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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10. 2020

가을정원 (2)

주원은 우울했다.

    남궁 여사는 1층에서, 주원은 2층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흘 동안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주원은 하루빨리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공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한국에서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 남궁 여사의 과잉반응에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렇게 시달리느니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집구석에만 있으면 남자가 튀어나오니?”

    “네 아버지 나이가 지금 몇인지 알아?”

    “아빠 사업체 그냥 다 날려버리고 싶어? 아빠 평생 고생해서 이뤄놓은 거 죄다 남 주고 싶냔 말야…….”

    “내 소리 듣기 싫으면 네가 참한 사람 하나 데리고 와 봐. 미국에 10년이나 있었으면서도 그런 재주 하나 없어?”

    “민 사장 댁 딸은 얘…….”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와 닦달.

    게다가 남궁 여사는 하루가 갈수록 주원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날카로워져 갔다. 그리고는 사흘이 멀다 하고 이 남자 저 남자 사진과 프로필을 들고 와서 주원을 들볶았다. 주원이 직접 만난 사람도 여럿이었다. 호기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달리기 싫어 나가주었던 것이다. 그들 중 호감이 가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주원은 기본적으로 그들 모두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 나이에 연애 한번 안 해보고 여자 소개받는다는 것이 웃기는 것 같았다. 오죽 못났으면, 아니면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너무 바쁘셨는지 모르지만, 또한 연애하다 찼거나 차였거나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들 과거를 싹 지우고 순진무구한 듯 자신 앞에 나오는 남자들.

    하긴 저쪽에서도 주원에 대해 똑같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외국 나가 공부하면서 남자 한번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서로가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사람들끼리 마주앉아 상대방 탐색하는 짓,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남궁 여사는 딸을 공개석상에서 선을 보이기로 한 것이다. 귀국연주회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래서 주변의 힘 있고 돈 있고 멋들어지게 보이는 사람들 죄다 초청해서 경매 붙여보려 한 속셈이었다.

    그런 야무진 의도를 주원이 다 망쳐버렸으니…….

    주원은 왜 하필 자신이 그 노래를 불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그 노래를 어릴 때 몇 번 흘려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 가사나 음도 평소에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그 노래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주저 없이 구성지게 뽑아버렸으니.

    음악성이 있긴 있군. 어릴 때 들은 노래를 가사까지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니.

    주원은 씁쓸하게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다가 주원은 갑자기 명함이 하나 생각났다.

    파티에서 받은 명함은 모두 어머니 남궁 여사가 챙겼다. 그러나 하나만은 어머니에게 주기가 뭣해서 자신의 드레스 레이스 틈에 밀어넣었다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은 혹시나 해서 정리도 하지 않고 옷장에 집어던져 놓은 드레스를 들춰보았다.

    없었다.

    피―.

    어딘가에 떨어져 버렸군.

    잘됐어. 그런 거 찾아봤자…….

    옷장 문을 닫으려는데 바닥에 조그만 종이가 하나 떨어진 것이 보였다.

    저것인가……?

    맞다. 주워보니 바로 그 명함이었다.     


    인간에서 탈출하다

    Body Art     


웃겨. 뭘 탈출한다는 거야?

    표범으로 바디페인팅을 한 사람.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상반신을 모두 바디페인팅으로 장식했고, 그 아래 바지도 그에 맞게 얼룩덜룩한 것으로 입었었다. 구두는 흰색.

    가을밤이라 윗도리 안 입으면 꽤 추웠을 텐데 괜찮았을까? 괜히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고생 참 많이 하는구나.

    그런데 표범 바디페인팅 위에 금박을 뿌려놔서 그런지 온몸이 반짝반짝했었지. 머리 뒤가 좀 튀어나왔던 것 같은데, 머리칼을 뒤로 묶어서 그런가……. 장발이었던 모양이네.

    주원은 별걸 다 생각하고 있네 하고 자신을 향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눈이 무척 인상 깊었던 것을 주원은 기억하고 있었다.

    강렬했다고나 할까, 표범의 날카로운 눈빛. 그러나 어딘지 선한 표범 같았다. 라이온 킹처럼.   

    직업도 참 여러 가지구나. 힘들게들 산다.

    하긴 저쪽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처럼 악기 들고 먹고 사는 것도 힘들겠다고 여기겠지. 떠돌이 악사들. 바이올린 하나 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연주해 주며 던져주는 돈 받고, 남들 흥겨워할 때 뒤에서 깽깽이 소리나 내주는 것. 남들이 보면 그게 그거겠지. 돈 좀 있으면 클래식을 하네 하며 우쭐대겠지만 그런 계층이 얼마나 되랴. 음악 한답시고 평생 남의 그늘에서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텐데.

    공연히 이런 생각을 해서 주원의 기분은 그러잖아도 가라앉아 있었는데 더욱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아, 답답해.

    주원은 파티 나흘 만에 밖에 나가기로 했다. 친구들한테 연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파티 끝나고 몇몇 친구가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또한 카톡과 메시지나 이메일도 보냈지만 들여다보기만 하고 답은 하지 않았다. 모두들 잘했다, 예뻤다, 부러웠다, 결혼해라, 미국 언제 나가니, 힘들진 않았니 그런 것들이었다. 노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가 노래에 대해서 말을 해주었으면 당장 나가서 밥을 사주었을 것이다.

    밤하늘에 잔별 같은…….

    그게 뭐 어때서?

    뻔하지 뭐. 고상들 하셔서.     



주원은 잠원동 저택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카카오택시를 불렀더니 금방 왔다. 몇 번 타봤기에 이제는 신기하지도 않았다. 서울에서는 차 몰고 다니는 것보다 택시가 더 나을 것 같았다. 복잡한 서울 거리, 운전하고 싶지도 않았다.

    교보문고빌딩.

    안으로 들어가 안내판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높이 달려 있어서 그거 쳐다보는데 고개가 다 아팠다.

    18층.

    그곳에 핀란드 대사관이 있었다. 전화로 미리 알아보니 오전에만 문을 연다고 한다.

    주원은 미국에서 이미 몇 번 이메일을 보내어 유학비자에 대해 문의했다. 따라서 일부러 이곳에 와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주원 스스로에게 외출할 핑계를 주기 위해 핀란드 대사관을 떠올린 것이다.

    18층에 올라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좁은 복도를 걸어가 왼쪽으로 한번 꺾어지니 오른편에 핀란드 대사관이 나왔다.

    대사관 입구는 유리문으로 되어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몇 사람이 와 있었다. 주원이 유리문을 밀어보니 열리지 않았다. 안에 앉아 있는 한 외국인 남자가 손가락으로 문 옆을 가리킨다. 그곳을 보니 벨 누르는 곳이 있었다.

    주원이 벨을 누르자 한국어로 묻는 목소리가 조그만 스피커를 통해 나온다. 유학비자 때문에 왔다고 하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조그만 로비 건너편에 또 다른 두꺼운 유리창 안에서 한국인과 유럽인이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돌아다보았다. 주원이 다가가서 또 한번 유학비자 문제로 왔다고 영어로 말하자 사람 좋게 생긴 유럽 여자가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로비에는 의자가 몇 개 있었다. 한 의자에는 좀 전의 그 외국인 남자, 아마도 인도인 같은 40대 남자가 웃는 얼굴로 주원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또 다른 의자에는 한국인 할아버지가 손자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와 조그만 색종이 비행기를 접어서 날리며 놀고 있었다.

    주원은 인도인과 할아버지 사이에 있는 두 개의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귀여운 남자아이가 비행기를 잘못 날려 주원의 가슴께로 날아왔다. 주원이 살짝 잡아서 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가 옆에서 아이 대신 말을 했다.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하준아, 너도 죄송합니다 그래야지.”

    “죄송합니다.”

    주원은 어린 남자아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것을 보고 손을 저으며 웃어주었다.

    “애 엄마가 저 안에 들어가 인터뷰하고 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애가 지루해 하네요.”

    할아버지가 점잖은 목소리로 말해 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이야기가 꽤 이어졌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 주원이 다니는 학교 NEC 작곡과 졸업생이었다. 주원도 아는 사람이다. 자신보다 한 학년 위였다. 작곡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부자들이 다니는 학교로 유명한 LA의 사립대학 USC의 대학원 영화음악과에 들어갔다. 그곳을 우등으로 마친 뒤에 한국에 돌아가서 해군에 입대했다는 말까지 듣고 그 뒤의 소식은 모르고 있었다. 세상 참 좁았다. 이렇게 알게 되는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그 선배는 지금 한국의 유명한 게임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한다고 했다. 주원은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주고 그 선배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주원은 핀란드 헬싱키의 유일한 음악대학인 핀란디아 아카데미로 유학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어머니 남궁 여사가 하도 유럽으로 가서 더 공부하라고 닦달을 하는 바람에 핀란드로 방향을 정한 것이다. 어머니가 말하는 유럽은 물론 남쪽의 이탈리아이다. 그래서 일부러 유럽의 제일 북쪽인 핀란드를 택했다. 남궁 여사가 알면 한번 더 드러누울 것이다.  

    핀란드 대사관 인터뷰실에 들어가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주원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니 더는 갈 곳이 없었다. 어느 찻집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는 것 외에는.

    날은 화창했다. 기온도 기분 좋을 정도고, 미세먼지도 없다고 한다. 이는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으로 확인했다. 주원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무엇인가가 잡히자 무심코 꺼내보았다.

    명함.

    바디페인팅.

    풋.

    웃음이 나왔다.

    웃어?

    그래 웃었다, 왜?

    주원은 자신에게 시비 걸었다.

    아서라.

    주원은 명함을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걸었다. 무턱대고. 목적도 없이.

    세종로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메가폰을 들고 정치적 구호를 외치거나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어서 주원은 골목길을 통해 종로2가 쪽으로 걸어갔다. 보스턴에서 공부하며 가끔 서울에 들어와 여러 곳을 다녀보기는 했지만 종로 쪽으로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대한민국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정말 많이 변했다. 빌딩뿐만 아니라 차도와 간판, 행인들 모습, 게다가 문화까지도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이방인. 이런 식으로 거창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수송동.

    응? 뭐지? 수송동이?

    갑자기 수송동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종로구 수송동.

    주원은 머리가 멍했다. 걸음을 멈췄다. 지하철 종각역 사거리의 종로타워 건너편이었다.

    주원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명함이 손에 잡힌다.

    꺼냈다. 들여다보니 종로구 수송동…….

    아하.

    전화번호.

    눈에 크게 들어온다.

    주원은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스타벅스. 종로타워 로비 2층에 있는 커피숍.

    주원은 후회하면서도 앉아 있었다. 모르는 남자한테 먼저 전화를 건 것이다. 생전 처음 있는 일. 역사에 남을 일이다.

    주원은 그냥 일어나 나가버릴까 생각하면서도 커피를 홀짝거리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되겠지 뭐.

    그런데 바디페인팅 안 한 그 사람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혹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눈을 빤히 들여다볼 수도 없고.

    아냐, 여기 혼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들 한번씩 눈 들여다보며 조사해 볼까…….

    주원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쪽에서 알아보겠지.

    그러나 주원의 경험으로 보아 연주회에서 본 모습하고 실제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오겠군.

    정말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 정주원 씨,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저, 내일 뵈면 안 될까요……?”

    주원은 그냥 전화를 끊었다.

    웃기는 사람.

    카톡 문자가 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급한 일이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생존의 문제라서요. 내일 이 시간에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벅×999.

    웃긴다니까, 정말.

    주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999는 또 뭐야? 은하철도?

    답답.

    친구들에게는 연락하기 싫었다. 아는 사람은 무조건 싫다. 집에 가기도 싫고.

    하―!

    갑자기 크게 한숨이 쉬어졌다.

    주원은 조계사 쪽으로 올라가 안국동 사거리와 동십자각을 지나 삼청동으로 향하면서 크고 작은 미술관과 전시장 등등에 모조리 들어갔다. 몇 개 되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음악회는 모두 밤에 하는 것이어서 포기했다.

    저녁이 되었다.

    더는 갈 곳이 없었다.

    괜히 울고 싶어졌다. 다 큰 처녀가. 서울 한복판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정 회장이었다. 어디냐고 묻는다. 한강다리라고 했다. 왜 거기 간 거냐고 묻는다. 빠져 죽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정 회장이 웃는다. 좋은 생각이란다. 하지만 아직 죽기는 좀 이르니 그곳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한다. 데리러 오겠다며.

    “택시 타고 갈게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기는 했지만 택시 타기가 정말 힘들었다. 삼청동 근방에서는 카카오택시도 소용없는 것 같았다. 퇴근시간이라서 그렇겠지만.

    주원은 눈에 띄는 첫 번째 식당에 무조건 들어갔다.

    메뉴판을 갖다준다. 그리 큰 식당도 아닌데 격식은 다 차리는 것 같았다. 식탁 위에 메뉴판 올려놓아도 될 것을. 아니면 무슨 뜻인지 모를 야릇한 그림 걸어놓은 벽에다 차라리 음식메뉴 붙여놓고 알아서 시키라고 하든지.

    하긴 겉보기보다 값이 좀 비싼 편이라 격식을 갖추는 것 같기도 했다.

    웨이터, 아니 식당 주인 같은 사람이 미소를 지은 채 식탁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 이름들이 주원에게는 생소했다. 알 듯 말 듯 눈에 익숙지 않은 음식 이름. 갑자기 촌뜨기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주원은 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메뉴판에서 그냥 눈이 가는 대로 시켰다.

    화려하게 혼자 외출하고서, 그리고 또 혼자서 먹는 저녁.

    쓸쓸했냐고? 글쎄다. 실은 좀 쓸쓸하긴 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혼자 먹는 사람은 주원 혼자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주원은 자신의 처지가 이상하게 통쾌했다.

    그동안 잘났다고 실컷 뻐기고 나다니더만…….

    쌤통이다.

    음식을 다 먹으니 계산서를 가지고 온다. 뭐 싼 거 하나 먹었는데 계산서까지…….

    계산서를 들여다보는데 뭔가 좀 어색했다.

    음식값은 나와 있는데……, 세금이 없다. 게다가 팁 적는 칸도 없고.

    아, 여기는 한국이지.

    한국이 좋긴 좋다.

    주원은 혼자서 머리를 끄덕이며 카운터로 갔다.

    크레디트카드를 꺼내어 주었더니 주인이 미소지으며 돌려준다.

    뭐야? 현금만 받는다는 거야?

    주원은 당황스러웠다. 현금이 없었던 것이다. 요즘 현금 쓰는 사람이 어디 있담?

    지갑을 뒤지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조그만 수첩을 꺼냈다. 비상시를 생각해서 넣어두었던 돈이 있었던 것이다.

    주원은 입맛이 좀 씁쓸했지만 그것을 꺼내어 주었다.

    주인이 돈을 받고 좀 난감해한다. 그러더니 알았다는 듯이 서랍을 열어 계산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주원은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그거 다시 주세요. 제가 잠시 착각을 해서…….”

    주원은 100달러짜리 지폐를 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다시 생각이 났다.

    자신이 좀 전에 무심코 미국 Bank of America 카드를 내밀었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속으로 머리를 갸웃했다.

    음, 이상하다……. 다른 곳에서는 미국 카드 다 받던데…….

    주원은 남궁 여사가 준 한국 체크카드를 꺼냈다.     



다음날 낮. 전화가 왔다. 주원은 자신의 한국 전화번호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전화번호를 보았다.

    모르는 번호.

    끊었다. 이상한 전화겠지.

    곧바로 전화에서 까똑 하는 소리가 난다. 들여다보니 카톡 메시지. 아차, 어제 그 사람. 잊고 있었다. 열어보지도 않고 핸드폰을 껐다.

    또 전화가 왔다. 같은 번호. 꺼버렸다.

    또 전화. 또다시 껐다.

    이번에는 카톡.

    죄송합니다……, 어쩌구.

    주원은 핸드폰 버튼을 한참 눌렀다. 전원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다음날 아침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 다섯. 카톡 셋. 모두 같은 번호.

    웃긴다.

    정말 웃긴다.

    나한테 전화 올 사람이 그 인간 하나밖에 없다니.

    친구들도 더 이상 연락이 없다. 그 인간들은 죄다 끊어져도 상관없다. 적어도 지금은.

    카톡은 보지도 않았다.

    죄송합니다……, 구구절절. 읽어봤자 뻔하지 뭐.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주원은 저도 모르게 부재중 전화번호를 꾹 누르고 말았다.      


주원은 택시를 타고 종로타워로 갔다.

    정성이다, 참. 강남에서 택시 타고 남자를 만나러 종로로 간다.

    웃긴다. 정말.

    글자 그대로 징징거리는 남자. 이름은 편지수.

    편지를 얼마나 많이 썼으면 이름이 편지수냐고. 연애편지? 혹 받은 건가?

    상관없음. 받거나 말거나.

    그 인간이 전화로 징징댔다. 죽을죄를 지었단다. 다 먹고 살기 위해 그런 거란다. 하루살이 인생이라 거래처에서 오라 하면 가야 하고, 가라 하면 울면서 와야 한단다. 외국에서 공부만 하고 온 사람은 한국 사정 잘 모른단다.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든지. 자기 같은 사람 한번 만나주는 것도 적선하는 것이란다.

    말은 잘해요. 청산유수.

    주원은 못 이기는 척하고 나가겠다고 했다. 주원 아는 곳으로 정하라고 했지만 아는 곳도 가본 곳도 없어서 어제 간 그 커피숍에서 같은 시간에 보자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곧 후회했다. 자기 연주회에 일하러 온 사람에게 괜히 전화했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인생 참.

    이 나이에 뭔 인생?

    피―.

    약속시간 거의 다 되어 커피숍에 도착한 주원은 먼저 와서 기다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안을 쓰윽 둘러보았다.

    그런데……, 없다.

    없어?

    주원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주원이야 당연히 그 사람 본 얼굴을 모르니 저쪽에서 아는 척해야 할 테다.

    어쭈.

    이것 봐라. 그냥 가버릴까?

    자존심 팍.

    하지만 그딴 자존심 탁 접고 커피 하나 주문해서 의자에 앉았다.

    주원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어 켰다.

    카톡이 하나 와 있었다.

    10분만 늦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블랙커피 맛이 정말 씁쓰름했다. 그럼 커피가 쓰지 달겠니?

    10분이 지났다.

    커피점에는 여러 사람이 들어오고 나갔지만 그 남자라고 여겨질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또 10분만이라는 카톡.

    사람 놀리는 거야, 아니면 정말 그 정도로 바쁜 거야?

    좋아, 이번 10분만 더 기다려 준다. 그것으로 끝이다.

    10분이 지났다.

    주원은 일어섰다. 건물 밖으로 나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주원이 무슨 미련이 남아 있는지 계단 입구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무엇인가를 누르면서 허겁지겁 올라오고 있었다.  

    주원 핸드백에서 전화 왔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 남자겠군. 또 늦는다는 거겠지.

    계단을 올라오던 남자가 주원의 가방에서 나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멈춰선다.

    “아, 저, 혹시 정주원 씨?”     



주원은 편지수와 마주앉았다. 가관이었다. 편지수의 모습이. 사실 주원은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이것저것 다듬고 나온 것이다. 너무 티 나지는 않게. 그러한 자신이 우습게 여겨지긴 했지만 머리 얼굴 옷매무새 등을 다듬는 손길은 멈춰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편지수의 몰골은 어떠냐 하면……. 이것은 남들이 꼭 알아야 한다. 아무리 일에 바쁜 사람이라도 그렇지, 나 주원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와서 (그쪽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봤다시피) 며칠 전 어마어마한 귀국연주회를 연 사람이란 말이야. 귀 국 연 주 회. 게다가 우리 부모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에구, 말을 말자.

    아무튼 그 복장 복색 꼬라지는 설명 불가. 게다가 흐트러진 장발.

    그런데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앉자마자 한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미자 씨.”

    “이미자 아니거든요!”

    “아차차, 죄송, 죄송, 죄송. 정말 죄송합니다.”

    이 남자 죄송 소리가 버릇인 모양이다. 늘 죄송 죄송 죄송…….

    그러나 어떻든 주원의 눈에서 핏발이 섰다. 지금 집에서는 어머니 남궁 여사께서 닷새째 두문불출하고 드러누운 상태다. 바로 그 이미자 때문에! 주원 자신은 친구는 물론 아무에게도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고.

    그런 판에 눈치도 없이 이미자라니!

    주원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남자가 당황해 하며 뒤쫓아온다.

    “아, 잠깐만요. 저기…….”

    웃기는 인간. 내가 미쳤지.

    계단을 다 내려가니 편가가 바로 옆에 와서 팔을 붙잡으려 한다. 주원이 눈 치켜뜨고 돌아다보았다. 편가가 멈칫하며 손을 거둔다.

    주원은 문을 밀어 열고서 큰길로 나갔다. 종각역 쪽으로 갔다. 그때까지도 편가는 계속 따라붙으며 뭐라고 변명을 해댄다.

    종각역 지하도로 내려갔다. 상가 쪽으로 걸어갔다.

    편가가 이제는 아예 주원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았다.

    주원은 편가 옆으로 몸을 비틀며 지나가려고 했다.

    편가가 계속 막아선다. 팔을 붙들려는 것 같았다.

    주원이 그 팔을 뿌리치려고 왼팔을 들어올렸다. 아니, 들어올리려 했는데 그것이 동작이 좀 컸던 모양이다. 편가의 몸을 탁 친 것이다. 편가가 어어어 하면서 옆으로 쓰러지려 한다. 그러면서 주원의 소매를 붙잡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런 동작에서 편가는 균형을 잃으며 여성내의가게의 마네킹 쪽으로 쓰러졌다. 주원의 옷을 붙잡은 채. 게다가 편가는 쓰러지면서 한쪽 다리를 번쩍 들어올리는 바람에 첫 번째 마네킹 오른쪽 옆에 있는 또 다른 마네킹도 치고 말았다.

    또한 주원은 편가와 함께 쓰러지며 팔을 벌리는 바람에 첫 번째 마네킹 왼쪽에 있는 유리 진열장을 손으로 치고 말았다.

    여기에다 더 끔찍한 것은 두 번째 마네킹이 쓰러지며 마침 그 옆에 나와 있던 가게 여직원을 덮친 일이다.

    우당탕 퉁탕. 쨍그랑. 와르르르…….

    내의가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비명과 함께.

    뭇 행인들의 시선집중.     


     

두 사람, 주원과 편가는 상가관리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내의가게 여자는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한다며 허리에 손을 대고 문지르고 있었다.

    또한 가게 여자는 경찰서에도 가야겠다고 고집부렸다. 마네킹 두 개 파손, 유리 진열장 파손, 옷 몇 벌 파손, 옷걸이 파손, 영업손실, 치료비 등등.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상당한 금액을 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편가는 은행카드나 신용카드로 빼낼 수 있는 돈이 거의 없다고 했다. 예금잔고, 현금서비스 등이 모두 한도 가까이까지 바닥나 있었고, 현금은 물론 얼마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편가는 주원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주원은 어이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피해자다. 그러나 가게 여자는 둘이 사랑싸움을 하다 함께 넘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주원은 달라는 대로 다 물어주고 말았다. 근처 은행에 가서 현금을 빼온 것이다. 합의서 한 장을 받고서. 게다가 나중에 가게 여자가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도 보상해 주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가게 여자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나서 두 사람은 관리사무실을 나왔다.

    한동안 말도 없이 걸었다. 주원은 앞에서 걷고, 편가는 뒤에서 따라오며.

    지하도를 나와 걷고 걷다 보니 종로3가에 이르렀다.

    주원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편가도 멈춰서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마주본다.

    뭐야, 미안한 마음도 없는 거야?

    주원은 어이가 없어서 그냥 돌아섰다.

    편가가 갑자기 주원 앞으로 뛰어와서 선다.

    “제가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됐네요, 이 사람아. 그쪽 갈 길이나 가셔.

    “비키세요. 갈 데가 있으니까.”

    “제 사무실에 가시죠. 거기 가면 다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주원은 편가를 비켜서 걸어가려 했다.

    “저, 실은 그날 그 파티 하던 날 밤에 제가 사진을 찍었거든요. 그쪽 사진. 그거 오늘 아침에 크게 확대해서 뽑아놓았습니다. 가서 보실래요?”

    편가는 두 팔을 최대한 벌려 커다란 네모를 그렸다.

    어이없음.  

    주원은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멍한 눈으로 편가를 쳐다보았다.

    “제가 핸드폰에 저장해 놓았는데 한번 보시죠.”

    편가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찾아서 앞으로 내민다.

    주원은 얼떨결에 핸드폰을 받아서 그 사진을 보았다.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주원 자신의 모습. 눈을 반쯤 지그시 감고서.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다 나와 있었다.

    주원은 고개를 들어서 편가를 노려보았다.

    이 사람 뭐야?

    스토커?

    “저 사진작가입니다.”

    바디아트라며?

    “제 직업이 여러 가지 거든요. 허락받지 않고 찍어서 죄송합니다만, 그때 그 모습이 너무 아름…….”

    아이고.

    주원은 돌아서서 종로2가 쪽으로 걸었다.

    이거 사생활 침해 아닌가? 그 뭐라더라……. 초…… 초상권…… 침해?

    고발해도 되는 거겠지……?

    주원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편가가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다가 깜짝 놀라 움찔한다.

    “사무실이 어디예요? 수송동?”

    편가가 주원의 사진을 확대해 놓았다고 하니 그것은 일단 돌려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원본도.

    “아, 거기는 임시사무실이고, 제 진짜 사무실은 홍은동에 있습니다. 전철 타면 금방 가는데…….”

    “택시 타고 가죠.”

    주원이 핸드폰으로 택시 앱을 열려고 하자 편가가 얼른 자기 핸드폰을 꺼낸다.

    “제가 부를게요.”      



택시는 홍은동 유진상가 옆으로 돌아 잠시 들어가서 5층짜리 허름한 건물 앞에서 섰다. 택시요금은 물론 주원이 지불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힘들게 5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죄송합니다. 원래 가진 게 없어서.”

    상관없으니까 어서 올라가기나 해.

    주원은 한마다 쏘아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지금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5층에 도착했다. 다리가 아프긴 했다.

    가만두라 봐라.

    색 바랜 낡은 철제문. 온갖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녹도 조금 슬어 있고.

    그리고 웬 스티커 종류는 그렇게 많은지. 중국집이나 튀김, 설렁탕, 칼국수 같은 음식점은 물론이고 열쇠, 일수, 신용회복, 임대문의, 미장원 등등…….

    일부러 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좀 신기한 느낌이 들어서 주원은 주욱 한번 훑어본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좀 야릇한 것도 있었다. 룸살롱, 마사지, 결혼정보, 외로워요…….

    여러 가지네.

    편가는 스티커에는 눈길도 안 주고 철제문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벽에 있는 스위치를 올린다.  

    주원이 뒤따라 들어가 보니 예상한 대로 혼잡스러웠다. 그러나 전등을 켜지 않아도 안은 환할 것 같았다.

    문 반대편은 넓은 유리창인데 그 밖으로 아파트 단지와 삼각산이 보였다. 사무실은 북향이었다.

    겨울엔 춥겠네.

    웬 남 걱정……. 주원은 스스로를 나무랐다.

    주원은 벽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원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주원이 궁금한 표정으로 편가를 쳐다보았다.

    편가가 한쪽 벽면에 기대어 세워둔 커다란 스티로폼 패널 뒤쪽으로 가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온다.

    그것을 주욱 폈다.

    아, 거의 실물 크기의 주원 사진.

    주원은 숨이 탁 막혔다.

    핸드폰으로 볼 때보다 사진이 더 멋진 것이었다.

    솜씨 좋네.

    “이렇게 몰래 찍으면 문제 되는 거 아녜요?”

    “문제 되죠.”

    주원은 편가를 돌아다보았다.

    그래서……?

    “그냥 다 드리겠습니다. 원본 파일까지.”

    주원은 편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속셈이 뭐지?

    “다른 뜻 없습니다. 저는 그냥 여기저기에 가서 사진 찍습니다. 대부분은 의미 없어서 나중에 대충 살펴보고 다 없애버리죠. 그런데 주원 씨가 저에게 전화한 바람에 저 사진에 의미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물하려고 인화한 겁니다. 저거 말고 몇 컷 더 있습니다. 그것도 다 드릴게요.”

    “명함엔 바디아트로 되어 있던데……?”

    편가는 싱긋 웃는다. 그리고는 장황하게 설명해 나간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벤트 사업가란다. 명함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필요에 따라 다른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바디아트에서부터 결혼과 환갑, 칠순, 돌과 같은 가족행사, 운동회나 각종 체육행사 및 송년회와 같은 실내외 행사, 여기에 데코레이션을 포함한 각종 행사나 이벤트의 장식, 퍼레이드나 밴드. 그리고 치어리더를 포함한 응원단 조직, 미술관이나 음악회 장소 섭외, 마술쇼 등등.

    “마술도 해요? 직접?”

    “프로급입니다.”

    “사진도 찍고요?”

    “당연하죠. 각종 행사를 하다 보면 사진은 필수인걸요.”

    “팔방미인이시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을 여기서 다 해요?”

    “여기는 주로 사진이나 포스터 작업, 그리고 바디아트를 하는 곳입니다.”

    “바디아트……. 참 저번에 제 행사 날 무척 추웠을 텐데…….”

    주원은 연주회 날 장면이 갑자기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지금 남 걱정해 줄 여유가 있는 거니, 주원아? 정신 차려!

    주원은 보이지 않게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아, 표범 외투를 가지고 다니면서 살짝살짝 입죠. 안 그러면 우리 다 얼어죽어요. 한겨울에도 행사를 하거든요.”

    “그럼 외투가 많아야겠네요. 각종 동물이랑…….”

    그래도 주원은 또 맞장구를 친다.

    한심해…….

    “그것 말고도 돈 들어가는 게 장난 아닙니다. 페인트 값도 엄청나고, 또 혼자서 칠하는 게 아니라서 전문가 불러야 돼요.”

    “전문가……?”

    하긴 요즘은 무엇이든지 세분화되어 있고 그 분야마다 남달리 열정을 쏟는 사람들이 많다.

    “바디페인팅 아티스트가 따로 있어요.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돈 더 잘 법니다. 저도 직업 바꿔 그거나 해볼까 늘 생각 중이라니까요.”

    편가가 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지워요?”

    “꽤 궁금하신 모양이네. 한번 해보고 싶으세요? 우리 행사 때 같이 해보시면…….”

    “됐네요. 그런데 저번 제 연주회 때 여러 분이 오셨잖아요? 같이 일하시는 거예요?”

    “우리 팀이 있습니다. 많이 동원하면 수십 명도 돼요. 행사 규모에 따라 인원 조절하는 거죠.”

    “힘드시겠네.”

    그만 좀 나대, 주원아!

    아차.

    “힘들기만 합니다. 돈도 안 되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 편가. 연기해도 되겠네.

    “그럼 왜 하세요?”

    주원이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벤트 사업 하려면 고객이 원하는 건 다 해줘야 돼요. 요즘 아이들 행사에 가려면 바디페인팅은 기본이자 필수입니다.”

    “페인트 많이 들 텐데…….”

    “다 돈이죠. 칠할 때도 돈, 지울 때도 돈, 아티스트에게도 돈……. 아, 지우는 거 물어봤죠? 손이나 팔 같은 데 하는 것은 간단하게 물이나 비누로 씻어도 되지만, 얼굴이나 몸에 할 때는 전용 클렌징폼 같은 것으로 지워야 해요.”

    편가는 아주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나갔다. 처음에 좀 덜렁덜렁해 보인 것과는 아주 달랐다. 게다가 마구 헝클어져 있는 장발이 좀 지저분하게도 보였지만 어딘지 표범을 닮은 것도 같았다. 지난번 연주회 때 모습을 보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요즘 한국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바디페인팅 같은 것도 다 하고…….”

    주원은 어딘지 자신이 끌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허, 모르시는 말씀.”

    뭐야? 말투 봐라…….

    그러면서도 주원은 궁금하다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여자분들 화장하는 것도 그거 다 바디페인팅이라고요. 페이스 페인팅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게 그거예요.”

    피―.

    “정말입니다. 얼굴 완전히 딴판으로 만들고 다니는 사람 많아요.”

    편가가 주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듯 쳐다본다.

    주원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얼굴을 뒤로 물렸다.

    “흠……, 주원 씨는 본 얼굴 맞는 거죠?”

    “왜 이래요?”

    주원의 목소리 톤이 좀 높아졌다.

    “헤헤……. 지난번 연주회 때하고 좀 다른가 해서요.”

    주원은 편가를 노려보았다.

    “아아, 뭐 그건 그렇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제가 또 이 방면에는 전문가 뺨…….”

    “됐고요. 이젠 가봐야겠어요.”

    주원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허리도 꼿꼿이 세우고.

    “아니, 아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주원 씨 사진 잘 챙겨드려야 하니까.”

    주원은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사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편가는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러면서 저 혼자 말하듯 중얼거린다.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 그리고 우리나라 신라시대 화랑들이 진하게 화장했던 것 그거 다 바디페인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깊어요…….”

    아이고, 유식해서 좋겠다. 그 정도는 다 아네요.

    편가는 싱글싱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한마디 덧붙인다.

    “다음에 여기 한 번 더 오시면 제가 바디페인팅 직접 보여드리죠. 이 사무실 말고도 다른 데도 있는데 거기도 보여드리고요.”

    사무실이 그렇게 많아? 돈도 없다면서.

    “그럼, 수송동엔 뭐가 있는 거예요?”

    주원은 문득 명함이 생각나서 이렇게 물었다.

    “아, 거기는 주로 행사주문만 받는 곳인데, 친구 사무실을 빌려쓰고 있습니다. 이름만 걸어놓고.”

    “직원은 있나요?”

    “아니……, 직원은 나 혼자…….”

    그럴 줄 알았다.

    “아, 저 체육관도 있습니다.”

    “……?”

    “태권도 도장을 하거든요.”

    “태권도도 하세요?”

    주원은 호기심이 생겼다. 진심.

    “그럼요. 4단입니다.”

    “직접 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죠. 거기가 제 메인 아지트입니다. 거기에 사범들도 있고 직원도 있죠. 파트타임이긴 하지만.”

    “그럼 여기는……?”

    “아, 여기는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요. 나 혼자 여기에 와서 별짓 다 합니다.”

    “명함 좀 다 줘봐요.”

    편가가 주머니 여기저기에서 꺼내어 일일이 확인하고는 명함을 한 묶음 건네준다.

    주원이 명함을 받아보니 10종류가 넘었다.

    세상에…….

    “사람을 많이 알아야겠네요?”

    “방송국에서부터 동네 양아치까지 좌악 깔렸습니다. 정치인도 물론이고.”

    우쭐하긴.

    “제 행사에는 어떻게 오게 됐어요?”

    “제 인맥 장난 아닙니다.”  

    “돈 많이 버시겠네?”

    편가는 한숨을 푹 쉰다.

    “들어오는 거보다 나가는 게 더 많아요.”

    “그럼 뭐 먹고 살아요?”

    “요술로 사는 거죠. 제 꼬라지 보세요.”

    피―! 엄살은.

    “동업하실래요?”

    편가가 불쑥 말한다.

    “네? 뭐라고요?”

    “아니, 아니, 실례.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재미있겠는데…….

    “좋아요. 해요.”

    주원은 스스로도 놀랐다. 지금 이런 말 할 때가 아닌데…….

    “네……?”

    “돈은 그쪽에서 대요. 나는 노래만 할 테니까.”

    하하하! 호호호!

    동업. 장난으로 한 말이 진짜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신이 실없이 되어가고 있는지 주원도 알 수가 없었다.

    “실은 다음 주에 팔순 잔치가 있는데 해볼래요?”

    “뭐를 해요?”

    “노래하는 거죠. 다른 게 뭐 있겠습니까?”

    “내가 노래를?”

    “잘 하시던데.”

    “…….”

    “조금만 더 꺾으면 돼요.”

    “…….”

    “밤하늘에 잔별 같은……, 뽕짝뽕짝……, 탁탁 꺾어주면 돼요. 콧소리 조금 섞어서. 그때 그 노래 좋았습니다.”

    “그만 하세요!”

    주원은 갑자기 약이 올랐다.

    “아닙니다. 기회가 되면 바이올린으로 그 곡을 꼭 들었으면 좋겠…….”

    “5 대 5.”

    주원이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네? 뭐가요?”

    “내 수입.”

    “…….”

   “좋아요. 그게 싫으면 3 대 7.”

    “누가 7?”

    “그쪽이 7 가져가요. 그럼 되죠?”

    “총금액? 수익금에서?”

    “당연히 수익금에서죠.”     



주원은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면서 어쩐지 오늘 자신이 많이 당한 것 같아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편가의 능청에 말려들어 저도 모르게 맞장구친 것들로 인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어떻게 갚아주지……?

    그러면서도 전철 입구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편가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 참, 매년 8월 말에 대구에서 바디페인팅 페스티벌이 열리니까 확인해 보세요. 도움이 되실 겁니다.

    칫, 뭐가 도움이 된다는 거야? 난 관심도 없는데.

    주원은 그러나 몸이 갑자기 피곤해지며 머릿속이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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