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 어둠의 탄생
1
강진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가운데 눈을 떴다. 어둠. 아무것도 안 보인다. 퀴퀴한 냄새.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선율. 바이올린. 음……. 머리를 흔들고 귀를 잠시 기울이니 어딘지 익숙한 곡 같은 느낌. 아, 맞다. 그 곡. 베토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 9번 크로이처. D장조 Op. 61. 2악장 라르게토. 진규는 머릿속으로 그 음을 쫓아갔다. 뒤죽박죽된 머릿속에서 어딘지 정다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음률.
아……. 그래, 저 곡……. 추설희가 가장 좋아했던 곡 중 하나다. 추설희는 진규를 위해서 여러 곡을 연주해 주었는데, 그 중에 이 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에서 음대에 다니며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추설희.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시 바이올린에 푹 빠져 있던 북한 고위층의 눈에 들었고, 그로 인해 어처구니없게도 대남공작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끈거리는 가운데 눈을 떴다. 어둠. 아무것도 안 보인다. 퀴퀴한 냄새.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선율. 바이올린. 음……. 머리를 흔들고 귀를 잠시 기울이니 어딘지 익숙한 곡 같은 느낌. 아, 맞다. 그 곡. 베토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 9번 크로이처. D장조 Op. 61. 2악장 라르게토. 진규는 머릿속으로 그 음을 쫓아갔다. 뒤죽박죽된 머릿속에서 어딘지 정다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음률.
아……. 그래, 저 곡……. 추설희가 가장 좋아했던 곡 중 하나다. 추설희는 진규를 위해서 여러 곡을 연주해 주었는데, 그 중에 이 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에서 음대에 다니며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추설희.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시 바이올린에 푹 빠져 있던 북한 고위층의 눈에 들었고, 그로 인해 어처구니없게도 대남공작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왜……, 왜 저 곡이 흘러나오는 거지……? 혹시 설희……? 설희가 여기에 있나?
진규는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가 더욱 지끈거린다. 바늘로 푹푹 찌르듯……? 아니야……, 그보다는 머릿속이 폭탄이 터진 뒤 그 잔해들로 마구 뒤엉켜 있는 듯한 느낌. 그래, 바로 그거다. 파편. 머릿속이 온갖 파편으로 가득 찬 것. 그 파편들이 이리저리 튀면서 머릿속을 마구 찌른다. 그리고 그 파편들 사이사이로 바이올린의 선율이 구불구불 휘어져 흐르고 있는 것이다.
설희……, 설희…….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지?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진규는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맞아. 주차장. 건물 뒤쪽.
진규는 눈을 떴다.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안고.
어둠침침한 공간. 창문 없는 방 같았다. 지하실이나 폐허 같은 곳.
이제 생각났다. 진규는 암호를 받고 서점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간판 입간판이 15도 왼쪽으로 돌아가 있으면 건물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 뒤편의 작은 주차장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는 진규가 부탁한 정보를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입간판이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으면 위험신호가 된다.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 여의도가 아닌 제2의 아지트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날 밤 입간판은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가장 믿을 만한 동료에게서 온 반가운 표시. 진규는 그 얼마 전에 국정원 내의 유일한 동료, 그동안 여러 번 서로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어 국정원 내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게 해준 동료에게 한 가지 정보를 부탁해 두었었다. KD-12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KD-12는……, 사실 진규 자신이었다. 그러나 국정원 내에서는 코드명으로만 되어 있어서 KD-12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최고위층이 아니면. 하지만 최근 국정원에서 비밀리에 KD-12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바로 그 동료에게. 사실 그 친구는 그때까지 KD-12가 누군지 모르고 있었으며, 진규는 국정원에서 자신에 대한 체포 지시를 그 친구에게 내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그 친구만이 진규의 영등포 서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차마 자신이 직접 진규를 체포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동료에게 진규의 서점에 대해 알려준 것이다.
진규가 주변을 둘러보자 낯선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드나 보지?”
음침한 목소리를 좇아 침침한 눈을 돌리니 한 거구가 보였다. 짧게 자른 머리. 그러나 얼굴은 부드러워 보였다.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가는 눈만 빼면. 목소리와 눈이 잘 어울리는 느낌.
“죽지는 않을 테니 천천히 일어나 봐.”
그러고 보니 진규는 바닥에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철제 군용침대 매트리스 같은 곳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진규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팔꿈치를 대고 윗몸을 조금 일으켰다. 약간 머리가 핑 도는 느낌. 진규는 그대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나 알지?”
진규는 이 말에는 반응하지 않고 주변상황을 확인했다. 남자 셋. 얌전하게 생긴 두 사람은 모르는 얼굴. 그러나 진규에게 말을 건 남자는 몇 번 본 사람이다. 국정원에서.
진규는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몸집이 크고 다소 우락부락한 모습이지만 어딘지 지적으로 보이는 얼굴. 그래, 맞다. 한상일 차장이 특수임무과 차장으로 가기 전에 그 밑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지금은 어느 부서인지 모른다. 아마 미국과 캐나다에서 연수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것이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한 차장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꽤 고지식하지만 실력은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약간은 정의파. 아마도 부친이 정부 고위관료 출신일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왜 여기에 있지? 그리고 나는 또 어떻게 된 거야?
지끈거리는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의문이 맴돈다.
진규는 자신으로서는 가장 믿을 만하다고 여긴 친구에게 자신의 도피처인 서점과 아파트를 알려주었다. 급할 때 연락할 수단으로. 그리고 그 친구에게 추설희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또한 이석윤 팀장 방에 있었던 검은 옷의 여인에 대해서도.
아……, 추설희. 이제 생각난다. 추설희. 그녀는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진규가 추설희를 언급한 순간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진규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으으으으…….
“타이레놀 두 알 갖다줘.”
그놈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 친구……. 그래, 맞아. 이름이 김이웅. 갑자기 이름이 생각났다.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진규의 눈앞에 떠오른다. 명확하게. 머리는 아직도 지끈거리며 아픈 가운데에서 불이 확 켜지는 느낌이다.
저놈과 그 친구, 대학 동기동창이면서 둘 다 한상일 차장 밑에서 일했었다.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있었던 거문고자리 작전 때 둘 다 큰 위험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왔다. 그곳에서 중국의 이중첩자와 접선하다가 오히려 납치되기 직전에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도망쳤는데, 그때 그 정보를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진규였다.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건가……?”
진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안하게 됐어….”
정말로 미안한 목소리.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라는 느낌.
“왜 이러는 거야?”
“이유 없어.”
“그럼 뭐야?”
“추설희.”
진규는 머리를 치켜들며 김이웅을 노려보았다. 머리가 더욱 쑤셔온다.
뭐? 추설희?
하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머리가 아파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추설희라는 이름이 너무 쉽게, 또한 너무 빨리 등장한 것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 그 이름. 사실 진규는 좀 전에 깨어날 때부터 왠지 모르게 추설희라는 이름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어딘지 직감?
“설희…….”
“너 추설희를 찾고 있었잖아.”
“…….”
“네가 모르는 게 많아.”
“짐작하고 있었어.”
“안됐지만 모든 게 끝났다. 넌 곧 죽어.”
“추설희 얘기나 해봐.”
“모르는 게 좋다. 별로 안 좋은 얘기다.”
“살아 있니?”
“글쎄…….”
“부정하지는 못하는구나.”
“긍정도 못 하지.”
김이웅이 싱긋 웃듯이 대꾸한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잘 몰라.”
“누가 시킨 건가?”
“알 필요 없어.”
“너한테 부탁하지 않았어.”
“알아.”
“손정만은 어디에 있어?”
손정만은 진규가 추설희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은밀히 부탁했던 바로 그 친구다. 진규가 가장 믿을 만하다고 여겼던 친구. 진규가 여러 모로 도와주었던 친구. 영등포 중고서점 뒤에서 만나기로 했었던 바로 그 놈.
“글쎄.”
“둘 다 같은 편인가?”
“글쎄.”
“나 어떻게 할 거야?”
“……. 글쎄.”
김이웅은 살짝 미소를 지은 뒤 좀 지루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돌아서서 뒤에 있는 두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데 진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보다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갑자기 머리가 폭발하듯이 아팠기 때문이다.
“니네들……, 나한테……, 주사 놨냐……?”
하지만 이 말은 제대로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만 나올 뿐. 갑자기 머릿속이 뒤집히고 뱃속이 난동을 피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뒤 진규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러면서 몸이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진규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불빛 환한 방이었다. 진규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하얀색이었다. 자신이 누워 있었던 자리는 철제 침대. 한쪽 벽 쪽으로 단출한 서랍장 같은 것이 보인다. 그 옆으로는 간이세면대와 변기. 그 옆쪽 벽면에 문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꽉 잠긴 문. 창문이 없는데도 공기가 텁텁하지 않은 것을 보니 환기는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진규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연푸른색의 환자복.
진규의 머릿속으로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신병원.
2
일주일 뒤 진규는 처음으로 의사를 만났다. 이틀 뒤 진규의 방으로 한 의사가 경비요원인 듯한, 안경을 쓴 사람을 대동하고 찾아왔다. 그 일주일 동안 진규는 거의 잠만 잤다. 아마도 수면과 관계된 약을 먹인 것 같았다. 그런 탓인지 끊임없이 악몽과 몽롱 속에서 밤과 낮을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처음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지금 의사가 온 것이다.
“오늘 기분이 좀 어떻습니까?”
의사는 이렇게 말해 놓고서 진찰할 의도는 없는지 눈도 맞추지도 않고 진규 뒤쪽의 하얗게 칠해진 벽 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그런데 그 표정이나 억양이 오늘 처음 만나는 환자를 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진규로서는 처음 본 사람이지만, 의사는 진규를 아주 잘 아는 느낌이다.
“나 아십니까?”
“네? 무슨 말……?”
“내가 누군지 아시냐고요.”
“네……?”
의사는 당황한 얼굴이다. 그러자 의사 뒤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선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약간 경직되어 있고, 양복을 입었는데도 어딘지 제복 같은 느낌이 든다.
“검사받아야 할 게 있어서 함께 가야겠습니다.”
“무슨 검사를…….”
그러나 진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남자가 진규의 한쪽 어깨를 잡고 우악스럽게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나가시죠.”
의사는 약간 당황한 얼굴이다. 예상했던 장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를…….”
이번에도 진규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남자가 등을 확 밀었던 것이다. 진규는 살짝 앞으로 고꾸라지듯이 발을 내디뎠다. 그 바람에 의사도 놀라서 옆으로 비켜선다. 그 순간 진규가 팔을 벌려 허우적거리는 듯하더니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 그 탓에 의사는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고, 그와 동시에 진규는 더욱 강하게 가운을 움켜잡았는데, 그로 인해 이번에는 의사가 균형을 잃으며 옆으로 살짝 쓰러지는 것 같았는데, 마침 그 옆에서 있던 남자가 의사를 피한다며 침대 쪽으로 몸을 비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쿵!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남자가 넘어지면서 침대 옆에 있는,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 것인지 모를 나무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다. 겉보기엔 살짝 부딪친 것 같았는데, 남자는 그대로 나무상자 옆으로 나뒹굴며 쓰러지고 말았다.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진규는 깜짝 놀라서 붙잡고 있던 의사의 옷을 놓고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의사도 몸을 추스르며 곧 균형을 잡더니 곧바로 남자를 내려다본다.
? ? ?
의사는 얼른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남자의 얼굴을 더듬으며 상태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숨을 쉬고 있는지 코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얼굴에 강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 있던 진규를 밀치면서 남자의 몸 위로 올라가 인공호흡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진규에게 소리지른다.
“빨리 나가서 방 밖에 있는 비상벨을 누르고 사람을 불러요!”
진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멈춰서고 말았다. 온통 흰색의 복도, 그 양옆으로 나란히 나 있는 방문들. 그 문들에는 작은 유리창과 그 밑으로 번호판이 붙어 있었으며 문틀 바로 옆에 벨이 붙어 있었다.
진규는 벨을 눌렀다. 여러 번. 그러자 복도 안으로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진규는 복도 양쪽 끝을 흘끗 쳐다본 뒤 방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인공호흡을 계속하고 있었다. 진규는 의사를 밀쳐냈다. 의사는 깜짝 놀라며 뒤로 넘어진다. 진규는 남자의 윗도리를 홱 젖혀서 벗기더니 남자의 바지 주머니도 뒤져서 핸드폰과 지갑 그리고 차 열쇠를 빼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서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흘끗 뒤돌아보자 의사가 다시 남자 몸으로 올라가 인공호흡을 하려는 것 같았다.
진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긴 복도 한쪽 끝으로 걸어갔다. 복도에서는 벨이 여전히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제야 복도 저쪽 끝의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진규는 몸을 옆으로 돌려 활짝 열려 있는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환자가 쓰러졌어요. 의사 선생님이 인공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3
진규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채 국정원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을 걸지는 않는다. 진규는 긴급지원팀으로 갔다. 도중에 아는 사람도 만났지만 그냥 미소만 지어주고 지나쳤다. 긴급지원팀 팀장실 앞에서 잠시 선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노크를 하려고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때 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이석윤 팀장과 방첩공유센터의 특수임무과 한상일 차장이 동시에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진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멈칫한다.
진규가 오른손가락 둘을 눈썹에 갖다대며 경례하는 동작을 취했다.
“저 대령했습니다.”
진규는 한상일 차장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를 모셔오라고 하셨다면서요?”
한상일 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석윤 팀장이 고개를 돌려 한상일을 쳐다본다. 무표정한, 그러나 의문이 들어가 있는 표정으로. 한상일은 얼굴이 무표정한 채 이석윤의 눈길을 피한다.
진규는 앞의 두 사람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방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뜻밖에도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뒷모습이 살짝 보이는 것이었다. 지난번 이 방에 왔을 때와 아주 똑같은 장면.
진규는 한상일 옆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한상일이 몸을 움직여 막는다. 하지만 진규는 손을 들어 한상일의 몸을 밀치려 했다. 그러자 한상일은 포기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 쪽으로 몸을 살짝 돌린다. 진규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몸이 스르르 돌아가면서 진규 쪽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어딘지 어색한 동작.
? ? ?
그런데 여인은 얼굴이 없었다. 아니,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새하얀 가면. 눈만 뻥 뚫려 있어서 그곳으로 눈이 보였다. 강렬한 눈빛.
진규는 멈칫했다.
“당신 누구야?”
그러나 여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때 한상일 차장이 진규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한다.
“마네킹하고 싸울 건가?”
진규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아무튼 축하한다. 도망쳤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여긴 왜 온 거야? 아주 멀리 가버리지.”
진규는 몸을 돌려서 한 차장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추설희를 어떻게 한 겁니까?”
“뭘 어떻게 해? 저기 서 있잖아.”
“추설희가 죽은 건 아니지?”
“따라와.”
한 차장은 몸을 돌이켜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러자 이석윤 팀장이 진규 앞으로 와서 말을 건넨다.
“사정이 좀 복잡하게 됐다. 너에 대한 것은 나도 방금 들었다. 일단 같이 가자.”
“저 피의자 신분인가요?”
“좀 복잡해.”
“저 마네킹은 뭡니까?”
“그것도 좀 복잡해. 제기랄.”
“지금 뭐하는 겁니까?”
진규의 언성이 높아졌다.
한상일 차장이 돌아다본다. 그리고 톡 쏘듯이 말한다. 아무런 억양도 없이.
“여러 가지로 미안하게 됐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규가 한 차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그러자 진규는 이석윤 팀장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말해 주시죠.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우리가 아주 곤란해졌다.”
“…….”
“미안하게 됐다.”
이번에는 한 차장이 뒤돌아보고 대답한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됐어.”
한 차장의 표정이 굳어진다. 어딘지 낭패스러운 느낌.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한 차장은 다시 몸을 돌려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러자 이 팀장이 진규에게 따라오라는 눈빛을 하며 한 차장 뒤를 따른다.
진규는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시 함정? 그러나 이 팀장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 팀장은 지금까지 진규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진규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팀장 말에 의하면 자신도 이번에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일을 안 것일까? 그리고 곤란해졌다는 뜻은……?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진규는 이 팀장의 뒤를 따라갔다.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지하 3층의 한 방이었다. 진규는 그런 방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문을 열자 조명이 약해서 그런지 어슴푸레한 짧은 복도가 나타나고 그 맞은편에는 또 다른 문이 육중한 모습으로 닫혀 있었다. 한 차장이 그 문으로 다가가서 월패드 같은 것 앞에 선다. 그러자 문 전체가 TV 화면처럼 환하게 밝아지며 복도까지 밝힌다. 진규는 눈이 부셔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더니 곧바로 복도의 위와 옆 전체가 옅은 형광 빛을 띤 푸른색으로 변한다. 그렇게 3초 정도 지났나 싶었을 때 어디선가 살짝 웅~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몸이 살짝 들뜨는 듯한 느낌. 마치 엘리베이터가 급히 내려가는 느낌이랄까.
약간 현기증을 느낀 뒤 발 아래쪽에서 저항감이 느껴지며 웅~ 하는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곧바로 앞쪽의 환한 화면이 사라지며 엘리베이터 문처럼 양쪽으로 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또다시 환하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한 차장이 앞장서서 걸어가고 두 사람이 뒤를 이었다. 이번의 복도는 꽤 길었다.
그렇게 5분 정도 걸었나, 이번에도 문 하나가 또 나타났다.
그러나 세 사람이 다가가자 저절로 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나타난 광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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