았다. 그리고 섬 뒤쪽에 가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이곳이 정말로 섬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마치 무인도와 같은 섬. 또한 바다 저 멀리에 꽤 큰 섬이 보였다는 것. 그 산 오른쪽, 아마도 동쪽일 텐데 그곳에는 그리 높지 않은 섬이 솟아 있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섬 주변에 큰 배들이 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청나게 큰 배들. 즉 (멀리에서 아련히 보이긴 했지만 틀림없는) 항공모함이나 군함, 크루즈 선박, 기타 등등. 게다가 그 항공모함에서는 쉴 새 없이 비행기, 즉 전투기나 헬리콥터 등이 뜨고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비행기 소음들도 비로소 들려오고 있었다. 이 섬 저쪽에서는 새소리 파도소리 외에는 거의 들려오는 것이 없이 적막함만이 펼쳐져 있었는데, 반대편으로 돌아들자마자 세상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마치 전쟁 한복판 같은 소란한 광경. 혹 상륙작전이라도 펼쳐지는 것인지도……. 단지 폭탄 터지는 소리만 없을 뿐 그것은 바로 전쟁영화 장면이었다.
3
계지선과 추설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말도 서로 트기로 했고. 나이는 설희가 일곱 살 많았지만 집명당 지하에 들어온 이후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그런지 두 사람은 거의 동갑으로 보였다.
“언니, 그럼 여기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는 거야?”
“모르겠어. 말도 못 하게 많이 탈출하려고 해보았지만 방법이 없었어. 여기 숲 속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다른 데로 가는 길이 없는 거야. 늘 똑같은 장소로 되돌아가기만 하고. 게다가 이번에는 내가 살던 집도 없어져 버렸어. 지금은 이 집 밖에 없는 거야.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우리 둘 다 여기 가둬놓고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고…….”
“근데……, 언니 집에 그 악당 말고 다른 사람은 안 왔어?”
“아무도 안 왔어. 정말 아무도…….”
“그럼 5년 동안 어떻게 살았어? 끔찍했을 텐데.”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어떤 때는 그 자식이 찾아오는 게 오히려 반갑기도 하더라니까.”
두 사람은 하루밖에 함께 있지 않았는데도 서로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내온 일들을.
“여기에서 나갈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
“혹시 그 자식 요구를 들어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안 돼! 그건 정말 싫어.”
“답답해…….”
“우리 이러고만 있지 말고 한 번 더 밖에 나가서 살펴보자. 내가 여기 올 때 평소보다 좀 이상한 것을 느끼고 표시해 놓은 게 있거든. 일단 거기까지 가서 혹시 단서가 될 만한 거라도 있는지…….”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숲 속으로 들어가서 추설희가 표시해 놓은 곳까지 갔다. 처음에는 좀 헤매긴 했지만 기억을 잘 더듬어서 찾을 수 있었다.
“아까 여기까지 왔을 때 갑자기 낯선 느낌이 드는 거야. 자주 다닌 길이었는데.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지도 꺾어놓고, 풀도 매듭을 지어놓기 시작했어. 저기 저쪽으로 계속 가면 그렇게 해놓은 표시들이 주욱 나올 거야. 나중에 돌아갈 때 알아보기 쉽게 하려고 그런 거였거든. 그런데 이 길이 너희 집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
“매듭지어 놓은 거 정말 잘했네, 언니. 나도 배워둬야겠다.”
계지선은 눈을 반짝이며 설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설희가 만들어놓은 표시를 따라 계속 나아갔다.
“아, 여기가 내가 처음 표시해 놓은 곳이다. 바로 이거.”
설희가 자신이 부러뜨려 놓은 나뭇가지를 보며 말했다. 그 말대로 가는 가지 하나가 반쯤 부러진 채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매듭도 봐. 혹시나 해서 더 표시해 놓은 거야.”
설희가 가리킨 곳을 보니 길쭉하게 뻗어 있는 잡풀 몇 개를 한꺼번에 엮어 매듭을 지어놓았다.
“정말 잘했네, 언니. 그럼 여기 올 때까지는 낯설지 않았던 거네?”
“아냐,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걸어오다가 여기에서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아 표시를 해놓은 거야. 좀더 가보면 내가 처음으로 이상하다고 느낀 곳도 나올 거야.”
설희가 앞장서고 지선은 뒤따르면서 계속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0여 분 걸었을 때 설희가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바로 이쯤이야. 여기서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
“그럼 더 앞으로 가봐. 그곳은 어떤 덴지 궁금하네.”
두 사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조금 걸어가다가 이번에는 지선이 발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어, 여기는 내가 늘 다니던 길인데?”
“뭐……?”
“여기 이 길, 아까 왔던 곳이잖아.”
지선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여기가 어디라고?”
“아까 우리가 왔던 길.”
그 말에 설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정말 그러네. 아까 왔었던 길이야.”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어이없어했다.
“일단 계속 가보자. 너희 집이 정말 나오는지.”
자신들이 무엇엔가 홀렸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걸어가면 갈수록 점차 눈에 익은 길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섰다.
“저 앞에 보이는 집, 너희 집 맞지?”
지선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놀란 것이다. 물론 그전에도 숲길을 아무리 다른 방향으로 걸어도 늘 자신의 집으로 향했었기에 이번에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이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은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설희가 익숙하게 여기고 걸어온 길이 지선이 걸었던 길과 똑같았다니……. 그럼 두 사람은 같은 길을 다녔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설희의 집은 나오지 않은 거지? 말도 안 된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돌아섰다. 그리고 서로 말도 하지 않고서 오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길로 다시 가면 어떻게 될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시 걸어가니 아까 설희가 표시해 놓은 곳이 나왔다. 그것을 확인한 뒤 다시 앞으로 걸어가니 역시 아까 보았던 표시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선의 집이 나타난 것이다.
설희와 지선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우리가 무엇엔가 홀린 거지……? 이 말 맞지……?
하지만 설희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 좋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
이 말에 따라 두 사람은 다시 돌아서서 오던 길을 거슬러 갔다. 이렇게 두 번 더 그 숲길을 왕복하고 나서 지선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설희의 집은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 뒤 두 사람은 거의 말이 없이 깊은 생각에 빠졌다. 사실은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생각이나 상상의 한계를 넘어선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SF 소설이나 영화처럼.
그러다가 지선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라 고개를 돌려서 설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하려니 어딘지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몰라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나도 네 생각을 알아.” 그러자 설희가 살짝 미소 지으며 입을 연다. “그 매듭, 표시 말이야…….”
“아…….” 지선은 입을 살짝 벌리며 신음 같은 감탄사가 나왔다.
“아무래도 그 매듭이 이상해. 다른 것은 다 바뀌었는데, 왜 나뭇가지 꺾어놓은 것하고 풀을 매듭지어 놓은 것만은 그대로 있을까?”
“실은 나도 그 생각을 했어. 그런데 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인가 뭔가 하는 것이 완벽하지 않아서 오류가 가끔 발생한다고 언니가 말하지 않았어?”
지선이 눈에 빛을 내면서 설희를 쳐다보았다. 설희는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그리고는 또다시 두 사람은 침묵했다.
“혹시…….” 지선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 매듭 말이야……, 다시 한번 가서 볼 수 있을까?”
설희가 조금은 멍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짐작이 가는 것이 있어서…….”
설희가 궁금한 눈길을 보냈지만 지선은 그것을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지 자신 없는 모습을 하고서. 하지만 설희는 아무 말 없이 지선을 따라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마음으로는 조급하게, 그러나 겉으로는 천천히 걸었다. 특히 지선은 무엇인가 잡힐 듯, 하지만 곧 사라지는 어떤 이미지,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뭐라고 할까……, 어떤……, 그 어떤……, 관념(?), 개념(?) 같은 것에 생각이 꽂혀 있었는데, 실은 자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고 있어서 답답하기도 했고, 약간은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상태로 두 사람은 매듭을 지은 풀 있는 곳까지 갔다.
지선은 매듭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설희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매듭 모두 언니가 묶은 거야?”
지선은 무슨 뜨악한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렇다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매듭이 왜 어때서?”
“음……. 그러니까……, 언니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묶은 것은 아니지?”
뭔 말이래? 설희의 얼굴은 그런 표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뭐가 잘못됐니……?”
“그게 아니고……, 이 매듭이 모두 세 번 묶여 있잖아. 전부 다. 언니가 죄다 이렇게 한 거야?”
“…….”
설희는 매듭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의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지선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상하네. 난 이렇게 묶지 않았어. 그냥 대강 묶었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데 왜 모두 세 번 묶여 있지?” 설희는 매듭과 지선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자신 없는 투로 말을 했다. “난……, 사실 한 번밖에 안 묶은 것 같은데……. 일부러 세 번씩 묶을 이유가 없잖아.” 설희는 고개를 갸웃한다.
“다시 잘 생각해 봐, 언니.”
“내가 모두 다 일부러 세 번 묶었을 리는 없는데. 혹시……. 다른 사람이 와서 다시 묶은 건 아닐까?”
“누가?”
“글쎄…….”
“사실 그러잖아도 아까 내가 다시 와서 봤을 때 사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어. 내가 정확히 기억하진 못해도 일부러 세 번씩 묶지는 않았을 거거든. 그런데 세 번 묶여 있기에 이상하긴 했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 버렸었어.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정말 이상하네. 내 기억엔 틀림없이 한 번밖에 안 묶었던 같은데. 정말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됐지?”
“여기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는 건 아닐까?”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본능처럼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얼굴은 창백해진 채.
한참 동안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살피다가 설희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모니터 같은 것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이 말에 따라 두 사람은 나무 같은 곳에 카메라가 숨겨져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샅샅이 살펴봐도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그런 느낌이 들자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다.
이것들이 숙녀들을 몰래 엿보고 있었다고……?
갑자기 부아가 치민 설희가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들아, 이 치사한 놈들아, 이리 나와 봐! 비겁하게 숨어서 엿보기나 하지 말고 이리 나오란 말야, 이 병신들아!”
그러나 아무리 소리소리 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럴 테지. 소리 지른다고 나 여기 있소 하고 나타날 인간들이 아니니까.
두 사람은 맥이 빠져 허탈한 채 마주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설희가 웃는 것이었다. 깔깔거리는 웃음이 아니라 세상 통달한 노인의 웃음. 뭐 그런 웃음이 있다면 말이다.
설희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웃고 난 뒤 또 다른 통달도사라도 된 듯이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보니 이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 수도 있어.” 설희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이 매듭은 우리한테 자신들의 존재를 알려주려는 표시인지도 몰라. 어떤 암시 같은 거 말이야.” 설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도와주려는 거야. 아무도 몰래. 분명해.”
이렇게 말하는 설희의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설희의 말에는 확신이 들어 있었다.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절대 확신. 마치 증거라고 갖고 있는 것처럼.
“사실 이런 느낌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야. 그동안 몇 번인가 좀 이상한 일이 있었어.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넘어갔는데, 비슷한 일이 몇 번 일어나니까 좀 이상하다고 생각됐었거든.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붙잡혀 오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였을 거야. 한 번은 현관문 밖에 내놓은 화분에 누가 물을 주었더라고. 처음에는 내가 준 것인가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며칠 동안 몸살을 몹시 앓아 밖에 나가지도 않았던 거야. 그래서 처음에는 저놈들이 나보다 화분을 더 아끼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었지.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누군가가 현관문 틈에 CD를 하나 껴놓고 간 거야.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d.821 2악장이 들어 있는 것을. 그 곡은 슈베르트가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작곡한 것인데, 남들이 연주한 것을 들을 때보다 내가 직접 연주할 때 더 가슴이 저리기도 했고, 또 내가 힘들 때마다 힘을 실어주기도 했었어. 그런데 사실 나는 내가 그 곡을 좋아한다는 것을 누구에게 말해 본 적이 없거든. 단지 한국으로 전향하고 나서 뮌헨에 있을 때, 그러니까 내 위장 장례식 바로 직전에 어쩌면 더 이상 그 곡을 듣지도 쳐보지도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당시 한국에서 온 어떤 요원에게 마지막으로 그 곡을 한번 연주해 보고 싶다고 했더니 내 장례식 바로 전날 밤, 그 장례식을 치른 바로 그 교회에 데리고 가서 연주하게 해주었었어. 교회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서. 반주는 없이 나 혼자 독주만 한 것인데, 그때 얼마나 내 마음이 처량했었는지 몰라. 아, 지금도 그때 마지막으로 잡았던 첼로가 내 촉감에 남아 있는 것 같아……. 난 바이올린이 전공이지만, 첼로와 비올라도 부전공으로 했는데, 사실 둘 다 좀 친다고 자부할 정도야. 이 곡 말고도 좋아하는 곡이 또 있기는 있었지.”
설희의 눈가가 약간 붉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설희는 눈을 한번 꿈뻑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그 30분도 안 되는 연주 동안 신기하게도 그 곡의 음 하나하나가 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어. 그 곡을 연주해 본 지 한참 되었는데도 막상 활을 당기기 시작하니까 마치 녹음기처럼 그냥 흘러나오는 거야. 나는 정말 그 순간처럼 곡에 취해서 연주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런데 바로 그 곡이 들어 있는 CD를 놓고 간 거란 말이야.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설렜었는지 몰라. 그 CD를 닳고 닳을 정도로 들었는데, 그나마 이제 내가 살던 집이 없어져 버려서 다시는 들을 수도 없게 되어버렸네. 그 곡은 슈베르트 작품이야. Arpeggione Sonata - Mischa Maisky, Gábor Takács-Nagy, Weinberger. 그 유명한 바인베르거 챔버 오케스트라(Weinberger Chamber Orchestra) 연주인데. 저놈들이 내가 살던 집에 피아노나 첼로, 하다못해 기타라도 하나 갖다놓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나 기타도 아주 잘 치거든.”
아르페지오네는 현재는 없어진 현악기로, 현대의 기타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이 곡은 원래 아르페지오네를 위해 작곡되었으나 지금은 주로 첼로나 비올라로 연주한다. 물론 설희는 바이올린으로 이 곡으로 연주하여 평양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3위를 하여 노동당 간부의 눈에 들었지만, 엉뚱하게도 그로 인해 대남 첩보요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설희는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의 한 소절을 콧소리로 내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니, 감으려 하다가 오히려 번쩍 뜨고 말았다.
“내가 그 곡으로 상을 탔어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터널로 들어갔으니까. 첩보의 세계를 우리는 터널이라고 불러. 외부에는 철저히 신분을 감춰야 하니까. 나한테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연주자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직업이잖아. 공개된 장소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려 하는 거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어.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내 신분, 내 모습, 심지어 내 존재 자체를 숨겨야 하는 신분이 되었단 말야. 그것만이 아니었어. 나는 죽은 사람으로 위장해서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일까지 생긴 거야. 그렇게 해서 이 요상한 세계에 들어와 5년을 지냈어. 그동안 단 한 번도 외부세계와 연결된 적이 없었어. 만나는 사람도 늘 그 나쁜 놈 하나였고. 그놈 말고는 지선이 네가 5년 만에 만난 첫 외부인이야.”
설희의 눈가가 약간 붉어지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눈꼬리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설희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놈들한테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복수해야 돼. 그리고 어쩌면 이 매듭이 좋은 징조가 될지도 몰라.”
4
강진규는 그 작은 섬을 샅샅이 뒤졌다. 섬의 크기는……, 어떻게 말할까……, 축구장 열 개 크기 정도 되려나. 그러니까 섬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무인도라고 부르는 게 알맞을 것 같았다. 나무 하나 없이 바위로만 되어 있으면 거대한 암초라고도 할 만하겠지만. 아, 아니지. 암초(暗礁)는 어두울 암(暗)에다가 물에 잠긴 바위 초(礁)니까 그 단어는 맞지 않는다. 그냥 무인도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높이 역시 50미터도 되지 않을 듯해 무인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지금 현재 상태로는 진규가 들어와 있으니 유인도, 일시적 유인도가 되겠지.
진규는 섬 꼭대기에 올라가 저 멀리 소란한 유인도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항공모함까지 동원되어 저 난리일까? 전쟁이라도 난 건가? 그러나 폭탄연기나 그런 것이 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전쟁은 아닐 듯하다. 그럼 훈련? 상륙훈련? 그렇지만 크루즈 선박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니다. 그럼 뭐야? 저 멀리 북새통이나 감상하라고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
진규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진규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합명당 지하의 숲이나 지금 이곳 섬, 또한 저 멀리의 어지러운 광경 모두. SF 영화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시추에이션인지.
진규는 머리를 흔들며 천천히 섬 꼭대기로 올라갔다. 비탈이 심하지 않아서 힘들지는 않았다. 길이 정상적으로 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국적인 나무숲 사이로 적당히 거친, 그리고 알맞은 등산로 같은 숲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진규는 그 길을 올라가는 데도 꽤 힘이 들었다. 체력이 갑자기 떨어진 느낌이다. 하긴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골방이나 웬 지하정원에도 갇혀 보고 급기야는 뾰족머리에게 실컷 얻어터지는 등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고행(?)을 겪었으니 몸이 온전할 리 없겠지.
진규가 이러한 생각에 잠긴 채 숨을 몰아쉬며 야트막한 섬 꼭대기에 오르자 온 천지가 발아래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런 풍경에 감탄할 상황이 아니었다. 진규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산 정상은 평평한 기다란 타원형 운동장처럼 되어 있었는데 땅에는 잔디를 깔아놓은 듯 얕게 자란 잔디로 덮여 있었고, 저쪽 한 끝에는 어처구니없게도 낮은 폭포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폭포 같지는 않았다. 높이가 10여 미터 되는 바위들이 가지런히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폭포 앞에는 마치 그리스식 대리석 기둥 같은 것이 여러 개가 솟아 있고, 그 위로 또한 대리석 장식이 올려져 있었는데, 어딘지 고대 그리스의 제단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제단 양옆에는 고대 그리스 여신 같은 입상이 횃불을 든 채 하나씩 서 있었다. 그 앞으로는 역시 대리석 바닥에 제단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만든 지 얼마 안 되는 듯 깔끔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주 잘 다듬어진 잔디밭.
하…….
진규는 무인도 꼭대기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긴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 역시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지만.
진규는 제단 쪽을 걸어가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제단이나 잔디밭은 그렇다 쳐도 저 폭포는 어떻게 된 거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어디에서 솟아난 것일까? 그리고 어디로 흘러가는 것이지? 진규는 이 섬 주위를 둘러볼 때 강은커녕 시내도 보지 못했다. 그저 도랑 같은 것이 몇몇 군데 있어서 물이 졸졸 흐를 뿐이었다. 그런데 저 폭포에서 쏟아져 내린 물들은 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 그보다 먼저……, 저 물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지? 폭포 그 위쪽은 가(이)없이 높고 높은 새파란 하늘이다. 그렇다면 인공폭포? 설사 그렇더라도 이 섬에 저런 시설을 어떻게 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제단은 무슨 뜻이지? 무슨 의식을 위한 제단인가?
혹 희생제단? 그러면 제물은? 제단 양 끝에는 대리석으로 된 황소가 하나씩 놓여 있었는데, 저들을 잡아 제물을 삼으려 한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이긴 하지만, 상황이 하도 요상해서 그런지 그렇게 한다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글쎄……, 제단이 있으면 정말로 제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지금 이 섬에 제물로 삼을 만한 것이 있을까? 진규 빼놓고.
안 돼! 왜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제물과 진규를 연결한 것이지? 말도 안 돼!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놈들이 아무리 잔인해도 그렇지. 설마 21세기 최첨단 문명의 시기에 사람을, 그것도 진규를……. 아이고,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말도 안 돼!
그런데 저것들이 하도 숭한 놈들이라서 뭔 짓을 할지 모른다 말야. 그래도 그렇지, 디지털 시대요 인권을 최우선시하는 이 시대에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고……. 정말 그랬다간 저 멀리에 떠 있는 항공모함에서 당장 전투기가 날아와 기관총으로 그냥 드르르르르르…….
하지만 진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자신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랴 하는 생각 한구석에는 고개를 젓고 싶은 장면이 슬쩍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하면서도 진규는 그 풀밭을 마치 지뢰밭을 걷듯이 꼼꼼하게 살피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수상한 곳은 아무 데도 없는 듯했다. 적어도 풀밭은 정상적으로 보인 것이다. 뒤이어 그리스식 제단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살폈지만 그 역시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폭포는 겉보기로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폭포 절벽 뒤는 말 그대로 절벽이어서 한 20미터 아래까지 깎아지른 바위로 되어 있었다. 그 아래는 그냥 풀밭. 진규로서는 그 아래로 내려가 조사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마 하늘에서 절벽이 뚝 떨어져 푹 박힌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그 정체를 알 재간이 없을 듯했던 것이다. 어떻든 절벽은 절벽이다. 땅 속에서 저절로 솟아났든, 누군가가 하늘에서 떨어뜨렸든, 아니면 수많은 돌조각을 가져다 기막히게 조립해서 만들었든 지금으로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작은 섬 꼭대기에 왜 이런 시설을 해놓았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이 섬 전체에 인간이라곤 진규 하나밖에 없을 듯한데, 이런 거창한 시설이 왜 필요한 것일까? 무슨 의도일까?
5
추설희와 계지선은 풀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혹여 풀이 아플까 봐 조심조심해 가며. 그렇게 몇몇 풀의 매듭을 풀어가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환경. 주변 환경. 즉 두 사람 주변의 색이 어딘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주변의 색이라……. 그래, 맞다. 주변 환경의 색, 초록 풀잎이나 나뭇잎, 검푸른 풀줄기들의 색이 다소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정말이다. 색이 엷어진 것이다. 어딘지 숲 전체에 안개가 끼어 가고 있는 듯이.
설희와 지선은 동시에 그런 것을 느낀 것처럼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말없이 서로 마주 바라보고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맞다. 두 사람 주변의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색이 옅어져 가고 있었다. 마치 깊은 숲 속의 어둑새벽 때 아스라이 안개가 피어올라 주변으로 퍼져가듯이 그렇게 사방이 차츰차츰 희미해져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벽안개와는 달랐다. 약간 매캐한 듯한 안개 냄새도 없었거니와 주변 풀잎에는 이슬조차 맺히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공기 그 자체는 색깔이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사물, 즉 풀이나 나무, 나뭇잎, 그리고 여기저기 부끄러이 피어 있는 이름 모를 잡꽃들 색만 옅어져 가는 것이었다.
이게 웬일이래……?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서로를 쳐다보고는 머리 위쪽에 물음표를 가득 띄웠다. 두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좀 전까지 숲 속을 뒤지던 그 모습과 그 색깔 그대로였다. 마치 주요 대상만 빼놓고 나머지 배경화면을 블러리, 즉 흐릿하니 처리하듯 그런 상태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 좋은 징조인가, 아니면 나쁜 징조, 즉 또 다른 변화인가……?
두 사람은 한편으로는 불안했지만, 이러하든 저러하든 이렇게 숨 막히는 공간 속에 갇힌 것보다는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설희는 5년 동안 늘 똑같은 장면만 보고 살아와서 사실 이제는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에 와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숲 환경이 바뀌며 지선의 집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변화가 있는 게 오히려 낫겠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의 끝은 어디인가……? 사실 그것도 마음 졸이며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어떻든 주변은 계속 흐릿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치 안개 속으로 들어가듯 서서히 페이드아웃(fade-out)되어 가는 것이다.
반면에 지선은 불안했다. 무섭기까지 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런 현상을 자신이 직접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런데 이런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영화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SF 소설도 아니고, 누가 지어낸 이야기도 아닌, 정말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이런 일들.
이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주변 환경은 점점 더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설희와 지선도 함께 사라지지 않은 것이 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더, 점점점 더욱더 주위의 모든 풀과 나무들은 지우개로 문지르듯 지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칠판에 그린 낙서들을 누군가가 쓱싹쓱싹 문질러 지우듯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 어? 어어? 어어어……?
그리고 주변 광경이 거의 지워지고 있을 무렵, 이번에는 어딘지 다시 밝아지는 듯한, 그러니까 주변 환경이 다소 명료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하……, 골치 아파. 이건 뭐 SF나 환상소설도 아니고, 정말 이런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 거지?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좀 전의 그 숲은 보이지 않고 다른 느낌이 드는 장면이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닥 역시 아까와 달리 잔잔한 풀들로 덮여가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주변의 모습. 어딘지 허공 같은 느낌. 푸르름. 좀 전의 풀과 나무들의 싱그러운 푸르름이 아니라 마치 새파란 하늘이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사방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 허공. 저 머리 위로는 새파란 창공. 전후좌우 사방은 탁 트인 공간.
설희와 지선은 탁 트인 어떤 공간에 우뚝 서게 되고 말았다. 주위 사방과 머리 위가 한없이 펼쳐진 푸르른 창공 아래의 새파란 풀밭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기묘하게도 그 풀밭 한쪽에서 어떤 사람이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