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 존재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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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규는 오지게 얻어맞았다. 뾰족머리에게. 그놈은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지 송곳을 들고 진규의 눈을 찌르는 시늉도 하고 펜치로 이빨을 뽑는 시늉도 했다. 여차하면 정말로 그럴 태세였다.
끔찍할 정도로 진규를 괴롭히던 뾰족머리가 나가자 좁은 방은 진규의 신음으로 가득 찼다. 그곳은 원래 진규가 갇혔던 감옥이 아니라 어느 건물 지하에 있는 소모품 창고였다. 그곳에는 소소한 사무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아마도 대통령 일당이 비밀리에 관리하는 건물 같았다.
진규가 시멘트 바닥에 누워 신음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몇몇 건장한 사람들이 걸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
눈 감고 천장을 향해 드러누워 있는 진규는 누가 들어오든 이제는 관심도 없다. 이 소설이 끝나 봐야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직 욱신욱신 쑤시는 온 몸뚱이, 그거 하나만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이대로 죽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그래도 살아남아야 하는 건지……. 하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살아날 가망은 없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모진 고문과 폭행에 시달리다가 이 세상 하직하고 말 것 같은 느낌이다. 이 글의 작가가 의도하는 바와는 전혀 달리 그냥 중도 하차하고 마는 것은 아닐지. ‘강진규는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는 문장 하나로 끝나면서.
누군가가 구둣발로 진규의 옆구리를 툭툭 찼다.
맘대로 해라. 죽이든지 말든지. 이젠 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냥 편히 죽여 달라.
“야, 그만 엄살떨고 일어나.”
니가 보기엔 이게 엄살 같냐?
“맞잖아, 엄살.”
? ? ?
진규가 실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그 뾰족머리가 다시 와서 자신을 툭툭 건드린 것이었다.
이 새끼가 또 왔네.
“니 새끼 아니거든.”
아이고…….
“아이고건 저이고건 얼른 일어나, 이 자식아!”
진규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뜻밖에도 한상일 차장과 이석윤 팀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진규야, 미안하게 됐다. 이제 일어나서 나가자.”
한 차장은 전혀 안됐다는 표정이 아닌 얼굴로 말을 했다. 그 옆에 서 있는 이 팀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둘 다 표정이 무척 험악했다. 게다가 일본 스모 선수들처럼 엄청 뚱뚱했다. 그렇다고 살진 돼지들 같지는 않고 몸들이 운동으로 다져진 듯 탄탄해 보였다.
진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젠 저놈들한테 시달려야 하는 건가……?
진규는 팔을 구부려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뾰족머리는 사람 때리는 기술을 아주 잘 터득한 것 같았다. 겉으로는 상처 하나 안 내고 속으로 골병들게 하는 것 말이다. 진규는 뼛속 깊은 통증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차라리 이대로 다시 누워서 안 일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겉보기엔 멀쩡한 것 같으니까 얼른 일어나.”
한 차장이 닦달한다.
진규는 일부러 끙 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조심 천천히 일어났다. 온몸의 통증으로 머리가 다 아플 정도였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느 누구라도 부축 좀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아무도 손 하나 내밀지 않았다. 진규는 머리가 어찔어찔한 것도 가까스로 참고 천천히 일어나서 두 발로 버티고 섰다. 사방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게다가 온몸의 뼈 마디마디, 관절이란 관절은 모두, 몸 전체의 근육 하나하나, 그러니까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쉬지 않고 왕복으로 달리는 통증으로 인해 그냥 다시 누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한상일과 이석윤 이 두 새끼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자.”
한 차장이 말한다.
어디로? 사형장으로? 개새끼들…….
진규는 한 차장을 노려보았다. 옆에서는 뾰족머리가 진규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패고도 분이 안 풀리는 모양이다.
“왕 개새끼. 제기랄.”
진규는 이판사판인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듣든지 말든지.
진규가 차에 태워져 도착한 곳은 어느 깊숙한 산속의 으리으리한 3층 한옥 건물이었다. 얼핏 보아도 무슨 사이비 종교 본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엄청 잘 지었다. 으슥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울 한복판은 아니더라도 사람들 잘 보이는 데다 지었으면 아주 명물이 되었을 텐데.
이석윤 팀장이 진규를 한번 슬쩍 돌아다보고는 그 건물로 들어간다. 뾰족머리가 진규의 종아리를 발로 툭 찬다. 한가한 감상은 그만하고 빨리 들어가라는 신호다.
진규는 일부러 버팅기는 듯이 몸을 뒤로 밀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돌아보았다. 그러면서 들으라는 의미로 중얼거렸다.
“씨발……, 죽이려면 곱게 죽이지 뭐 이런 데까지 끌고 왔어……?”
그러자 뾰족머리가 주먹으로 진규의 등을 쿡 찌른다. 진규는 뾰족머리를 노려보았다.
“빨리 가.”
뒤따라오는 검은 양복 한 놈이 짜증 난다는 투로 내뱉는다. 진규는 땅에다 침을 탁 뱉고서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한옥 안의 홀은 엄청났다. 장식이 호화로운 것은 아니지만 웅장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사람을 압도할 만큼 거창한 것이다.
진규는 홀 천장과 벽을 올려다보다가 앞쪽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홀 맞은편 약간 높은 단상 한복판에서 책상의자 같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
대통령.
진규는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국가 행정수반. 모든 국가공무원의 최상위 신분. 모든 공무원은 국가수반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 진규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정원 직원이니까.
진규는 저도 모르게 차렷을 하고 경례를 할 뻔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이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진규는 주변 사람들을 돌아다보았다. 모두들 무표정한 가운데 이석윤 팀장과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 팀장이 얼른 눈을 피한다.
이 새끼들…….
이거 반란 아냐? 대통령이 국가에 반란을 해?
진규는 혼란스러웠다.
대통령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원래 큰 키에다 단상에 올라가 있으니 마치 거인이 몸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대통령의 키는 190cm 약간 넘는 것 같다. 이것은 국가기밀도 아니다.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거니까.
진규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로 다가와서 손끝으로 등을 민다. 진규가 돌아다보니 한상일 차장이다.
한 차장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뭐야, 뭐라는 거야……?
진규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발을 떼었다. 그렇게 해서 두어 발자국 앞으로 나갔는데 대통령이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면서 입을 열었다.
“됐어.”
아주 온화한 목소리. 그러나 강한 카리스마가 담긴 소리.
진규는 자동적으로 멈춰서서 올려다보았다. 다시 경례를 하고 싶은 욕구. 그러나 진규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오른팔이 경례하기 위해 올라가는 것을 억제하기라도 하듯이. 그러나 몸은 꼿꼿이 세우고서 거인같이 우뚝 선 대통령을 올려다보았다. 우러러본 것이다. 단상 높이 솟아 있는 국가수반을. 진규 자신의 최고위 상관을. 그러나 심경 복잡한 마음으로.
“강진규 요원이 해줄 일이 하나 있는데…….”
진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오른팔이 꿈틀거렸다. 손이 올라가려 한 것이다. 이마의 눈썹 위로. 그와 동시에 입에서는 ‘Yes, sir!’, 아니 ‘충성!’ 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것을 참는 데 온 신경을 쓰느라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군인은……. 그렇다 진규는 아직 현역 군인 신분이었던 것이다. 해군 소령. 하지만 몇몇 경로를 통해 국정원에 들어가서 대북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해군사관학교를 차석으로 입학하고 나서 또다시 차석으로 졸업하고 곧바로 정보부서에 들어가 몇 년 일한 뒤 남들보다 빨리 진급하면서 결국 국정원에서 특수임무, 즉 유럽에서 북한의 밀수입 활동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러하니 지금 대통령이 직접 진규를 마주하며 부탁을 하겠다는데 어찌 경례를 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군인으로서 그보다 더한 영예는 없는 것이다. 설사 지금 당장 폭탄을 적재한 함정을 몰고 적진으로 돌진하라 하더라도 영광으로 알고 충성을 맹세했을 터이다.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겠나?”
아아, 이 영광. 대통령이 대면하여 직접 내리는 명령. 그런데도 대통령은 부탁이라고 했다. 평소 온 국민, 아니 전 세계인으로부터 가장 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귀한 인물이 친히 내리시는 부탁. 이럴 경우 진규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감읍. 感泣.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 이는 자기 일신뿐만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 되는 일이다.
진규는 몸을 꼿꼿이 세우며 차렷 자세를 했다. 그러자 또다시 오른팔이 꿈틀거린다. 올라가려고. 아, 참을 수가 없다. 팔이, 손이 근질거린다. 진규는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팔이 올라가고 있었다. 진규는 거의 무의식에 빠져 자신의 팔과 손이 어깨 높이로 올라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그 팔은 진규가 아니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용맹한 군인정신이었다. 진규의 팔은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그리고 사실은 다섯 손가락이 붙은 채로 팔꿈치가 135도 꺾이며 이마로 향했어야 한다. 그리고 힘차게 ‘충성’을 외쳤어야 하는 것이다. 각본대로 하자면. 그런데도 진규의 팔은 135도로 꺾이지도 않았고 다섯 손가락이 붙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둘째손가락을 앞으로 쑥 내민 채 나머지 네 손가락은 손바닥을 향해 접히면서 팔 전체가 앞쪽, 그러니까 대통령 쪽으로 둘째손가락이 곧게 향한 것이다. 불충! 사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나머지 사람들은 나치식의 경례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손바닥을 편 채 팔을 쑥 내밀고 ‘하일, 히틀러!’하고 외치는 동작. 그러나 다섯 손가락이 붙기는커녕 오히려 둘째손가락만 앞으로 불쑥 내민 채 ‘하일, 히틀러’ 대신 불충의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당신 누구야!”
그러나 이 말은 약간 떨리며 나오는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 자신의 생과 사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딘지 자신 없기도 한 동시에, 자신의 등 뒤에 진 치고 있는 작자들에게 허세를 보이기 위한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그것이야말로 나라에 충성해야 하는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근본 자세이겠기에, 게다가 눈곱만큼의 틀림도 없이 저들이 국가에 반하는 행위를 음모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았기에 대통령보다도 더 상위 개념인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군인의 본분을 그 순간 자각했던 것이다.
진규의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뒤에 있던 한 인간이 앞으로 나와 진규의 목덜미를 잡고 비틀었다.
그러자 대통령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지, 입술을 여 시 었 지.
“놔둬.”
온화한 말투. 그러나 약간은 우울한 느낌이 배어 있는 어감.
“이것은 나를 위한 것도, 국가를 위한 것도 아니야. 인류 전체의 미래를 위한 것이지.”
진규는 멍한 눈으로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대통령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으면서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연단 옆에 있는 계단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진규는 두 눈으로 대통령을 좇았다. 그러나 머릿속은 텅 비고 말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대통령이 연단에서 내려와 진규 쪽으로 걸어왔다. 진규는 얼굴을 앞쪽으로 똑바로 향한 채 눈동자만 대통령을 좇고 있었다. 멍한 눈을 한 채.
대통령은 평소의 성큼성큼한 걸음으로 진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진규는 그 모습이 마치 슬로비디오 동작처럼 약간 과장되게 그리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규의 사고가 마비되어 버린 탓 같았다. 아니, 같았다가 아니라 실제로 진규는 거의 무아지경과 같은 몽롱한 상태로 그저 대통령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동공이 거의 풀린 채로 멍하게 서 있는 진규 바로 앞까지 대통령이 왔다. 진규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몸을 곧추세우며 새로이 차렷 자세를 했다.
대통령이 진규 바로 앞 1미터 거리까지 와서 멈춰섰다. 진규는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인형.
대통령이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더니 한 손을 진규 어깨에 얹는다. 진규는 여전히 인형.
대통령이 큰 키를 약간 숙이고 178cm 키의 진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아직까지도 진규는 인형.
대통령이 진규의 어깨를 툭 쳤다. 인형 진규.
대통령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꼿꼿 인형 진규.
그런 뒤 대통령은 옆으로 돌아서서 저만치로 걸어갔다. 뚜벅뚜벅 걸어서. 드넓은 홀에 발자국 공명을 남기면서.
2
강진규는 독방에 갇혔다. 고급호텔 같은 독방. 창문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꽤 큰 저택의 내부 같은 독방. 아무리 넓어도 혼자 쓰면 독방이지 뭐. 하지만 그곳이 아무리 넓고 호화롭다고 해도 합명당, 즉 천인합일명신제례당, 그러니까 이명학 대통령 아지트의 지하일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지하감옥.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진규는 일종의 칙사, 귀인, 귀빈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했는데도 말이다.
이거 혹시 죽이기 전에 만찬을 누리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최후의 만찬.
그거야 어떻든 지금은 이렇게 호사를 누리니 그것을 즐기기나 하지 뭐. Carpe Diem, Seize the Day, 오늘을 잡아라, 현실에 충실하라…….
그렇게 며칠을 지내고 나니 욱신거리는 몸도 거의 나아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내의는 물론 양복까지도 모두 새것에다 고급으로 마련해 주니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음은 엿 같았지만.
그런데 정말 이것들이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냐고? 괜히 불안해지잖아.
혹 ‘죽은 시인들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거기에서 존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 말을 해주잖소. 고대 로마시대의 서정시인 퀸투스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가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에게 바치는 송시(頌詩), 즉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시에 들어 있는 이 구절을.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오늘을 붙잡고, 내일은 가능한 한 믿지 마시오. 오늘 최선을 다하고, 내일은 내일에게 맡기시오.)
그래, 로마의 황금기인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로마 백성들처럼 일단 호사를 누리고 보는 거야. 내일은 내일에게 맡기고. 멋지지, 이 말. ‘내일은 내일에게.’ 내 일은 내일에게. 급할 것 없어. 내 일, 즉 오늘 내가 할 일을 내일 하라는 거잖아. 오늘은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고. 오케이?
진규는 극도로 불안했지만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지금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맘이나 편히 지내자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냐고. 그래서 진규는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이곳에 갇힌 이상, 그리고 지금 잠시 호강을 누린다 해도 저들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자신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생명까지도 포함해서. 자신에게 지금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뜻이다. 조만간 그 일이 닥칠 것이다.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 그렇다면 그 일이 닥치기 전에 결정해야 한다. 지금 호의호식하는 이 순간에. 게다가 저들도 진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서로 계산하는 것은 똑같을 테니까.
그래, 끝내자. 지금 당장 끝내자. 나중에는 진규 자신으로서는 감당도 할 수 없고, 되 물릴 수도 없는, 즉 진규로서는 선택권이 없는 끔찍한 상황에 몰릴 것이다. 그런 때를 위해 지금 진규를 사육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진규는 모든 수도꼭지를 최대한 다 틀어놓고 샤워실과 세면대, 주방의 하수구 등등을 모두 닫아버렸다. 그리고 집 안의 전선이란 전선은 다 뽑아버렸다. 전등은 죄다 깨버렸고. 만일 가스 밸브가 있었다면 그것도 다 틀어놨을 것이다. 어떻든 이렇게 해놓으니 완전 캄캄한 방에 물만 차오르고 있었다. 저놈들은 아마도 어딘가에 숨겨놓은 카메라로 이 장면을 잘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커먼 화면만 보이겠지. 게다가 여기는 지하실이기에 물이 달리 빠져나갈 곳도 없을 테다. 설사 놈들이 들어와서 하수구를 연다고 해도 한꺼번에 물이 빠져나가지는 않을 것이고.
삶은 참 피곤한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공 제일선에서 일하는 대외 첩보요원들은 항상 긴장을 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북요원들. 남북은 같은 동포인데도 서로에겐 가장 냉혹하고 잔인하다. 게다가 이름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또한 정보요원들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조국에 충성했다는 면에서는 그 죽음이 헛되지 않는다. 그런데 자국의 대통령에게 살해된다면 그 죽는 자는 반역자인가 애국자인가?
물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영양가 없는 헛된 생각과 질문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죽음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깨금발로 선 탓에 몸이 물에 살짝 뜨는 느낌이 드는 것 말고는. 마치 문 워커처럼 발과 바닥과의 마찰이 사라진 듯하다. 물이 점점 더 올라온다. 진규는 본능에 따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완벽한 칠흑이라서 서양 집처럼 높은 천장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헤엄쳐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해군 출신이라 이쯤에서 물이 멈춘다면 몇 시간이라도 방 안에서 헤엄쳐 돌아다닐 수 있다. 혹시 상어가 나타나지는 않겠지. 아니, 그래도 상관없다. 물에 빠져 죽는 거나 상어한테 물려 죽는 거나…….
이러한 상태에서도 물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암흑의 공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 모든 것이 정지된, 오직 물만 차오르는 3차원 공간. 그러나 진규는 이제 4차원 공간에 들어서 있다고 생각했다. 공간의 가로, 세로, 높이에 시간이 더해진 공간. 지금까지는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느껴진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감각세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종말을 향한 시간의 흐름. 그동안은 1~2초의 시간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1초, 1초, 아니 그보다 더 작은 단위 1/10초, 1/100초, 1/1,000초, 1/10,000초가 감각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감각은 태초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과는 반대 방향으로. 더군다나 0.00001초씩 흐를 때마다 시간은 우주의 탄생 시점으로 속도가 붙어서 급속하게 날아가는 것이다. 칠흑의 공간에서 진규의 모든 감각세포는 시간의 흐름, 물질과 생명의 시초인 태초를 향한 역행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제 우주는 한 점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한 점, 특이점,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미세한,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공간적 개념이 아닌 의미적 또는 환상적 개념에 불과한 우주 뒷면으로 사라져 가는 자기 자신…….
3
강진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대통령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모든 계획이 거의 완벽해진 것이다.
4
계지선은 우울했다.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현재의 상황을 자신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냥 포기했다. 글자 그대로 포기. ‘니들이 알아서 해라.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포기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지선은 막상 포기하고 나니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죽이는 걸까? 그렇겠지. 대통령 일당의 비밀을 알았으니 곱게 내버려둘 수는 없을 테지. 지선이 겉으로 저들에게 복종하는 체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고. 뻔한 거니까.
그럼 죽어주지 뭐. 아프지 않게만 죽여줘.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느낌까지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고달프게 달려온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을 보니 앞으로도 편한 길 가기는 틀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뭐하러 인생 아등바등해. 그냥 포기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했었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울로 바뀐 것이다.
죽는다는 것……. 그것도 그저 그래. 그럼 산다는 건……? 그것도 그저 그렇고. 그럼 뭐야? 뭐가 남느냐고?
하긴 뭐 남을 것도 없다. 짧게 살다가 가는 인생, 뭐 남을 거라도 있는 거니?
아차……, 죽을 때 죽더라도 한 가지 의문은 밝히고 싶다. 바로 그 사진. 왜 친아버지 사진 뒤에 대통령이 찍혔을까? 그리고 친아버지의 죽음과 양아버지의 죽음……, 그 두 사건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도무지 그 둘 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 두 분 모두 저 나쁜 인간, 대통령 말이야, 그놈한테 잘못 걸려들어 그런 참변을 당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사실을 혹 지선이 짐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납치해서 죽이려는 거잖아.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속 시원히 알려주면 안 될까? 사정해 볼까? 알려달라고. 나를 죽이기 전에……. (하긴 그렇다고 뭐 달라질 건 없겠다만.)
지선은 문득 나치가 생각났다. 정확히 말하면 나치의 문양인 스바스티카(Swastika). 한자의 만(卍)을 거꾸로 그린 그 표시. 만(卍)자는 부처의 가슴에도 그려졌다고 하는데 길상(吉祥), 즉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뜻이다. 불가에서는 불상의 가슴, 손, 발 등에 그 문양을 그려넣어 부처의 공덕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문양은 좋은 것일 테지. 그런데 만(卍)자를 반대로 그린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는 나치 독일을 상징하며 끔찍한 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똑같은 문양인데도 방향이 달라지자 이렇게 극과 극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하필 그 문양이 떠오른 것일까? 극과 극……, 반대 개념……, 남과 북……, 남반구와 북반구……. 그래, 지금 이곳은 남반구야.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지선은 남반구에 와 봤었다. 호주 시드니에 여행 갔었지. 그때 왕십리에도 갔었어. 오잉,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소월 시인이 노래한 왕십리(往十里). 그런데 호주에 웬 왕십리? 호주 시드니에 가면 킹스크로스(King’s Cross)라는 교차로가 나온다. (물론 영국 런던에도 그와 똑같은 이름의 지명과 지하철역이 있지만.) 이 교차로를 한국인들은 왕십리(王十里)로 부른다더라. (시드니에 있는 또 다른 지명인 ‘Black Stone’은 흑석동, ‘Banks Street’는 은행동.) 뭐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같은 말도 쓰임새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곳에 실제로 가보기나 하고 이런 글 쓰시남? 물론이죠, 가보고말고.)
하 참. 이러한 답답한 상황에서도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지선은 자신이 아직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치, 정말 그렇지? 그런데도 지선은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미주 대륙이랑 유럽, 남반구 여기저기 막 기웃거리며 여행 다니던 시절, 그때는 무지갯빛 미래만 있었지. 비록 공부는 힘들었지만. 그런데 지금 공부 다 끝나고 두 손으로 꽃 흔들어주던 군중들의 환호성도 들은 이 황금 같은 시기에 이게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냐고. 그렇다고 눈물 흘려주랴? 그것은 싫다. 비록 싸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연약한 아낙 연출은 하기 싫다. 죽으면 죽는 것. 그것으로 끝이다. 좀 아쉽기는 하지만. (유관순 언니도 그랬을 테니까.)
사실 어제 대통령이 또 왔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한 것이다. 뭐, 결혼? 정말 웃겨. 우선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만, 무엇보다도 그 면상 꼴 보기도 싫다. 흉터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장님에다 코가 떨어져 나갔어도 마음만 간다면 결혼이 아니라 종으로라도 섬기겠다. 그 인간이 말이 대통령이지 실은 역적질하는 것 다 알고 있을뿐더러, 지선의 부모님 사망에도 깊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증거만 없을 뿐이지. 그런데 결혼은 무슨…….
씨부렁 디부렁……, 에이(A)팔 비(B)팔 씨(C)팔 디(D)팔 이(E)팔 에프(F)팔 왼팔 오른팔 양팔 곰배팔……, 혼잣말 반말 존댓말……, 욕설 안욕설 기타 등등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은 죄다 (마음속으로) 뱉어냈지만 사실은 불안했다. 몹시, 무지, 무척, 엄청.
게다가 아쉬움도 남았다. 저 인간이 역적만 아니라면 그냥 청혼을 받아들여 영부인이 되는 건데. 그런데 이게 만화나 소설도 아니고 뭐 이렇게 웃기는 상황이냔 말이다. 대통령한테 청혼받고도 더러운 기분이 되어야 하는 이 꼬라지. 뭐 못 먹을 것 먹은 것처럼 토악질도 나올 것만 같았다.
그건 그런데……, 이곳이 대체 어디지? 남반구인 줄은 알겠는데,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늘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단 말야. 그런데 저 재섮는 대통령 새끼는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선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온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배터리 빠진 자동인형처럼. 게다가 평소에 자신은 학식도 갖추고 정계에도 진출한 경험이 있어서 교양 좀 있다고 늘 자부했었는데 이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비속어, 즉 욕까지 나오는 것이었다. 비록 마음속으로지만.
이렇게 지선이 혼자서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선은 화들짝 놀랐다. 자기가 대통령 욕하는 걸 들킨 듯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아무 말 안 했어. 마음속으로야 누군들 별의별 말 다 하지 않겠니? (국어사전에는 ‘별의별’이 표준말로 나와 있는데, 어느 누가 ‘별의별’로 발음할까. 다들 ‘별아별’이라고 하겠지. 나만 그러나……?)
지선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현관을 바라본 뒤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대통령인가? 그러나 창문으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숲 광경만 펼쳐져 있을 뿐.
또다시 현관 노크 소리.
지선은 자기의 옷매무새를 흘끗 둘러본 뒤 머리를 한번 매만지고 현관으로 향했다.
대통령일까? 갑자기 마음이 두근거린다. 아니, 좀 떨려오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사람이 찾아온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한 사람이 오는 것은 그의 일생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과 가족은 물론 조상, 친구, 친구들의 부모와 조상, 심지어 태초와 지금 현재까지 함께 오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김훤이라는 시인이 쓴 글이다. (여기에다 미래까지 포함시키면 더 좋겠다.) 그러니 사람이 찾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이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감격이 아니라 오히려 놀람이나 공포, 두려움 등이 떠오른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잘못? 찾아오는 이인가, 아니면 맞이하는 이인가?
지선은 이에 대한 대답도 찾지 못한 채 현관 앞에 섰다. 그러나 문고리는 돌리지 못하고, 또한 밖에 있는 이가 누군지 묻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현관문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똑똑똑!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현관문이 울린다. 마치 비극을 예고하는 악신이라도 와 있는 듯. 아니면 늑대라도.
‘문 열어주면 안 잡아먹지.’
문을 조금 열고 손을 보여달라고 할까? 기분 나쁜 털이 숭숭 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때 또다시 똑 똑 똑!
이번에는 좀더 힘이 들어가고 간격이 좀 떨어진 채.
지선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누, 누, 누구……세……요?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의식이 성대를 막아버린 듯. 그때 문 밖에서 들려온 소리…….
“계세요?”
엄마!
어머나, 어머나, 엄마…….
사실은 숨이 넘어가는 헉 소리가 나왔어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그런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지선은 멈칫했다. 여자 목소리였던 것이다. 가는, 그러나 어딘지 절박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
보통 현관문에는 밖을 내다보는 동그란 렌즈가 달려 있어야 하지만, 이 돼먹지 못한 집의 문짝에는 그런 것도 만들어놓지 않았다. 그저 육중한 나무판으로 현관을 탁 막아놓은 것이다.
지선은 문고리를 꽉 잡고 귀를 문에 갖다대려 했다.
그때 또다시 음성이 들렸다.
“안에 아무도 안 계세요?”
지선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그냥 내버려둔 채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러자 문틈으로 보이는 것은……, 어이없게도 화사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젊은 여인이었다!
“누, 누구……?”
어머나!
밖에 서 있는 여인이 말은 안 했지만 그 표정은 아까 지선이 마음속으로 외친 그 외마디 비명과 동일한 느낌이었다.
빼꼼히 열린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얼어붙어 버렸다.
5
추설희와 계지선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들이 살아온 것과 이곳에 온 경위에 대해서. 그리고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주아주 새롭고도 묘한 사실을. 즉 5년 전 이명학은 추설희를 납치해서 이곳에 가둬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명학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계속 추설희를 찾아와서 결혼해 달라느니 뭐니 해가며 찝쩍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정체를 안 이상 조금도 정이 가지 않아 지금껏 거부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던 사람이 며칠 전부터는 더 이상 추설희를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오늘 추설희가 집 밖에 나가 숲 속을 돌아다니며 산책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는데, 웬일인지 자신의 집이 나타나지 않아 여기저기 헤매다가 낯선 집을 발견하고는 반갑기도 하고 걱정도 되기도 하는 마음으로 다가와서 문을 두드렸다는 것이다. 그러한 반면 계지선은 자신은 며칠 전에 이곳에 납치되어 와서 이명학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 대화가 끝나자 두 여인은 묘한 감정에 빠지고 말았다. 비록 꼴 보기 싫은 남자이긴 하지만, 그 사람이 두 여인에게 구혼한 것이다. 첫 번째는 추설희. 그리고 다음에는 계지선.
흠…….
이 경우 두 여인은 서로 동지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서로에 대해 흥 하고 돌아설 수도 없는 현실.
아무튼 두 여인은 서로에 대한 신상을 털어놓고 묻고 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을까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찼다. 혹 두 여인을 한 집에 두고 하렘을 만들려고 한 것일까?
안 되지, 그건 더더욱 안 돼, 이 나쁜 놈아! (차라리 나 하나만……. 아니 아니, 이건 더더더욱 아니고…….)
아니, 혹시 이제는 귀찮은 존재가 된 우리 둘 다 여기에다 가둬 버리고 새 여자 구해서 갑자기 숲 속에서 사라졌다는, 추설희가 지금껏 살았다는 그 집에 데려다 놓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만일 그랬다간 그 연놈을 그냥…….
하, 이건 또 뭐 하는 시추에이션이냐? 하여간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들이란……. (쩝!)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 입을 쩝쩝 다시고 나서 다시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 어떻게 해야 하죠?”
“우리 둘 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다음 수순은 뻔하잖아요.”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을까요?”
“내가 여기 5년 넘게 갇혀 있으면서 별별 방법 다 안 찾아봤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궁리해 봐도 해법이 없는 거예요. 여기에서 아무리 아무리 멀리 나가 봐도 결국 똑같은 집만 나오는 거니까. 그런데 오늘만 달랐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아마 그 집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도 없을 거예요.”
“그럼 저 사람들이 어떤 방법을 쓴 거죠?”
“내가 저 사람들 대화를 얼핏얼핏 들어서 안 것이 좀 있는데, 무슨 가상현실 기법 같은 것을 최고도로 발전시켜서 현실과 가상세계를 연결해 가지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도 실은 실제가 아니라 가상공간인 거예요.”
“가상공간? 지금 여기가 실제가 아니라 가상공간이라고요?”
“그렇다니까요.”
“말도 안 돼. 우리 둘 다 실제 인물이잖아요. 이 집도 실제고. 그런데 어떻게 여기가 가상공간일 수 있어요?”
“바로 그거예요. 가상공간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현실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이도 먹지 않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아요. 가상의 존재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이론적으로만 보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거죠. 전혀 늙지도 않고 병에도 안 걸리면서…….”
어쩐지 추설희의 나이가 계지선보다 일곱 살은 더 많은데도 조금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제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가상의 세계에 들어오는 순간 시간이 정지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제도 오늘이요, 오늘은 물론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이 되는 셈이다. 이 말이 맞는다면, 그러니까 이곳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이게 말이 돼? 아무래도 사기 같은데.
“나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어요. 그런데 정말로 손발톱도 자라지 않고, 머리칼도 자라지 않는 거예요. 몸에 때도 끼지 않고. 매일매일 먹고 자고 화장실 가고 하지만 늘 똑같은 거예요. 병도 안 걸리는걸요…….”
그럼 여기가 뭐 무릉도원이나 유토피아, 아니면 천국 같은 데야? 그럼 차라리 여기에서 영원히 사는 게 낫잖아.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요.”
“……?”
“저 사람들이 그 가상현실 기법을 이용해서 이곳의 환경과 조건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맞는데, 아직 그것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이 유토피아의 진실은 이러했다.
일단 이곳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생물의 성장이나 죽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그들의 사이클대로 그냥 진행된다. 다만 사람만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즉 생로병사 자연법칙대로 흘러가는 것이지.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 있을 때의 늙지 않은 상태 그대로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여기에서 나가는 순간 그동안 흐르지 않았던 시간이 한꺼번에 흘러가는 것이다. 그것이 몇 초, 몇 분, 몇 시간, 며칠이 될지라도. 그래서 이것을 고치기 위해 지금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중이란다. 이것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이곳과 저 바깥을 적당히 오가면서 세상도 즐기고 나이도 덜 먹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예 이곳에서만 살아간다면 글자 그대로 영생을 하며 젊음을 즐길 수 있게 되겠지. 게다가 또 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는 즉 공간의 통로다. 이것은 노화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지만 이 역시 기적과 같은 기술이다. 즉 현실과 가상공간을 잇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합명당 지하에 구축해 놓은 가상공간을 통해 실제 바깥의 공간으로 나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할 수 있는 것. 지구상 어느 곳이든지 말이다. 이것을 더욱 발전시키면 우주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주 전체를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영생이라는 시간, 그리고 우주라는 공간, 즉 시공간을 모두 정복하는 셈이지. 따라서 이 기술이 완성되면 온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인류 위에 우뚝 서게 되는 것. 한마디로 말하면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합명당 지하는 바로 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본부가 된다. 이것이 완성되면 한민족은 우주의 주인이요, 왕이 되는 것이지.
영광, 영광, 영광,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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