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순간 사이에 (8/11)

제8장 | 거짓 너머

by Rudolf


제8장 | 거짓 너머


1


이석윤 팀장과 한상일 차장은 종이 커피 잔을 들고 널따란 전망창을 마주하고 나란히 섰다. 창밖의 광경은 생동감으로 넘쳐 있었다. 6월의 푸르름. 온 산을 뒤덮고 있는 생명의 기운들. 그 위로는 새파란 하늘.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다. 공기는 아주 맑음. 가끔 하늘을 분탕질 치던 미세먼지도 하나 없이 오직 푸르름만이 저 시야 닿는 끝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제 추설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석윤 팀장이 시선은 창밖을 향한 채 아무런 억양도 없이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잖아.” 한 차장이 무뚝뚝한 짧은 말로 대꾸한다.

“이제 나는 빠지고 싶은데.” 이 팀장 역시 무미건조한 억양으로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한상일 차장의 이 말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국어시간에 교과서 읽는 듯한 느낌. 그러나 이 팀장은 그 말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 팀장은 웬만해서는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이 일에 끼어들게 되면서 어떤 운명적인 비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팀장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안위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외동딸을 일찌감치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으나, 실은 도피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라고 안전할 리 없다. 아니, 지구 어느 곳이라도 마찬가지다. 가족 전체가 일단 인질이 되면 빠져나갈 수가 없다. 협조하든가, 아니면 가족 모두가 감쪽같은 방법으로 제거되든가.

이 팀장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몸을 돌이켰다. 한 차장 정면으로.

그러자 한 차장은 의도적으로 몸을 돌려 저쪽을 향한다.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그리고는 내뱉듯이 말한다.

“우리 둘 다 같은 처지야.”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말.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 이젠 늦었어…….

한 차장은 자식 욕심이 많았는지 거의 연년생으로 넷을 낳았다. 모두 아들. 죄다 수재이며 한국에 둘, 미국에 하나, 영국에 하나 유학 가서 공부하고 있다. 게다가 부인은 방송에서도 잘 나가는 아나운서다. 소문에 의하면 정계 진출까지 꿈꾼다고 한다. 게다가 형제자매도 많고 부유하며 주위에서 부러움을 많이 받는 명문 가문인 데다 부친은 차관에까지 올랐고, 모친은 모 여대 총장을 했으며, 둘째 형이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다.

그런 그가 요즘 얼굴이 어둡다. 평소 입담이 센 것으로 유명했으나 얼마 전부터 입을 잘 열지 않는다. 가끔 이를 악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눈에는 어딘지 겁먹은 듯한 그림자가 비친다. 아니면 후회감일지도 모르지만.

이 두 사람은 원래 그리 사이가 안 좋았다. 게다가 이 팀장이 나이가 두 살 더 많고 국정원 내에서의 경력도 더 많다. 한상일 차장은 쉽게 말하면 낙하산이다. 원래는 국군정보사령부에서 근무하다 뇌물사건에 휘말려 예편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곧장 국정원으로 향했다. 그 뒤 고속승진을 거듭해서 국정원 내에서도 말이 많았었다. 그러나 뒷배가 든든하다는 소문이 돌아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었다. 그러던 그가 이번 정부 들어서서는 국정원 일보다도 대통령 비서실과 더 많이 소통하는 바람에 국정원 내에서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반면에 이석윤 팀장은 국정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지만 늘 윗사람과 충돌하는 바람에 고위층의 눈 밖에 난 사람이다. 게다가 몇 년 전에는 국정원장과 정면으로 부딪쳐 면직 직전까지 갔다가 일종의 반성문을 쓰고 나서 간신히 업무에 복귀했으나 징계를 받아 직급이 낮아지고 말았다. 이 팀장 성격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박차고 나가겠지만, 그의 능력을 높이 사는 주변 사람들의 끈질긴 권유로 후일을 도모한다는 각오로 국정원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한 팀이 되었을까?

사실 이 팀장은 외동딸 때문에 늘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중학생 때부터 아이돌 가수가 되겠다고 밖으로 나돌다가 임신도 하고 마약도 하고 범죄에도 엮이고 하는 바람에 이 팀장이 그거 해결해 준다고 몇 군데 들락거리다가 여기저기에서 신세도 지고 그것 때문에 약점도 잡히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결국 딸을 미국으로 보내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소신을 굽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딸은 미국에 가서도 여러 문제를 일으켜 아직도 제 아버지를 힘들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 이 팀장은 딸의 장래 때문에 국정원 고위층의 위험천만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추설희 문제는 나한테 넘기지.”

이 팀장이 한 차장 뒤통수를 쳐다보며 말한다.

“넘기면?”

“원상태로 되돌려놔야지.”

“진규는 어떻게 하고?”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자 한 차장이 몸을 돌이켜 이 팀장을 노려보듯이 바라보며 내뱉듯이 말한다.

“인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거 몰라?”

이 말에 이 팀장이 한 차장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내가 그놈을 설득해 보면 안 될까?”

“장난해?”

“좀 아까운 놈이라서…….”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처리할 테니까.”

한 차장의 이 말에 이 팀장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닫았다.



2


경기도 심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전통한옥 건물. 정식 명칭은 천인합일명신제례당(天人合一明神祭禮堂)이며, 천인합일교의 수양관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양관은 보통 햇볕 잘 드는 동남향에다 전망 좋은 곳에 짓게 마련인데, 이곳은 서북향으로 돌아앉아 있는 데다가 건물 전면에 백 길이 넘는 절벽이 가로막혀 있고 진입로도 아주 좁고 거친 나무들로 무성해서 어두컴컴한 탓에 분위기가 영 음산한 게 아니다. 게다가 바위 절벽에서는 제법 굵은 폭포까지 떨어져 소음이 꽤 심하다. 그뿐 아니라 폭포로 인해 주변이 음습해서 오래 지내면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악영향을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수양관은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지도상에도 나와 있지 않아 사람들이 혼자서 찾아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비록 좁고 비포장이긴 하지만 도로가 뚫려 있고 그 길로 주로 SUV 종류의 차량이 자주 다닌다.

새벽 5시경, 한여름이라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지만 그 수양관 주변은 가로등조차 없고 숲이 무성해서 한밤중처럼 캄캄하고 음습한 공기가 감돌아 어느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려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다가오는 차가 두 대 있었다. 대형 SUV.

차들이 수양관 앞에 멈추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컴컴한 어둠 속에서 시커먼 점퍼를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다가온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꺼지자 새벽의 산은 갑자기 영겁의 세계로 들어간 듯 고요해진다. 폭포 소리도 자취를 감춘 듯 귀에 들어오지 않고 (사실은 그 소리가 늘 익숙해서 무시하고 살아서 그렇지만) 그전까지 시끄럽게 지저귀던 새소리조차 멈추었다. 곧이어 차 문이 열리고 앞뒤 차에서 여러 사람이 천천히 나온다. 그리고는 모두 참선하는 사람들처럼 침묵한 채 시커먼 외양만 보이는 건물 속으로 들어가 이내 사라진다. 뒤이어서 건물의 창 여기저기에 불이 밝혀지며 주변이 갑자기 빛으로 소란해진다. 그에 맞춰 잠시 끊겨 있었던 새소리들이 일제히 울려퍼지며 산속을 소란스럽게 한다. 세상 일 일어나거나 말거나 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이런 장면에서는 우리 옛 선비들의 글 하나쯤이 떠오를 만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고려 중기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한시처럼.


月夜聞子規 | 월야문자규

달밤에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소리


寂寞殘宵月似波 | 적막잔소월사파

空山啼遍奈明何 | 공산제편내명하

十年痛哭窮途淚 | 십년통곡궁도루

與爾朱脣血孰多 | 여이주순혈숙다


적막한 밤 달빛은 물결처럼 잔잔히 흐르는데

빈산에 온통 새울음소리 날이 새면 어이하나

십년을 통곡하며 지낸 세월 궁핍한자의 눈물

소쩍새 붉은입술과 핏빛 중 어느것이 짙은가



이렇게 건물 밖에서는 일상사 반복되듯 아무런 마찰이나 조짐도 없이 천지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기실 건물 안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음모.

전 지구를 경악시킬 만한 사악한 음모.

SUV를 타고 온 여남은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웅장한 3층 한옥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건물 전체에 불이 환하게 켜지며 여러 창문으로 빛들이 쏟아져 나왔다. 비록 새벽이지만 산골짜기 숲 속 절벽에 가려진 음침한 곳에 갑자기 빛의 광휘가 펼쳐진 것이다.

그 건물 안에서 가장 넓은 방인 강인재(降仁齋)의 중앙에 검은 옷을 입은 신사가 멈춰섰다. 왼쪽 눈이 찌그러진 채 거의 감겨 있는 남자. 높은 천장에 매달린 요란한 샹들리에의 조명을 받아 약간은 신비스러운 느낌도 드는 사악한 인물. 그는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인 이명학, 미국명 Edward L. Howell. 미국에 입양되면서 얻은 새로운 성 Howell 대신 그는 한국의 성을 쓰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성과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고아원에서 원장의 성에 따라 임시로 지어준 이름인 이명학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인합일교는 실제로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이명학 대통령이 만든 일종의 비밀단체였다. 또한 천인합일명신제례당, 줄여서 합명당은 이들이 모여서 회합하고 모의하는 장소였다. 이 단체의 목적은 아름다운 지구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해를 줄이고 천연자원을 보존하며 물과 대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또한 지구 자원을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 어처구니없게도 지구 인구를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미개지역이라고 여기는 곳의 주민들은 모두 제거하고, 현재 시점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국민들을 전 세계에 골고루 배치해야만 나머지 인류가 풍요롭게 살 뿐만 아니라 지구 환경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인종갈등도 줄어들고, 지구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다고 여겼다. 심지어 한때는 남한의 인구만 남기고 다른 모든 인종을 제거하자는 말도 나오기도 했다. 그 뒤에 지구 곳곳을 분할하여 개발한 뒤 남한 인구를 전 세계에 적절히 분산시켜서 깨끗한 물과 식량이 넘치고 사람들 간, 인종 간 갈등이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무런 가치가 없는 모든 종교를 없애고, 전 지구인이 단일민족처럼 서로 간에 일체감으로 연대하며 살도록 하자는 모토를 내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너무 극단적이고도 실현 불가능이라 여기고 곧 접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지구 인구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생각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으며, 또한 그 일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기간 동안 여러 형태로 현재 선진국 국민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민족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비밀리에 개발한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을 이용하여 우선 시험적으로 지구의 대형 시설물들을 폭파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전 세계 대형 수족관, 즉 아쿠아리움 몇몇을 무작위로 선정해서 실험용으로 파괴하되, 그 대상에는 한국의 아쿠아리움도 포함시켜서 한국도 피해자라는 인식을 갖게 하기로 정했다. 게다가 이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주로 인도 과학자들을 납치해 와서 한국인들과 함께 일을 시키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 계획이 제대로 진행될 리도 없고, 또 자신들이 야망이 실현된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황당한 계획은 실은 지지자들을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대통령의 친위대가 되어 정권을 계속 연장하는 데 이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남북한을 연합한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기로 했다.

[여기에서 울트라 진상현실기법(眞像現實技法)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에 이은 증강현실(增强現實, augmented reality, AR)에서 더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실은 앞의 두 개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초혁신적인 것이다. 즉 현실과 가상을 혼합하여 그 둘을 오갈 수 있게 하는 기법이다. 아쿠아리움 폭파사건에서는 이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실제로 그 내부로 들어가 여러 각도에서 수많은 동영상을 찍어왔다. 그런 다음 그것으로 실제와 똑같은 가상의 아쿠아리움을 만든 다음, 여기에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을 적용하여 가상의 아쿠아리움에서 현실의 아쿠아리움으로 직접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이다. 따라서 아쿠아리움을 폭파하게 위해 미리 폭탄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이 기법을 이용하여 폭파 바로 직전에 아쿠아리움에 들어가서 설치하고 나오면 되니까. 그러나 이 기술을 현실에서 적용하는 데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시일도 엄청 걸리는 탓에 실제로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그동안 몇 년에 걸쳐 네 아쿠아리움에 대한 계획만 세우고 이번의 연쇄 아쿠아리움 폭파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오메가 진상현실기법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이는 기상위성을 가장해서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그곳에서 촬영한 지상의 장면과 오메가 진상현실기법을 결합하여 실제와 거의 동일한 자연환경을 재현해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지구 어느 곳, 심지어 우주 한 복판이라도 이 기법을 통해서 들락거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아니 사실 거의 성공 직전단계에 와 있지만, 이 기술이 탑재된 위장 인공위성을 쏘아올려야 하는데, 항상 발사 마지막 단계에서 오류가 나는 것이다. 바로 인도 기술자들의 보이지 않는 사보타주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제거하고 한국 기술자들로만 개발하기엔 아직 실력이 부족한 면이 있어서 속을 끓이고 있는 중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을 최대한 부각시켰다. 게다가 그는 지금도 자신은 불우하다고 말했다. 신체적 약점 때문에 결혼도 포기했고, 자신이 버는 돈은 모두 약자들을 돕는 데 사용하는 바람에 재산도 쌓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변호사 생활을 할 때 빈민촌에 들어가 거의 무료로 변론해 주며 사회에서 소외받은 계층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자동차도 중고 경차를 샀으며, 의복도 정장 대신 싸구려 빈티지 상점에서 산 것을 주로 입었다. 집도 빈민촌의 조그만 방 한 칸을 얻어 가구를 들이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만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곳에서 지냈다. 그리고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빈민구제에 사용하고, 무료변론 역시 늘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들에 대해 반기를 든 것도 아니다. 부자들은 그들의 치열한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이라 그에 합당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해서, 사회 각 계층으로부터 호감을 받았다. 게다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후원금을 전혀 받지 않고 최소 비용으로만 치러서 전 국민의 주목과 존경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국민들은 그가 다음 대권에 도전한다면 틀림없이 당선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에서 이명학은 갑자기 국회의원 직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좀더 공부하여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고 더욱 수양하기 위해서라며. 그리고 이 유학 때 바로 흑인과 중남미 인디오, 그리고 백인의 혼혈아인 영국 유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곧바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남데렐라, 즉 남자 신데렐라의 탄생 신화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때 혼혈아 예비신부 덕도 톡톡히 보았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한국은 물론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어 몇 달 동안 모든 매스컴을 도배하다시피 했으니까.

그러나 사실 이명학 대통령은 그 흑인 약혼자와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동화 같은 그 이야기를 통해 국제적인 관심과 환심을 얻은 이후, 연이은 아쿠아리움 폭파사건을 핑계로 약혼만 한 채 결혼은 하지 않고 시간을 끌다가 그녀가 흑인혐오주의자에게 암살된다는 시나리오를 미리 짜두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전 세계적으로 동정까지 얻는 효과가 있을 테니까. 이러한 시나리오에 의해 대통령은 63빌딩 아쿠아리움 폭파사건을 핑계로 대고 결혼 대신 약혼식만 치른 상태에서 멈춘 것이다.

현재 전 지구는 혼돈 속에 빠져 있다. 연이은 아쿠아리움 폭파사건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포와 혼란 속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대통령은 적극 이용하기로 했다. 현재 모든 공공시설 가운데 주로 아쿠아리움을 중심으로 해서 보안과 경비가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의 약혼자는 결혼은 미뤄졌지만 사실상 거의 영부인 수준의 대접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각색이 되어 세계인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을 대통령은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 약혼자가 고귀한 모습으로 여러 봉사활동이나 문화활동을 하던 중 암살당하는 비극. 그러면 대통령은 비운의 왕으로 또다시 전 세계의 이목과 동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뒤 대통령은 죽은 약혼자를 기리기 위해 거창한 장례식을 마련하고, 그 자리에 세계 각국의 정상들을 초청한다. 그리고 그 장소는 한국도 영국도 아닌, 약혼자의 고향인 바로 그 섬, 남대서양의 어센션 섬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세계 정상들이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한꺼번에 납치되면서 전 지구적인 엄청난 음모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이 시나리오는 이명학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짜놓은 것이다. 물론 그 뒤는 각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몇몇 가지가 조금씩 비틀어지고 있었다. 그중 한 가지는 바로 추설희였다.

대통령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추설희는 잘 있는 거지?”

“지하로 내려가서 확인하시지요.”

대통령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 방 앞쪽에 있는 단으로 올라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말없이 그 뒤를 따른다.

이명학이 단상 옆쪽에 있는 기다란 한국 풍속화 앞으로 가서 살짝 고개를 들고 그림 속에 감추어둔 듯한 카메라를 쳐다보자 풍속화가 옆으로 스르르 열린다. 그 안은 넓은 엘리베이터 홀이었다. 20명 정도는 탈 듯한 너른 공간.

시커먼 양복의 사내들이 우르르 엘리베이터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그리고는 잠시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알 수 없는 묵음의 공간에서 잠시 긴장감이 돌더니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높은 천장. 그리고 사방엔 푸르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새파란 하늘도. 하지만 이것은 모두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가상공간처럼 커다란 홀 사방과 천장 및 바닥이 모두 대서양 한 섬의 화면으로 가득 찬 것이다. 그 광경은 바로 어센션 섬을 동영상으로 찍어온 3차원 광경이다.

일행은 마치 실물 크기의 가상공간과 같은 방으로 들어가 천장과 바닥,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영락없는 섬 풍경이었다. 게다가 파도치는 소리와 물새 우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이었다. 사실 이 풍경은 실제였다.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을 통해 구현해 낸 현실. 그러니까 실제로 이 지하를 통해 지구상의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란 뜻이다.

대통령이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서 서너 명의 남자들이 다가오며 고개 숙여 인사한다.

대통령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무언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실내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파도치는 해안가에서 안쪽으로 향하는 숲길의 장면으로 변하더니 차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눈앞의 광경을 주시했다. 물론 지금까지 여러 번 본 광경이겠지만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며 넋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실제로 남대서양의 어떤 섬이었다. 물론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섬에 가본 것은 아니지만 모의훈련을 하기 위해 이 가상공간을 여러 번 체험했었다. 그런데도 다시 그 장면을 보게 되면 늘 숨을 죽이고 빠져드는 것이다.

섬의 광경이 여러 번 바뀌더니 눈앞에 지중해식의 이색적인 아담한 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대통령이 그 장면 속으로 성큼 발걸음은 떼면서 들어갔다. 그러자 눈앞의 모든 광경이 정지되었다. 마치 현실처럼 눈앞에 이국풍의 숲 속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아니, 사실 그 장면은 바로 현실이었다. 한국 어느 산 지하의 방에서 곧바로 남대서양의 한 섬으로 옮겨간 것이니까.

대통령이 그 집으로 걸어가서 문을 노크했다. 그러자 잠시 뒤 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화사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채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동양인 여인.

추설희.

그런데…….

그녀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나온다. 실제의 추설희가.

대통령이 한 손을 내밀자 추설희가 역시 손을 내밀어 살짝 붙잡는다. 아주 어색한 동작. 내키지 않으면서도 할 수 없이 응하는 듯한 모습.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지만, 그 모든 것이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았다.

대통령은 추설희의 손을 잡은 채 얼굴만 돌려 주변의 광경을 둘러보았다.

“잘 있었습니까?”

하지만 추설희는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만 보내고 있었다.

“곧 좋은 세상이 올 겁니다.”

사실 대통령은 며칠 전에 있었던 기상위성 발사 모의 테스트가 썩 성과가 좋지 않아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때 모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마지막 3초를 남겨놓고 그 이전 실험처럼 작동이 멈췄던 것이다. 만일 그 실험이 성공했더라면 본격적으로 위성을 쏘아올려 지구 궤도에 올려놓고 그동안 계획했었던 것을 하나하나 실행할 터였다. 그러나 납치해 온 인도 기술자들의 보이지 않는 사보타주로 인해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한국 기술자들로는 아직 그것을 해결할 수 없어서 속만 끓이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지상에서는 네 번에 걸쳐 아쿠아리움을 폭파했기에 그 기술이 검증이 되었으나, 그 기술을 인공위성에 탑재하여 쏘아올려 우주에서 실행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바로 이 점을 극복하기 위해 인도 기술자들을 몰아붙였지만 그들이 지능적으로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단계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추설희의 손을 살며시 당겼다. 그러자 추설희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대통령 앞으로 가서 선다. 하지만 어딘지 어색한 동작. 그러자 대통령은 갑자기 추설희를 잡은 손을 놓고 몸을 홱 돌려서 숲길로 걸어들어갔다. 혼자 머쓱한 모습으로 서 있는 추설희. 대통령의 뒷모습을 보는 그 표정에는 아주 복잡한 내면이 드러나 보이는 듯했다. 대통령은 특이하게도 낮이나 저녁, 또는 밤이 아니라 새벽녘에 종종 추설희를 찾아와서는 무엇인가 확인하듯 한번 보고 나서는 곧바로 돌아서 버린다. 그리고는 일반인들의 아침 출근시간 전에 집무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추설희는……?

사실 추설희는 지금 가상세계와 실제세계가 혼합된 곳에서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곳은 누구의 방해도 없는 자신만의 공간이다. 그러나 닫힌 공간. 게다가 그 공간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 통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곳은 바로 이상윤 팀장의 방에 있는 검은 마네킹 여인이다. 추설희는 아주 가끔 그곳을 통해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물론 다시 돌아갈 때도 그 마네킹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니까 이곳 비밀 지하 아지트 말고 지상에서 진짜 현실과 합명당 지하 현실세계를 잇는 통로는 오직 그 마네킹뿐인 셈이다. 이는 국정원뿐만 아니라 정부조직 내에서도 극히 몇 안 되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다. 국정원 내에서는 원장 말고는 한상일 차장과 이석윤 팀장 두 사람밖에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몇 년 전에 죽었다는 추설희는……?



3


강진규는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너무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자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희생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끔찍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죽어갔겠지. 그동안 진규의 정체를 숨겨주고 여러 형태로 도움을 주었던 그 사람들. 이제 대통령의 음모를 밝혀줄 수 있는 방법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진규는 그 사람들의 얼굴과 그 가족들이 떠올랐다. 진규와 함께하는 사람들 중에는 진규가 그 가족까지 만난 경우도 있다. 그들의 이름, 그 모습…….

진규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기 목숨 하나로 끝내자고 호소하고 싶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테니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빌고도 싶었다. 그러나 어디에, 어느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는가?

그렇게 여러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 이곳에 들어와 벌써 한밤중이 되었다. 한탄만 하다가 반나절 다 보낸 것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 시간 동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상일 차장과 이석윤 팀장은 모두 진규에게 동일한 내용의 USB를 주었다. 서로 모르게 주면서 같은 내용이라니……. 한 차장과 이 팀장은 그 USB를 줄 때 모두 무표정했으나 사실 어딘지 긴장한 구석도 있었던 듯했다. 무엇인가 급박한 느낌……? 글쎄…….

게다가 이번에 진규가 그 두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는 어딘지 낭패감 같은 표정을 본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어떤 공포감도…….

아니,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잘못 보았겠지…….

그야 어떻든 두 사람은 왜 진규에게 그것을 주었을까? 진규는 그 USB는 윗선에 전달했다. 그러나 윗선들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렇고, 왜 그 USB를 진규에게 주었을까? 게다가 두 사람이 서로 모르도록 은밀히 건넨 것이다. 선의일까, 악의일까? 즉 자신들 대신해서 폭로해 달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음모를 꾸미려고 그런 것일까? 선의라면 급박한 상황을 알리려 한 것일 테고, 악의라면 의도적으로 진규나 또는 진규의 동료들에게 혼선을 주려 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 모두 진규와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상관이긴 하지만, 진규는 주로 이 팀장과 상대했기에 한 차장과 직접 마주친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은 서로 극과 극이라는 소문이 국정원 내에서는 파다했다. 그런 두 사람이 왜 함께하고 있는지 사실 그것도 좀 의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은 지금 갇혀 있다. 국정원 지하로 내려가 처음 보는 컨트롤 타워 같은 곳에 갔다가 억센 남자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보내진 것이다. 머리에 두건의 씌웠기 때문에 어디로 데려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느낌으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올라가 이리저리 끌려갔다가 차에 태워져서 지금 이곳까지 온 것 같았다. 그동안 그 남자들이나 진규나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진규가 당신들은 누구냐, 어디로 가는 거냐고 몇 번 묻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주먹으로 복부를 강타당해서 더 이상 물을 수도 없었다. 놈들에게 복부를 심하게 맞은 탓에 아직도 뱃속이 좋지 않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대로 쓰러졌겠지만, 지금은 잔뜩 긴장해서 그런지 뱃속은 욱신욱신 쑤셔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진규는 자신의 처지가 암담한데도 동료들 걱정이 더 앞섰다. 그 바람에 마음이 더욱 처참했다. 자신의 실수 하나로 여러 사람이 끔찍한 일을 당했을 테니까. 그리고 자기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는 것을 다 털어놓으라고 위협할까? 그런 다음 고문이 행해질까? 그럼 그것을 버텨낼 자신이 있을까? 그냥 미리 모두 자백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까? 이리됐든 저리 됐든 이제는 산목숨이 아닐 텐데, 차라리 편하게 죽는 것을 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죽는다……. 그게 어떤 것이지? 죽음, 죽음이 뭐야?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생명 저편의 세계……. 아니, 그런 것이 있기나 할까……?

진규는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했다. 두렵거나 아쉽거나 하지도 않고 그저 그랬다. 다만 이 처지가 무슨 뜻인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오히려 철학적으로 분석하려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계속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제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든 삶이든 빨리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렇게 아무런 일도 없이 가만히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현실이 오히려 괴로웠던 것이다.



4


추설희. 그녀는 5년 전에 죽었다. 아니, 죽었다고 한 것이지. 그리고 장례식까지 치렀다. 이것은 이명학이 대통령이 되기 전의 일이다. 이명학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유럽 등지를 여행할 때 계지선을 만났다. 이명학이 강력한 차기 대통령감인 것은 정치권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다 알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준 대통령급으로 대우해 줄 정도였으니까. 이러한 이명학이 독일에 갔을 때 국정원에서 대북활동 상황을 브리핑해 주는 도중에 계지선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때 이명학은 계지선에게 호기심이 생겨 직접 만나본 뒤 그녀에게 강하게 끌리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안 당시 대통령은 자신이 임기 동안 저지른 여러 비위사실을 차기 대통령에 거의 확정되다시피 한 이명학이 덮어주는 조건으로 그에게 계지선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었기 때문에 계지선이 정보수집 도중 피살된 것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한국에 보내어 이명학의 아지트에 감금한 것이다. 그리고 이명학은 울트라 가상현실을 이용해서 계지선이 머물 공간을 마련했는데, 그 모델은 약혼녀가 태어난 어센션 섬 근처였다. 즉, 합명당 지하와 어센션, 그리고 그 섬을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곳을 낙원처럼 꾸민 것이다. 그런 뒤 추설희를 그곳에 가둬둔 뒤 그녀가 너무 힘들어하면 가끔 외부로 나가게 해주었다. 물론 주변에 삼엄한 경비를 동반하면서. 또한 몸이 아프면 외부에서 이명학 세력의 범위 안에 있는 의사를 불렀는데, 한번은 계지선이 너무 애원을 하는 바람에 서울 남쪽의 대학병원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병원 본관과 약간 떨어진 병원 부속약국에서 약을 받아 오는 시간에 마침 그 약국에 강진규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지선을 감시하기 위해 따라갔던 대통령의 수하 하나가 그 약국에서 강진규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대통령의 부하들은 그날 곧바로 강진규를 감쪽같이 제거하려 했으나 함부로 행동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침 강진규를 밀착 미행하다가 그가 국정원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그의 상관인 이석윤 팀장과 또 그 윗선인 한상일 차장에게 알렸다. 그 두 사람은 모두 강진규가 제거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각각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둘 다 상대방이 모르게 암시를 주려고 슬쩍 USB를 건네주었다. 진규가 그 내용을 보고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의 비밀을 알아차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다음 그를 자신들 계획에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또한 강진규가 자신들의 아쿠아리움 폭파일정에 맞춰 그 현장에 갈 수 있도록 암시도 주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음모를 오히려 다른 무리들이 꾸미는 것으로 만들어 그들을 파헤쳐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무리들을 찾을 수 있는 여러 단서들을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만일 진규가 그 단서들을 따라 추적에 나선다면 그 모든 과정을 자신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해놓았다. 그리고 진규가 자신들이 계획한 아쿠아리움 폭파 일정에 맞춰 그곳으로 향하게 해두었다. 만일의 경우 진규가 아쿠아리움 폭파와 관련이 있게 만들기 위한 의도로. 그런데 그러한 여러 과정에서 위의 의도와는 어긋나게 진행되기도 하고 설명이 안 되는 일도 가끔 나타난다. 그것은 무슨 이유일까? (낸들 아냐. 세상일이 어찌 계획된 대로만 진행되랴. 때로는 좀 벗어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나는 법 아닌가. 그게 바로 인생인데. 그런 일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대충 넘어가자. 글쓴이도 그 이유를 모르겠고, 읽는 이들도 모르고, 안 읽은 이들도 모르고, 뭐 다 그런 거니까. 세상만사 너무 따지지 말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게 좋을 때도 있는 법. 뭐 굳이 사실을 밝히자면, 글을 나름대로는 멋들어지게 꾸미기 위해 이러저러한 복선을 깔아놓았는데, 그것을 너무 불필요하게 남발하다 보니 그만 요리조리 꼬이고 만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 모든 것을 세세하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으랴. Sorry.)

아무튼 그 과정에서 진규가 위험한 일, 즉 대통령 패거리들의 의도에 반하는 일을 할 조짐을 보이면 곧바로 제거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진규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일당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진규의 소재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진규가 위장술로 중고서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꼼수를 써서 납치한 것이다.

한편, 대통령의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 국정원 내외에서 은밀히 활동하던 조직은 진규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들 모두 감쪽같이 제거된 것이다. 게다가 진규 또한 사로잡혀 골방에 갇힌 신세가 되자 대통령 일당은 기고만장하게 되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구약성경 잠언 16장 18절)이라고 했던가. 이 말처럼 바로 그 순간부터 이들의 견고한 성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5


계지선은 문을 두드렸다. 마구 두드렸다. 손이 부서져라 두드렸다. 발로 차기도 했다. 몸으로 쾅쾅쾅 부딪쳐 보기도 했다. 나중에는 힘도 들고 손이랑 발이랑 몸이랑 모두 아파 더 이상 문을 두드릴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살려줘요! 사람 살려! 여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살려주세요!”

이렇게 한참 발광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내용을 좀 바꿨다.

“나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제발, 제발 나가게 해주세요…….”

그래도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러자 약이 바짝 올라 오히려 독하게 소리 질렀다.

“나 여기에서 혀 깨물고 죽을 거야! 문 열어줘! 안 열면 이 쇠문에 머리 부딪쳐 피 흘리고 죽을 거야, 이 나쁜 놈들아!”

그러나 역시 밖은 고요했다.

그러자 더욱 열받는 것이었다.

“나 죽으면 귀신 돼서 니네들 다 잡아먹을 거야. 피 쪽쪽 빨아먹을 거라고!”

으스스스스. 이렇게 소리치고 나니 오히려 진희 자신이 무서워졌다. 그래서 그랬는지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앗, 저기 저 구석에 저 희끄무레한 게 뭐지? 귀신? 구신?

안 돼…….

지선은 괜히 헛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취소, 취소……, 취이소…….

귀신 같은 건 너무 싫어. 그런 거 말고 다른 건 없나…….

“야, 이놈들아, 나 홀딱 벗고 나선다. 그럼 무섭겠지……롱…….”

그러자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벗어라, 벗어. 메롱∼∼!

이것들이, 정말!

“나 이젠 안 참는다. 니네들 다 죽었다. 내가 만만해 보이지? 흥! 흐흐흐흥!”

지선은 방구석 저 멀리로 뒷걸음쳤다. 그리고 등이 벽에 닿을락 말락 할 때까지 뒤로 갔다가, 거기에서 욱 하고 숨을 크게 쉰 다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냅다 달려 날아가서 두 발로 쇠문을 걷어차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야압!

지선은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가다가 문 가까이에 이르자 드디어 기합을 지르며 날아올랐다.

“돌쇠바람! 정의의 사자! 아니, 사자녀, 암사자! 야아아압! 가나다라마바사! 아아아아! 자차카타파핫!”

지선의 몸은 허공에 뜬 채 오른발을 앞으로 곧장 뻗고 바람을 가르며 쇠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분노의 절정이요, 약 오름의 끝장이요, 두려움에 대한 저항의 정신이고, 정의를 향한 고귀한 도약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철문이 철커덕 열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지선의 몸은 그대로 문을 지나 문 앞에서 자물쇠를 풀고 막 문을 연 간수 같은 남자, 남자 같은 간수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퍽! 아이쿠! 콰당당탕!

물론 이것은 꿈이었다. 지쳐서 잠깐 누웠다가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꾼 것이다.

지선은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정말로 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끼이익~!

마치 천년 동안 열지 않아 녹슨 철문처럼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쇠문이 열리고 있었다.

지선은 아직 꿈에서 덜 깬 머리와 마음과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현실과 반현실과 꿈과 생시가 뒤섞인 상태에서. 사실 지선의 흐릿한 머릿속에는 아직도 자신이 그 쇠문을 향해 오른 다리를 쪽 뻗은 채 날아가고 있었다.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 날아발차기로. 날아라∼, 마징가~. 그와 동시에 지선의 머릿속에서는 비명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에 사람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뒤섞이며 복도의 벽과 천장에 메아리가 울려퍼져 나갔다.

그러나 실은 녹슨 쇠문이 삐이걱하며 열리는 기분 나쁜 소리.

지선은 몽롱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정신을 잃어갔다. 너무나도 심한 공포에 질려 있다가 갑작스럽게 상황이 변하자 몸과 마음이 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지선이 깨어난 곳은 깨끗하고 환한 방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울창한 숲이 내다보였다. 새들이 우짖고 버나비 날아드는 숲. ‘버나비’라고 하니까 혹 캐나다 서부에 있는 도시 버나비(Burnaby, 버너비)라고 오해하실까? ‘버나비’는 벌과 나비를 합친 말인데, 사전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옛글에만 나오는 단어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버나비……, 참 정겨운 말인데 아쉽다. 어떻든 ‘버나비’ 날아드는 숲 속, 멋지지 않은가. 그곳에서 어여쁜 공주님이 잠들어 있다면 더욱더 멋질 것이고.

아주 간단히 설명하련다. 계지선은 추설희 대용품으로 그 울트라 진상현실기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추설희의 외모와 여러 이력에 반했던 이명학은 그녀가 하도 지독하게 자신을 거부하자 그 대용으로 계지선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계지선이 나이도 더 어리고 지성미도 갖추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 출신이 아닌 것에 매료되었다. 게다가 지선이 이명학과는 당이 달랐지만 지방선거에도 나와서 아주 독특한 어법으로 유세한 것에 진작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옛 자신의 비밀조직 일원이었던 정성학의 딸이라는 점에 더욱 마음이 기울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녀가 자신의 사조직인 합명당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묘한 호기심이 곁들여졌다. 물론 아직은 지선이 합명당이나 이명학의 정체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을 테지만, 워낙 총명하다고 소문난 여자라서 언젠가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려 했다. 그런데 막상 그녀를 붙잡아놓고 보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잖아도 끝까지 대통령인 자신을 거부하는 추설희에 질려 있었던 터라 이러한 기회에 말이나 갈아타자는 마음이 앞서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엄청 똑똑하다고 소문나 있었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자 하는 호기심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처음에는 감옥에 가뒀다가 적당한 때 처치하려 한 것이 마음이 바뀌어 한번 직접 만나보기로 한 것이다.

지선은 아늑하게 꾸민 집에서 며칠을 보냈다. 침실과 거실에 식당까지 딸린 고급주택이었으며, 산뜻한 흰색 드레스와 속옷 등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정갈하고 맛난 음식도 제공해 주고, 고급 전자제품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석 장신구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여자로서 거부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인 셈이다. 단지 외부와 연결되는 장치들만 없었을 뿐.

지선은 심지어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바깥에 나가서 집을 돌아다보면 아담한 전원주택이다. 어딘지 유럽풍 느낌도 나고. 그리고 주변의 나무나 풀, 꽃 등은 생소해 보였다. 먼 이국의 풍경. 지선이 공부했던 미국의 경치와도 달랐다. 따라서 적어도 한국이나 미국은 아닌 제3의 나라 또는 장소.

어딜까……?

지선은 어쩐지 자신이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기절해 있었던 시간은 반나절도 안 된다. 시계를 보면 안다. 저놈들이 다른 건 다 빼앗았어도 손목시계만은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니고, 혹 스파이용도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물론 저놈들이 시간을 돌려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쩐지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 데에서나 살 수 있는 싸구려 전자시계. 그 시계에 놈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든 그 시계에 의하면 지선 자신이 정신을 잃은 것은 몇 시간 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깨어난 곳. 그러나 그곳은 자신이 지내고 있었던 한국의 환경과는 너무도 달랐다. 혹 제주도나 아주 외딴섬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사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비행기나 뭐 그런 것으로 바다를 건넌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그럼 어디일까? 이처럼 완전히 이국적인 풍경을 지닌 곳 말이다. 게다가 기후 역시 여간 온화한 것이 아니다. 마치 어디 남국, 그러나 무덥고 끈적끈적한 열대는 아닌 곳, 그런 곳일 텐데…….

지선은 집 밖에 나가 이곳저곳 다녀보았다. 원래는 겁이 많은 성격이었으나, 한번 정치판에 뛰어든 다음부터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배짱도 생기고 그랬었다. 그래서 그런지 집 안에 바지는 없고 멋진 드레스 종류의 옷만 준비해 놓았는데도 그런 것 입고 치마 들어올리고서 집 근처 숲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모든 환경이 역시 아주아주 낯설었다. 완전 이국풍. 마치 남반구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니면 파라다이스에라도 온 걸까? 물론 그렇다면 오히려 좋지. 저 나쁜 놈들만 없다면. 게다가 한국 땅 어디라면 더 좋고.

하지만 원래 겁 많은 성격이어서 처음에는 집 근처로만 돌다가 차츰 용기를 내어 멀리까지 가보았다. 혹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래서 겁은 좀 났지만 아예 탈출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먹고 숲길을 헤쳐 깊숙이까지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가다 보니 저 멀리 숲 사이로 집이 하나 보이는 것이었다. 지선은 발을 멈추고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혹 위험한 곳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그곳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가까이 다가가는데……, 어딘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집의 모양이 눈에 익은 듯한 것이다. 그래도 조심조심 다가가 보았다. 그랬더니…….

아, 저건 아까 내가 나온 집하고 비슷하잖아…….

하긴 비슷한 집도 많을 것 같다. 주택회사에서 지으면 다 그렇고 그럴 테니까.

그래서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을 만나서 여기가 어딘지 물어보려고.

하지만 그 집 바로 앞까지 가보니 그것은 아까 자신이 나온 집과 똑같았다. 주변 풍경까지도. 그래서 현관문을 살짝 밀어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안의 광경이 영락없이 자기가 지내던 집이었던 것이다.

지선은 혼란스러웠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알지 못할 먼 곳에 와 있는 바람에 숲 속 길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오히려 집 쪽으로 향했나 보다 하고.

그래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집 뒤쪽 길로 가보았다. 숲길이라 그리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헤쳐나갈 만했다. 그렇게 한 30분 갔었나, 이번에도 숲 사이로 집이 하나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 지선은 발걸음을 멈췄다. 무엇인가 이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잠시 그 집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나무들 사이로 아주 천천히 걸어나갔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잠시 걷다가 지선은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아무래도 그 집이 자신이 나왔던 바로 그 집 같았던 것이다.

지선은 약간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어서 이번에는 오히려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숲을 벗어나 집 앞으로 가보니 틀림없이 자신이 나왔던 바로 그 집이었다.

이미 짐작은 했지만 막상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이번에는 겁이 더럭 나는 것이었다. 왜 있잖은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같은 곳만 뱅글뱅글 돈다는 이야기. 무엇엔가 홀려서 말이다.

지선은 집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잠시 뒤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이번에는 또 다른 방향을 택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으나 이번에도 역시 같은 집에 도착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지선은 오기가 생겼다. 좋아, 한번 해보자!



지선은 여러 방향을 통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매번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360도 사방팔방 어느 곳으로 가든 결과는 똑같았다.

내가 무엇엔가 홀린 것일까……?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정신은 말짱한 것 같았다. 눈코귀입 감각도 모두 정상이다.

지선은 일단 쉬자고 생각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것저것 찾아서 먹고 마신 뒤 침대에 누워서 잠시 쉬다가 정신을 차리자고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찬물로 세수를 하려고. 그러면 정신이 좀 나아지겠지. 지선은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두 손으로 물을 떠서 천천히 얼굴에 갖다댔다. 그리고는 얼굴 곳곳을 물로 적시며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하고 스스로를 달랬다. 잠시 그런 뒤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고 나서 물을 내렸다.

…….

?

? ?

? ? ?

? ? ? ?

지선은 수도꼭지를 다시 틀고 물을 세면조에 한가득 받았다. 그리고 다시 물을 내렸다.

지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다르잖아, 달라.

방향이 다른 것이다. 물이 회전하며 내려가는 방향이. 그동안 지선이 살아오면서 보았던 물은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내려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왼쪽으로 회전하는 것이었다.

왼쪽!

지선은 독일 나치의 전범자 아이히만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가 아르헨티나로 도피한 뒤 이스라엘 첩보부에 납치되어 비행기로 어디론가 끌려간 뒤 형무소에 갇혔을 때 세수를 하다가 문득 자신이 이스라엘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세면대의 물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즉 물이 오른쪽을 회전하며 내려갔던 것이다. 이는 지구가 자전하기 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그로 인해 북반구에서는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반대로 남반구에서는 왼쪽으로 회전하게 된다. 바로 아이히만은 이 점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북반구, 즉 이스라엘로 붙잡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물론 이것을 실화가 아니다. 일본의 어느 작가가 추리게임 비슷한 책을 쓰면서 만든 가상의 이야기이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차이점을 깨닫게 해주려는 의도로.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코리올리 효과(Coriolis effect)로도 증명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설명이 복잡하니 인터넷 등을 찾아보실 것을 권한다.]

지선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남반구!

이럴 수가……. 자신이 지금 남반구에 와 있었던 것이다. 하긴 숲 속의 모든 광경이 어쩐지 낯설었다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것이지?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이 한동안 기절해 있었으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이라 여겨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면.

아냐!

지선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이 아무리 기절했다 하더라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 리는 없다고 생각된 것이다. 물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지선은 황당한 마음으로 거실로 나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그러다가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앗, 숲길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보이는 것이었다!

지선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찬찬히 밖을 내다보며 살폈다.

그러자 정말이었다.

짙은 색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동양인 같았다.

괴한? 한국인일까?

지선이 창 옆에 숨어서 살짝 내다보고 있는데 느릿느릿 계속 다가오는 남자.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체구는 큰 편이었고. 옷은 어딘지 검은 정장 같은 느낌.

이 숲 속에서 정장을 입어……?

지선은 숨을 죽이고 창밖을 응시했다. 커튼에 몸을 가린 채.

그렇게 잠시 뒤 드디어 검은 정장의 모습이 온전히 나타났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이명학 대통령.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 얼마 전 흑인 여성과 약혼한 대통령. 어렸을 때 양부모에게 학대받아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남아서 보기 흉하게 생겼으면서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지구인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 대통령. 한쪽 눈이 찌그러져 있지만, 그 반대편인 오른쪽 눈은 한없이 깊어 보이고 인자하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주는 모습의 대통령. 자신의 결혼보다도 국민들의 안전을 더 먼저 생각해서 결혼을 미뤄둔 대통령.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큰 성공을 거둔 대통령. 모든 청소년들에게 큰 꿈을 심어주는 대통령. 어려운 환경에 처란 사람들을 먼저 찾아다니며 격려해 주고 그들 곁에 자신이 있다며 힘을 실어주는 대통령.

그런 대통령을 지선은 정말정말 존경했다. 그러한 대통령을 가진 대한민국에 자부심이 있었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늘 자랑하고 다녔다. 마치 세종대왕이 다시 탄생한 듯한 느낌으로 항상 우러러보았던 그 대통령.

그가 지금 저 수풀 속에서 나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TV 뉴스 등에서 본 그 성큼성큼한 걸음으로.



6


강진규가 갇힌 방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30대 초반 정도의 풋내기 냄새가 팍팍 나는 말라깽이. 옆머리를 아주 바싹 밀어올려 전체 인상이 더욱 뾰족하고 얍상해 보였다. 그런데 그 눈만은 좀 달랐다. 어딘지 미련해 보이는 느낌. 아니, 그보다는 게으르다고나 할까, 아무튼 전체 인상이 좀 복잡했다.

“강 선생님, 지내시기가 좀 누추하죠?”

내가 니 선생이가?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 ? ?

“아, 죄송합니다. 저는 이석윤 팀장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뭔 심부름? 여기가 심부름센터야?

“그럴 리가요. 그냥 마음 심, 아닐 부, 시름시름름, 마음이 심란하실 것 같아 말벗이라도 해드릴 할 겸해서요.”

심부름이라며?

“뭐 그냥 그렇게 말한 거죠 뭐.”

뭐가 그냥인데?

“허허, 참……. 따박따박 말대꾸 다하시네.”

오메, 난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

“제가 여기 들어올 때부터 제 인상이 뾰족하고 얍상하다고 생각하셨잖아요.”

하, 하, 하, 항복…….

“잘 생각하셨어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셔야 합니다.”

옛, 잘 알겠습니다. 충성!

“뭐, 충성까지는 그렇고……, 여기에 사인 하나만 해주시면 됩니다.”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쏙 빼낸다.

“…….”

남자는 진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약간 미소 짓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한다.

“이것은 인체장기 포기각서인데, 강 선생님 눈코입귀에다가, 가설라무네……, 그러니까 심장이랑 내장에다가 뭐 뇌까지 그냥 다 저희에게 자발적으로 기증하신다는 증서입니다. 지금 당장.”

진규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아니, 기절 직전까지 간 것이다.

“한 가지 예외는 있습니다. 손톱과 발톱은 잘 깎아서 부모님에게 보내드릴 겁니다.”

…….

사고가 마비된 진규는 멍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동공이 커지고 흐릿해진 채로.

“아, 예외가 한 가지 더 있네요. 저희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만 해주신다면 선생님 신체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손대지 않을 겁니다. 아셨죠?”

진규는 입을 헤 벌리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발적으로요.”

남자가 미소 짓는다. 아주아주 해맑은 미소. 천사 같은 미소. 천진난만한 미소.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아기의 벙긋벙긋한 미소.

진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까닥 삼켰다. 그러다가 목에 걸렸는지 갑자기 기침이 터져나왔다.

쿨룩, 쿨룩, 쿨쿨룩, 쿨쿨쿨룩, 쿨쿨쿨쿨쿨쿨쿨쿨쿨쿨룩룩룩…….

진규가 끌려간 곳은 지하 몇 층인지 모를 깊은 곳이었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낡고 냄새나는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가 지독하게 낡고 녹이 다 슨 철문을 열자 고약한 냄새가 확 밀려왔다. 썩은 내, 쿠린 내, 똥오줌 냄새 등등.

그곳은 지하 정화조였다. 버려진 정화조. 아주아주 오래전에 버려진 왕 낡은, 끔찍할 정도로 역겨운 냄새에 눈까지도 따끔거려 제대로 뜰 수 없는 그런 거대한 똥통. 똥오줌이 가득 찬 시커멓고 커다란 시멘트 통. 그 안의 출렁출렁한 오물덩이 속에는 똥 썩은 것들과 각종 지저분한 휴지에다 생리대 등등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뿐 아니다. 사람 옷가지나 구두, 신발 등등 여기저기 떠 있고, 가만히 보니 사람 신체 일부 같은 것들도 똥통 여기저기에 떠 있었다. 게다가 곳곳에서는 쥐들이 찍찍거리거나 쪼르르 달려가고 있었고.

아이고…….

진규는 곧바로 토할 것만 같았다.

머리통이 뾰족하고 인상이 얍상해 보이는 말라깽이가 진규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여기 마음에 드세요? 저 속에 시체가 숱하게 들어차 있거든요.”

말라깽이는 냄새도 맡지 못하는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말을 한다.

“원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저 속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냄새를 어떡하냐? 똥오줌 썩는 냄새에 암모니아 냄새 같은 지독한 것들이 마구 뒤섞여 진규의 코를 고문하고 있었다. 진규는 이 냄새가 죽는 것보다 더 싫었다. 물론 찍찍거리는 쥐들은 더 싫었고.

진규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무슨 요구든 다 들어줄 수 있었다. 목숨을 내놓으라면 그것도 줄 수 있을…….

아니지, 그건 안 되는 거고, 그럼 어떻게 한다? 그냥 순순히 저놈들 원하는 대로 다 해주면 되는 걸까? 뭐 그렇다고 살려줄 것 같지는 않다만, 그래도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지만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

좋아, 우선 이쯤에서 항복하자.

“원하는 게 뭐요?”

“당신 목숨.”

얼레? 아까는 살려줄 것처럼 하더만……. 이것들이…….

진규는 멍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말라깽이 뾰족머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돌아선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밖으로 나가는, 다섯 단 정도 되는 계단을 올라간다. 진규는 얼른 뒤따라갔다. 뾰족머리는 문을 열고 나가면서 뒤돌아보며 눈을 찡긋하고 윙크하더니 그대로 문을 닫으려 한다.

진규는 혼비백산해서 뛰다시피 달려 올라가서 막 닫히려 하는 문을 확 밀어 열었다. 그러자 놈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어 진규의 얼굴을 겨눈다.

진규는 멈칫했다. 그리고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그래, 차라리 죽여라.

진규는 가슴을 폈다. 그리고 심호흡했다. 그러자 코를 통해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참기 힘든 역겨운 냄새. 갑자기 진규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는 식도를 타고 올라온다.

그 순간 진규의 입에서 뱃속 오물이 터져나왔다. 우웩! 토악질.

구토물이 놈의 얼굴로 쏟아져 나갔다. 놈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몸을 움츠리는 순간 진규는 발로 놈의 배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그러자 놈이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지면서 손에서 권총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진규는 그 권총을 얼른 집어들고 다른 손으로 입가를 닦으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7


계지선은 마음이 설렜다. 비록 갇혀 있는 몸이긴 하지만 이런 데서 평소 극존경하던 대통령을 만나다니. 물론 상황이 좀 묘하긴 하다. 어딘지 작위적, 아니 인위적? 그것도 아니면 어떤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지만 아무튼 느낌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더라도 이런 낯선 상황에서 대통령이 나타난다는 것은 좋은 징조 아닐까? 왜 영화에서도 그렇잖은가. 마지막 해피엔딩에 대통령이 등장해서 위로해 주고 승리를 만끽하는 장면들……. 하긴 지금 지선의 마음이 설레는 것을 보니 어떤 극적인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상황은 그러한데, 그러나 어딘지 좀 묘했다. 게다가 대통령은 수행원 하나 없이 혼자 나타난 것이다. 혹 가짜나 대용인가 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일단 사람은 분명했고, 인물의 생김생김 역시 영락없이 그동안 각종 언론을 통해서 본 그 얼굴, 왼쪽 눈이 반쯤 감겨 있고 그 위에 흉터가 나 있는 것, 게다가 더 확실한 것은 바로 왼쪽 입 가장자리의 큰 상처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노출하면서도 당당하게 살아온 위대한 인물, 그 얼굴은 바로 그러한 위인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다른 사람일 리 없다. 게다가 큰 키에 호리호리하고도 꼿꼿하며 당당한 모습. 가만히 있을 때도 은은한 미소가 감도는 그 입가.

지선은 마음이 설레면서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의문부호가 연달아 찍히고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붉은 경광등이 계속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흑!

지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지금부터 그동안은 전혀 생각지 못한 엄청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하긴, 지금 이 상황 자체도 엄청난 것이긴 하지만.

대통령은 이제 집 바로 앞까지 왔다. 지선은 저도 모르게 창가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혹 자신이 창문으로 내다보는 장면을 저쪽에서 알아차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지선은 얼른 창문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었다. 어딘지 얼굴도 빨개지는 것 같았다.

똑, 똑, 똑.

아, 노크소리.

그러나 지선의 마음에는 엄청난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어떡해, 어떡해…….

지선은 그 순간 갑자기 지난번 지방선거 때 자신이 대통령의 당에게 퍼부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사실 대통령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선 자신이 당선되기 위해서는 다른 당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공약이야 따지고 보면 이 당이나 저 당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 모두 다 표를 얻기 위한 사탕발림이니까. 따라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공약을 보고 찍어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시류(時流), 즉 선거 당시에 정치판에서 부는 바람이 더 중요하고, 그보다 더 큰 변수는 바로 인물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무엇인가 기대를 걸어 볼 만하다고 여겨지는 인물. 구태 인물이나 신진 인물이나 따지고 보면 죄다 그렇고 그렇다. 단지 그들에게 미래를 걸어볼 만한 느낌이 드는지 아닌지 하는 것, 바로 그 점이 선거판을 좌우하는 변수라고 지선은 생각했다. 아니면 말고.

아니, 지금 한가하게 선거판이나 생각하고 있을 때냐? 지선은 다시금 숨을 죽이고 지금 상황을 더듬어 보았다. 어딘지 모를 숲 속에 갇힌 가련한 여인. 그때 갑자기 나타난 왕자님. 아니, 그런데 왜 백마는 안 타고 왔지? (아이고, 이것아! 지금 네 꼴에 무슨 백마 탄 왕자?)

지선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들려오는 노크소리.

똑, 똑, 똑.

생각해 보니 지선이 머리를 흔드는 것과 노크소리가 착착 박자가 맞게 겹쳐지는 것이었다. 어쭈? 잘 맞는데……. 천생연분? 갑자기 지선은 볼이 빨개지는 느낌이었다.

예, 나가요. 어서 오세요, 왕자님…….

……?

지선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이건.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

똑! 똑! 똑!

이번에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아니면 적어도 스타카토.

맞다. 노크소리가 조금 커진 것이다. 탁탁 끊어진 듯하며. 그러나 지선에게는 정말로 천둥이나 대포소리처럼 들린 것이다.



지선은 침을 꼴깍 삼켰다. 가슴은 두 방망이질 치며.

지선은 몸을 움직여 천천히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 천둥소리가 들려올라 걱정하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고 살며시 열었다. 가슴은 여전히 쿵쾅거리면서. 그리고 볼은……, 여전히 발그레 상기되었을까?

아니지. 그보다는 오히려 창백해지고 있었다. 새하얀 손수건처럼. 마치 다가오는 위험을 순순히 맞이하는 순간처럼.

“계지선 씨.”

부드러운, 솜사탕처럼 달콤한 (솜사탕을 언제 먹어본 적이 있었나?) 아리아리, 그러면서도 우렁우렁한 목소리.

헉!

지선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아니, 적어도 숨이 막히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놈이 왕자가 아니라 악당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으니까.

하, 그런데도 문을 열어주었다고? 아니, 그럼 어쩌냐고? 문 안 열어주면 저 악당이 ‘예, 알았습니다’ 하고 그냥 돌아서서 가버릴 것 같아? 지금 상황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잖아! 그런데 날보고 뭐 어쩌라고?

지선은 겁먹은 얼굴로 대통령을 올려다보았다. 165cm 지선보다 적어도 20cm 뿔자 하나는 더 큰 대통령.

“계지선 씨.”

대통령은 지선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지선은 침을 꼴까닥 넘기며 대꾸할 말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오른손을 내민다. 갸름하면서도 흰 손.

지선도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대통령의 손은 따스했다. 마음도 따스하겠지……?

“뭐 불편하신 것 없었습니까? 제가 특별히 부탁해 놓았는데 부족한 점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뒤로도 대통령은 몇 마디 더 했는데 지선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공포로 두뇌가 얼어버린 것 같았다.

“제가 집 안을 좀 둘러봐도 될까요? 제대로 일들을 해놨는지 원…….”

대통령은 상대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천장이랑 벽 등등을 세밀히 살피면서. 숙녀가 혼자 있는 집을 함부로 들이닥쳐서 말이다.

“아, 여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대통령이 여러 곳을 더듬듯 살피다가 아담한 식탁이 놓은 식당 한쪽 구석에 가서 이렇게 말을 하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껌통이었다. 그러더니 하나를 꺼내어 종이를 벗기고서 입에 넣고 일부러 그러는지 볼을 크게 부풀려가며 질겅질겅 씹는다.

지선이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이에 대통령은 손가락으로 입에서 씹던 껌을 꺼내어 조그만 액자 그림 아래쪽에 갖다붙이고서 꾹 누르는 것이었다.

아…….

지선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카메라 렌즈. 이것들이…….

지선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뿐 아니다 뱃속 저 아래에서 어떤 뜨거운 것이 확 치솟는 것이었다.

“이봐욧!”

대통령이 뒤돌아본다. ‘이봐요? 나 대통령인데’ 하는 표정이었다.

“이거 뭐 하는 짓이에요?”

그러나 이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침이 먼저 꼴깍 넘어갔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눈빛이 너무 강렬했던 것이다.

아니, 난 그저…….

지선이 약간 겁먹은 얼굴로 입속으로 우물우물하는 사이에 대통령이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숙이며 내려다본다.

“저는 대통령입니다.”

아, 아, 알아요, 대통령인 거…….

지선은 입속으로만 우물우물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뭐 불편하거나 부족한 것 있으면 아무 때나 말씀해 주십시오. 거실에 있는 전화기, 거기에서 0번을 누르고 말을 하면 됩니다. 밤낮 아무 때나 말씀해 주시면…….”

대통령은 몇 마디 더 잇는 것 같았는데 지선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기 때문이다. 알지 못할 공포로.

그 뒤 대통령이 여기저기 살피며 몇 마디 더 했는데, 지선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고 오직 ‘다음에 또 찾아뵙죠’ 하는 말밖에 기억에 남지 않았다. 대통령은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가 현관문을 살며시 닫으면서 한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가버렸다.

지선은 맥이 탁 풀려 버렸다. 하지만 잠시 뒤 갑자기 생각이 나서 집 안 구석구석 죄다 몇 번씩 살펴보며 혹 카메라 렌즈가 더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식당 액자 아래의 것 외에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지선은 그 액자를 떼어냈다. 그러나 액자 뒤로는 아무런 선이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 무선카메라 같았다. 지선은 그것을 떼어내어 주방으로 가서 커다란 칼 손잡이 끝으로 마구 내리쳤다. 그러자 마치 바퀴벌레처럼 납작해지고 안의 것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마치 벌레 내장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분이 풀리지 않아 이번에는 공구함을 뒤져서 커다란 망치를 가져와 마구 두들겨 팼다. 모든 부품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지고 납작해질 때까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침도 뱉고 코도 풀어서 갖다 문지르고 싶었지만 그것은 참고) 저주의 말, 욕하는 말, 비아냥거리는 말 등등을 퍼붓고는 그만 맥이 탁 풀려 거실 소파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나니까 괜히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서럽기도 하고.

그런데 대통령은 왜 그렇게 멋있냐 말야, 씨…….

사실 대통령의 모습은 나무랄 데 없는 신사였다. 행동이나 말투, 눈빛 모두 하나하나 다정한 오라버니 같은, 아니 그보다는 먼 데 나라에서 온 다정한 왕자님 같은 그 모습.

악당만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지선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8


강진규는 또다시 붙잡혔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시커먼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죽 둘러서서 진규를 맞았기 때문이다. 진규가 권총을 들어올렸지만 그 남자들 역시 모두 권총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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