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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an 27. 2024

불멍

그 소득 없는 공허의 가치

어느 해 새해 첫날 만난 남자. 전날 밤엔 제야의 종소리 대신 우주의 심포니를 감상했다고 자랑하며 밤새 찍은 사진들을 보여준다. 사진 전문가이자 자칭 탐험가란다.

    탁 트인 동해바다가 살짝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등성이에서 거센 바닷바람을 맞받으며 일출을 감상한 뒤, 새벽빛으로 물든 바다와 바늘 같은 얼음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마음으로 준비해 온 새해 소원을 대충 빌고 나니 갑자기 허탈감이 몰려온다.

    새해 일출은 좀 색다르고 비장감까지 느껴져야 제격일 텐데, 뭐 아무 때나 본 태양과 같은 느낌이라서 갑자기 시들해지는 것이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설 때 동네 어귀에서 본 일출이나 융프라우 정상에서 비스듬하게 떠 있는 태양을 보는 것이나 죄다 그게 그거였고, 그날 그 새벽에 본 (좀 거창해야 제격일) 동해 일출이나 뭐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느낌. 어쩐지 사기당한 것 같아 좀 억울하기도 하다. 멋진 글이나 영화, 또는 작품사진에서 보면 일출의 순간에 대해 어마어마한 감상이나 각오 같은 것을 표현하던데, 이건 영 밋밋해서 아무 멋대가리 없는 느낌인 것이다. 어딘지 사기당한 기분.

    하긴 지금껏 수십 년 인생에서 한두 번밖에 없었지만 기가 막힌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그 뭐시라 발음하기도 영 어려운 요리나, 집에서 후다닥 삶아 김치 툭툭 썰어넣고 끓인 매운 라면이나 뭐 그게 그거였다. 잔뜩 기대하고 먹은 닝닝한 고기 요리를 그러나 그런 것 한번 먹어봤다는 헛된 자부심으로 포장하고 나서는, 다시는 그 비싼 돈 주고 그런 데 안 간다고 다짐했던 촌뜨기 마음.

    그러다가 우연히 어느 (자칭) 탐험가를 만났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강한 분이었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을 가장 나약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실은 생존경쟁에서 뒤진 탓에 살아남기 위해 도피한 것이 여행이요 탐험이라고 한 것이다. 대한민국 잘난 사람들 속에서 도저히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어서, 또한 그 우람한 선남선녀들 사이에서는 도무지 자신이 살아남을 자신이 없을 것 같아서 자연 속으로 숨어든 것이라고 했단 말이다. 그리고 그는 물었다.      


    - 혹 불멍 해보셨어요?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불멍이 아니라 머멍, 즉 머리가 멍해진 것이다.      


    - 뭐 캠핑 가서 그냥 좀…….

    - 아, 안 해보셨구나. 캠핑 가서 불만 쬐셨군요.

    - 뭔 말……?     



이렇게 해서 시작된 명 강의 아닌 멍 강의를 장장 한 시간이나 졸다말다하며 듣게 되었다. 사실 그때는 그 지루한 멍 강의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었다. 그러나 세월이 좀 흐른 뒤 어느 새벽, 겨울 맞바람을 맞으며 어깨 잔뜩 웅크리고 걸어갈 때 문득 그 불멍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다. 캠핑이나 캠프파이어 때 마주했었던 불. 장작개비 위로 치솟는 화염.

    어느 해 겨울 우리 집 온 가족이 바닷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때 큼직한 별장 전체를 세내어 고즈넉한 저녁을 보냈는데, 거실 벽난로 앞에 앉아 타닥타닥 장작불 타오르는 광경을 한참이나 넋을 놓고 바라본 적이 있다. 그 좀 전에 밤의 정원 끝자락에 있는 핫탑(hottop)에 몸을 푹 담그고 겨울 밤하늘 별들을 감상하고 돌아온 뒤라 그런지 몸이 노곤하며 졸음이 살살 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반쯤 감긴 눈 속으로 들어오는 벽난로 장작불 빛. 따스하다는 느낌 말고도 무엇인가 신비스러운 기운이 내 온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장작불, 그것에서 사실 무엇인가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일까? 흔들리는 불꽃? 위로 치솟는 불길?      


     | 빛과 열을 내면서 타는 물체      


불에서 더 발전된 단어는 화염(火焰). 영어로 하면 fire(불), flame(화염), blaze(불길 또는 화재).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불도 있다. 격렬한 감정이 치솟아 오를 때 우리는 ‘불길’이 치솟는다고 한다. ‘열불’이 난다고도 하고. 이 경우 영어로는 ‘burning passion’이라고 한다나 보다. 열정 또는 정열을 표현할 때도 불에 비유하기도 한다. ‘사랑의 불길’은 또 어떨까? 진한 사랑을 한다고 해서 살이 데이지는 않을 텐데도 우리는 뜨겁다고 표현한다. 무엇이 뜨거울까? (하지만 이것이 우문인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불이 왜 뜨거울까 궁금하다. 그렇다고 해서 불 속에 손을 집어넣고 뜨거운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은 전혀 없다. 보지 않고 듣기만 해도, 생각으로만 떠올려도 뜨거우니까. 그런즉 불은 뜨거운 것이다.

    뜨겁다…….      



불멍도 뜨거울까……?     


하지만 (나중에 그것이 불멍으로 가는 초입인 줄 알았지만) 장작개비에 붙은 그 자잘한 화염의 시뻘건 불덩이들이 어딘지 모르게 신비감을 주는 것이었다. 눈은 다소 피곤하여 게슴츠레하게 뜨고 몸은 노곤하여 비몽사몽 스르르 눈꺼풀이 잠기듯 하던 그 아슴저슴하던 느낌들. . .

    그러면서 어딘지 아늑한 환각에 사로잡힌 듯 장작불 속으로 의식을 밀어넣으며 혼몽에 잠기려 하던 그 찰나들. 노곤한 몸에 따사로운 열감이 돌고 의식은 무의식 문턱까지 다가가 문을 살그미 열고 환각의 세계 입구에 발끝을 막 집어넣으려 할 때, 아스르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말았었다. 아, 그랬더니 벽난로 안에서 너풀거리며 타오르는 불꽃이 갑자기 눈앞에 크로즈업되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갑자기 혼몽에서 깨어나 눈앞에서 이글대는 불꽃을 다시금 노려본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누구……?

    아, 그렇고 보니 이것은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이었다. 장작개비 불길 속에서 어딘지 모르게 무엇인가를 보았던 것 같은 환상이 온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치 환각제에 취하기라도 한 듯 몸뚱아리가 노곤해지며 한없는 구덩이로 빠져들려 한다. 그 순간 갑자기 허리에 힘을 주고 등줄기를 꼿꼿이 한 뒤 눈을 번쩍 뜨고서 어딘지 멋쩍은 듯 주변을 슬쩍 돌아다본다…….

    물론 이것은 불멍이 아니다. 불 앞에서 몸이 노곤하여 살짝 잠이 들려다 나도 모르게 번뜩 정신이 나서 몸을 슬쩍 움츠린 것뿐이겠다. 그리고 문득 눈에 띄는 것, 불꽃. 자그만 화염들이 살짝살짝 슬쩍슬쩍 형체를 바꾸며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하며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의식이 번뜩 돌아온다.

    사실 불멍을 본격적으로 시도해 보거나 누리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문득 튀어나온 불멍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머릿속을 채운다.      



불멍의 중독성     


누구에게선가 얼핏 들었던, 그러나 아무런 의식 없이 그냥 지나쳤던 불멍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내 머릿속을 채우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먼먼 추억처럼, 또는 기억 속에서 멀어졌던 옛날이야기처럼 문득 아주아주 친근하면서도 노곤하게 불멍이 내 앞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것이다. 다정한 연인처럼.

    언젠가 노르웨이 공영방송국인 NRK(노르웨이방송협회)에서 장작불 타는 장면만 12시간 계속해서 내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실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모른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도 나는 갑자기 잔잔한 불길들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 몸은 차츰 따스해지며 주변 역시 온기가 살며시 돌면서 어딘지 모르게 아늑한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꼬마 환각이나 노곤한 환상과도 같은 혼미함이 살짝 감아도는 느낌들……. 그 순간 내 감상은 먼먼 과거로 슬며시 흘러간다……. 내 어렸을 적 그 초라한 시골마을의 추억들……. 건넌방 온돌 아랫목에 덮어놓은 작은 이불 속으로 발 뻗고 들었을 법한 옛이야기들…….

    아, 그리고 나니 눈앞의 장작불은 사라지고 나는 어느 공간 위로 붕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정신이 몽롱한 것은 아니었다. 옛 기억도 또렷하고 내 자아도 확실히 깨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정말로 장작불 속으로 들어가 다른 세상에 다다른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단지 하나……, 내 몸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 아니 영혼이랄까 뭐 어떤 비생물적인 것이 그러한 자유를 속박하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어쩌면 나 스스로 그런 속박을 받아들이거나 더 나아가 도취되려 하는 마음이랄까…….


    

얼어죽을 과학     


이쯤에서 분위기 깨는 과학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불, 불에는 다 아시다시피 빛과 열이 있다. 차갑기만 할 듯한 형광등 불빛에도 약간의 열이 동반된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불은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격렬하고도 연쇄적인 산화반응이라고 한다. 말이 어렵다. 그러나 어떻든 그 연쇄반응을 통해 열과 빛을 낸다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격렬한 산화반응을 통해서 플라즈마를 발생시키는 현상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과학적인 해석이라 단어들이 좀 생소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다 똑같은 뜻이다. 즉 무엇인가가 타오르면서 열과 빛을 내는 현상이라는 것. 그러니까 불은 곧 불이라는 뜻. 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 글이 불을 과학적 또는 이성적으로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기에 불의 과학적 본성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한다.     



불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     


뜨거운 감정, 불타오르는 정열, 불꽃 같은 사랑, 영어로 하면 burning passion……. 이러한 수사(修辭)는 사실 불(fire)과는 상관이 없다. 마음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계량으로 측정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제로 마음에 또는 감정에 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불의 뜨거움을 견디다 못해 일(?)을 벌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불은 위대한 성취로 나타나거나 엄청난 스토리를 남기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치욕과 증오와 범죄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불멍은 어떠할까? 불멍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혹 ‘얻는다’는 단어로 인해 가시적, 즉 눈에 보이는 어떤 결실을 기대해야 하는 듯이 여겨진다면 이는 전적으로 필자의 잘못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율 로그(yule log)’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벽난로에서 통나무가 불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그 장면 외에는 어떠한 다른 장면이나 대사도 없다. 그냥 장작이 불타는 장면 하나만 고정되어 방송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장면을 그저 응시하면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묵언수행을 하듯 불타고 있는 장작만 바라본다.

    무슨 이유일까? 현대인의 시간은 글자 그대로 금이다. 금쪽같은 시간이다. 그러한 귀중품을 아무런 대가 없는 ‘멍’에 쏟는다. 혹 그 시간을 명상이나 깊은 숙고로 보내고자 함일까?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 ‘멍’ 뒤에는 사실 아무런 소득도 없기 쉽다. 그저 무상무념 아무런 의식 없이 보냈으니까.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그 ‘멍’을 소유하고자 불 앞으로 모여든다.

    그렇다면 멍과 명상(冥想, meditation)은 어떻게 다를까?

    명상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이러하다.


    첫째, 우선 눈을 감아야 한다.

    둘째, 그런 다음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을 것.

    셋째, 그러고 나서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에 잠겨야 한다.


그러니까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것,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아몰입이나 속 깊은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또는 도달하려는 것이 아마도 명상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개념인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자아를 초월하여 오히려 자아해체 단계로 넘어가게 되지 않을지…….

    또 하나 멍과 명상의 차이는 아마도 시야(視野)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즉 명상은 일단 눈을 감아야 한다. 그리고 속세를 떠나 마음으로, 어쩌면 영혼으로 세상과 우주와 진리를 바라보고 깨우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는 주로 종교적 몰입 상태와도 연관되기도 한다. 물론 모든 명상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 아니라 자아수련에서도 명상은 좋은 수단이 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멍’은 어떠한가? 멍이 명상과 확연히 다른 차이 하나. 즉 눈을 감지 않는다는 것. 무감무상무시(無感無常無視) 상태로 앞을 바라보되 응시는 아닌, 그러니까 잡다한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듯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을 보탠다면 바로 스스로 ‘멍’한 상태를 즐길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혹 ‘즐긴다’는 단어로 인해 정(靜)보다는 동(動)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는 ‘신체를 즐긴다’와 ‘마음을 즐긴다’는 의미의 구분은 이미 하고 있다. 따라서 멍은 어떤 의미로는 ‘멍’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과는 다른 어떤 정신적 감흥상태를 저도 모르게 체험하게 해주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머니 가슴에 새겨진 멍, 멍울     


하지만 모든 ‘멍’이 다 그런(?) ‘멍’이더냐? 멍은 멍이되 다른 멍도 있지 아니할까……. 예를 들어 어머니 가슴에 새겨진 멍, 멍울 같은 것 말이다. 내 어머니처럼 가슴에 그 큰 멍을 담아놓고 반세기도 전에 어느 날 말 한마디 없이 졸지에 눈을 감으신 것.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도 멍은 멍일 것이다. 속세의 정을 다 정리할 수 없어서 그저 망연히 가슴에 큼직한 멍 하나만 남겨놓고 다차원의 세계로 들어가셨으니까.    



멍의 잡다한 World     


불멍 외에 물멍이나 별멍, 벽멍, 심지어 허멍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여러 종류와 이름이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모두 동일하다. 경험한 이들에 의하면. 그러니까 대상이나 종류와 관계없이 모두가 그 근본은 ‘멍’인 것이다.

    그렇다면 ‘멍’은 무엇일까?      


 | 피부에 (시)퍼렇게 피가 엉긴 것. 어디에 부딪히거나 맞아서 피하출혈을 일으켜 피가 뭉쳐 굳은 것. 보통 피멍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어혈(瘀血)이나 적혈(積血) 또는 축혈(蓄血)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을 이를 때도 사용한다. ‘마음에 멍이 들었다’는 표현으로. 또한 장기를 둘 때 장군하고 위협하면 ‘멍’군으로 막기도 한다.     


위와 같은 멋대가리 없는 사전적 해석 말고, 윗글의 영혼 없는 서술 같은 것에서 벗어나 이 글에 가장 부합되는 멍의 정의는 잠시 정신 줄을 놓듯 넋을 놓고 아무런 의식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말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한다면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는 것, 즉 어머니 가슴에 새겨진 한스러운 멍울 같은 것을 표현할 때도 사용된다. 어머니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가슴에 새겨진 한이 어린 감정 또한 ‘멍’ 또는 ‘멍울’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그리고 우리 스스로 수많은 멍을 만날 수 있다.     


    흐르는 강이나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물멍

    밤하늘 깊은 우주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별멍

    심심산골 푸르른 장막에 잠겨드는 산멍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푸르름에 도취되는 하늘멍

    검푸른 파도를 타고 수평선 너머로 달려가는 바다멍

    하늘 도화지에 펼쳐지는 구름 따라 둥실 떠가는 구름멍

    아무런 대상 없이 사팔뜨기 눈을 하고 무상무념 잠겨드는 멍청멍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식도 없게 되는 책멍

    삼라만상 죄다 우주로 떠나보내고 저만 홀로 물구나무 서듯 뒤집혀 혼이 나가는 바보멍청멍

    오직 그녀 생각에만 몰두하다 저녁밥 먹는 것도 놓치고 엄마한테 야단맞아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그녀멍

    온갖 쓰잘데없는 공상에만 매달려 식음 전폐하고 벽만 바라보는 등신처럼멍

    등등등……      



이상 모두가 사실은 한 가지를 가리킨다. 현실에서 잠시 떠나는 것이다. 복잡다단하고 설왕설래, 분주만주, 분기탱기, 요사구사, 지랄염병 등을 모두 저어 의식의 수평지평선 너머로 날려보내고 오직 마음을 비운 채 아무런 욕구요구 없이 백지로 만드는 것, 더 거창하게 말하면 자아적 의식을 떠나 무상무념과 평온정온의 상태로 접어드는 것, 즉 공간과 시간과 물질의 개념을 떠나 가장 순수한 정화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멍’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야 복잡다단한 현실을 떠나 마음의 위로나 평온을 얻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만, 이를 대형사고 치듯 과장확대해석하면 그렇다는 뜻이다.

    따라서 불멍, 물멍, 산멍, 하늘멍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저 말 그대로 ‘멍때리기’로 만족한다면 손해날 것도, 아깝거나 아쉬울 것도 하나 없다. 그냥 멍했으니 그저 멍한 대로 만족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냥 한 가지 첨언한다면, ‘멍’은 의외로 우리 정신과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에게도 훌륭한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멍을 통해 잠시나마, 또한 다소나마 우리는 영원(?)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멍 그 자체를 잠시 경험한다고 해서 하나도 손해날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하니, 이 글이 끝나는 즉시 한번 멍에 빠져 보심이…….



(끝으로 변명을 보태자면, 이 글은 전적으로 필자의 견해이다. 사전적, 종교적, 관행적 ‘멍’이나 ‘명상’과도 전혀 상관이 없기에 혹 이 글과 시야를 달리하신다 해도 필자는 ‘변명’할 수 없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그러니까 축약적으로 표현하면 학술적이나 경험적 관점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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