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 음모의 탄생
1
계지선은 친아버지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자신의 양아버지는 국정원 요원이었기에 빨갱이와는 상관없다. 그렇다면 어쩌면 친부모가 북한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이번에 지선이 선거에 나오는 바람에 그것을 눈치 채고 폭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친부모가 정말로 북한에서 내려왔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방법은 모른다. 지금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선은 일단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진행하자고 생각했다. 사실 지선은 언젠가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 정확히 알아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막연하게 한참 뒤의 어느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선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정원이었다. 양아버지가 국정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 방면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방법은?
여러 가지를 생각한 끝에 지선은 곧바로 국정원으로 가기로 했다. 자신의 양아버지가 국정원 출신이고, 지선 자신은 지방선거에도 나갔었으니 신분은 확실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근처.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을 합쳐서 부르는 헌인릉. 이 중 헌릉은 조선의 태종과 태종비인 원경왕후가 함께 잠든 곳이고, 헌릉은 23대 왕 순조와 순조비인 순원왕후를 함께 모신 왕릉이다. 한때는 국정원의 위치가 비밀에 속하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인터넷만 검색해도 나온다.
그러나 지선은 먼저 국정원 전화번호 111을 눌러 통화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었다. 양아버지 계용진은 국정원에 근무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국정원은 원래 중앙정보부라는 이름으로 서울 남산에 있었는데, 그 뒤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5년 10월에 내곡동으로 이전했다. 지선은 여러 번 전화를 해서 혹 다른 이름으로 근무했었는지, 또는 국정원과 연결된 다른 기관에서 일했었는지 물었지만 대답은 늘 똑같았다. 모른다는 것이다. 지선은 자신의 양아버지와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날짜까지 언급하며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지선의 양아버지 계용진은 국정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혹시 계용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근무했는지 알아보려고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학력, 주소, 가족상황 등을 말해 주었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국정원에는 그런 인물이 근무한 적이 없다고.
이럴 수가…….
지선은 정신이 아득했다. 당장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야, 무엇인가 잘못됐어. 거짓말이야…….
지선은 자신이 지금 첩보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지금까지 알던 사실이 몽땅 거짓이라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선은 집에서 나와 국정원이 있는 내곡동으로 향했다. 가서 따져야 한다. 양아버지는 틀림없이 국정원에서 일했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곳 직원이 아니었다니. 여기는 분명 음모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무슨 음모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지선은 국정원 입구에서부터 막혔다. 아무리 설명하고 항의하고 애원해도 국정원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담당직원과 전화로 연결해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인사과에서도 대답은 똑같았다. 양아버지는 국정원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정원 비슷한 다른 기관에서 근무했나? 하지만 어디에서?
지선은 여러 경로를 통해 양아버지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심지어 국세청에서도 양아버지는 단 한 번도 세금을 낸 기록이 없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외무부에 출입국 기록을 확인했으나,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하도 여러 번 붙들고 늘어지자 그러한 기록조차 없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등록상은 분명 존재했었던 사람이다. 사망신고를 했으니까.
지선은 다리가 풀리고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자신이 무서운 음모에 휩쓸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러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이 일을 풀어나가야 하는 거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기에 지선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지를 않나, 양아버지의 경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지를 않나, 소설이나 영화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지선은 멘붕 상태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껏 거의 완벽하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선은 모든 면에서 철두철미하고 자신감 넘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바보, 그렇다 바보가 된 느낌이다. 완전 바보.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
한 시간 이상 그런 상태로 앉아 있다가 지선은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내가 세상을 너무 몰랐구나. 그동안 공부만 한답시고 부모님에 대해서나 이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너무 무심했어. 이런 정신상태로 정치를 한답시고 나섰으니, 혹 지난번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아마 엉망진창으로 해나가다 엄청난 혼란만 일으키고 큰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차라리 낙선된 것이 지선 자신은 물론이고 정치세계에서도 큰 다행이야. 온실 속에서만 자라 세상물정 어두운 인간이 무슨 정치를 하겠다고…….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나가긴 했으나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일단 빨갱이란 말을 들은 이상 대한민국에서는 제대로 존재감을 나타내기 힘들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모님에 대한 것은 물론 그 부분도 해결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더 급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이 부모님의 일과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을 테니까.
지선은 양아버지가 남긴 유품들을 세밀히 살피기로 했다. 양아버지에 대한 모든 서류는 커다란 상자 몇 개에 넣어서 보관해 두었다. 양아버지는 아주 꼼꼼한 성격이었다. 사진은 물론 아주 작은 영수증부터 크고 작은 문서나 서류들을 모두 클리어 파일에 넣어서 보관해 두었다. 사진 앨범 말고도 그렇게 해서 만든 두툼한 서류철이 10권이 넘었다. 그 서류철마다 가족이나 여행, 병원, 취미 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낙심 반, 그러나 한편으로는 혹 어떤 단서라도 나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선은 그 서류철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단서인지조차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엇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지선은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가며 넘겼다. 하지만 무엇을 찾는지,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헛수고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자료가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자잘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혹 나중에 다시 살펴보아야겠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따로 빼놓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무엇이 의심스러운지도 모르는 채 그저 느낌만으로 빼놓은 것이 수두룩했다.
이런 식으로 몇 시간에 걸쳐 자료 전체를 다 훑어본 뒤 이제는 별도로 추려놓은 것을 살피려 하자 이번에는 그냥 맥이 빠져 더 이상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의미 없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지선은 침대에 가서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래가 분홍빛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그저 암담할 뿐이다. 게다가 괜히 한국에 들어왔다는 후회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안정적인 직장과 그런대로 괜찮은 평판을 얻고 있었기에 그것을 기반으로 충분히 넉넉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저것 죄다 초라하게 되었다. 물론 당분간은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아무런 미래가 없다.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일까? 미래의 삶을 위해 나서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런 근거나 전조도 없이 툭 튀어나온 빨갱이란 말에 매달려야 하는 것일까?
그 순간 지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빨갱이!
지선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스크랩북을 한 곳으로 모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지루할 정도로 한장 한장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가며 북한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생각을 하고 찾아보니 눈에 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약간 실망하며 자료들을 넘기다가 지선은 문득 양아버지의 앨범에서 지나치듯 보았던 한 장의 사진이 머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사실 아주 평범한 사진이다. 자갈밭에서 아버지와 어떤 남자가 나란히 서서 찍은 모습. 그 남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양아버지는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분위기였다. 그리고 두 사람 뒤편 저쪽에 어떤 남자의 옆모습이 작게 찍혀 있었다.
지선은 얼른 그 사진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들여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 남자. 양아버지 옆에 선 남자.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양아버지와 관련된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 아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었을지 몰라도 그런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는 없다. 아주아주 충격적인 일이어서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 아니라면.
지선은 사진에서 고개를 돌리고 잠시 눈을 감고서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다.
사진 생각은 하지 말고 다른 생각들을 해보려 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 이럴 경우 어떤 생각을 해야 하나? 다른 생각이 나기나 할까……? 그래도 억지로라도 생각을 돌려보려 했다. 어제 무슨 일을 했지? 국정원에 전화해서 매달린 것 말고. 마트에 갔었지.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갔었지. 오늘은 왜 간 거지? 아, 생수를 사러 갔었구나.
지선은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콜라 병 크기의 작은 플라스틱 병. 물이 반쯤 들어 있었다. 지선은 물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고 입에다 들이붓듯이 마셨다. 갑자기 가슴 속과 뱃속이 시원해진다. 게다가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냉수를 한껏 들이켜고 나니 헛배가 불러온다. 그러고 보니 아침은 아주 간단히 해결하고 점심은 거른 상태다.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을까……?
지선은 주방을 가로지르다가 아무런 생각 없이 벽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
지선은 그대로 멈춰서서 거울 속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네 얼굴……, 어디에서 보지 않았니?
우리 어디에서 만나지 않았어?
……?
지선은 얼른 돌아서서 탁자에 펼쳐놓은 앨범으로 갔다. 그리고 그 사진, 양아버지와 어떤 남자가 함께 찍은 사신을 들여다보았다. 빤히. 사진이 뚫어질 정도로.
그러다가 그 사진을 들고 다시 거울 앞으로 갔다. 사진 속의 아주 작은 얼굴. 그 얼굴을 지선 얼굴 옆으로 놓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두 얼굴. 하나는 큼직한 처녀의 또렷한 얼굴. 또 하나는 옛 사진 속의 아주 작은 얼굴. 얼핏 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두 얼굴. 그러나 지선은 본능처럼 알아차렸다. 두 얼굴은 닮은 것이다. 사진 속 양아버지 옆 남자와 사진 밖의 지선 얼굴. 남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본능은 알아차린 것이다. 눈매, 이마, 콧날, 턱 등이 닮았다는 것을.
수십 년 세월을 뛰어넘은 두 사람의 모습. 하나는 남자, 또 하나는 여자. 남자는 중년의 모습, 여자는 20대 중반. 게다가 각각 다른 세상에서 살았기에 각각 다른 개성을 보이는 두 얼굴. 하나는 현실 세계의 입체적인 얼굴, 또 하나는 평면화된 사진 속의 얼굴. 거기다가 어쩌면 20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의 간격이 있을지도 모르는 얼굴. 그리고 또 하나, 하나는 현실의 살아 있는 얼굴. 그러나 또 하나는 혹 지금은 현실에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를 얼굴. 그러면서도 그 두 얼굴은 마치 지남철처럼 강하게 서로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지선은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과 사진 속의 또 하나의 자신일지도 모를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2
계지선. 26세. 한국 국적.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에서 공부. 미국 서부의 명문인 LA의 스탠퍼드 대학과 동부의 명문인 케임브리지의 하버드 대학원 졸업. 경영학 석사(MBA). 미래를 이끌어 나갈 한국인 청년 여성 100인에 선정. 그러나 현재는 무직.
지선에게는 당분간 생활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는 있다. 앞으로도 평범한 직장생활을 한다면 평생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상류층으로 진입할 수도 있겠지. 외모 또한 그리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다면 모를까 대한민국에서는 다소 불편하게 되고 말았다. 일단 발을 들여놓은 정치판에서 혹 사상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면 장래가 편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묘한 일에 엮이고 말았다. 아니, 스스로 엮인 것이다. 사진 한 장으로 인해서.
양아버지의 앨범 속 사진 한 장. 두 남자가 찍힌 사진. 한 사람은 양아버지의 젊었을 때의 모습. 그리고 또 한 사람인 그 젊은 남자는 분명 지선과 혈연관계일 것이다. 얼굴 모습이 너무도 닮은 것이다. 한 사람은 남자고 또 한 사람은 여자이지만, 두 사람의 이목구비는 한눈에도 혈연관계임을 보여준다.
혈연관계…….
양아버지와는 피 한 방울 안 섞였다. 그런데 그 옆에 서 있는 사람과는 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사진 상으로는.
그것은 그렇다 치고,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추리소설이나 첩보영화라면 이 경우 어떻게 진행될까? 하긴 그런 영화나 소설은 결론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 스토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 갑자기 등장한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냐고? 게다가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게 될까? 스릴러? 멜로드라마……?
지선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농담 따먹기나 할 때가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야, 현실.
좋아.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아주아주 평범하게.
두 사람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친아버지이고, 또 한 사람은 양아버지라고 가정하자.
두 사람은 평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자기 딸을 맡겼겠지.
두 사람은 그 사진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어디에서 사진을 찍었는지, 그 사진을 찍은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지선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국정원에는 이름이 없는 정보원 출신이다. 그리고 어느 날 사고로 죽었다. 살해되었나? 두 분 모두? 게다가 그 뒤에는 엄청난 음모가 깔려 있고……?
아마도 이 가정이 맞을 것이다. 제대로 설명되지는 않겠지만.
어처구니없는 현실.
게다가 이러한 사실을 어느 누군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선에게 빨갱이라고 소리쳤겠지. 그런데 왜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그런 거지?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협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게다가 무슨 목적일까? 단지 지선을 매장시키기 위해서? 지선이 매장되면 저들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사람……,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지? 무슨 이유일까? 무슨 목적일까? 그리고 그 사람은 누구일까?
지선은 방송국 PD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 바빠서 그런가? 아니다. 지선은 알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지선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그래, 이해해 주자. 빨갱이와 엮여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혹 저 사람들은 지선이 다시 방송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를 것으로 여긴 걸까? 천만에.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은 지선도 알고 있고 저들도 알고 있다. 그럼 지선은 왜 방송국에 전화한 걸까?
정말 왜 전화한 거지? 지선을 피할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래, 피하겠지. 그게 정상이니까.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니? 왜 하필 방송 첫날 첫 전화가 그 사람일까?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 방송 전에는 지선이 출연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방송국 사람 외에는.
그렇지, 정말 이상하지?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많이.
사실 그 방송은 외형상으로는 좀 멋진 그림이 될 수도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좋은 직장 다니다 한국에 와서 대한민국 청년 여성 100인에 선정되어 선거에 나갈 때만 해도 날개를 단 것 같았으니까. 선거에서 아슬아슬하게 낙마했을 때만 해도 여전히 미래는 장밋빛 속에 들어가 있었다. 방송에까지 나가게 되고. 그런데 여기에 누군가가 끼어든 것이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니, 끼워맞춘 것처럼.
끼워맞춰?
끼워맞췄다고?
일부러?
계획적으로?
누가? 누가 그런 거지?
그리고 나중에는, 하긴 단 한 번 출연했을 뿐이지만 곧바로 버린다고? 그것도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빨갱이로.
이거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지선은 그 사진을 카메라로 찍은 다음 컴퓨터에 넣어서 크게 확대했다. 실물 크기로. 그러자 인물이 흐릿해졌다. 지선은 앞쪽 두 사람 말고 저 멀리에서 찍힌 다른 남자에게 초점을 맞췄다.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그 사람 부분을 별도로 잘라내어 사진 보정 앱으로 확대한 뒤 실물 크기로 인화했다. 물론 흐릿해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그런데도 어쩐지 그 사람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만 같았다. 괜한 생각이겠지만.
지선은 그 사진을 벽에 붙여놓았다. 그리고 사진 앞을 지나가거나 여러 각도로 쳐다보고 하면서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3
지선은 반(半)변장, 반(半)잠복하다시피하고 방송국 근처를 맴돌면서 그 여자 PD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지방 방송국이라 건물은 크지 않았고, 주차장이나 그 주변도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이 지선에게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많은 사람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그 PD가 나타나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록 그 PD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지선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졌다. 그 순간 갑자기 가슴 한복판이 얼음으로 채워지듯이 싸늘해지며 죄어오는 것이었다.
혹시 내가 여기 와 있는 것을 눈치 챈 걸까?
그렇다면…….
지선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방송국 그 부서로 전화했다.
“어머, 지선 씨, 웬일이세요?”
웬일?
“PD님 계세요?”
지선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르셨어요?”
뭘?
“교통사고로…….” 뭐? “돌아가셨잖아요.”
지선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버티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PD는 지선이 방송에 나간 날 밤에 자신의 승용차로 퇴근하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주운전 덤프트럭에 받혀 즉사했다. 상대방도 즉사. 양쪽 차 운전자가 모두 죽은 것이다. 게다가 그 남자는 안전띠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과속으로 달리다가 중앙선을 넘었다. 20대 초반의 상대 운전자는 덤프트럭 면허를 따고 나서 첫 번째 운행에서 그런 사고를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그 PD 역시 면허취소 수준의 음주에 과속으로 밝혀졌다. 차 안까지 술 냄새가 배어 있을 정도로.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지선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이 말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 아냐, 뭔가 잘못되었을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안 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거야. 안 돼, 안 돼, 안 돼…….
비틀비틀, 거의 혼비백산한 채 오피스텔로 돌아온 지선은 문득 생각이 나서 인터넷으로 그 PD의 이름을 쳐보았다. 혹 기사가 나온 것은 없는지, 혹 자신이 잘못 듣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혹 그 교통사고가 아니라 다른 어떤 음모가 끼어들었던 건 아닌지 하는 마음에. 그러나 확실했다. 아주 짧게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방송국 사람이 말한 대로 한쪽은 음주운전, 다른 쪽은 과속에 중앙선 침범으로 사고가 난 것이었다. 게다가 누가 올렸는지 사고 당시 어느 자동차의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까지 올라와 있었는데, 기사 내용대로 그 PD의 차 역시 과속이면서도 비틀비틀거리다가 한 순간에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덤프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왼쪽으로 튕겨나가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여기에 어떤 조작이나 인위적인 것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이 사건은 언론사인 방송국 PD가 사망한 일이니만큼 경찰에서도 세밀히 검토했을 것이다. 만일 조그마한 의문점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이슈화되지 않았겠는가.
그날 밤 지선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악몽이 연속되면서 식은땀을 잔뜩 흘린 채 잠에서 깨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겨우 한 시간 반이 지났을 뿐이다. 그리고 창에 친 블라인드 사이로 부옇게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좁은 오피스텔 속으로 파고든 희뿌연 세상. 마치 가위 눌리듯 그 음울한 공간에서 온몸이 굳은 채 반투명한 자신의 의식을 흐릿하게 응시하는 지선. 정신은……, 마음은 그러나 오히려 맑은 유리처럼 투명해져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되어 그 위로 떠 있는 공간들을 투영하고 있다. 양아버지가 남긴 사진 속 두 사람, 그리고 그 뒤로 멀리에서 찍힌 또 하나의 인물,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화기에서 찢듯이 튀어나온 빨갱이라는 말,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음주운전으로 세상을 떠난 PD……. 이들 세 사람이 추상화가 되어 지선의 눈앞 희뿌연 공간에서 뒤얽혀 떠돈다.
왜, 왜, 왜……. 그 사람은 죽었을까? 그 PD 말이다. 꼭 죽어야 했을까? 안 죽으면 안 되는 걸까……?
논리도 이유도 없이 이러한 질문들이 지선의 눈앞에서 흘러간다.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그 모습이 변하면서. 질문들의 모습. 무형이 구체화된 유형으로 몸을 바꾸어 지선의 눈앞 흐릿한 공간에서 떠도는 것이다.
문득 지선은 양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 양부모가 탄 차가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음주운전 승용차와 맞부딪히며 사고가 났다. 두 분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상대방 운전사 역시 현장에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뒷일은 경찰과 보험회사에서 처리했기에 지선은 자세한 사항은 모른다. 단지 상대방 운전사가 음주운전에 초보자였다는 것 말고는.
음주운전……. 지난번 사고 때는 상대방 운전자가 음주운전이었는데, 이번에는 이쪽 PD가 음주운전이다. 두 사건을 억지로 꿰어맞춘다면 음주운전이라는 공통점이 나타난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
첫 번째 음주운전 사망사고는 5년 전. 당시는 지선의 양부모가 사망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송국 PD.
혹 공통점은? 또는 합집합 같은 것은?
그래, 억지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가해자나 피해자 중 한쪽이 음주운전이라는 공통점. 하지만 사실 음주운전 사고는 종종 일어나는 편이다. 게다가 그 PD는 지선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다. 전화를 받고 나서 딱 한 번 방송국에서 본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음주운전 말고 혹 다른 공통점은 없을까? 사망이나 살인과 관계없는 것이라도. 사실 억지로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그 두 사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죽음이라는 공통점은 있는 것 아닌가?
죽음…….
왜 갑자기 죽음이 나타난 것이지? 지금껏 살자고 기를 쓰고 여기까지 왔는데, 왜 죽음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거냐고?
아니, 그것보다도 지금 당장 그 PD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이 지구상에서 하루에도 수백, 수천, 수만 명이 교통사고로 죽을 텐데 그중 한 죽음이 꼭 나와 연결될 이유가 무엇일까? 애도하거나 자책할 필요도 없는 죽음을.
핸드폰이 울렸다.
지선은 깜짝 놀라서 펄쩍 뛸 뻔했다. 사실 자신에게 특별히 전화해야 할 인물은 없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치권에서건 경제계에서건 이제는 별 가치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되었기에. 이제는 오히려 지선 자신이 여기저기에 전화하며 찾아다녀야 할 입장이다. 정치라는 것은 원래 모 아니면 도다. 선거에서 지면 개밥의 도토리 신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선도 그 정도는 안다. 게다가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빨갱이 소리를 들었는데 누가 가까이하려 들까? 혹 지선을 이용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하지만 그것도 좀 의문이다. 아직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지선이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말이다.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니 방송국이다. 아까 지선이 걸었던 그 번호.
지선은 저도 모르게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계지선 씨 되시죠?”
모르는 목소리. 남자.
“네, 그렇습니다만.”
“저는 음악세상만사 프로의 막내 되는 사람입니다.”
“아, 그러세요. 지난번에 제가 갔을 때 만났었나요?”
“그때는 제가 출장 갈 일이 있어서 방송국에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저, 실은……. 알려드릴 것이 하나 있어서요…….”
지선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면서도 어딘지 경고등이 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출연하셨을 때 어떤 남자가 전화해서 이상한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때 좀…….”
“저, 실은……. 그 사람 제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요.”
지선은 신경이 뾰족해졌다.
“그 사람, 꽤 유명한 친구예요. 사람들 엿 먹이는 걸로.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것하고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제가 듣기로는 누구한테서 돈을 받은…….”
그 순간 전화가 끊어졌다.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전화를 끊은 것처럼.
지선은 그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간다. 그러나 전화벨 소리가 한참 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다가 끊어진다. 지선은 한 번 더 그 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도 역시 신호는 가는데 응답이 없다.
좀 의아하긴 했지만 지선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저쪽에서 또 연락하겠지 하는 생각에.
하지만 그날 저녁 핸드폰 뉴스 검색을 하다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사 제목을 보았다. 속보로 뜬 뉴스였다. 그 방송국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지선은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으로 그 기사를 눌렀다.
아…….
안 돼…….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음악세상만사 프로그램 비정규 직원인 하연수가 목에 칼이 찔린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기사였다. 피해자는 물론 사망했는데, 사후 네 시간 정도 지나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방송국 한 방의 캐비닛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 가장 기본적인 구역만 제외하고는 방송국 내 모든 시설에 경찰이 들어가서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망시간을 짐작해 보니 지선과 하던 통화가 갑자기 끊어진 시점과 비슷했다. 지선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핸드폰도 잡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등골에서 한기가 쫘악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지선은 책상으로 사용하는 커다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으나 몸이 굳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지선은 경찰에 알려야 하나 생각했다. 어쩌면 경찰이 방송국 전화의 통화기록을 모두 조사해서 그 시간 무렵에 통화를 한 지선에게 연락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그 사실을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지 않았다간 오히려…….
지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여기엔 뭐라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숨겨져 있어. 그렇지 않고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거야. 전화로 빨갱이라고 말한 사람……. 또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다며 전화한 사람……. 그리고……, 지선이 방송에 나간 바로 그날 PD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 게다가 이번에는 지선에게 전화한 사람이 살해된 것……, 이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는 거야…….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