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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10. 2020

가을정원 (3)

주원은 돌돌 말아서 통에 넣어 가져온 자신의 전신사진을 펴서 벽에 붙여놓고 감상하고 있었다. 아주 정교한 사진은 아니지만 현장감이 실려 있는 느낌이 들어 볼수록 괜찮았다. 색도 약간 보정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괜찮았다. 게다가 입자를 약간 거친 느낌으로 처리한 것도. 

    다른 솜씨는 아직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바디페인팅과 사진술은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주원이 보기에는. 

    아, 바디페인팅은 편가 솜씨가 아니지……. 그럼 바디페인팅 당한 솜씨?

    주원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참 묘한 사람이다. 무례하고 거친 면이 있어서 기분이 몇 번 상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주원이 사는 세상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세계. 태권도가 몇 단이라고 했지? 4단? 4단이면 어느 정도야? 아무튼 특이해.

    주원은 동업하자는 말에 자신이 선뜻 동의한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자신의 어디에 그런 엉뚱한 면이 있었던 거지?

    아무튼 재미있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똑 똑 똑.

    저렇게 살며시 노크하는 사람은 아버지 정 회장뿐이다.

    주원은 사진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돌아섰다. 

    살짝 문을 여니 아버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주원은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문을 활짝 열었다. 

    정 회장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서 한눈에 주원의 사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젖혀서 바라본다. 말은 없었다. 두 팔로 팔짱을 낀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다시 한번 바라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주원을 쳐다보았다. 이리 오라는 손짓. 주원을 사진 옆에다 세운다. 둘을 비교하는 듯 이쪽저쪽 번갈아 살펴본다.

    “실물이 더 낫다.”

    정 회장이 싱긋 웃으며 말한다.

    “분위기는 사진이 더 낫고.”

    주원이 핏 하고 웃었다. 

    “누가 찍은 거냐?”

    주원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갸웃했다.

    정 회장은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요즘 바쁜 것 같다. 밖에 많이 나간다고?”

    주원은 대답하지 않고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좋은 일 있니? 아빠도 끼자.”

    주원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짜식. 아무튼 바쁜 게 좋다. 여기 있을 때 맘껏 다녀봐. 사람도 많이 만나보고. 만날 사람 없으면 나한테 말해라. 내가 상대해 줄 테니까.”

    “알았아요.”

    “그런데 말이다……, 나보다는 다른 남자 만나는 게 더 좋을 거다. 잘 찾아봐.”     



주원은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다. 한국 핸드폰은 아예 꺼놓았다. 그 대신 미국 핸드폰으로 친구들하고 카톡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남궁 여사는 파티 이후에 한동안은 주원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도 주지 않았으나 차츰 마음이 풀어져 이제는 거의 평상시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단지 아직도 그 노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때의 배신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남궁 여사는 또다시 주원의 혼처를 알아보기 위함인지 그 파티 참석자들의 명부를 들여다보며 점을 찍거나 메모를 하는 것이었다. 남궁 여사는 그전부터 주원에게 연애결혼은 꿈도 꾸지 말라고 윽박질러 왔다. 

    “네가 보는 눈보다는 내 눈이 나아.”

    주원이 어릴 때부터 남궁 여사는 자신의 사위는 자신이 정할 것이라고 늘 말해 왔다. 그 사위는 단지 사위가 아니라 우리 집안의 후계자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란다.  

    “남자는 겉만 보면 안 돼. 배경이나 뭐를 배웠나 하는 거 다 따져봐야 해. 잘못했다간 건달 만나서 평생 고생만 한다.”

    그러나 남궁 여사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주원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남자라는 사람을 아예 몇 만나보지도 못했으니까. 게다가 남궁 여사가 말하는 ‘뭐를 배웠나’가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의사나 판검사나 뭐 그런 걸 말하는 거야? 아니면 아빠 회사 맡아서 할 사람 고른다면 경영학 같은 거……? 

    그래서 그런지 남궁 여사는 MBA를 늘 입에 달고 살았다.

    MBA, MBA, MBA, 엠비에이…….

    MBA, 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경영학 석사. 100년도 더 전인 1900년엔가 미국의 다트머스 대학에서 처음으로 경영학 석사과정이 생겼다지. 뉴햄프셔 주에 있는 아이비리그 대학. 종합대학이면서 아직도 칼리지(collage)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 뒤 여기저기에서 MBA가 생겨났다. 한때는 귀하신 몸이었지만 지금은 길에 널린 게 MBA다. 공과대학인 MIT에서까지 개설되어 있으니까. 

    엠비에이, 엠비에이……, 에비에비…….

    주원은 하마터면 메롱을 덧붙일 뻔했다.

    그것은 그렇고…….

    그런데 주원은 자신의 마음이 왜 이리도 허전한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주원은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 한번 못 해봤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지만, 남궁 여사의 오랜 압력도 사실 꽤 큰 작용을 한 셈이다.

    주원은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에서 연애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쓸쓸했다. 봄날 가는 비 흩날리는 날이나 가을날 낙엽 지는 공원 근처를 걸을 때면 마음이 허전한 것을 넘어 아프기까지 했다. 어떤 아련함으로. 미국 동부해안을 자동차로 달리면서 그 시퍼런 대서양 바닷물을 바라볼 때도 막연한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주원에게 남자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 번 소개를 받아 만나기도 하고 끈질기게 접근한 남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같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집안 좋은 그들. 미국인도 영국인도 이탈리아인도 중국인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나같이 위선자처럼 보였는지 모른다. 사실 한번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어서 잠시 가까이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 부인이 있었다. 그때 실은 배신감보다는 아깝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그 사람이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었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연애. 

    무엇일까?

    유부남인 것을 모르고 만났던 그 남자. 카페에 일찍 가서 그 사람 기다릴 때 그 마음이 연애일까? 파리 공항에서 보스턴으로 갈 때 공항면세점에서 그 사람 줄 선물이 뭐 있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던 그 시간들이 연애일까? 그때 분명 마음이 벅차고 어떤 흥분감 같은 것이 있었지. 나중에는 어이없게 끝났지만. 

    도대체 남자들은 어디에 다 있는 거야……? 주변 친구들은 어디에서 구해 오는지 모르지만 잘도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그러다가 청첩장 보내오고 하는데.

    주원 자신도 이렇게 답답한데 부모님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특히 MBA를 입에서 놓지 않고 사시는 남궁 여사께서는 주원보다 더 답답하실 거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요즘 주원에게 그전과는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전에는 하루종일 집 안에만 있어도 지루하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가 그렇게 길었다. 거의 10분마다 한숨이 저도 모르게 나오고 문득 시계를 보면 겨우 20분이 지난 것이다. 드라마나 뉴스 등 시답잖은 것들 조금 보고, 음악도 이것저것 들었다 멈추기고 하고, 악보도 좀 정리했다가 먼지 하나 없는 바이올린 꺼내어 티끌 묻은 거 있나 없나 검사해 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거실에 내려가 소파에도 드러눕기도 하고, 집 안 여기저기 서성이면서도 가끔 누구를 기다리는 것마냥 시계를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겨우 30분 지났는데. 

    또한 자신에게 전화 올 일도 편지 올 일도 없는데도 문득문득 무엇인가 어떤 소식이라고 왔으면 하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카톡이나 메시지, 이메일 그런 것 말고. 진짜 소식 말이다. 누군가가 손으로 쓴 편지 같은 것. 낙엽에 실려온 글이나 시…….

    이렇게 답답하게 살아도 되는 거야……? 집에만 처박혀 있으면서……. 

    어디 나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일부러 나가서 만단다면 모를까…….

    누구를……?

    지난 며칠 동안 그 정신 사나운 남자 때문에 좀 부산했었던 것 외엔 통…….

    아, 그 남자. 

    3 대 7.

    풋. 웃겼어.

    요란도 했었지, 그 남자.

    덕분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렇다고 인생사는 데 도움 될 것도 아니지만.

    카톡을 한꺼번에 10통씩 보낼 정도로 무모하고 어찌 보면 무례한 사람이긴 하지만 열심히는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도 사는구나…….

    카톡 또 왔을까? 

    왔겠지. 

    열어봐?

    아서라.

    글쎄…….

    열어본들 무슨 일을 하랴.

    동업할 것도 아니고.

    아냐, 그거 해봐?

    재미있을까?

    엄마가 알면 기절?

    ㅎㅎㅎ…….

    재밌겠는데.

    그때 갑자기 편가가 알려준 것이 생각났다.

    바디페인팅 페스티벌.

    대한민국에서 그런 것도 하나……?

    주원은 인터넷으로 대구 바디페인팅페스티벌을 쳐보았다.

    우와―!

    여러 기사와 사진들이 좌악 올라와 있었다.

    2008년부터 시작되었단다. 그리고 행사 사진 올라온 것을 보니 행사 규모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참가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몰려왔고, 바디페인팅은 물론 여러 복장 등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화려하고 다양했다. 게다가 관람객은 어린아이들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바디페인팅이 일부 계층이나 호기심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공적인 예술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어떻게 보면 초현실주의와도 이어지는 첨단예술에 속하는 바디페인팅 행사를 한국에서, 그것도 예로부터 보수와 전통을 중시하던 대구에서 개최했다는 것은 이미 바디페인팅이 일반예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 같았다. 하긴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데서도 많은 이들이 얼굴에 국기 문양을 넣거나 아예 얼굴 전체를 국기로 칠한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었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렸을 때 아빠가 주원의 얼굴에 태극기 색인 빨강과 파랑을 그려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그 간단한 것만으로도 주원은 마음이 들떴었지. 

    그래, 그런 것들이 바로 바디페인팅이다. 그것을 확대하면 대구 페스티벌과 같이 되는 것이겠지. 요즘 어린이들 각종 행사에 바디페인팅이 필수라고 한 편가의 말이 실감났다. 하긴 주원 자신의 행사에서도 등장했으니까.

    혹시 일본 야쿠자들이 온몸에 이상한 무늬를 잔뜩 그려넣은 것도 바디페인팅에 속하나? 

아, 그것은 문신이겠구나.

    하긴, 미국 영화를 보면 팔이나 어깨에 문신을 넣은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그럼 그런 것들도 바디페인팅의 한 분야?

    에이, 그것은 그냥 문신이라고 할 거야. 종류가 좀 다르겠지…….

    주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편가 그 인간은 시대의 첨단을 걷는 것 같았다. 돈 버는 재주는 좀 없는 것 같지만.

    반면에 주원은 클래식, 글자 그대로 옛 시절의 악보에만 매달려 있다. 

    그래서 내가 고리타분하고 연애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는 건가……?     



또 며칠이 지났다. 

    아, 무료했다. 그냥 미국에 빨리 가버릴까? 몇몇 교수들하고 약속해 놓은 것, 박사후과정, 핀란드 유학, 여러 콘테스트, 연주회 투어, 인터뷰, 게다가 자기에게 배우는 학생들 등등 꽤 복잡하다. 사실 한국에 와서 이렇게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매일 연습을 강행군해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한량생활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태껏 살아온 중에 지금처럼 편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 늘 쫓기며 살아오고 남궁 여사에게 시달려서 숨도 못 쉬며 지냈으니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번에는 잔소리가 별로 없다. 혹 이번에는 주원이 미국으로 가서 남아 있는 계획들 마무리하는 것보다 한국에 남아서 적어도 혼처라도 정해 놓고 가길 바라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고요할 리가 없지. 

    혹 나 몰래 무슨 꿍꿍이가……?

    문이 벌컥 열린다. 누가 올라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남궁 여사.

    그러면 그렇지.

    “얘, 나와 봐.” 

    주원은 깊숙한 안락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주원의 방은 엄청 컸다. 아래층 거실보다 훨씬 넓었으니까. 원래는 이층에 방이 세 개 있었으나 그것을 모두 터서 하나로 만들었던 것이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3층으로 통하는 복도를 빼고 나머지 공간을 두꺼운 통유리로 막고서 한쪽에 문을 달았다. 방음이 되는 두꺼운 유리문으로. 그러나 주원이 고집해서 이층 유리 아래쪽 3분의 2가 불투명으로 된 것으로 바꾸었다. 여러 오페라 장면이 에칭으로 새겨진 것으로. 한국에 자주 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꾸며놓고 자신만의 성을 꾸미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원은 어느 정도 짐작하며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널따란 대리석 거실 한쪽에 연회색 대리석 테이블이 있었다. 남궁 여사는 그 앞에 가서 섰다. 머리는 부스스한 채.

    남궁 여사는 말은 없이 눈으로만 테이블을 가리킨다.

    주원은 그 눈길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진들.

    10여 장 되는 것 같았다. 사진들이 제법 컸다. 소설책 크기만 했으니까.

    주원은 호기심 있게, 그러나 겉보기에만 그렇게 쳐다보았다. 

    대충 살펴보니 세 사람 사진 같았다.

    죄다 멀끔한 모습들. 

    정장 모습, 스포티한 차림, 외국 풍경 같은 배경, 사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 골프장 광경 등등.

    남궁 여사는 고개를 들어 주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어떠냐는 뜻.

    다 괜찮다. 

    모두를 하나로 합치면 더 좋겠다.

    인물 좋고, 미소 괜찮고, 물론 배경도 굿이겠지.

    남궁 여사가 손으로 사진을 하나하나 짚는다. 

    이 사람은 성형외과 전문의. 이쪽은 스탠퍼드 대학 경영학 박사. 저 청년은 국제통화기금(IMF) 한국지사 과장급 매니저. 

    남궁 여사가 손을 거두며 어깨를 약간 들썩하는 제스처를 한다.

    고르란 말이지.

    주원은 남궁 여사를 마주보았다.

    이 셋 다 합친 남자 데려오라니까.

    주원은 돌아서려 했다.

    “얘!” 날카로운 소리.

    주원이 약간 찔끔하며 동작을 멈췄다.

    “말을 해, 말을!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원하는 사람 없어.”

    “그래도 네 타입이 있을 거 아냐.”

    “마크롱.” 

    왜 이 이름이 나온 거지? 하필 프랑스 대통령이?

    “뭐? 마이크랑?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

    주원은 아주 돌아서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별 생각 없이 그쪽으로 향했으나, 그 김에 정원에 나가보자고 생각했다.

    “나 좀 봐!” 남궁 여사가 뒤쫓아오며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너 무슨 애가 그러니? 남자 있는 거야?”

    “있어요.”

    “누구야?”

    “마술사.”

    에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쟤 말하는 것 좀 봐.”

    남궁 여사의 탄식소리.

    주원은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저기 낙엽이 흩어져 있는 정원. 

    바람이 약간 분다. 그에 따라 마지못한 듯 살짝살짝 뒹구는 시든 나뭇잎들. 

    바람아, 불어라. 더 많이! 그 바람에 무엇이라도 실려오게. 님 목소리라도 실려오면 더 좋고.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

    주원은 그 곡이 마음에서 떠올랐다. 그리고는 그 음을 따라가며 머릿속으로 여러 장면을 그려보았다. 아무도 없는 빈 장면들을. 낙엽만 흩어지며 어디선지 모를 곳에서 흘러오는 선율을 좇아가며.

    생 프뤼(Saint Preux)의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Concerto pour une Voix).’ 4분의 4박자 모데라토 템포의 바로크풍 음악. 가사는 없이 목소리만 이어지는 노래. 1969년 생 프뤼가 폴란드를 여행하다 작곡했다. 여러 사람이 연주했지만 주원은 그 중에서도 특히 앙드레 류(Andre Rieu)가 지휘하고 바이올린 연주를 한 것이 좋았다. 가슴을 아련하게 만드는 3분 남짓의 곡. 바람이 스쳐가는 빈 들 저 멀리 어디에선가 오카리나 소리 같은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아련하게.

    아련하게…….

    아 련 하 게…….     



그날 저녁 정 회장이 딸 방으로 왔다.

    방에 들어와 지나가다 들른 것처럼 이것저것 둘러보며 슬쩍 만져보기도 하고 손으로 쓸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무심코 말하듯 묻는다. 주원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눈은 뚜껑이 열려 있는 피아노 건반으로 향해 있었다. 그 옆에 세워놓은 바이올린 케이스가 아니라. 

    “따로 계획 세워놓은 것 있니? 그냥 이렇게 지낼 거야?”

    억양도 없고 감정도 없고, 딸에 대한 관심이나 걱정도 없이 그저 무심히 지나가는 말투.

    주원은 갑자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분위기상 한 마디 대꾸는 할 법한데, 주원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괜히 눈물이 나오려 했다. 서러운 마음이 들면서. 

    사실 그동안 부모님이 여러 계획을 세워 주원에게 알렸으나 주원은 죄다 싫다고 했었다. 아무데도 안 가고 그저 집에서 푹 쉬다 가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알리고서 한꺼번에 만난 뒤 나머지는 남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혼자서 편히 지내자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10월 초반에 귀국연주회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었다. 말만 그럴 뿐이지.

    주원이 한국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되었다. 석 달만 한국에 있겠다고 해서 돌아가는 비행기 표는 내년 1월 초로 되어 있다. 지금은 10월 말에 접어들고 있었다. 

    정 회장은 그간 몇 번이나 딸에게 어떻게 지낼 거냐고 물어봤었다. 그때마다 주원은 집에서 푹 쉬다 가겠다고 말했다. 집이 좋다고. 언제 또다시 집에 와서 이렇게 쉬어보겠느냐고 했다. 이 말에 정 회장은 기특하면서도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공부에만 시달린 딸. 남궁 여사는 단 한시라도 딸을 그냥 놔두면 당장 어떻게 될 줄 알고 미국에까지 달려가서 닦달하고 레슨 일정뿐만 아니라 외국 연수나 콘테스트까지 직접 챙겼다. 게다가 이번에는 주원보다 한 달 먼저 들어와 귀국연주회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챙기고 잔소리를 해댔었다. 그리고 그 파티를 통해 사윗감 경쟁도 시키면서 즐기려 했었던 것이다. 파티 막판에 주원이 어이없게도 망쳐버렸지만. 

    그러던 남궁 여사도 남편 정 회장이 이번에는 그냥 쉬게 놔두라는고 하는 말에 억지로 지금껏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주원은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딸이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했다 하더라도 부모가 이렇게 모른 척할 수 있는 거냔 말이다.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외동딸을. 특히 아빠가…….

    정 회장은 외면하고 있었던 눈길을 슬쩍 돌려 주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딘지 달래는 듯한 투로 말을 한다.

    “엄마도 걱정이 태산이다. 너 이렇게 놔둬도 되느냐고.”

    오늘 정 회장은 바람도 쐴 겸 저녁을 외식하자며 주원에게 말을 하려고 2층으로 찾아온 것이다. 

    “아빠…….”

    “그래……, 우리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자.”

    “좋아요.”

    주원은 웬지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 맺히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껌벅이면서 지워버리려 했다.   

  

주원의 식구는 자주 다니는 아르누보강남에 들어갔다. 정 회장이 집에서 떠나기 전에 전화해 둔 덕분에 예약한 자리로 곧장 안내받을 수 있었다. 

    레스토랑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원은 한국에 올 때마다 적어도 한 번은 이곳에 왔는데 늘 사람으로 북적이는 것에 놀라곤 했다. 이 넓은 식당이.

    그러나 식사 코스는 그저 그랬다. 부모님이야 이곳에 올 때마다 음식맛에 감탄한다고 옆에서 말했지만, 주원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을 뿐 아무런 대꾸도 않았다. 

    남궁 여사가 옆눈으로 주원을 살폈다.  

    그냥 놔두라는 듯 남궁 여사를 쳐다보는 정 회장의 무표정한 얼굴이 주원의 눈에 잡힌다.  

    주원은 음식을 남기고 싶었지만 억지로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음식으로 가득한 그릇 언제 다 비우나 걱정하며. 마음으로 걱정하는 부모님 편케 해드리려 끝까지 도전해 보려고.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항상 분위기 깨는 남궁 여사의 말.

    “맛있는데요.”

    주원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궁 여사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정 회장도 흐뭇해 하는 얼굴.

    레스토랑 안에는 홀 중앙에 놓인 그랜드피아노에서 나오는 맑은 선율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주원은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가 나올 때 화장실에 갔다. 

    주원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도중에 꼬마들이 풍선을 들고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 구석 별실에서 생일모임이 있는 모양이다. 

    주원은 아이들 모습이 귀여워 그 애들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눈길을 옮겼다. 

    ……?

    아는 사람?

    누군가가 눈에 띈다. 아니, 동물이.

    표범.

    바디페인팅은 아닌 듯 표범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그 위로 올라온 머리와 얼굴 모습은 분명 표범이다. 

아이들 몇이 그 표범 주위로 돌면서 나 잡아봐라 하는 듯이 뛰어다닌다.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표범만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손에 무엇인가를 잔뜩 쥔 채 어정거리는 모습.

    주원은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저 사람이……?

    저도 모르게 주원은 그 방으로 몇 발자국 옮겼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풍선을 든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뛰어갔다.

    표범이 돌아다본다. 아이들에게 손을 흔든다. 그러더니 손을 든 채 동작이 멈춰졌다. 아마도 주원과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주원은 뒤돌아섰다. 몇 걸음 옮겼다.

    뒤에서 갑자기 우와 하는 함성이 들린다.

    주원이 돌아다보았다.

    표범이 뛰어오고 있었다. 

    뒤에서는 아이들이 함께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뛰어온다. 놀이의 일종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주변 사람들도 돌아다본다. 웃는다. 표범을 보고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홀의 다른 식탁에 앉아 있는 아이들도 덩달아 소리 지른다. 

    표범이 주원 가까이 달려왔다. 껑충껑충 뛰면서. 표범처럼.

    그 뒤로 조르르 쫓아오는 아이들. 그 광경을 보고 여러 테이블에서도 몇몇 아이가 뛰쳐나오고 있었다. 

    표범이 주원 가까이까지 왔다. 멈춰선다. 아이들을 돌아보더니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을 나눠준다. 표범 인형. 아이들이 서로 달라고 소리 지르며 모여든다.

    그러더니 표범은 주원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기다란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아이들도 표범을 따라 주원의 주위를 돌았다. 소리 질러 가며.

    주원은 자신의 주위를 도는 표범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표범은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몸을 낮추고 이리저리 흔들기도 하며 계속 돌았다. 어흥어흥 하면서. 그 뒤로 아이들이 신이 나서 뒤따른다. 

    빙글빙글.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쳐다보며 웃는다. 

    갑자기 표범이 몸을 돌렸다. 가까이에 있는 한 테이블로 뛰어간다. 그러더니 동작을 크게 해서 꾸벅하며 테이블 손님에게 절을 하고는 테이블 한가운데 꽂혀 있는 길쭉한 유리병에서 흰색 난초꽃 한 송이를 빼어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크게 절을 한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웃었다.

    표범은 꽃을 들고 돌아서더니 곧장 주원에게로 달려왔다. 

    껑충껑충 뛰면서.

    아이들이 펄쩍펄쩍 뛰며 좋아한다. 

    꽃 나 줘요. 나 줘. 내 거야…….

    아이들이 달려든다. 

    표범은 꽃을 높이 치켜들고 아이들을 헤치며 주원 쪽으로 곧장 다가갔다. 

    그러더니 주원 앞에 이르러 한쪽 무릎을 꿇고 꽃을 들어 주원에게 내민다.

    우와―!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함성.

    그리고 이어지는 요란한 박수. 

    주원이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자 박수소리가 더 요란해진다. 

    레스토랑 한가운데 있는 피아노의 연주 소리가 박수 소리에 묻혀서 사라졌다. 그러더니 더 이상 피아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주원은 두 손을 반쯤 들어올린 채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해 하며 서 있었다.

    꽃 받아!

    누군가가 두 손을 입에 대고 소리친다.

    뒤이어 이어지는 아이들 합창.

    받아라. 받아라. 받아라. 받아라…….

    몇몇 사람이 박자에 맞춰 손뼉까지 친다.

    그러자 곧바로 대형 레스토랑 안에 울려퍼지는 구호와 박수.

    주원은 빨개진 얼굴에 두 손을 갖다댔다. 여기저기에서 핸드폰 카메라 들이대는 모습. 

    구호와 박수에 뒤이어 누군가가 발을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레스토랑 안은 쿵 쿵 쿵 쿵 발 구르는 소리와 함께 구호와 손뼉 소리로 넘치고 있었다. 

    표범은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간절한 표정과 눈빛을 담아 두 손을 위로 내밀고 있었다. 난초꽃을 들고서.

    주원은 약간 현기증이 일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점점 더 커지는 요란한 소리들.

    주원이 꽃을 받았다.

    우와―――!

    레스토랑 천장이 무너져 내릴 듯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휘파람 소리. 함성 소리. 웃음소리. 식탁 두드리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로 유리잔 두드리는 소리. 

    몇몇 사람은 일어서서 파이팅 하며 소리 지르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누군가가 두 손을 입에 대고 모아서 소리 지른다. 

    뽀뽀해!

    그 순간 아이들도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그러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주원이 쓰러진 것이다. 

    현기증으로.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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