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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10. 2020

예술정원 (1)


주원은 병원에서 퇴원한 뒤 집으로 가지 않고 여주 별장으로 내려갔다. 남궁 여사와 함께. 남궁 여사는 주원이 서울에 있을 때 며칠 동안 시내에 나돌아다녔던 것이 무리가 되었다고 생각해 시골로 가자고 한 것이다.

    이것에 주원도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한국에 올 때 어차피 좀 쉬자고 한 것이기에 이참에 도시를 떠나서 자연에 묻히자고 생각했다. 여주 별장 심주원 주변의 경광이 꽤 수려해서 마음에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궁 여사는 레스토랑에서 요란을 떨었던 표범 분장의 인간이 주원의 귀국연주회에도 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인간한테서 주원을 떨어뜨리려 할 목적도 있었다. 그자가 주원에게 집적거리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레스토랑 사건 때 손님들이야 낭만적인 해프닝으로 여겼을 테지만 남궁 여사는 여간 망신스럽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멀쩡한 딸이 많은 사람 앞에서 놀림감이 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못된 놈. 남들 행사에 따라다니며 광대 노릇하고 푼돈이나 받는 주제에 감히 내 딸에게 희롱을 해?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 함부러 나대, 내 딸한테. 한 번만 더 그랬다간 요절을 내줄 테다. 나쁜 놈!”

    이런 생각에 남궁 여사는 남편 정 회장에게 힐난을 퍼부었다. 도대체 어떤 업체한테 그 파티 진행을 맡겼기에 그 따위 인간이 나타나 주원이 그 꼴을 당하게 만들었느냐고.

    “아니, 당신은 뒤도 알아보지 않고 아무한테나 일을 맡기는 거예요? 그런 놈들 중에서 못된 생각 갖고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그러나 사실 그 행사는 모두 남궁 여사가 맡아서 한 것이다. 자기 주변에서 여러 큰 행사를 치른 사람의 소개를 받아 남궁 여사가 직접 결정했기 때문이다. 단, 그 바디페인팅 아이디어만은 정 회장 비서실 직원이 남궁 여사에게 알려준 것이어서 그것이 빌미가 되어 정 회장이 덤터기를 쓰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할 거예요? 하나밖에 없는 딸 저렇게 쓰러뜨려 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예요? 당장 가서 요절을 내든지 해야지, 그렇게 눈만 뜨고 있을 거냐고요!”

    어떻든…….

    남궁 여사는 이제부터 자신의 무남독녀 주원은 자기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맡아서 관리하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애당초 남편 정 회장에게 그 레스토랑으로 정하도록 한 것부터가 자신의 실책이라고 스스로를 타박하면서. 자신이 잠깐 신경줄 놓았던 것이 이 지경이 되었다며 한탄까지 했다.

    “엄마, 이제 그만해. 엄마 잘못 아니니까.”

    “넌 가만히 있어. 내가 너를 믿은 게 잘못이다. 넌 뭐 하나 혼자서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앞으로는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괜히 나돌아다니면서 못된 놈들한테 치이지 말고.”

    남궁 여사는 자기가 아니면 집안 결딴난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나저나 여기는 단풍이 아직도 지지 않았네.”

    그 말대로 10월 말인데도 아직 단풍이 그대로 있었다. 빨갛고 노랗고. 물론 땅에는 잎이 많이 떨어져 있었으나 주변 산들은 울긋불긋 글자 그대로 꽃대궐이었다.

    “정말 단풍이 참 곱다.”

    주원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보스턴을 떠올렸다. 가는 곳마다 숲이고 공원인 보스턴 주변에서 지낸 10년 동안 매년 가을이 되면 단풍여행을 떠났었다. 여행이라고 해봤자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다. 보스턴에서 그 바로 위쪽 찰스 강 건너 케임브리지 지역의 MIT나 하버드 대학 북쪽까지 자전거로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때 경험한 깊고도 진한 단풍 골짜기들. 사실 한국에서는 그리 많이 다녀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이곳도 보스턴 못지않으리라. 어떻든 남한강변 이 시골에 와서 단풍을 바라보니 주원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이었다.

    “엄마, 나 바이올린 갖다줘.”

    “오늘은 그냥 쉬어라. 이 김에 쉬는 거야.”

    “요즘 몇 번 잡아보지 못했는데…….”

    “아이고, 괜찮아요. 그 실력 어디 안 가니까 염려 말고 푹 쉬어라, 아가야.”

    아가야. 참 좋은 말이다. 엄마나 아빠가 가끔 그렇게 불러주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어떤 때는 눈시울도 붉어지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의 품.

    너무 좋다.      



주원은 편가가 생각났다. 그날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걱정 많이 했겠지.

    주원은 그날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가서 이틀 동안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편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 남자가 자기 딸에게 집적거린 것으로 여기고 있는 판에 주원이 그 사람과 어울려 돌아다닌 것을 알면 아마 난리가 날 것이다. 당장에라도 쫓아가서 죽이려 들 테지.

    주원은 자신의 인생에 별 역할도 하지 못할 사람이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편가가 자기 자신 때문에 주원이 쓰러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으니 어떤 사람인들 마음이 편하겠냐마는, 어떻든 그 사람 마음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서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그 편가, 참 어처구니없는 인간이야. 그런 데서 다시 만나다니.

    그 사람이야 돈 벌기 위해 그런 데 쫓아다닌 것이겠지만 왜 하필 거기까지 온 거야?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주원은 그동안 편가에 대해 거의 잊고 있었다. 편가가 준 자신의 전신사진을 가끔 펼쳐볼 때마다 생각은 났으나, 그것도 며칠 지나니 그저 그랬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남의 모습 몰래 사진 찍은 것은 불쾌했지만 사진이 잘 나와 용서해 주기로 했었다. 덕분에 멋진 전신사진이 생겼으니. 또한 파일까지 받았으니까 나중에 필요하면 더 뽑으면 된다. 얼마든지 포샵도 할 수 있고.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약간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주원이 지금껏 찍은 사진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공짜로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비싼 돈 주고 사진작가 동원해서 찍은 것들보다, 자기 자신은 프로라고 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아마추어가 몰래 찍은 사진에 제일 마음이 갈 줄이야. 행동은 산만하고 허벙댔지만 아무튼 남모를 실력만은 갖춘 사람이다. 편가는. 다방면으로.

    다재다능.

    그래서 그렇게 힘들게 사는 건가? 재주 많은 사람이 박복하다는 말처럼. 하지만 요즘 세상에선 그 반대인데.

    어떻든…….

    아이고야, 그 생각 그만하자. 내 코가 석 자인데.

    석 자?

    뭔 고민 있어?

    없는데…….     


주원은 한국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심호흡을 하고 전원을 켰다. 주원의 눈이 커졌다. 카톡이 30통이 넘게 와 있었다. 친구들 몇몇한테서도 왔지만 대부분은 편가가 보낸 것이다.

    친구들 카톡은 그저 소소한 소식 전하는 것이었다. 동해안 가서 가을바다 배경으로 찍은 사진, 여학교 동창 누가 아들을 낳았다는 얘기 등등 뭐 그런 거. 친구들은 주원이 쓰러진 것은 모르는 듯했다. 당연하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니까.

    귀국연주회 표범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엉뚱한 소문 퍼질라. 아예 언급을 말아야지. 일급비밀.

    주원은 친구들 카톡에 간단히 답했다.

    전화 온 것들은 무시하고.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편가의 카톡 계정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제일 마지막에 온 카톡은 보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것은 읽고 말았다.

    그 문구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Ars magna.

    라틴어를 알아?

    어디서 주워들은 거겠지.

    위대한 예술. 무엇이 그렇다는 걸까?

    어쩌면 그 앞의 카톡에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글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혹시 내가?

    피!

    너무 나가지 마세요, 나(me) 씨.

    괜히 다 지웠나?

    다 끝났네요. 미련 갖지 마세요.

    그래, 연습이나 하자.

    주원은 바이올린을 가지러 방에 들어갔다.      


    

11월 중순, 주원은 서울로 돌아왔다. 늦가을 바람 쓸쓸히 부는 대도시 거리로. 주원의 마음처럼 썰렁한 현실로.

    재미없음.

    답답.

    주원은 인터넷으로 미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편을 알아보았다. 예약이 다 되어 있으니까 날짜 변경하고 아무 때나 가방 들고 나가면 된다. 그래서 이 날짜 저 날짜 달력을 짚어가며 이것으로 바꿔 말어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부모님은 주원에게 밖에는 절대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 바람에 초대받은 연주회나 오페라가 몇 있었는데도 대부분 포기했다. 그저 집에서 쉬는 것이다.

    “얘, 너 그 몸으로 밖에 나갔다가 감기 걸리면 큰일이다. 요즘 독감도 돈다더라. 여기는 겨울만 되면 난리야, 난리. 여기저기서 콜록콜록. 너는 면역력도 약한 데다가 미국에서 왔기 때문에 여기 독감 이겨내지 못해.”

    남궁 여사가 눈을 크게 뜨면서 호랑이 나왔다 하는 듯이 말을 했다.  

    주원은 아무런 대꾸 없이 멍한 눈길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람만 지나가는 빈 하늘.

    “정신 어디다 두는 거야? 나는 너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할 때마다 겁이 덜컥 난다. 또 무슨 일을 저지려나 해서 말이야.”

    그리고는 남궁 여사는 눈을 살짝 흘기며 마무리한다.

    “꿈에도 밖에 나가 돌아다닐 생각 하지 마. 저번 그놈 같은 인간들이 또 어디에서 나타날지 몰라. 알았니? 대답 좀 해봐!”

    남궁 여사는 답답하다는 듯이 주원을 노려보고는 이마를 찌그러뜨리고서 방에서 나갔다. 그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점심 뒤에 아래층 거실에서 TV 틀어놓고 이리저리 채널 돌리다 리모콘 내던졌다.

    그리고 주원은 벌떡 일어섰다.

    이층으로 올라가서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섰다. 집에는 일하는 아주머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아주머니가 걱정하는 눈빛을 뒤로 하고 아무런 말도 않고 나온 것이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데 전화가 왔다. 남궁 여사였다. 아주머니에게서 연락받은 것이겠지. 그러나 주원은 받지 않았다. 계속해서 몇 번 더 전화가 걸려왔다. 내버려뒀다. 운전사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백미러로 뒤를 바라본다. 주원은 전화 전원을 껐다.

    종로타워 앞에서 내렸다. 커피숍이 그렇게 많은데도 하필 또 이곳에 온 건가? 아무 만날 사람도 없는데.    

    커피숍에 올라가니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는 자리가 없을 정도였으나 이날은 좀 한산했다. 여기저기 테이블이 많이 비어 있었다.

    주원은 커피 한 잔 받아서 터덜터덜 걸어가 아무 데나 앉았다. 그리고 나서 문득 생각해 보니 지난번 앉았던 그 자리. 편가 그 인간 만나서 앉자마자 기분이 팍 상해서 얼른 일어났던 그 자리였다.

    주원은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많은 자리 중에서 하필…….

    주원은 커피를 든 채로 밖으로 나갔다.

    종각역 지하도로 내려갔다.

    문득 그 속옷가게가 생각났다. 가볼까?

    그곳에서는 그때 그 일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달라는 대로 다 주었기 때문일 테지. 그래서 그런지 주원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주원은 그냥 멀찌감치에서 그 상점을 슬쩍 쳐다보았다. 지난번 그대로였다. 아무런 일 없었던 듯이.

    신기했다.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살아가고, 세상은 저 돌아가고 싶은 대로 굴러간다. 사람들 표정을 봐라. 아무렇지도 않다. 주원이 마네킹을 쓰러뜨리든 레스토랑에서 쓰러지든, 그리고 귀국 바이올린 연주회에서 이미자를 부르든 아무 관심 없다. 편가가 주원 사진을 찍든, 표범 바디페인팅을 하든……, 말든…….

    칫. 내가 레스토랑에서 쓰러져서 죽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 끝이겠지.

    아무도 관심 없고, 아무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뭣하러 살어, 이렇게 재미없게. 남 눈치나 보면서…….

    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도 모자랄 판에.

    주원은 괜히 입이 이만큼 나와서 투덜투덜대며 걸었다.

    갈 데도 없고…….

    주원은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돌아갔다.     



주원이 집에 들어가자 남궁 여사가 팔짱을 끼고 빤히 노려본다. 주원은 아무런 말 없이 계단으로 가서 올라섰다. 뒤통수가 따갑기는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층에 다 올라갔는데 뒤통수로 화살이 날아온다.

    “너 또 병 나도 나 아무것도 안 한다.”

    알았어.

    주원은 속으로만 대꾸하고 이층 유리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원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미국 핸드폰을 꺼냈다. 카톡과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들. 한국 핸드폰을 꺼내서 전원을 켰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편가가 다시 연결한 것이다.

    ― 맞죠, 그쪽?

    카톡 메시지. 게다가 사진까지 보냈다.

    카톡 계정에서 나가버릴까 하다가 그냥 놔두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남궁 여사가 보이지 않는다. 방에 들어간 모양이다.

    걱정해 주는 엄마 마음 좀 달래주려 했는데…….     

    주원은 괜히 거실을 한 바퀴 휘돌고 창문으로 바깥을 한번 내다본 뒤 다시 올라갔다. 어딘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시내에 나갔고, 또 아무런 생각 없이 가방 하나 들고 터덜터덜 돌아다닌 것. 아무 데도 갈 곳이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말 붙일 사람도 없고, 연락할 사람도 없고, 연락 올 인간들도 없고…….

    갑자기 카톡 메시지가 생각났다.

    뭐가 맞다는 거야? ‘그쪽’은 또 뭐란 말임?

    그쪽, 그쪽, 그쪽…….

    하긴 그것 말고 달리 부르기도 뭣했을 것이다. 주원 같아도 그 말 말고 다른 호칭을 고르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혹 그대, 당신, 아니면 이름. 주원 씨, 미스 정…….

    미스 정?

    여기가 미국이야? 한국에서 요즘도 미스, 미스터 그런 말 쓰나…….

    주원은 문득 자신이라면 편가를 어떻게 부를까 생각해 보았다.

    당신? 아니지.

    그대? 아이고.

    편 씨? 글쎄. 그런데 ‘씨’라니, 그런 호칭이 사람을 높이는 거야, 낮추는 거야? 헷갈리네.

    편가? 흠, 나 혼자 생각할 때는 그게 제일 좋겠는데, 코앞에서 부르기에는 좀…….

    그럼 뭐가 좋을까…….

    편지수, 지수, 지수 씨…….

    지수 씨? 에고, 낯간지러워라. 에비.

    지수야. 그래, 그게 좋겠다.

    지수야, 고마해라. 나 정신 사납다. 너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님. 이번까지는 봐준다. 다음부터는 연락 사절.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주원은 저도 모르게 카톡을 톡 눌렀다.

    사진.

    주원은 인상을 쓰고 사진을 보았다. 크게 확대했다.

    응……?

    지하철 기둥에 누군가가 무슨 광고판 같은 것을 걸고 있는 장면 같았다. 뭐하는 거야? 지하철에서 광고 작업도 해?

    주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뭐가 ‘그쪽’? 뭐가 맞다는 거야?

    그 순간 주원은 화들짝 놀랐다.

    뒷모습. 아니, 4분의 3 옆모습.

    주원 자신이었다.

    어떤 사람 뒤를 따라 전동차 문 안으로 막 들어가는 장면. 그것이 광고판 옆으로 찍힌 것이다. 지하철에서 무슨 일인가를 하다가 주원을 알아보고 급히 찍은 것 같은데, 그래도 사진은 제법 선명했다.

    이 경우 고소할 수 있을까? 스토커라고. 남의 모습 함부로 사진 찍는 습관이라도 있는 건가? 이 인간…….

    이럴 때 주원은 기분이 나빠야 하지? 당연. 그런데 마음이 덤덤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거 참…….

    ― 그래, 맞다! 나다 나. 그래서 어쩔건대?

    이렇게 써 보내려다가 그만두었다. 냅두자. 가운뎃손가락 끝이 간질간질했다.

    핸드폰을 껐다.

    아니, 끄려는데 문자가 떴다.

    ― 건강 괜찮으신 거죠?

    웬 상관? 그쪽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신경 끄시지.

    핸드폰을 껐다.

    아니, 이번에도 끄려고 하는데 또 문자.

    ― 그 스타벅스로 오실래요?

    어쭈.

    ― 내일 2시.     



내가 미쳤지.

    주원은 투덜투덜 중얼거리면서 종로타워 일층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주원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가장 한심한 점은 무슨 의도로 치장까지 하고 나왔느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너무 티 나게 치장하면 들킬 것 같고, (이 경우 뭐를 들킬 것 같은지 정확히 자신에게 설명하지 못함) 맨숭맨숭하게 나가자니 괜히 꿀릴 것 같고. (뭐가 꿀리는데?)

    시끄러!

    주원은 자신을 나무라고는 모르는 척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갔다. 안을 둘러보았다.

    이 화상!

    이번에도 먼저 와서 기다리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에서 김이 난다.

    나 웬만해선 이러지 않는단 말야! 성격 좋기로 소문난 여자라고!

    주원은 커피는 주문도 하지 않고 아무 자리나 찾아가서 앉았다.

    아차, 앉아서 보니 어제 그 자리였다.

    벌떡 일어났다.

    그 자리에서 가장 먼 쪽으로 갔다. 겨우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곳에 앉으려고 하는데 계단 위로 막 올라오는 사람. 숨을 헐떡거리면서.

    으이그!     


웬일인지 오늘은 깔끔했다. 그 화상이.

    맛도 없는 무슨무슨 티라는 것을 빨대로 홀짝거리면서 주원은 화상을 외면하고 딴 데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화상은 장황하게 떠벌인다.  

    어쩌고저쩌고……. (지루해) 그 팔순잔치라나 뭐라나 하는 곳에 왜 안 나왔냐…….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느라 혼났다……. (쌤통이다) 그날 레스토랑에서 자기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느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당연) 왜 그 동안 전혀 응답이 없었느냐……. (그럼 좀 어때서?) 어제는 어디 갔었던 거냐……. (웬 참견?) 이렇게 나와 다녀도 되는 거냐……. (그럼 나오지 말랴?) 오늘은 좀 어떠냐……. (됐네요) 꼬치꼬치……. (아이고, 코 나오겠다)

    자기가 내 보호자라도 되는 거야 뭐야?

    화상은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도 않고 떠벌였다.

    얼마 전에 지하철 광고판 설치 일을 하청받아서 요즘 그 작업을 하느라 힘들었다……. (누가 그냥 돈 주겠니)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뭐?) 원래는 전철 끊어진 한밤중에 일을 해서 새벽 첫 차 전에 끝내야 하는데, (그렇겠지) 다른 동료가 실수로 잘못 건 게 있어서 급히 연락받고 나와 교체하던 중에 주원을 보았다……. (그래서 사진 찍었다고?) 사진 찍은 것은 미안하다……. (알기는 하네) 그런데 그 사진의 뒷모습이 꼭 영화장면 같아서 확대해서 인화하려는데…….

    주원은 발끈했다.

    벌떡 일어났다. 탁자가 흔들려 잔이 쓰려지려 한다. 화상이 얼른 잔을 잡았다.

    그리고는 화상도 슬그머니 일어난다. 주변을 슬쩍 살펴보면서. (왜? 뭐 팔리니?)

    주원은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사진 뽑기만 해봐라!



주원은 종각역 지하도로 들어갔다. 뒤로 안 돌아보고 상가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화상이 뒤쫓아오며 미안하다고 계속 변명해 댄다.

    그 상점, 여성내의가게.

    마네킹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번 그 여직원이 알아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혹 한번 더 와서 쓰러뜨려 줬으면 좋겠다는 얼굴 아닐지…….

    (아이고, 어째 저번 날하고 똑같냐, 이 상황이.)

    여직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 같았다. 언제든지 대환영!

    정말 오늘 한번 더 쓰러뜨려 줘?

    주원은 갑자기 약이 올랐다. 발걸음을 탁 멈춘 뒤 돌아섰다.

    화상이 화들짝 놀라 멈춰선다.

    주원이 손가락을 돌렸다. 빙글빙글.

    화상이 맹한 얼굴로 바라본다.

    돌아가란 말야! 돌아서! 돌아서라니까!

    주원이 말은 하지 않고 손가락만 계속 돌렸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주원이 손을 내리고 화상 옆을 홱 지나 반대편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화상이 급히 쫓아오면서 뒤를 자꾸만 돌아다본다. 뭔 일이래?

    아직도 상황판단이 안 되지, 이 화상아?

    옆으로 따라붙은 화상의 옆구리를 주원이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빨리 빨리.

    주원은 지나온 길을 거꾸로 거슬러 가서 종로타워로 들어가 이층으로 올라갔다. 모든 자리가 다 차 있거나 탁자가 지저분했다. 아까 처음에 앉았다 얼른 일어난 그 자리만 빼고.

    주원은 그 자리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화상이 쭈뼛쭈뼛 따라와서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앉는다.

    (여기밖에 갈 데가 없어. 주원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결국 이 자리에 또 앉고 말았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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